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그거 한 번 해보면 안되겠습니까?
나와 강혜선 사이에 오해 아닌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오해는 어색할 줄 알았던 술자리를 부드럽게 만들어주기 시작한다.
“그제야 아, 지금 이 남자가 처음 전화번호를 받아갈 때와는 다르게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는거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전까지는 지금 이게 뭐지? 어장관리하나? 뭐 이런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고요.”
“어장관리라니요. 무슨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제가 어디 그럴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그럴 사람들은 어디 자기 얼굴에 나 어장관리 하는 사람. 이렇게 써놓고 다니나요, 뭐.”
활어횟집에서 술을 한 잔 했다.
일반 횟집은 아니고 사장이 젊은 사람인지, 꽤 감각적으로 인테리어를 해놓고 장사를 하는 집이었다.
강혜선이 가자고 한 집이다.
일전에 한 번 와본적이 있는데, 가성비가 훌륭한 집이라면서.
기본 테이블은 두 개가 전부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전부 바에 둘러 앉아 먹어야 한다는 단점은 있지만, 가볍게 소주 한 잔 하기엔 그만인 집이었다.
양은 적지만 코스로 나오는 메뉴 종류가 워낙에 다양해서 이것저것 맛을 볼 수도 있고, 무엇보다 강혜선의 말처럼 가게 분위기 대비 메뉴판에 적힌 가격들이 하나같이 다 착했다.
젓가락도 고급스런 플라스틱 젓가락이고, 그릇들도 하나같이 예쁜집.
다행히 운이 좋아 바의 커브자리를 안내받을 수 있었다.
만약 나란히 앉아서 먹어야했다면 그것만큼 불편한 일이 있었을까.
난 자리에 앉자마자 지난주에 내가 펑크를 냈던 약속에 대해 사과했다.
그러자 강혜선은 그 부분에 대해선 아무렇지도 않았다고 대답했다.
“다른 일도 아니고 회사 일로 출장을 가셨는데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면 그게 더 이상한 거죠.”
그때까지도 난 그게 강혜선의 진심이 절대 아닐 거라고 오해를 하고 있었다.
왜냐면 만토바를 다녀와서 일요일에 연락을 했는데, 그때의 반응은 말로 설명하긴 참 애매하지만 지금 이 여자가 뭔가에 단단히 빈정이 상해있구나...하는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니까요. 일요일...사실 저도 그날 속으로 은태 씨를 좀...”
“좀...?”
“이상하게 생각했던 거 같아요.”
“...왜요?”
“아니...에휴...됐어요.”
강혜선은 답답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됐다면서 새우 튀김을 입안으로 넣었다.
“아니 왜 말을 하다가 말아요? 뭐가 이상하단 말이에요?”
가만히 날 쳐다보며 입에 든 새우튀김을 씹는 강혜선.
난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무슨 실수라도 한 게 아닐까 걱정을 하며 날 빤히 쳐다보는 강혜선과 눈을 맞췄다.
“10시에 연락이 와서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하면, 그것도 아직 씻지도 않고 늘어질대로 늘어져있는 일요일 아침 10시에. 어떤 여자가 알았다면서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할 수 있겠어요? 오래 만난 연인 사이도 아니고.”
“...?”
강혜선은 내가 도통 모르겠단 반응을 보이자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어깨만 살짝 들었다 올렸다.
그 표정이 더 날 자극했던 거 같다.
“아니, 꼭 점심을 12시에 먹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1시에 먹어도 되고, 혜선 씨 말처럼 늘어질대로 늘어지는 일요일인데 2시에 먹을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요.”
“...?”
“그러니까 그런 이야기를 하려면 통화를 해야할 거 아니에요. 대뜸 카톡으로 점심때 시간 괜찮으면 식사나 같이 할까요? 라고 해버리면 제가 거기서 뭐라고 대답을 할 수 있겠어요? 그리고 제가 분명히 점심때는 이라고 강조까지 했잖아요. 점심때는 힘들 거 같다고...거기다 최대한 귀여운 이모티콘도 같이 써서 답장을 보냈잖아요.”
