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오케이, 거기까지
“향은 씨, 그리고 지혜 씨.”
“네, 대리님.”
“어...나 진짜 미안한데, 양해 좀 해줄 수 있나? 나 괜히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하지 말고.”
“뭔데요?”
“나 허리띠 좀 풀고 먹으면 안될까? 안그래도 요즘 갑자기 살이 쪄서 옷이 하나같이 좀 작아졌는데, 지금은 아예 자크가 터질라 그래요.”
양 대리의 말에 다시 한 번 룸 안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이제는 너무 많이 먹어서 배가 아픈 건지, 너무 많이 웃어서 배가 아픈 건지 분간이 안갈 정도다.
정말 많이 웃었고, 또 많이 먹었다.
전무님 카드가 아닌가.
사실 전무님 정도면 우리팀 인원이 몇 명인지도 잘 모르실 거다.
아신다고 해도 크게 문제될 건 없고.
무조건 비싼 걸 먹으라고 하셨다.
그래서 한우를 먹으러 왔다.
내 기준에서 최고 비싼 회식은 단연 한우다.
아예 8인 상이 마련된 룸을 하나 빌려서 불판 두 개로 고기를 구웠다.
그리고 고기를 구워주시는 이모님 두 분께는 각각 2만 원씩 내 사비로 팁을 드리고 우리 먹는 속도에 맞출 필요 없이 그냥 쉬지 말고 구워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평소엔 감탄을 하며 맛을 보는 서비스 선지국.
하지만 오늘만큼은 서비스 음식에 손을 댈 이유가 없었다.
오죽했음 술도 헛배가 불러올 게 걱정돼, 첫잔 소맥을 생략하고 바로 소주로 달리기 시작했을까.
“나 오늘 진짜 먹고 죽으려고.”
그냥 웃자고 하는 소리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양 대리는 진짜 몸을 돌려서 허리띠 버클을 풀어 재빨리 바지 속에 숨어있던 셔츠를 바깥으로 빼어내 앞을 가렸다.
“진짜 못말린다니까! 우리 앞에서나 그렇게 하지, 다음에 선 보는 여자 앞에선 절대 그러지 마세요. 어우...진짜 누가 아재 아니랄까봐...”
“향은 씨도 참...내가 미쳤어요, 선 보는 여자 앞에서까지 이러게. 그리고 뭐 내가 언제 이러는 거 본적 있어요? 오늘은 그냥 뭐랄까...그동안 해왔던 회사생활 보상 받는단 생각으로 먹고 있는 중이야.”
“피...말이나 못하면.”
“우리가 언제 전무님 카드로 회식을 해보겠어, 안 그래? 나 1팀에 있는 동안 전무님 카드로 회식해 본 적 한 번도 없어요. 그래서 지금 기분 좀 그래. 이게 꼭 한우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좀 누려야 할 거 같아. 그러니까 오늘만 좀 이해해줘요. 이모님, 여기 채끝살 두 개씩 더 갖다주세요.”
“그렇게 드셔놓고 더 드시게? 어이쿠...우리야 팔아서 좋다지만, 진짜 너무 많이 드시는데? 그렇게 먹어서 무슨 맛이나 알겠어요?”
“상관없습니다. 회사돈으로 먹는 거거든요. 이럴 때 부위별로 다 먹어보지, 언제 다 먹어보겠어요?”
보상 받는단 생각으로 먹고 있는 중이다...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도 양 대리가 별 생각없이 툭 내뱉은 한 마디가 내 가슴을 때렸다.
사실 난 사원일 때도 그랬고 대리일 때도 장 차장이라는 걸출한 에이스를 팀장으로 모시고 있어서 전무님 카드로 회식을 여러번 해봤다.
“좋습니다. 어디 진짜 배 터질 때까지 한 번 먹어봅시다.”
장향은과 이지혜가 기권을 선언한 상황에서도 나와 양 대리, 그리고 박기태는 미련하리만치 꾸역꾸역, 다시 들어온 채끝살 4인분을 불판 하나로 몰아서 깔끔하게 끝내버렸다.
모두가 숨도 못쉴 정도로 빵빵하게 불러온 배를 부여잡으며 숨을 고르기 시작했고, 그제야 박기태는 소화도 시킬겸 마무리는 시원한 소맥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맥주컵 다섯 개를 나란히 붙여놓고 뚜껑열린 소주를 기울여 미끄러지듯 잔 위를 몇차례 왔다갔다 하며 소주를 채운다.
그리고 카스 로고 가장 아래까지 맥주를 채워 황금비율을 완성시킨 박기태가 그걸 한 잔씩 나눠주며 말했다.
