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주재원 근무라는 게 다녀온 뒤에도 몇 년 동안은 계속 더 홍성 인터네셔널에서 근무를 해야한다는 조건 같은 게 따라붙는 거 아닌가요? 보통은 그런 거 같던데.”
“그렇죠. 아무래도 주재원 근무를 하는 동안 회사로부터 받는 경제적 혜택이 많으니까요.”
“그러니까요. 그런 조건에 오케이를 해야 보낼 때도 승진을 시켜서 보내고, 또 주재원 근무가 끝난 뒤에도 승진의 기회를 유리하게 주는 거겠죠.”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요.”
“부산에서 서영이 결혼식날 처음 뵙고, 백화점에서 다시 한 번. 그 두 번을 제외하면 오늘이 정식으로 데이트를 하는 건 세 번째죠?”
“네.”
“세 번째 만나는 자리에서 벌써부터 이런 이야기까지 한다는 게 조금 우습긴 한데...”
강혜선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전 은태 씨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지금이 참 즐겁네요.”
강혜선.
이 여자는 밀당에 자신이 없는 게 아니라, 자신이 없다는 말로 위장막을 친 곰같은 여우일 가능성이 크다.
나도 그동안 먹어온 영업짬밥이라는 게 있는 사람이다.
그정도 사람 보는 눈이 없을까.
물론 그런 그녀의 모습은 내 입장에선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우리정도 나이를 먹고도 여전히 순수하면 그건 순수한 게 아니라 약간 모자란 게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순수함을 연기하며 속으로 따질 건 다 따져보는 그녀의 모습은 내게 내숭이 아닌 매력으로 다가왔다.
“은태 씨 생각은 어떠세요? 은태 씨 생각엔 가는 게 좋을 거 같으세요?”
“글쎄요...사실 저도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는 이유가 혹시 저와의 관계 때문인 건가요?”
“은행이라는 곳이 저도 잘은 모르지만 일단 사람들 인식에 연봉도 높고 또 무엇보다 안정적인 직장이잖아요. 그래서 그만큼 은행에서 근무하길 희망하는 사람들도 많은 거고. 그런데 그런 좋은 직장을 포기하고 같이 갈 수 있겠냐고 물어보기가 상당히 조심스러웠습니다.”
강혜선은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주재원 근무 제안을 받고 생각이 많아지더라고요. 가늘고 길게.”
“가늘고 길게?”
“그렇게 직장 생활을 하는 게 제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주재원 근무를 제안받는 순간 알겠더라고요. 가늘고 길게 하고싶다는 건 회사 안에서 주류에 들 자신이 없었을 당시 제가 만든 목표였다는 걸.”
“...”
“일종의 자기 위안이었던 거겠죠. 그렇게라도 해서 최대한 오래 버티고 살아남는 놈이 이기는 거라고. 그동안 그런 생각으로 직장 생활을 해왔는데, 덜컥 전무님께서 직접 절 눈여겨보고 있으시다면서 주재원 근무를 한 번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시니 그동안 억지로 숨기고 있었던 제 안의 진심, 야망 같은 것들이 솔직하게 스물스물 올라오더라고요.”
“어떤 느낌인지 대충 알 거 같네요.”
“사실 저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직장 생활하는 남자들이 저와 비슷할 겁니다. 회사에서 인정받고 안정적으로 월급만 많이 받을 수 있다면 배우자를 찾을 때 꼭 맞벌이가 가능한 상대만 찾을 이유는 없는 거겠죠. 현실적으로 그게 힘드니까 맞벌이가 가능한 배우자를 찾는 거고.”
“그렇죠.”
“혜선 씨도 분명 현재 다니고 있는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또 대리 직급까지 올라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셨겠습니까. 또 직장 내에서 생각하고 계신 목표라는 것도 분명 있으실 거고. 그런데 제가 너무 저 개인적인 경력 쌓기? 혹은 회사 내의 야망만 보고 혜선 씨께 무리한 선택지를 드리는 건 아닐까...어쩔 수 없이 조심스럽더라고요.”
“굳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하기 보다는 그냥 현재 은태 씨에게 이런 기회도 들어왔다...정도로 편하게 생각해도 될까요?”
“네, 물론입니다.”
“그래야 편하게 제 생각을 말씀드릴 수 있을 거 같네요. 저는...음...은태 씨처럼 자기 위안으로라도 회사 생활의 뚜렷한 목표 같은 건 없어요.”
“네?”
“왜요? 목표가 없다니까 좀 이상한가요?”
“아, 아뇨.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죠.”