“...그게 그런 뜻이었군요.”
“은태 씨의 의도가 정확히 뭔지 헷갈리는 제 입장에선 먼저 저녁에라도 잠시 만나자는 말을 하기가 참 조심스러웠단 말이에요. 그것도 카톡으로 물어보기가.”
“제 생각은 뭐였냐면 다음날이 월요일 출근일이잖아요. 그래서 낮에 잠시 보는 것도 아니고 저녁에 만나면 다음날 출근 때문에 부담스러우실까봐 그랬죠. 저야 언제든 상관이 없지만 혜선 씨가 집에만 계시는 것도 아니고 평일 근무를 하시는 분이고, 또 저 때문에 괜히 피곤하실 거 같아서 가급적이면...”
“안 그래도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실 거 같아서 먼저 제가 술 한 잔 같이 하자고 말씀드렸던 거예요.”
“...”
“제가 하는 일이 은행에 오는 사람들 말로 상대하는 일이라 일 마치면 말 수가 별로 없는 편이에요.”
“근데 지금은 상당히 말이...”
“제 말이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까지...”
“...?”
“사실 그렇잖아요, 여자 나이 서른 셋. 평생 혼자 살 게 아니라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남자를 만나야 하는데, 지금 이 나이에 썸 타는 남자랑 밀당을 할 시간적 여유가 어딨겠어요? 밀당을 하더라도 서로의 감정이 어느정도는 진심이란 걸 확인한 뒤에 안전하게 하고싶지, 아무런 건덕지도 없는데, 무턱대고 밀당부터 하자는 여자는 그리 많지 않을 거예요.”
오늘따라 미소를 보여주지 않는 강혜선이었다.
근데...미소가 없어도 예쁜 건 여전히 예뻤다.
내 눈에만 예쁜 건지는 모르겠지만...
“결혼에 대한 의지가 있는 여자 나이 서른 셋이면 시간적으로 여유가 그리 많지가 않아요.”
“남자라고 왜 다르겠습니까. 하지만 사람에 대해 알아보려면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물론이죠. 제대로 알아봐야죠. 그런데 그렇게 정공법대로 사람을 알아가는데 1년, 2년이란 시간을 쓰고, 그때가서 나랑 안 맞는 사람이란 걸 깨달아 이별이란 걸 하고...그땐 또 그만큼의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겠죠. 그럼 제 나이 서른 다섯이겠네요. 서른 다섯에 다시 다른 상대를 만나 은태 씨와 하고 있는 이런 관계를 시작한다는 건...”
무슨 말인지 충분히 알고 있다.
내 상황이 딱 그러니까.
“은행에서 같이 일하는 동생이 오늘 은태 씨를 만나면 이런 이야기를 솔직하게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저도 오죽 답답했나 보네요. 그 말을 듣고 지금 이러고 있는 거 보면. 남자를 소개시켜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이게 썸인지 뭔지는 모르겠는데 연락을 하고 있는 남자가 한 명 있다면서 은태 씨 이야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아무래도 은태 씨가 상당히 신중한 성격인 거 같다면서 제가 먼저 용기를 내지 않으면 천년만년 지금 관계 이상 발전이 힘들 것 같다고 조언을 해주더군요.”
“감사한 동생이네요. 제 입장에서요. 사실...네, 맞습니다.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리고...어떻게 해야하는 건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저도 잘 몰라요.”
“...”
“그래서 그냥 솔직하게 이야기 해보자, 꾸밈없이...그럴 결심을 했던 거 같네요.”
“저...괜찮습니까?”
“괜찮은 사람같아 보이니까 이러고 앉아서 같이 술을 마시고 있는 거 아니겠어요?”
그 자리 술값을 강혜선 자신이 내겠다고 했다.