“이거 한 잔씩 하시고 2차 가셔야죠.”
“향은 씨, 지혜 씨 괜찮겠습니까?”
“왜 저한테는 안 물어보십니까?”
양 대리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물어보려고 했거든요?”
“전 무조건 괜찮습니다. 오늘 전무님카드 뽕 뽑기 전까지는 절대 집에 못 들어갑니다.”
“그럴 거 같았습니다.”
“저도 괜찮습니다.”
“저도요.”
“음...그럼 2차는 어디로 갈까요?”
박기태가 잔을 들며 말했다.
“2차 장소는 제가 섭외할테니까, 팀장님. 건배 제의 한 번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런 건 최소 부장님 정도 참석하는 자리에서나 점수 딸 때 하자고 하면 됩니다. 꼴랑 다섯 명 모여서 저녁 한끼 먹는 자리에서 건배 제의는 무슨...”
“점수 따겠다는 게 아니라 진짜 한 말씀 듣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박기태의 표정은 제법 진지했다.
그리고 양 대리와 장향은, 이지혜 역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끼리 쑥스럽게 뭐 이런 걸 시키고 그래요?”
“거 참 어지간히 뜸들이시네, 진짜...그냥 한 마디 해주고 치우세요.”
양 대리의 말에 난 피식 웃음을 흘려놓고 잔을 들었다.
“며칠 전에 제가 손 팀장님과 점심 먹으러 갔던 거 기억하십니까? 그 식사 자리에서 손 팀장님이 저한테 그러시더라고요. 겸손하지마라.”
모두가 잠시 잔을 내려놓으며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직 제가 손 팀장님 만큼의 내공이 없어서인지, 절반은 이해가 되고 또 남은 절반은 이해가 잘 안되더라고요. 그래서 그 절반은 저 스스로 이렇게 이해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럼에도 겸손해라. 그럼에도 우린 겸손해야 하는 사람들인 거 같습니다. 앞으로 영업부 뿐만 아니라 VMD부, 재무부까지 우리 5팀을 눈여겨 보기 시작할 겁니다. 다른 부서들과의 싸움은 제가 할테니, 여러분들은 개개인의 이미지 관리 잘 하시면서 겸손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뭔가 뚜렷한 실적을 올리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런 회식 자리를 제공받는 건 부담입니다. 하지만 이상하게 이 회식만큼은 전혀 부담스럽지가 않습니다.”
“원래 빨간불일 때 건너도 여러사람 손 잡고 다같이 건너면 좀 덜 무서운 법이죠. 하물며 지금 파란불이 들어왔는데, 무서울 게 뭐가 있습니까.”
기가 막히는 비유였다.
양 대리의 말이 맞다.
무서울 게 없었다.
사내 대표 싸움닭 양 대리.
거래 브랜드 업체 킬러 장향은.
그리고 나와는 조금 다른 이유지만 이직이라는 걸 염두에 두고 있어 아쉬울 게 크게 없는 박기태와 정규직 전환이 절실한 이지혜.
술기운이 올라와서일까.
이상하게 이 사람들과 함께 한다면 뭐라도 해낼 수 있을 거 같다는 자신감이 생겨나고 있었다.
“영업 5팀의 대박을 위하여!”
“위하여!”
그리고 다음날.
째깍째깍...
사무실 벽에 걸린 시계 시침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릴 정도로 고요한 사무실 안.
벌써 금요일이다.
그리고 장 차장은 오늘까지 내가 직접 만토바에서 초이스한 브랜드의 본사들로부터 해당 브랜드로 구성된 편집샵을 국내에 오픈해도 된다는 최종 승인을 받아주겠다 장담을 했었다.
다른팀 모두 점심을 먹으러 나갔지만, 우리 영업 5팀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장 차장이 마지막 브랜드업체 본사와 연락중인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12시 15분을 이제 막 지나고 있었다.
마침내 장 차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박 부장도 함께 나왔다.
장 차장은 몇 장의 A4용지를 들고 그걸로 부채질을 하며 걸어오고 있었다.
우리 5팀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박 부장과 장 차장을 맞이했다.
“아직 점심 먹으러 안갔던 거야?”
장 차장의 표정은 가벼웠다.
그리고 우리 5팀을 쳐다보는 박 부장의 표정 역시도 여유로웠다.
“어떻게 됐습니까?”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자, 이거.”
난 장 차장으로부터 건네받은 A4 용지를 자리에서 바로 확인했다.
총 6장이었다.
“...!”
