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
오늘 최고였다
지현이 녀석 결혼식 날 사회를 볼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압박감이었다.
그때도 물론 떨리기는 했다.
하지만 그땐 애초에 하객들은 결혼식 사회에 큰 신경을 안쓴다는 위안이라는 게 있었다.
그리고 결혼식의 주인공은 따로 있었고.
그런데 이사진들 앞에서 하는 프리젠테이션은 날 짓누르는 공기의 무게부터가 달랐다.
마치 내 머리 위로 보름달 하나가 달랑 떠있는 듯한 느낌.
그 달빛 아래 나란 사람만 덩그러니 노출되어 있고, 저 어둠속 각자의 자리를 잡고 앉은 전무님 이하 모든 이사진과 부서장들의 반응은 냉랭하기만 했다.
다들 이런 압박감을 견뎌내고 저 자리까지 올라간 거겠지.
다시금 박 부장과 장 차장의 존재감이 크게 느껴지는 순간.
“...”
그리고 차장 급에선 유일하게 VMD부 고 차장과 함께 자리한 장 차장이 다른 사람들 몰래 날 향해 응원을 보낸다.
단단하게 다문 입술.
코로 숨을 몰아쉬며 하던대로만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장 차장을 향해 나 역시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최선을 다해보겠다 대답했다.
시작도 하기 전에 손에 땀이 맺혔다.
그리고 스탠드 마이크 높이를 조절하는 동안 마치 수전증이 있는 사람처럼 달달달 떨리는 내 손을 보며 긴장은 배가 되고 있었다.
“...!”
순간 눈 앞이 아득해진다.
스크린에 띄운 파워포인트가 춤을 추는 기분이었다.
포인트들이 일제히 울렁울렁 거리기 시작한다.
“지, 지금부터 H.I 슈즈 편집샵 관련 프리젠테이션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잠깐, 공 팀장.”
미팅 테이블 위로 양쪽 팔꿈치를 올려놓고 스텐드 마이크를 턱에 살짝 붙인 전무님.
프리젠테이션을 시작하기도 전에 날 잡아세우셨다.
전무님 말고는 아무도 안 보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네, 전무님.”
“혹시 H.I가 홍성 인터네셔널의 약자인가?”
“네, 그렇습니다.”
“흐음...쓰읍...”
뭘까 저 반응은.
꼭 똥 싸고 뒤를 안 닦은 듯한 표정을 짓는 전무님 덕에 시작부터 간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박 부장 생각엔 저 H.I가 브랜드화 시키기에 적합한 조합이라고 보나? 내가 봤을 땐 별 의미도 없고 브랜드 네이밍에 큰 성의도 없어보이는데...앉아서 이야기해, 앉아서.”
“일단 임의로 H.I라고 정해놓고 구체적인...”
“임의로?”
우와, 대박.
두 눈을 크게 뜨며 진심으로 놀랐다는 표정을 짓는 전무님.
어떻게 자기를 여기까지 불러놓고 ‘임의’라는 표현을 입에 담을 수 있는냐는 듯 상당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런 자리였단 말인가.
비록 사장님은 참석을 하지 않으시지만, 전무님 이하 모든 이사진들이 참석하는 자리라 약간의 빈틈도 보이면 안된다는 건 이미 장 차장을 통해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정도로 팍팍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을 못했다.
정말이지 눈 앞에 반투명 코팅지가 끼어있는 것처럼 모든 시야가 흐릿하게 변해가는 순간.
“임의로라...알았어. 일단 계속 해 봐.”
군대에 다시 가고 싶었다.
그정도로 살벌했다.
난 전무님이 저렇게 날카로운 분인 줄 이번에 처음 알았다.
그리고 상무님이 저렇게까지 건조한 분이신지도 이번에 처음 알았고.
그런데 그 순간 정말 거짓말처럼 한줄기 빛이 장 차장을 비추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날 바라보는 장 차장.
가볍게 두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마치 신경 쓰지말고 자기에게 했던 것처럼 자신감 있게 질러버리라는 사인 같았다.
