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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36화 (36/325)

# 36

금요일이잖아요

오후 5시까지 기다렸다.

4시에 전화를 걸어볼까 하다가 아무래도 출근 길일 거 같아, 한 시간을 더 기다렸던 거다.

현재 파리는 오전 10시.

마침 유럽은 휴가철이기도 해서 이런 전화를 걸 때마다 망설여진다.

“홍성 인터네셔널 공은태 입니다.”

-네, 팀장님! 잘지내셨죠? 안그래도 제가 조만간에 먼저 연락 한 번 드리려고 했는데...

그 조만간은 아마도 홍성과 나크리스 사이에 뭔가 문제가 크게 생겼을 때를 말하는 거겠지.

김형찬을 나무랄 수는 없다.

원래 그런 거니까.

화장실 들어갈 때 기분과 나올 때 기분은 당연히 다를 수 밖에.

어찌됐든 홍성 인터네셔널을 통해 강남점에 나크리스를 입점시키는데 성공을 했다.

그럼 뭐 김형찬 입장에선 자기 할 일을 다 한 거지.

나머지는 우리 영업 5팀과 나크리스 본사 컨트롤 팀이 알아서 해야하는 거고.

“누가 먼저하면 어떻습니까? 목소리 듣고싶은 사람이 먼저하면 되는 거죠. 그나저나 업무 보시는데 연락드린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이제 막 미팅 끝내놓고 잠시 커피 브레이크 가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시군요.”

-그런데 어쩐 일로...

“그냥 잘 지내시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또 지난주에 나크리스 매출 메일로 보내드렸는데, 확인을 해보셨나 궁금하기도 하고...겸사겸사 연락 한 번 드려봤습니다.”

-아...그러시군요. 그런데 그 매출을 저는 못 받았습니다.

“그런가요? 그럼 아마도 팀 센터가 나크리스 컨트롤팀으로만 메일을 보낸 모양이네요.”

-다른 곳에서도 다 그렇게 하니까요.

“매출이 기대했던 것보다는 저조하더라고요. 매장 직원들이 애를 쓰고 있긴 한데, 생각처럼 쉽지가 않은 모양입니다. 하하하.”

-이제 시작했으니까요. 천천히 지켜보시죠. 급할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팀장님.

확실히 김형찬도 쉬운 상대는 아니다.

매출이 저조하게 올라온다는 말에 긴장을 하기는 커녕 오히려 날 격려하고 있다.

아니 격려하는 척을 하며 살짝 뒤로 한 발을 빼려고 하고 있다.

컨트롤 기업에서 이런 말을 할 때엔 브랜드 파워가 부족하다는 걸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거다.

그걸 모르지 않을텐데도 당황은 커녕 오히려 능글맞게 홍성과 나크리스의 포지션을 바꿔버린다.

보통 어느정도 힘이 있는 브랜드 업체쪽에서 매출이 기대했던 것보다 저조하단 말이 나오면 홍성이 이제 시작을 한 브랜드이니 천천히 지켜보자고 하는 게 맞는 거다.

김형찬...

그정도 방어는 가볍게 해낼 짬밥이다 이건가?

살짝 웃음이 나왔다.

-그나저나 요즘 한국은 좀 어떻습니까? 며칠 전에 한국에 계신 부모님과 통화를 했는데, 날씨가 보통이 아니라고 하시더라고요.

“어휴...말도 마십시오. 숨이 안 쉬어집니다. 정말 에어컨 발명한 사람한테 노벨상을 줘야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에어컨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상황입니다.”

-그렇군요.

“거기다 또 갑자기 회사에서 진행하는 편집샵 프로젝트를 떠안아서 정신이 없습니다.”

-편집샵이요?

“네, 몇몇 브랜드들의 신발만 따로 모아서 편집샵 개념으로 전국에 있는 백화점, 아웃렛쪽으로 깔아야 하게 생겼습니다. 근데 이게 보통 작업이 아닐 거 같아 시작도 하기 전에 겁부터 나네요.”

-혹시 뭐 생각하고 계신 브랜드라도 있습니까?

“브랜드 초이스는 이미 다 끝났습니다.”

-어떤 브랜드가 들어가나요?

김형찬의 목소리가 살짝 들뜨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이쯤되면 상대도 내가 전화를 건 진짜 목적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김형찬은 내가 만토바에서 초이스해온 브랜드들을 나열하자 지레 겁을 먹고 살짝 포기하는 듯한 음성으로 축하한다고 말했다.

“축하는요, 무슨. 이게 어디 제 개인 사업도 아니고...그리고 요즘 백화점들이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앞다투어 자체 편집샵을 런칭하고 있어서 분명 겹쳐지는 브랜드도 몇 개 있을 걸로 예상합니다.”

-그게 어디 큰 문제겠습니까. 그런데 해당 브랜드 본사들과는 이미 이야기가 다 끝난 사안입니까?

“그럼요. 제일 중요한 게 그 부분이니까요.”

-그렇군요. 역시 홍성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본론을 꺼낼 차례.

