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38화 (38/325)

# 38

부장님 오늘 무슨 안 좋은 일 있으셨습니까?

“자, 잠깐만요!”

간발의 차이로 엘레베이터를 잡았다.

그런데 막상 열린 엘레베이터 안의 상황은 개미 한마리 비집고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빽빽했다.

월요일 아침.

“죄송합니다. 전 다음 엘레베이터 타고 올라가겠습니다. 먼저들 올라가세요.”

엘레베이터 안에 탄 사람들의 얼굴 표정은 마치 타지도 않을 거면서 왜 이제 막 올라가려고 하는 엘레베이터를 잡았는지 그 이유를 따지고 싶어 죽겠다는 식이었다.

마침 엘레베이터 안에는 지하 주차장에서부터 타고 올라왔을 양 대리가 싱긋이 미소를 지으며 날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다른 호기 엘레베이터를 타고 사무실에 올라갔다.

그리고 어느정도 예상했던대로 의미심장한 얼굴로 날 기다리고 있는 팀원들을 발견했다.

“자, 가방은 기태 씨한테 주시고 팀장님은 잠시 이쪽으로 좀 앉아보시죠.”

양 대리는 내 의자를 사무실 중간으로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이지혜는 내 커피를 준비하러 탕비실에 가있겠지?

“뭐합니까, 지금...”

“뭐하긴요, 지난주 월요일에 저한테 하셨던 거 고스란히 갚아드리는 거죠.”

팀원들은 거의 반 강제로 자리에 날 앉혀놓고 각자의 의자를 가져와 원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지혜가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탕비실을 나오고 있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뭘 기대하시는지 대충은 알겠는데, 안타깝게도 전 잘 됐습니다. 그러니까 양 대리님도 앞으로는 맞선 자리 나오는 여자 앞에 앉혀놓고 현타나 맞지 말고 분발 좀 하시죠?”

난 이지혜가 준비해준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최대한 능청스럽게 팀원들의 장난을 받아주었다.

그리고 강혜선과는 실제로 정말 잘 되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강혜선과는 금요일 밤 낙지구이 집 앞에서 헤어지고 일요일에 다시 만나 점심을 같이 먹었다.

불필요한 밀당을 원하지 않았던 강혜선.

솔직하게 말해서 나 역시 생략할 수만 있음 생략하고 싶은 부분이었다.

연애라는 감정에만 내 모든 에너지를 모두 집중시킬 수 있는 형편이 아니지 않나.

오히려 할 수만 있다면 이기적인 건 알지만 연애라는 감정을 통해 일주일을 버틸 에너지를 충전받고 싶은 심정이다.

강혜선은 자신에게 궁금한게 있음 얼마든지 물어보라는 식이었다.

상대가 그렇게 나오니 나 역시 그럴 수 밖에 없었고.

조금은 속물처럼, 서로의 민낯을 파악하는 동안 난 양 대리처럼 진짜 꼭 이렇게까지 해서 결혼을 해야하나? 라는 현타가 오기 보다는, 아...난 이렇게 결혼을 하게 되겠구나...하는 확신이 더 강하게 들었던 거 같다.

정말 우습게도 나와 강혜선은 단 두 번의 데이트만에 서로의 연봉과 대충의 집안 형편을 서로에게 오픈했다.

연애 상대가 아닌 결혼 배우자 감으로 상대에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한 우리.

아예 처음부터 결혼이라는 걸 전제로 깔아놓고 상대에게 호감을 느꼈기 때문에, 비록 다른 사람들이 단 두 번의 데이트만에 연봉을 까고 또 집안 형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우릴 보고 그건 좀 오버가 아니냐고 할지언정, 오히려 우리에겐 그게 더 편했던 거 같다.

그냥 순서만 조금 바뀌는 거라고 생각하니, 크게 이상할 것도 없었다.

연애라는 감정교환?

지금부터 하면 되는 거지.

그거 열심히 다 해놓고 나중에 가서 집안 형편, 가족사에 걸려서 관계에 제동이 걸리는 것 보다는, 우리 나이엔 어쩌면 이게 더 합리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 같다.

막상 강혜선과 일요일에 만나 짧은 데이트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까, 그제야 왜 사람들이 맞선을 보면 첫 만남에서부터 서로의 연봉이 얼마인지, 결혼 준비는 어떻게 할 것인지...등을 인간미 없이 바로 물어보는지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았다.

그럼에도 로또에 관한 이야기만큼은 조심스러웠다.

언젠가는 해야겠지만, 타이밍상 그 언제가가 꼭 일요일이어야 할 이유는 없을 거 같았다.

이미 강혜선은 로또 당첨을 제외한 나의 조건에 그정도면 충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런 강혜선에게 그런데 사실은 제가 몇 달 전에 로또 1등에 당첨이 됐습니다. 그래서 현재 14억 짜리 아파트를 한채 구입했고 그 아파트로 월세를 돌리고 있는 중입니다...라는 말을 덧불일 이유가 없었다.