“은행이라는 조직이 그래요. 입사를 하는 게 힘들어서 그렇지, 입사 후엔 다른 대기업들처럼 막 그렇게까지 치열한 경쟁을 하지 않아도 어느정도 정년이 보장된다는 부분, 주임 거쳐 대리까지는 어떻게든 올라갈 수 있다는 부분, 그리고 그정도까지만 올라가도 여자 입장에선 나중에 결혼해서 출산을 했을 때 다른 일반 회사들에 비해 큰 눈치 안보고 복직해서 어느정도 더 경제활동을 할 수 있다는 부분...”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제가 은행에 취직한 가장 큰 이유죠. 전 결혼을 했다고 해서 가정의 모든 경제적 책임감을 남자 혼자 다 떠안게 만들고 싶지는 않거든요. 은태 씨가 말씀하신 것처럼 현실적으로 힘들잖아요, 요즘같은 시대엔.”
“...그렇죠.”
“돈을 많이 버는 남자를 만난다고 해도 전 제 일을 계속 하고 싶어요. 제가 장기적으로 보자고 했던 게 바로 이런 맥락으로 했던 말이에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직장 생활 하다보면 한 번씩 정말 도저히 참기 힘든 순간이 찾아오기도 하잖아요. 자기 사업을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해요. 그럴 때에 어디 도망칠 구멍, 또는 믿는 구석이 하나 정도 있는 것과 아예 없는 건 심리적으로 정말 엄청난 차이가 있더라고요. 도망칠 구멍...다른 말로는 숨 쉴 구멍이잖아요. 그게 없으면...정말 팍팍하지 않을까요?”
“팍팍하죠.”
“지금 제가 다니고 있는 은행이 만약 우리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은태 씨에게 그런 숨 쉴 수 있는 구멍, 또는 믿는 구석이 되어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은태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생각하긴 당연히 백 번 맞는 말이고, 또 남자 입장에선 빈말이라도 그렇게 말해주는 게 고마울 뿐이지.
“만약 남자 혼자 가정 경제를 다 책임지기 위해 그런 숨 쉴 구멍 하나 없는 직장 생활을 해야 한다면...과연 그런 직장 생활을 해야하는 남자와 함께 사는 여자는 얼마나 행복할 수 있을까요? 행복하다, 행복하지 않다를 떠나 제 스타일상 전 마음이 무척 불편할 거 같아요.”
순간 난 이런 여자가 왜 날 마주보고 앉아서 나랑 같이 결혼을 전제로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대체 왜?
아니, 이런 여자가 어째서 아직까지 시집을 안가고 이렇게 싱글로 남아 결혼할 상대를 애타게 찾고 있는 거지?
“지금 저와 은태 씨 컨디션이라면 꼭 은태 씨가 주재원 근무를 하지 않더라도, 꼭 급하게 승진을 하지 않더라도 그 주재원 근무 기간이 끝날 4년 뒤엔 그걸 한 것보다 더 괜찮은 결과를 충분히 만들어내고도 남을 거 같단 생각이 드네요. 은태 씨가 혼자 벌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정작 가정을 돌보기 보다는 회사 일에만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가며 하루를, 일주일을, 한 달을, 그렇게 일 년을 살지 않아도 되면서 말이죠.”
생각이 정리가 되는 게 아니라 아예 생각이 없어지는 순간이었다.
홍성 인터네셔널의 전무 군단이라는 별칭을 만들어낼 정도로 막강한 파워를 가지고 있는 전무님.
하지만 난 그 전무님의 라인이 아니라 강혜선의 라인을 타야 회사 생활이 아닌 내 인생 전체가 수월해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고요. 사회 통념상 남자는 또 밖에 나가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다보니, 여자인 저와는 생각이 다를 수도 있다고 봐요. 직장 안에서의 서열과 같은 본능적인 야망의 크기도 분명 다를 것이고. 그 부분에 대해선 은태 씨가 조금 더 신중하게 고민을 해보고 결정을 내리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그리고 또...”
“...?”
“여자 입장에서 은행 근무가 참 매력적인 게...이런 경우 휴직계를 낼 수가 있어요. 물론 이것도 제가 좀 더 자세하게 알아봐야 하는 부분이기는 한데, 이런 경우 1년 정도, 길면 2년 정도까지 휴직계를 쓸 수 있긴 해요. 처음 1,2년 정도는 같이 넘어가서 생활을 하다가 상황에 따라 제가 혼자 넘어와서 복직을 할 수도 있는 거고요.”
“그럼 우리 결혼 합니까?”
그 순간 강혜선의 얼굴은 급하게 굳어버렸다.