“제 입장에서는 그렇습니다. 나크리스는 제가 팀장을 달고 처음 받은 브랜드 아닙니까.”

-네, 그때 그렇게 말씀을 하셨죠.

“그래서 저조한 매출에 실망감도 크고...또 어쩔 수 없이 다른 브랜드들에 비해 더 많은 애착이 가는 거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매출에 관해서는 크게 부담감 느끼실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이건 어디까지나 우리끼리 하는 말입니다.”

-네, 말씀하시죠.

“이미 확정된 브랜드들 사이에 같이 끼워넣기만 하면 어떤 브랜드라도 덩달아 팔릴 수 밖에 더 있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어후...그럼요. 말씀하신 브랜드들이 다 모여있는 샵인데, 그건 매출이 안 올라온다고 해도...뭐랄까, 일종의 홍보효과 가치만 해도 어마어마한 거죠.

“그래서 제가 지금 이미 초이스가 끝난 브랜드 외에 나크리스도 같이 한 번 넣어볼까 생각 중에 있거든요.”

-감사합니다, 공 팀장님! 제가 진짜 다음에 한국 들어갈 일 있으면...

“아니, 아니. 일단 끝까지 한 번 들어보세요. 제 생각이 그렇다는 겁니다, 제 생각이. 괜한 오해는 하지 마시고요. 고작 팀장이 결정할 수 있는 사이즈의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홍성 인터네셔널 전체가 지금 발벗고 나서는 프로젝트입니다. 저는 그냥 운이 좋아 제 이름을 걸고 진행하는 거 뿐이고요.”

-아...

“그래서 제가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일단은 우리끼리 하는 말이라고.”

-네...

“아직 부장님께도 말을 못드렸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부장님은 담당자님과의 개인적인 친분이 있으셔서 나크리스라고 하면 어떻게든 오케이 사인을 주시려고 할 것도 같고...”

-혹시 걸리는 부분이라도 있습니까?

“걸리는 부분이라고 하기 보다는...하아...이걸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편하게 말씀해주십시오.

“그 프로젝트에 나크리스를 넣을 마땅한 명분이 없습니다.”

-...!

통화 내용을 엿듣고 있던 양 대리가 결국 푸훕! 하며 웃음을 들켰다.

그러더니 날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 엄지의 의미 속엔 당신이 이렇게까지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해낼 줄 몰랐다는 의미가 담겨있는 듯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영업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다 해야하는 일인 것을...

“저 개인적으로야 얼마든지 명분이 있죠. 나크리스는 제가 맡고 있는 브랜드이고, 또 런칭을 시켰는데, 기대했던 것보다 매출이 저조하다는...그런데 이게 회사 전체적으로 보면 해당 편집샵 프로젝트에 나크리스를 포함시킬 명분이 되지는 못한다는 겁니다.”

-흐음...

“현재 회사의 입장은 이미 초이스 된 브랜드 6개만 가지고 샵을 꾸미기엔 조금 부족한 감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한두 개 정도 브랜드를 더 섭외를 하는 게 어떻겠냐고 하면서 그 물망에 토즈와 벨로티를 올려놓더라고요.”

박기태까지 입을 반쯤 벌린채 멍한 눈으로 날 쳐다봤다.

마치 지금까지 자기가 알고 있었던 팀장의 이미지 역시 구라가 아닐지 의심스럽다는 표정이었다.

“근데 전 그 두 브랜드 보다는 이상하게 제가 팀장을 달고 처음 맡게 된 브랜드라서 그런지 나크리스 쪽으로 더 마음이 쏠리고 있고...그런데 토즈와 벨로티를 포기하고 나크리스를 넣을 수 있는 명분이 저한테는 없습니다.”

-실례가 안된다면 현재 홍성 측에서 예상하고 있는 편집샵 매장 수가 얼마나 되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예상이 아니라 그 부분은 확정입니다. 일단 다음 시즌에 맞춰서 전국 40개 백화점에 1차 입점을 시킬 겁니다.”

-40군데...그 명분, 제가 한 번 만들어드리면 어떻겠습니까?

“어떻게요?”

-마진을 좀 낮춰드리는 건 어떨까요? 현재 일본으로 보내는 마진 베이스로...사실 제 입장에서도 명분이 필요했습니다. 처음부터 일본으로 보내는 마진 베이스로 맞춰드리고 싶었지만, 강남점 하나만 보고 그 마진 베이스를 던졌다간 나중에 제가 한국인이라서 그랬다는 소릴 들을 가능성이 높았거든요.

“에이, 이미 끝난 계약을 가지고 그런 말씀을 하실 필요는 없고요. 사실 저 역시 처음부터 너무 많은 마진을 깎은 건 아니었을까, 내심 죄송스럽더라고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담당자님, 다른 브랜드 모두 다 만토바에서 받아옵니다.”

-...!

“마진 부분은 마진 부분이고 그 외 다른 무기가 하나 정도 더 있으면 제가 회사를 설득하는데 큰 힘이 될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흐음, 뭐가 있을까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이참에 상황 봐가며 오퍼해주시기로 했던 프로모션 경비 3퍼센트도 같이 포함시켜주시죠. 어차피 이미 초이스된 브랜드들과 같이 깔리는 거 자체가 프로모션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하죠.