난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려는 강혜선을 서둘러 말리며 자켓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고, 그런 날 쳐다보며 강혜선이 말했다.
“여긴 제가 살게요.”
“에이, 에이...뭐하시는 겁니까, 지금. 그건 아니죠. 지갑 넣으세요. 아, 얼른요. 사장님 이 카드로 계산 부탁드립니다.”
“제가 마시자고 했잖아요.”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합니까? 그리고 제가 먼저 만나자고...”
“이럴 땐 그냥 2차는 제가 사겠습니다. 이렇게 해주시면 더 좋을 거 같아요. 2차를 가자는 말까지 제가 먼저 하려니까...”
“아니, 뭐 전 2차도...당연히 제가 사려고...했죠.”
“거짓말. 카운터까지 오는 동안 2차 이야기는 단 한 마디도 안 꺼내놓고서는...”
“진짭니다. 나가서 하려고 했습니다. 술도 좀 깰 겸, 천천히 걸으면서 자연스럽게.”
“이 카드로 계산해주세요.”
“진짠데...”
자리를 옮긴 2차 낙지구이 집에서 우린 좀 더 서로에 대해 깊게 묻고 또 깊게 대답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강혜선.
결혼까지 생각했던 남자가 지금껏 두 명이 있었다고 한다.
한 번은 3년 전, 그리고 다른 한 번은 지현이 결혼식에 참석하기 바로 몇 주 전에 관계가 정리됐다고 했다.
3년 전에 끝난 남자에 대해선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에 헤어진 남자에 대해서는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양가 부모님들께 인사를 드리러 가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그냥 결혼에 대한 이야기만 몇차례 오고 갔었죠. 지금에 와 그 사람이 제게 했던 행동들을 돌이켜보면 아마도 집안 형편에 열등감이 많았던 사람이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들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음...단 한 번도 저한테 솔직하게 집안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거든요. 처음 관계가 형성될 땐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저 역시 처음부터 모든 걸 다 보여주는 스타일은 아니거든요. 처음엔 서로한테 잘 보이고만 싶지, 자신이 가진 열등감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잖아요.”
“흐음...네, 뭐 그럴 수도 있죠.”
“그 사람이 자기 집안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당시엔 그냥 그런가 보다...했던 그 사람의 말들이 시간이 조금씩 지나면서 진실이 아닌 거짓말이었다는 걸 알게 되면서...음...오히려 전 그 사람한테 더 애가 쓰였던 거 같아요.”
뭐랄까...
사실 상대의 지나간 연애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조금이라도 질투심이 나야 정상일텐데, 나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건지, 아님 지난 연애에 대해 너무 담백하게 이야기를 하는 강혜선의 진실된 모습 때문인지 질투심이 들기 보다는 오히려 더 좋았던 거 같다.
강혜선이라는 사람에 대해 좀 더 깊게 알게되는 거 같아서일까?
“처음에는 어머니가 신촌 어디에서 작은 정식집을 운영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런가보다 했죠. 그리고 또 지금까지 성실하게 회사를 다니며 어느정도 모아놨고, 그 돈에 대출 좀 받으면 변두리에 아파트 전세 정도는 구할 수 있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강혜선은 살짝 취해있었다.
“그런데 웃긴 게 제가 직접적으로 집안 형편에 대해 물어봤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다 자기 입으로 제가 물어보기도 전에 한 말들이에요. 전 그런 부분에 크게 관심이 없었거든요. 물론 상대방 집안 형편이 괜찮으면 당연히 좋죠. 그걸 싫어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요? 남자, 여자를 떠나서.”
“...그렇죠.”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것만 보고 상대를 만날 수는 없잖아요. 평생을 같이 살아야 하는 사람인데, 지금 당장 가진 게 좀 부족하고 어려워도 사람만 성실하고 긍정적이라면 얼마든지 같이 극복해나갈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렇다고 제가 집에만 있는 사람도 아니고, 저도 나가서 일하잖아요. 은행 일이라는 게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메이저 은행은 결혼해서 애를 낳은 후에도 계속 다닐 수 있고.”
