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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41화 (41/325)

# 41

변화를 해, 변질되지 말고.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아버지와 팔씨름을 해서 이겼던 기억이 있다.

나도 정확하게 뭐 때문에 팔씨름을 했는지는 기억이 안난다.

아마도 당시 나는 뭔가 갖고 싶었던 게 있었을 것이고, 아들과 장난삼아 내기를 하는 걸 좋아하셨던 아버지가 팔씨름을 해서 이기면 사주겠다...뭐 이렇게 해서 하게 된 팔씨름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그 팔씨름에서 졌더라고 아버지는 아들이 갖고싶어 하는 걸 사주셨을 거다.

그런 분이시니까.

그런데 그날 난 진짜로 아버지를 넘겨버렸다.

넘겨놓고 나도 놀랐다.

내가 아버지를 이길 줄 몰랐으니까.

처음 아버지 손을 딱 잡았을 때, 어른들한테서 느껴지는 묵직한 느낌이 그대로 전해졌다.

그런데 시작을 하고 잠시 이어지는 팽팽한 힘겨루기, 그리고 뭐지? 넘길 수도 있겠는데? 하는 기분.

분명 이긴 건 난데, 나보다 아버지가 더 좋아하시던 게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다.

아버지는 당신이 일부러 봐줬다고 하셨지만, 그 이후로 아버지는 더이상 아들에게 팔씨름을 하자는 말씀이 없으셨다.

고작 팔씨름 한 번 이겼다고 그때부터 아버지의 어깨가 좁아보였다거나, 아버지의 얼굴에 주름이 보이기 시작했던 건 아니다.

팔씨름은 이겼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집안의 가장이셨고, 무서우셨으며 또 아직은 젊으셨으니까.

그냥 좀 놀랐던 거 같다.

내가 아버지를 이길 수 있는 게 생겼구나...하는 생각에.

그때 이후로 난 아버지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됐고, 그러면서도 무거운 걸 들거나 힘을 써야 하는 일은 가급적 내가 하려고 했던 거 같다.

왠지 그렇게 해야만 할 거 같았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런 아들에게 “그래, 니가 함 해봐라.” 혹은 “인자 다 키았네.” 와 같은 말씀을 하시며 아들이 무거운 걸 들거나 힘을 쓰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셨다.

지금 나와 장 차장의 관계가 약간 그 시절 처음으로 아버지를 팔씨름으로 이겼던 때와 비슷한 거 같았다.

이제 막 팀장을 달고 부서 내에서 물이 올라 훨훨 날기 시작하는 나와 그런 시절을 이미 다 거쳐 박 부장의 옆에서 부서를 이끌어가는 장 차장.

아버지를 팔씨름으로 이겼던 그 시절 난 공부만 하면 됐다.

우리 팀만 관리하며 실적을 내기만 하면 되는 지금처럼.

그리고 곧 부장 진급을 앞두고 있는 장 차장은 아마도 그 시절 아버지처럼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하는 게 훨씬 더 많겠지.

항상 무섭고 차갑기만 한 줄 알았던 장 차장에게서 조금씩 인간적인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건 장 차장이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가기 때문이 아니라 그만큼 내가 성장했기 때문이란 걸 알게 되는 순간, 지난 시절 그로 인해 받았던 상처들에 조금씩 딱지가 앉기 시작했다.

하루는 장 차장이 내게 술을 한 잔 같이 하자고 했다.

편집샵 건으로 만토바에서 신상 리스트가 도착한 날이었다.

그걸 체크해서 발주를 넣으면 아무리 늦어도 한 달 안에는 물건을 받게 될테니 그에 맞춰서 천천히 매장 정리에 들어가겠다고 보고를 하던 중이었다.

“오늘도 야근하나?”

“아뇨, 이번주는 좀 널널할 거 같습니다.”

“그럼 뭐 마치고 데이트해?”

“아직 잡힌 약속은 없습니다.”

“그럼...간만에 둘이서 소주나 한 잔 할까?”

장 차장이 차장을 달기 전까지만 해도 둘이서 술을 참 많이 마셨다.

그런데 차장쯤 되니까 부서 전체를 아울러야 하는 입장이 되어버렸고, 그래서 둘이서만 술을 마실 기회는 거의 없어지다시피 했다.

“네, 알겠습니다.”

사대문 안에 들어가면 오래된 육회집이 하나 있다, 울산집이라고.

분위기만 보면 마치 90년대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느낌이다.

수입산 냉동 소고기를 마치 무채 썰듯 길게 썰어서 계란 노란자 대신 연골을 올려주는 집인데, 장 차장이 오래전 내 팀장이었을 시절 둘이서 참 자주 갔던 집이다.