“그럼 부장님께 보고드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기존 계약 가죽파트 65 의류파트 70에서 일본쪽 마진 적용시켜 가죽파트 70 의류파트 75로 변경, 거기에 프로모션 경비 3퍼센트 추가, 매장 직원 인센티브 3퍼센트는 그대로 유지. 그리고...”

-컨사인먼트도 그대로 유지.

“그럼 제가 부장님께 보고드리기 전에 나크리스 쪽에 해당 내용 메일 하나 요청드릴 수 있겠습니까? 부장님 스타일 잘 아시지 않습니까. 문서 없는 보고는 받지도 않으십니다. 하하하...”

-지금 바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오늘 금요일이니까, 제가 메일 받고 따로 프리젠테이션 준비해서 월요일에 부장님께 보고드리고, 결과는 그 뒤에 전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렇게해도 괜찮겠습니까?”

-잘 좀 부탁드립니다, 팀장님.

“아직 나크리스쪽 다른 사람들에겐 비밀로 해주시고요. 아직 확실한 것도 없는데, 괜히 바람만 잡았단 소리 나오면 서로 불편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럼요. 그 부분은 걱정안하셔도 됩니다.

잠시 뒤 나크리스 본사 컨트롤팀으로부터 영문으로 된 약식 메일이 하나 도착한다.

해당 메일을 출력해서 박기태가 내 앞으로 내려놓았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팀장님.”

“저보다 더 대단하고 날고 긴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동안 홍성에.”

“...?”

“조금 전 나크리스와의 딜은 홍성이라는 타이틀이 있기 때문에 만들어낼 수 있는 결과였지, 홍성이라는 타이틀이 없으면 아무리 날고 기는 사람들도 나크리스 정도 되는 브랜드를 상대로 절대 이런 결과를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게 내 실력이라고 헷갈려선 절대 안됩니다.”

“...!”

“그게 바로 스타트업 기업에서 일하는 게 힘든 이유 아닐까요? 브랜드를 입맛에 맞게 끌고가는 게 아니라 브랜드 입맛에 끌려다녀야 할 테니까요. 그리고 바로 그게 자기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피가 마르는 이유일 것이고.”

난 자리에서 일어나 박기태의 어깨 위로 살짝 손을 올렸다.

“그냥 제 생각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게 정답이란 말이 아니라...”

말 그대로 약식 메일이었다.

하지만 이정도면 충분하다.

한주를 끝내는 금요일 오후 업무치고는 무척이나 개운한 결과였다.

그리고 난 출력된 메일을 가지고 장 차장을 찾았다.

“이대로 진행하면 될 거 같습니다.”

그 앞을 기웃거리던 박 부장에게 장 차장이 메일을 넘겼고, 박 부장은 그저 의미없이 사무실 안을 돌아다니며 메일 내용을 확인했다.

“공 팀장, 저녁에 같이 소주 한 잔 할까? 장 차장이랑 꼼장어 먹으러 가기로 했는데...”

별 대수롭지 않게 확인한 메일을 자기 책상 위로 올려놓는 박 부장.

하지만 이미 그의 표정엔 더이상 긁어낼 수 없을 정도로 나크리스의 바닥까지 다 긁어낸 날 기특하게 생각한다는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래도 그건 그거고 불금은 불금이다.

다른 날도 아니고 금요일 저녁에 회사 사람들과 잡히는 술자리는 정말이지 최악이다.

“아...부장님, 정말 죄송한데 다음에 사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저 오늘 저녁에 데이트 약속이 있습니다.”

“뭐? 데이트?”

장 차장이 깜짝 놀란 눈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만나는 여자 있냐?”

“아뇨, 아직...”

“여자도 없는 놈이 무슨 데이트?”

“그래서 한 번 만들어볼까 다방면으로 애를 쓰고 있는 중입니다. 꼼장어 다음에 사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저 올해 넘기면 서른 꺾입니다. 장가는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강혜선과의 약속이 확정된 건 아니다.

일 마치고 저녁에 커피나 한 잔 같이 하는 게 어떻겠냐고 카톡을 보내놨는데, 아직 확인을 못한 건지, 아님 일부러 안한 건지 숫자 1이 지워지지 않고 있다.

꼴을 보아하니 이번에도 거절을 당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번에도 내가 먼저 만든 약속을 깨뜨릴 수는 없다.

강혜선을 못 만난다고 해도 황금같은 금요일 저녁을 박 부장과 장 차장 사이에 끼어서 꼰대합창단의 관객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하긴, 이 역시도 예전 같았으면 꿈도 못 꿀 거절이다.

“여자가 있긴 있는 모양이네. 공 팀장이 술자리를 다 빼고 말이야. 조만간 잔치국수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는 건가?”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정말 거짓말처럼, 다시 우리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강혜선으로부터 한 통의 카톡 메시지가 도착한다.

-업무 중이라 카톡 확인을 못했네요. 커피 말고 소주 한 잔 어떤가요? 금요일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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