“그렇죠.”
“그런데 그 남자는 아마 저한테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는 게 두려웠나봐요. 성실한 사람이었지만, 그렇게 긍정적인 사람은 아니었던 거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음...얼굴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어느정도 이해는 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저도 그래요. 저도 이해는 해요. 하지만 이해를 하는 것과 믿음에 금이 가는 건 별개의 일이더라고요.”
“그 부분 역시 이해합니다.”
“처음부터 안 해도 될 거짓말들을 해버려서 제가 그런 부분에 크게 신경을 안 쓰는 사람이란 걸 안 뒤부턴, 자신이 한 거짓말들 때문에, 그게 감당이 안되어서 계속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이더라고요. 그게 어떻게 안 보이겠어요, 다 보이지...”
“그런데 왜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요?”
“아마도 그 남자는 저랑 결혼까지 이야기가 오고갈 정도로 관계가 발전될지 모르고 그런 거짓말들을 했을 거예요. 사실 전 어느정도 만남이 지속된 이후부터 그 남자가 아파트 전세를 얻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는 건 대충 눈치채고 있었거든요. 그런데도 그냥 기다렸던 거 같아요.”
“뭘요?”
“저한테 솔직하게 말해주기를...전세가 힘들면 월세부터 시작해도 되잖아요. 꼭 아파트일 이유도 없는 거고. 형편이 안되면 그에 맞춰서 신혼집 꾸며놓고 조금씩 서로 힘 합쳐서 넓혀가도 되는 거죠.”
“하지만 그 남자는 틀림없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겁니다.”
“무슨 생각이요?”
“자신은 아직 결혼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아마도 혜선 씨가 아닌 이 사회가 만들어 놓은 일종의 정형화된 결혼 틀에 스스로 함몰되어 있었던 사람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드네요. 사실 우리 또래 미혼 대부분이 그렇지 않을까요?”
“그래서 저도 그 남자가 저한테 헤어지자는 말을 할 때, 아...이 모든 상황으로부터 도망을 치고 싶은 거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못 잡겠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도망가라고 놓아줬어요.”
“아직 생각이 나시나 봅니다?”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생각이 날 거였음 헤어지자고 할 때 잡았겠죠. 사람은 참 괜찮고 또 상황 자체가 안타깝긴 했지만...인연이 아니었던 거죠. 뭐 어쩌겠어요? 경제적인 부분 때문이 아니라...그렇게 솔직하지 못한데, 그렇게 자기 진짜 모습에 대한 자신감이 없는 남잔데, 그런 사람과 평생을 함께 할 생각을 하니까 좀 무섭더라고요, 솔직하게 말해서. 모든 걸 다 오픈하자는 게 아니잖아요. 그냥 기본적인 부분은 서로에게 솔직해지자는 건데, 그것마저 못하는 남자였잖아요.”
“저는 일단 그것만 안하면 되는 거네요, 거짓말. 그렇죠?”
“푸흡...”
“아까 횟집에서 그런 말 하셨잖아요.”
“무슨 말이요?”
“밀당을 하더라도 서로의 감정이 어느정도는 진심이란 걸 확인한 뒤에 안전하게 하고싶다고.”
“...”
“그거 한 번 해보면 안되겠습니까?”
“뭐요? 밀당이요?”
“필요한 거라면요.”
“하면 질 거 같아서 싫어요.”
순간 심장이 쫄깃해졌다.
저렇게 약한 모습으로도 상대의 마음을 들었다 놓을 수 있는 거구나...
“말 수 없는 절 이렇게까지 말을 하게 만드는 사람을 상대로 제가 어떻게 이기겠어요? 그리고 해봤자 질 거 뻔한데 제가 그걸 왜 하겠어요? 안 할래요, 자신 없어요. 저 원래 그런 거 잘 못해요, 단순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