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
장기적으로 봐야죠
아놔, 개인적으로 이런 거 진짜 별로 안좋아하는데...
박 부장이 있고, 또 그 사이에 장 차장까지 있는데, 왜 그 중간을 거치지 않고 날 직접 부르시는 거지?
전무님 방을 찾아가면서도 난 속으로 몇 가지 불안한 의심들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혹시 편집샵 프로젝트를 넘겨야 되는 건가?
결재 서류 커버를 신경질적으로 집어던진 박 부장의 행동을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뭐라고 전무님이 그 건으로 날 호출하시겠나.
그냥 박 부장한테 여차여차해서 그렇게 됐다는 식으로 말하고 치우면 그만일 것을.
똑.똑.똑...
전무님 방까지 들어가기 위해선 문을 두 번 통과해야 한다.
엘레베이터 복도를 통해 전무실 안으로 들어가면 탕비실이 붙어있는 비서 공간이 따로 존재한다.
그곳에서 다시 문을 하나 더 통과해야 전무님이 업무를 보시는 개인 방이 나온다.
신입 사원 오리엔테이션 때 한 번 와보고 그 이후로는 나도 처음 와보는 곳이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린채 통화중인 전무님의 뒷모습이 보였다.
직원 미팅실에 있는 테이블만큼 넓은 전무님 개인 집무책상.
그 집무책상과 전체창 사이에 서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린채 누군가와 통화를 이어가던 전무님은 날 발견하고는 손짓으로 소파를 가리키며 잠시만 앉아서 기다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런데 참...
먼저 앉기가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그래, 알았어. 일단 그렇게 진행하는 걸로 하고, 해달라는대로 맞춰줘. 그렇다고 또 너무 쉽게 오케이 해주지는 말고. 최대한 버틸 수 있는 만큼 버텨보고 원래는 안되는 거지만 그동안의 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번만 오케이 한다는 뉘앙스. 뭔 말인지 알지? 그래, 알았어. 상황봐가며 다시 통화하는 걸로 하자고.”
상대방과의 통화를 끝낸 전무님.
편집샵 프로젝트 프리젠테이션 때와는 달리 특유의 따뜻한 미소를 지으시며 소파 자리로 오셨다.
헷갈린다.
원래 냉철한 분이신 건지, 아님 프리젠테이션 때만 일부러 날을 세우셨던 건지...
“커피 한 잔 할까?”
“...네.”
전무님은 곧바로 내선 전화기 버튼을 눌러 안으로 커피 두 잔을 넣어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의중을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묘한 미소로 한참동안 날 쳐다보셨다.
“공 팀장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지?”
“서른 넷입니다.”
“서른 넷...”
내 나이를 되뇌며 몇 차례 고개를 끄덕이셨다.
“박 부장한테 듣자하니까 프리젠테이션 때 발표했던 것보다 나크리스 쪽 마진을 5퍼센트 더 깎았다고? 거기다 프로모션 경비까지 확보했고.”
“상대적으로 국내 인지도가 부족한 브랜드가 되다보니까, 대형 브랜드들 사이에 섞어서 판매량을 어느정도 확보하기 위해선 나크리스의 인센티브를 공격적으로 넣어줄 수 밖에 없겠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다른 회사 브랜드를 팔아주면서 그 인센티브를 홍성의 운영비로 준다는 것도 말이 안되는 것 같고...”
“그래, 그렇게 요령이 생기는 거야.”
요령.
이런 걸 내공이라고 하는 건가?
지금까지 편집샵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내가 해왔던 모든 과정들도 어쩌면 장 차장 밑에서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어가며 익혔던 업무의 응용에 불과하다.
어느것 하나도 내 머릿속에서 툭하고 튀어나온 창의적인 건 없다.
하나같이 다 그동안 홍성이 해왔던 것들이고, 하나 다른 게 있다면 나크리스라는 만만한 브랜드가 손에 들어와서 그걸 여러방면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는 것 뿐.
그 모든 걸 요령이라는 단어 하나로 명쾌하게 정의하는 전무님이었다.
“부모님이 부산에서 옷 수선집을 하신다고 했었지?”