로또 당첨을 말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저 지금껏 일하며 모아둔 돈, 원룸 전세 가격, 부모님 집에 얹혀살고 있는 누나 내외, 조카 아영이의 대학 학비 정도는 어느정도 도움을 주고싶다는 말을 했음에도 눈살을 찌푸리기는 커녕, 오히려 자기 역시 결혼을 하고도 자기 부모님 용돈을 지금처럼 꾸준히 챙겨주고 싶다고 말하는 여자였다.

내 나이 서른 넷.

결혼을 전제로 만나기 시작한 상대가 내가 장가를 가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 될지도 모른다고 지레 겁을 먹었던 경제적인 부분에 있어 날 안심시켜주고 부담감을 없애주니...우습게도 난 그때부터 강혜선을 상대로 사랑이란 감정을 본격적으로 품어볼 수 있었다.

그녀로 인해 그동안 나도 잘 모르고 있었던 내 이상형이 좀 더 구체화되는 느낌이었다.

괜히 원래부터 강혜선과 같은 외모를 가진 여자가 내 이상형이었던 거 같고, 강혜선처럼 말하는 여자, 강혜선처럼 웃는 여자, 강혜선처럼 옷을 입는 여자가 내 이상형이었던 것만 같은 느낌.

“생각만 하면 설레고 또 간질간질한 상대가 아니라...뭐랄까? 그냥 든든한 기분이 들어요.”

“든든한 기분이요?”

양 대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네, 든든한 기분이요. 마치 꼭 든든한 보험이 하나 생긴 것 같은 기분이네요. 뭐 이만하면 월요 청문회는 여기서 끝내도 되지 않을까요? 이렇게 모여 앉은 김에 액션만 까지말고 바로 미팅 시작합시다.”

그렇게 시작한 월요일이었다.

아침부터 양 대리가 내 연애사를 핑계로 장난을 섞어 여유를 만들어낸 이유는 그만큼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신발 편집샵 프로젝트가 빡빡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기 앞서 팀원들에게 웃음을 한 번 만들어줘놓고 시작하자는 의미.

아침 미팅을 끝내기가 무섭게 양 대리는 박기태를 데리고 VMD부로 내려갔다.

오전 내내 VMD부 나 팀장과 편집샵 브랜드 로고 디자인 건으로 마라톤 미팅을 하고 돌아온 양 대리.

“외주 디자인 업체 통해서 로고 시안 최소 10개 정도는 뽑아달라고 해놨습니다.”

편집샵 브랜드 로고가 나와야 된다.

그게 없으면 아무것도 진행을 할 수가 없다.

신발 쇼핑백 진행도 불가능하고, 매장 간판 디자인도 시작할 수 없으며, 바이럴 마케팅 업체와의 접촉도 불가능하다.

“최대한 빨리 뽑아져야 합니다. 가구는요?”

“지난주에 우리가 카탈로그에서 선택했던 디스플레이 가구같은 경우는 일본산이라고 하네요. 그것도 주문제작이라고 합니다. 단가가 너무 쎄더라고요.”

“씨...어쩐지 그럴 거 같더라.”

“대신 한국 업체 중에 그 비슷한 느낌으로 뽑을 수 있는 업체가 한군데 있다고 합니다. 왜 인천공항 면세점에 들어가 있는 끌레오 샵 가보셨습니까?”

“뭔지 대충은 알 거 같네요.”

“그 끌레오 샵에 들어가 있는 디스플레이 가구가 한국 업체에서 만든 거라고 하더라고요. 기태 씨, 아까 VMD부에서 받아온 가구 카탈로그 팀장님 좀 보여드려.”

“네, 여기...”

내 앞으로 펼쳐진 카탈로그를 내려놓고 다시 자리로 돌아간 박기태.

그 자리로 양 대리가 들어와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여기 이거랑, 이거. 그리고 그 다음 페이지에 이거...여기까지 다 한국 업체가 제작한 거라고 하네요.”

“VMD부에 요청넣어서 이 업체랑 컨텍 한 번 해보세요. 시간도 얼마 없는데 단가만 맞으면 바로 진행하세요.”

“네.”

“향은 씨.”

“네, 팀장님.”

“나크리스 말고 만토바에서 넘어오는 신발같은 경우는 받아서 신발 박스에 넘버링 일일이 다 해줘야 돼요. 알고 있죠? 안 그럼 매장 직원들 물건 팔 때 헷갈려서 고생해요. 그거 놓치고 그냥 가면 틀림없이 매장에서 신발 하나 팔 때마다 컴플레인 계속 들어온다.”

“네, 안그래도 만토바 제품은 바코딩 작업 새로 다 해야되잖아요. 그거 할 때 물류창고에서 스티커작업까지 같이 할 수 있도록 미리 전달해놓겠습니다.”