한 사람당 육회 작은 접시 하나씩 시켜놓고 먹고, 거기에 돌판에 구워먹는 초리구이 두 개를 더 시켜서 먹으면 딱 맞다.

그러면 일인당 소주 두 병.

배도 충분히 부르고 술도 딱 기분이 좋을 만큼 취할 수가 있다.

그곳에서 장 차장과 이런저런 회사 이야기를 나누며 술을 마셨다.

그리고 육회를 끝내고 초리구이를 시킬 즈음 장 차장이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처음 부장님이 은태 널 팀장으로 올리라고 했을 때 내가 진짜 많이 반대를 했었거든.”

“차장님이 올려주신 거 아니었습니까?”

“차장이 무슨 힘이 있다고 팀장 승진을 결정하나?”

“아니...전 당연히 차장님께서 부장님께 절 추천하신 줄 알았는데요. 그리고 또 발표나기 전에 차장님께서 절 따로 부르셨잖아요. 다음 승진 때 팀장으로 발표가 날 건데 잘 할 자신 있느냐고...”

“아냐, 그런거. 나는 오히려 말렸어. 너무 이르다고.”

그건 또 몰랐던 내용이다.

“차장 정도 되면 문뜩 이런 생각이 든다. 여기서 내가 얼마나 더 올라갈 수 있을까? 내 입장에서야 부장까지는 큰 실수만 안하면 편하게 올라갈 수 있겠지.”

“부장 승진은 이미 확정 아닙니까?”

“확정이라는 게 어딨나, 회사 안에서. 아무튼 우리가 말이 쉬워 이사, 상무, 전무...그러는 거지 부장까지는 몰라도 임원이 되는 게 어디 말처럼 쉽냐?”

“...그렇죠.”

“말 그대로 이사부터는 별이야, 별. 군대에서 원스타, 투스타 하는 것처럼. 실력만 좋다고 되나, 어디. 위에서 끌어주고 또 뒤에서 든든하게 받쳐주지 않으면 안되는 거야.”

난 고개만 끄덕이며 달구어진 돌판 위로 육회를 먹을 때 서비스로 나왔던 생간과 천엽을 올려 굽기 시작했다.

나와 장 차장은 식성까지 비슷해서 생간은 굽지 않으면 잘 못먹는다.

치이이익...

“살짝 겁이 나더라고.”

“뭐가...”

“널 이렇게 빨리 팀장으로 올려도 되는 건가...하고 말이야. 그래도 네 동기들 중에선 가장 먼저 팀장을 달게 될 거라고 생각을 했지만, 양 대리 동기들 보다 먼저 팀장을 달게 만들자니까 덜컥 겁이 나더라고. 이게 잘하면 대박이지만, 쪽박이 될 가능성이 더 높잖아.”

맞는 말이다.

그래서 나 역시 팀장 승진 발표가 났을 때 좋은 기분 60퍼센트, 살짝 불안한 기분 40퍼센트 정도였던 거 같다.

“근데 이게 참...확실히 짬밥은 무시를 못해.”

“...?”

“부장님 말이야. 정말 신의 한수가 아니었나 싶다, 널 팀장으로 먼저 올린 게. 양 대리한테 고마워해라, 진짜.”

“...?”

“양 대리 때문에 네가 양 대리 동기들 다 제치고 먼저 팀장으로 올라간 거야.”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이 손에 붙고 또 어느정도까지는 특별한 지시, 보고 없이도 혼자 쳐낼 수 있는 실력까지 올라가다보면 어느순간 본인도 모르게 회사가 작게 느껴진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무능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상사의 부족함이 계속 눈에 보이기도 하지. 그래서 내가 여기서 이런 사람들과 섞여서 이런 일이나 하고 있을 사람이 아닌데...하는 오만이 생기기도 해. 넌 그런적 없냐?”

“흐음...글쎄요. 제 위엔 항상 차장님이 계셨잖습니까.”

“이빨 까지말고.”

“이빨을 까는 게 아니라 차장님께서 좀 무섭게 절 대하셨습니까? 지금에 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제야 장 차장은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내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양 대리가 그랬어. 넌 다른 팀이어서 잘 모르겠지만, 양 대리가 김 팀장님을 살살 무시하는 모습을 종종 보였거든. 사실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식당 안에 회사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그럼에도 주위를 한 번 살피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는 장 차장.

“김 팀장님이 밑에 직원들한테 인정받는 스타일은 아니잖아.”