“...네.”
약간의 감동.
그걸 기억하고 계실 줄은 몰랐다.
예전에 등산 동호회에서 우연한 기회에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있는 거 같다.
그때도 전무님은 내게 나이가 몇 살이냐 물으셨고, 억양을 보아하니 경상도 쪽인 거 같다는 거, 그리고 부모님은 어떤 일을 하시는지 등등을 아주 편안하게 물어보셨다.
“부모님 연세가 어떻게 되시지?”
“아버지는 57년 생이시고, 어머니는 53년 생이십니다.”
“자식이 공 팀장 하난가?”
“아닙니다. 위로 누나가 한 명 있습니다.”
“시집은 갔고?”
“네, 조카가 내년에 고등학교 올라갑니다.”
“아이고...공 팀장은?”
“네?”
“공 팀장도 이제 장가갈 준비 해야지?”
“아, 네...”
“만나고 있는 여자는 있고?”
좋은 감정을 가지고 만날 준비를 하고 있는 여자가 한 명 있다는 대답을 하려는 찰나였다.
문이 열리며 비서가 들어왔다.
그리고 전무님과 내 자리 앞으로 각각 커피를 내려놓고 다시 나갔다.
“영업부에서 서른 넷에 팀장이면 확실히 조금 빨리 달긴 달았네.”
이럴 땐 어떤 대답을 해야하는 것인지 도통 감이 안 잡혔다.
그래서 그냥 커피 한 모금을 입 안에 담아놓고,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박 부장이 이런 거 보면 확실히 사람 보는 눈이 있어. 그날 프리젠테이션 할 때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할 말 다 하는 거 보니까 제대로 잘만 키우면 머지않아 홍성에서 크게 한자리 하겠다 싶더라고.”
“과찬이십니다.”
“서른 넷에 팀장이라...공 팀장.”
“네, 전무님.”
“내년에 차장 한 번 안 해볼래?”
“...!”
전무님 방을 나와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는 동안 머릿속이 꽤 복잡하게 엉켜가고 있었다.
1시간 넘게 전무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이미 다른 팀들은 다 퇴근을 한 상태였다.
“뭐라고 하십니까?”
양 대리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편집샵 프로젝트 넘기라는 건 아니죠?”
“아뇨,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럼 왜...”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일단 오늘은 퇴근부터 합시다. 혹시 차장님, 부장님은 퇴근하셨습니까?”
“팀장님 올라가신 뒤에 두 분 다 바로 퇴근하셨어요.”
“...”
가방을 챙겨서 먼저 사무실을 나서며 장 차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치 장 차장은 내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연결음이 시작되자마자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어디십니까, 차장님.”
-돌막창집이다.
“부장님이랑 같이 계시죠.”
-응.
“저 가도 됩니까?”
“와. 와서 이야기 하자.”
엘레베이터에 올라 스마트 폰을 자켓 안 주머니 안으로 챙겨 놓고 스테인레스 문에 비친 나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봤다.
기회인가?
차장이라.
서른 다섯에 홍성 인터네셔널의 차장이라...
차장이 받는 월급과 새로운 명함은 둘 째 문제였다.
그런 것들보다는 지금 내가 인정을 받으며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전무님 라인에 들어갈 수 있다는 보장이 날 가슴뛰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런 나의 흥분과는 반대로 박 부장과 장 차장은 표정이 무거웠다.
막창집에 도착해서 벌써 두 병째 비우고 있는 박 부장과 장 차장이 있는 테이블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서류 가방을 빈 의자 위로 올려놓고 종업원에게 빈잔 하나와 소주 한 병을 새로 시켰다.
“뭐라고 하시더나?”
장 차장이 물었고, 옆에서 박 부장은 심기가 무척 불편한 표정으로 자신의 잔에 스스로 술을 채웠다.
“내년 2월에 중국으로 가서 주재원 근무 해 볼 생각 없느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래서 뭐라고 했어?”
“생각 좀 해보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무 생각도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니까 제가 뭐라고 대답을 드려야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장 차장은 뜨거운 콧김을 내뿜는 것으로 자신의 입장을 대신 밝혔다.