역시 장 차장이란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
브랜드 하나도 아니고 자그마치 대형 브랜드 여섯 군데로부터 승인을 다 받아냈다.
그것도 월요일부터 시작해 단 5일 만에.
그렇게 장 차장은 박 부장을 모시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우와...진짜 장 차장님이 넘사벽은 넘사벽이네요. 한 번 내뱉은 말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키시는 분이라 다 받아내실 줄은 알았지만, 진짜 오늘까지 다 받아내실 거라고는...”
양 대리가 승인된 서류를 확인하며 혀를 내둘렀다.
“그 벽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게 아니라 우리 뒤에 버티고 서있다는 게 중요한 거죠. 자, 우리도 이제 식사하러 갑시다.”
“아참, 공 팀장.”
엘레베이터 복도까지 나갔던 장 차장이 갑자기 할 말이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다시 돌아와 날 불렀다.
“네, 차장님!”
난 서둘러 자켓을 챙겼고, 장 차장이 다가오는 거리를 줄여주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장 차장 앞으로 갔다.
“설마 이대로 편집샵에 그냥 끼워줄 건 아니지? 나크리스 말이야.”
“물론이죠. 같이 붙는 브랜드들 파워가 다 얼만데, 거기에 그냥 끼워줄 수야 없죠.”
“그래.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야.”
“점심 먹고 돌아와서 바로 나크리스 쪽과 접촉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알았어. 점심 맛있게 먹고.”
“네,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점심은 멀리 가지 않고 사내 식당에서 해결했다.
점심을 먹는 동안 당연하다는 듯 미팅이 이뤄졌고.
내일이면 주말이다.
주말을 좀 주말답게 보내기 위해선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럼 점심시간 끝나는대로 양 대리님이 기태 씨 데리고 VMD부 찾아가서 매장 컨셉 요청해주시고, 향은 씨는 퇴근 전까지 물류창고 접촉해서 만토바 시프트 코드 하나 따달라고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지혜 씨는...시킬 수 있는 게 없구나...”
“...?”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지혜를 향해 장향은이 싱긋이 웃으며 말했다.
“현재 지혜 씨가 하고 있는 업무가 그만큼 중요하단 말씀이셔. 다른 브랜드들이랑 한데 섞여서 나크리스가 맥이나 추겠어요? 다른 브랜드들이야 브랜드 파워가 있어서 매장 직원 설명이라는 게 따로 필요가 없지만, 나크리스는 그게 아닐 거 아냐.”
“아, 네...그럼 전 슈즈 품목만 따로 빼서 나크리스 교육 자료 다시 만들어 보겠습니다..”
이지혜를 향해 고개 끄덕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팀장님.”
마치 비밀 이야기를 하듯 다른 사람이 들을새라 목소리를 낮추며 박기태가 물었다.
“아까 차장님이 뭐라고 하신 거예요? 나크리스를 그냥은 끼워주지 말란 소리로 들리던데.”
“말 그대롭니다. 편집샵에 같이 들어가는 다른 브랜드들 인지도가 얼만데 거기에 나크리스를 그냥 끼워줄 순 없죠.”
“이미 나크리스를 넣기로 확정된 거 아닌가요? 전무님 앞에서 프리젠테이션까지 다 끝난 거잖아요. 거기다 나크리스가 안 들어가면 매장 직원들 인센티브나 다른 부분에서 빵구 나는 게 많지 않나요? 무엇보다 컨사인먼트로 받을 수 있는 나크리스 덕분에 편집샵 초도 발주 금액을 6밀리언 대로 낮출 수 있었던 거고...”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양 대리가 대답했다.
“그걸 우리만 알지 나크리스 애들은 모르잖아.”
“...?”
“가진 패를 상대한테 다 보여주고 정직하게 딜을 치는 영업맨이 세상천지에 어딨나, 이 친구야. 기태 씨가 만약에 나크리스 사장이라고 생각해봐. 우리 홍성이랑 한 계약 조건은 이미 끝난 거니까 배제시키고 말이야. 발렌티노, 발렌시아가, 골든구스, 몽클레어...말 그대로 프리미엄 브랜드들만 들어가는 40여군데 편집샵에 나크리스를 같이 넣어주겠다고 하면 기분이 어떨 거 같애?”
“그야 당연히 땡잡았단 생각이 들겠죠.”
“똑같은 내용인데 말을 조금만 바꿔서 어떻게 잘만 하면 넣을 수도 있을 거 같다고 아리까리하게 말끝을 흐린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넣고 싶겠죠.”
“오케이, 거기까지.”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