귀여웠다.
“만약이라고 했잖아요, 만약에. 만약에 결혼을 하게 된다면...그런 방법도 있다, 뭐...그렇게 말했잖아요, 제가. 꼭 우리가 결혼을 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 주말을 보내고 맞이한 월요일.
출근을 하자마자 가장 먼저 내 눈에 들어왔던 건 아직 근무시간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업무를 시작하고 있는 우리 팀원들이었다.
다른 팀은 아직 시간에 맞춰 업무를 시작하기 위해 커피를 마시거나 소소한 잡담을 나누고 있었지만, 우리 영업 5팀엔 그정도의 여유도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에너지가 넘쳐 흐르고 있었다.
회사로부터 월급을 받기 때문에 마땅히 해야하는 일을 하고 있는 모습들이 아니었다.
내년 상반기 정기 인사 때엔 어떻게든 팀장을 달기 위해 초능력을 만들어내고 있는 양 대리.
센터 포지션이 가장 빛날 수 있는 영업 5팀으로 새롭게 배정받은 장향은.
언젠가는 회사를 나가 자기 사업을 시작하겠다는 목표로 열심히 바닥부터 다시 일을 배우고 있는 박기태.
그리고 정규직 전환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하는 이지혜까지.
말로 설명하기는 참 애매한데, 그런 다양한 목적들이 모여서 불같은 에너지를 만들어내고 있는 영업 5팀을 보고 있자니, 지난주 전무님의 제안으로 인해 서른 다섯에 차장을 달고 주재원 근무를 하면서 회사가 제공한 아파트에 신혼집을 차려 달달한 신혼생활을 시작하는 상상을 했던 게 유치하게까지 느껴졌다.
영업 2팀에서 높은 성과급을 받으며 일 잘 하고 있던 장향은을 우리 팀으로 스카웃한 건 나다.
박기태에게 아직은 좀 이른 거 같다며, 조금 더 경험을 쌓고 나가도 된다고 설득을 했던 것도 나고, 이지혜에게 약간의 희망이라도 심어준 것 역시 나다.
그래, 그렇다면 회사가 강제로 밀어내기 전까지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당연히 이곳이다.
“출근 하셨습니까, 팀장님.”
“저 잠깐 전무님 좀 뵙고 오겠습니다.”
난 가방만 놓고 다시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전무님을 만나 최대한 예의바르게 말씀드렸다.
주신 기회는 정말 감사하지만, 저는 조금 더 영업부에 남아서 인정을 받으며 일을 하고 싶다고.
주재원 근무.
무척 매력적인 기회이나, 중국 사정을 전혀 모르는 제가 지금 들어가면 틀림없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을 해야 할텐데, 굳이 그런 모험을 할 정도로 지금 제게 차장이라는 타이틀이 간절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고.
그렇게 전무님께 몇 번이나 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고, 그 기회를 잡지 못해 죄송하다고 말씀드린 후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장 차장님이 아까부터 몇 번이나 들락날락 거리시며 팀장님 찾으셨어요.”
“전무님 만나러 갔다고 말씀을 드리시죠.”
“당연히 말씀 드렸죠. 그랬더니 그때부터 더 안절부절 못하시던데요?”
양 대리가 부장, 차장 자리로 시선을 돌리며 피식하고 웃었다.
“인센티브 리스트 정리 다 끝났습니까?”
“네, 여기.”
난 양 대리에게 건네받은 인센티브 리스트를 정리해놓은 보고서를 가지고 장 차장을 찾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부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차장님.”
“전무님 방에 갔었다며?”
장 차장이 물었고, 박 부장이 신경 안 쓰는 척 곁눈질로 날 살폈다.
“네, 지난 주에 한 번 가보겠냐고 말씀하셨던 중국 주재원 근무...사정상 힘들 것 같다고 말씀드리고 왔습니다.”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난 지금 장 차장을 보고 있는데, 파티션 넘어에 있는 박 부장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너무나 정확하게 보이는 기분.
꽉 막혔던 숨통이 트이는 모양이다.
“별 말씀 안하시더나?”
“아뇨, 그냥 알았다고, 가서 일 보라고 하시던데요?”
“뭐라고 하면서 거절을 했는데?”
“현재 결혼을 전제로 진지하게 만나기 시작한 여자가 한 명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 연봉이 저보다 조금 더 높습니다. 만난지 얼마 안됐고, 그래서 다니고 있는 회사 그만두고 저랑 같이 중국에 가달라고 강하게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
“여기 편집샵에 적용시킬 인센티브 리스트 정리한 겁니다. 확인 한 번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