“맞네. 따로할 필요가 없지, 그냥 바코딩 작업하면서 같이 끝내버리면 되니까. 역시 향은 씨, 굿 아이디어!”

마치 중간고사 날짜와 과목별 모든 시험 범위가 다 나오는 순간 그때부터 벼락치기를 하는 것처럼, 우린 최대한의 집중력을 발휘해서 편집샵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로고 시안이 나왔고 매장 컨셉이 정해졌다.

그리고 만토바로부터 브랜드별 신상 리스트가 도착했다.

전날 야근을 하고도 조기 퇴근을 하지 않고 VMD부를 들락날락거리는 양 대리의 턱주변으로는 제법 야성미가 풍기는 수염이 번져있었다.

그리고 난 나크리스 김형찬과 통화를 시작했다.

“네, 그럼요. 요구를 하는 게 아니라 나크리스 측의 생각을 묻는 겁니다. 어차피 편집샵 브랜드 자체 쇼핑백 주문은 따로 들어갑니다. 나크리스를 제외한 다른 브랜드들은 브랜드 본사가 아니라 만토바로부터 받는게 되다보니까 브랜드 쇼핑백을 쓸 수가 없어요. 쇼핑백을 안줘요, 아예.”

-그럼 나크리스가 판매될 때도 편집샵 쇼핑백으로 주면 되는 거 아닌가요?

“아...지금 담당자님께서 뭔가 오해를 하셨네.”

-오해를 하는 게 아니라...

“물론 그렇게 해버리면 매장 직원들은 좋아라 하죠. 브랜드 구분없이 쇼핑백 하나만 쓰면 되니까. 그런데 그렇게 되면 나크리스라는 브랜드를 노출시킬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어지잖아요.”

-...!

“저희가 뭐 한 장에 몇 백 원 밖에 안하는 쇼핑백 가격 아끼자고 이러는 거겠습니까? 그거 아낄 정성으로 매장 직원들 일거리 하나라도 더 줄여주고 판매에만 집중시키는 게 백배는 더 남는 장사인데.”

-...그렇죠.

“쇼핑백 가격을 세이브 하겠다고 그러는 게 아니라 편집샵에서 나크리스 신발을 산 사람이 나크리스 쇼핑백을 들고 돌아다니면 그나마 조금이라도 브랜드를 노출 시킬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지 않을까 해서 나크리스 측의 생각은 어떤지를 여쭤본 겁니다. 그렇게 불편하게 생각하되시면 그냥 처음 홍성이 생각했던대로 일괄 편집샵 쇼핑백을 사용하는 걸로 할게요.”

-아닙니다, 팀장님. 불편하게 생각을 하다니요. 저도 이번이 편집샵에 브랜드를 처음 넣어보는 거라 뭐가 뭔지 잘 몰라요. 그래서 왜 나크리스만 따로 쇼핑백을 요구하는지 궁금해서 여쭤본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주문하신 제품수 맞춰서 쇼핑백을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코스트는요?”

-그냥 보내겠습니다.

“에이...그렇게까지 안하셔도 됩니다. 직영 기업 브랜드를 제외하고는 라이센스 업체들도 쇼핑백은 다 돈주고 받아쓰는데...”

-아닙니다, 아닙니다. 주문물량에 맞춰서 인보이스 제로로 잡아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김형찬과 통화를 하고 있을 때였다.

“에이, 씨발 진짜 더러워서 못해먹겠네!”

탁!

갑자기 전 사무실에 흐르기 시작하는 정적.

난 전화통화에 몰입한 나머지 박 부장과 장 차장이 우리 사무실 앞을 지나가고 있는 것도 못보고 있었다.

우리 사무실 앞에서 들고 있던 결재서류 커버를 바닥에 집어던지며 욕을 싸지른 박 부장.

잠시 나와 눈이 마주쳤고, 난 수화기를 귀에 붙인채로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고, 박 부장은 뭐에 그리 화가 났는지 혼자 씩씩거리며 자기 자리로 가버렸다.

그리고 박 부장이 바닥에 집어던진 결재서류 커버를 주으며 장 차장이 말했다.

“별 일 아니니까 다들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업무들 보세요.”

장 차장은 영업부 전 팀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말한 다음 박 부장의 결재서류 커버를 들고 우리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난 최대한 빨리 김형찬과의 통화를 마무리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장님 오늘 무슨 안 좋은 일 있으셨습니까?”

“아냐, 그냥 뭐...공 팀장.”

“네, 차장님.”

“지금 전무님 방으로 가봐.”

“네?”

“전무님이 공 팀장 좀 올려보내라고 하시네.”

“저를요? 저를 왜...”

“일단 올라가.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시간 있을 때 하자. 난 지금 가서 부장님 진정부터 시켜야 할 거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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