난 그저 장 차장의 빈잔을 채워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원래라면 네가 아니라 양 대리가 팀장을 달았어야 정상이야. 그리고 이번에 주 대리를 정 팀장이 빠진 자리에 팀장 대행으로 앉히기 전에도 주 대리가 아닌 양 대리 이야기가 먼저 나왔고.”

“...!”

“그런데 부장님이 여전히 고개를 저으시더라고. 왜 그러시는지 아냐?”

“아뇨.”

“분명 실력은 있는데, 불안해서 그래.”

“...!”

“양 대리 그 놈이 진짜 업무 쳐내는 실력만 놓고 보면 너보다도 한 수 위야. 그런데 그 놈이 딱 하나 안되는 게 있는데, 그게 바로 사람 관리를 못해. 그게 진짜 큰 거거든. 자기도 자기가 잘난 줄 알아. 그래서 그게 잘 안되나봐. 사람 관리라는 게 어디 뭐 부하직원만 말하는 게 아니잖아.”

“...그렇죠.”

“그래서 당시 부장님이 양 대리 기를 꺾어놓겠다고 널 팀장으로 올리고 네 밑으로 양 대리를 넣었던 거야. 입사 후배 밑에서 갈릴 만큼 갈려보라고. 그래야 자신이 은근슬쩍 무시했던 상사들의 심정을 알 수 있을 거라고. 그만큼 부장님이 양 대리 그 놈 업무 쳐내는 실력을 높게 평가하신 거지. 또 다른 부분은 아깝게 생각하신 거고.”

“아...”

“이제서야 말해준다. 나도 반신반의 했어, 그동안. 과연 네가 양 대리를 제대로 휘어잡을 수 있을지...반신반의가 아니지. 난 사실 네가 양 대리 데리고 있다보면 두 사람 다 부작용이 날 줄 알았어. 그런데 부장님 계획대로 네가 양 대리를 확 휘어잡고, 또 양 대리 콧대가 한 풀 꺾이네?”

“만약 제가 양 대리를 제대로 못 휘어잡고 부작용이 났음 어떻게 되는 겁니까?”

“회사가 아쉬울 건 없지. 대체할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

“아직도 모르겠냐? 그게 회사야. 너랑 양 대리가 없어서는 안되는 정말 꼭 필요한 존재들이었다면 부장님이 그런 모험을 하실 수 있었겠냐? 못해. 대체할 인원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리고 또 자신이 생각했던 대로 성과가 나오면 너나 양 대리를 다른 인원으로 대체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시킬 수 있을 거 같으니까 그런 모험을 해볼 생각을 하신 거지.”

“살짝 무섭네요.”

“무섭지? 그런 부장님을 바로 옆에서 모시고 있는 난 어떻겠냐? 부장님이 목소리만 크고 또 추진력만 끝내주는 줄 알지? 디테일은 많이 떨어지고. 그래서 아마도 사람들은 부장님의 떨어지는 디테일을 내가 옆에서 커버를 한다고 생각할 거야. 그런데 사실은 아니야. 난 그냥 시키시는 것만 하고 있는 거야.”

“...”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부장님 밑에서 다른 시각으로 인적관리 하는 걸 배우다보니까 이제 조금씩 보이는 거 같다. 은태야.”

“네, 차장님.”

“너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 말의 숨은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 난 뜨겁게 달아오른 불판 위로 초리고기를 올려놓으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 전까지는 있어도 그만, 없으면 조금 아쉬운 정도의 존재였다고 하면, 어쩌다보니 네가 벌써 영업부에선 없으면 안되는 꼭 필요한 존재가 된 거 같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냥 언제 기회되면 이 말을 꼭 해주고 싶더라.”

“무슨...”

“네가 잘났다는 걸 다른 사람들이 알게 만들어라. 그리고 네가 잘난 걸 스스로 알고 있다는 건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해.”

“...!”

“최근 들어 네가 보이는 지나친 자신감. 난 개인적으로 참 좋게 본다. 하지만 그걸 불편하게 바라보는 사람도 분명히 생길 거다. 그걸 불편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은 딱 두 종류다. 너처럼 할 수 없거나, 또는 너보다 더 잘난 사람들. 지금 네가 품은 마음들을 이미 다 경험해 본 사람들. 그러니까...”

장 차장은 술잔을 비워놓고 말했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까지 다 휘어잡을 수 있는 팀장이 되어주면 좋겠다. 그게 사내 정치라는 거고, 그게 진짜 실력이라는 거다. 팀장부터는...잘 할 수 있잖아? 그지?”

“...네.”

“위에 사람들 눈에는 다 보인다. 네가 기태, 향은이, 지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보이듯이. 그러니까...변화를 해. 변질되지 말고.”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무거운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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