이건 사실 장 차장이 가라, 가지마라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내가 만약 중국 주재원 생활을 한 번 해보겠다고 하면 그때부터 난 영업부가 아니라 해외사업부로 부서 이동을 하게 될테니까.
그리고 다같이 월급받는 입장에서 의리도 물론 중요하지만, 자신의 밥그릇을 알아서 챙겨야 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거고.
여기서 네가 어떻게 영업부를 버리고 다른 부서로 갈 수 있어? 하는 따위의 유치한 말을 꺼낼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내가 가겠다고 하면 박 부장과 장 차장은 생각이 많아질 수 밖에 없다.
박 부장 입장에서는 자신이 영업이사 진급을 하기 전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의 수족과 같았던 손 팀장을 중국 주재원으로 꼽아놓고 가고 싶었는데, 그걸 못하게 되는 것이고, 장 차장의 입장에서도 자신과 각을 세우는 손 팀장을 계속 안고 가야하는 입장이 되어버린다.
장 차장의 입장에선 나란 존재와 손 팀장이라는 존재는 같은 저울에 함께 올릴 수 없을 정도로 그 활용도나 마음 편하기에서 큰 차이가 날 것이다.
물론 내가 진짜 가겠다고 하면 손 팀장은 차장 진급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긴해도, 내가 진행하고 있는 편집샵 프로젝트를 떠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크게 손해볼 건 없어 보인다.
차장이란 타이틀이 없다는 것 뿐이지, 편집샵 프로젝트를 가지고만 갈 수 있다면 부서내 파워는 차장으로 진급하게 될 김 팀장보다 더 강해질 것이 확실하다.
“사실 좋은 기회지, 공 팀장한테는.”
박 부장이 소주 한 잔을 반으로 잘라먹은 뒤 말했다.
“차장 달고 한 4년 정도 나갔다 고생하고 들어오면 해외사업부 부장 자리는 확정이라고 봐야지.”
“그래, 그건 부장님 말씀이 맞아.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남 눈치 볼 필요 뭐 있어? 기회라는 게 어디 뭐 항상 찾아오나? 지금 당장 필요없다고 세이브 해놓고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이런 기회는 이월시킬 수 있는 게 아냐. 지금 안 잡으면 사라지는 거야. 잡아, 공 팀장.”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장 차장의 얼굴 표정엔 생각이 많았다.
그리고 난 그날 술자리에서 가겠다, 안가겠다 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내 홍성 인터네셔널 생활 중 가장 큰 터닝포인트가 될지도 모르는 사안이다.
영업부에 대한 의리, 손 팀장의 사정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그렇게 금요일이 찾아왔고, 퇴근 후에 강혜선을 만나서 회사로부터 받은 주재원 근무의 기회에 대해 이야기했다.
“만약에 우리가 결혼을 해서 제가 중국으로 주재원 근무를 하러 가야하는 일이 생기면...혜선 씨도 같이 따라가주실 수 있겠습니까?”
“주재원 근무요?”
“네, 조건이 너무 좋습니다. 원래 주재원 근무가 다들 한 번 정도는 해보고 싶어하는 거긴 한데, 올해 막 팀장을 단 제 입장에선 더 좋은 조건이 되어있습니다. 보통 주재원 근무를 보낼 때엔 한 직급 승진을 시켜서 보내거든요. 팀장 1년만에 차장 승진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또...그렇게 주재원 근무를 끝내고 다시 돌아오면 부장 승진에도 좀 유리할 수 있고요. 거기다 월급도 월급이지만, 가 있는 동안 아파트도 회사가 제공을 해주고 생활비 명목으로 지원금도 꽤 나오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족에 한해서 언어교육비 지원도 해준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군요.”
“물론 혜선 씨도 현재 일을 하고 계시고, 또 그 일이 결혼 후에도 계속 할 수 있는 안정적인 일이라는 건 알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닌 거 같고요. 장기적으로 봐야죠. 장기적으로 봤을 때 어떤 선택이 우리 결혼 생활에 더 유리하게 작용될지를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