그리고 난 다시 스크린을 향해 몸을 돌려 잠시 눈을 감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떠는지.
하지만 내가 끝내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 자리라는 거 하나 만큼은 확실했다.
“현 패션 유통 업계의 트랜드라고 할 수 있는 브랜드 편집샵. 과연 이 트랜드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를 놓고 초창기 많은 유통 기업, 패션 기업들이 고민을 하였고, 결국 저희 홍성 인터네셔널은 현 트랜드의 후발주자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미개척 브랜드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개척이 되었지만, 종합이 아닌 슈즈라는 한 아이템에만 집중을 해서...”
“포인트만 들었으면 좋겠는데. 서론이 너무 길다. 다 알고 있는 내용 아냐? 업계 현 상황을 들으러 온 게 아니잖아.”
이번에도 전무님이었다.
살짝 화가났다.
뭔 말만 하면 잘라먹고 앉아 있다.
신입사원 압박 면접을 보는 것도 아니고, 팀원들 다같이 며칠을 고생해서 준비한 프리젠테이션이 아닌가.
오기가 생겼다.
그래서 양 대리에게 다음 화면으로 넘기라고 신호를 보냈다.
포인트만 들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포인트만.
과연 우리팀에서 준비한 프리젠테이션 내용 중 포인트가 아닌 게 뭐가 있을까?
집에서 혼자 미친놈 마냥 백 번 가까이 파워포인트를 넘겨가며 소리내어 연습하고 또 발표 연습을 하지 않았나.
그런데 그 노력이 한순간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한 번 핀트가 나가버리니 머릿속에서 발표 순서가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불안한 눈으로 날 쳐다보는 양 대리.
그리고 난 고개를 돌렸다.
전무님 밖에 안 보였다.
사내 등산 동호회에서 막내라는 이유로 자신이 먹고 있던 자유시간 초코바를 반 잘라 건네주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성공적인 편집샵 브랜드 런칭 하나가 과연 홍성 인터네셔널에 어느정도 파장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라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출발한 아이디어였습니다.”
난 아예 스텐드에서 마이크를 뽑아버렸다.
그리고 그 마이크를 들고 발표 스탠드 뒤가 아닌 스크린 옆으로 서서 전무님만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이미 업계에 브랜드 따먹기 춘추전국 시대는 진작에 끝이 났습니다. 그 춘추전국 시대 최대 수혜자는 단연 홍성 인터네셔널이었고, 또 최대 피해자 역시 홍성 인터네셔널이었습니다.”
전무님이 마이크 목에 손을 올리려고 하는 찰나였다.
난 재빨리 다음 말을 이어버렸다.
“많은 대형 브랜드들이 지사 운영을 선언하며 홍성 인터네셔널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홍성 인터네셔널은 놓쳐버린 대형 브랜드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아직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들을 섭외하며 의외의 매출을 올려내는데 성공했습니다.”
전무님이 입술을 쭈뼛거리며 마이크에서 손을 놓으셨다.
“그때 많은 홍성맨들이 홍성 인터네셔널을 떠났습니다. 대형 브랜드들을 모두 놓쳐버린 홍성 인터네셔널. 떠나는 사람들이 입을 모아 했던 말이 바로 앞으로는 브랜드 직영 지사 기업만이 살아남을 거라는 거였죠. 하지만 의외의 결과가 벌어졌습니다.
자기들이 직접 들어와서 하면 될 줄 알았던 한국 시장. 한국 유통 시장 특유의 장벽을 넘지 못하고 결국 철수를 결정하는 브랜드들이 하나둘 씩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시야가 조금씩 확보되기 시작했다.
전무님의 표정부터 시작해 그 옆에 비어있는 사장석, 그리고 상무님의 표정들이 읽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홍성은 지사가 철수한 브랜드들을 모두 쓸어담으며 브랜드 컨트롤 업계 1위 기업으로 올라서는데 성공을 합니다. 하지만...”
그리고 난 자리에 참석한 모두를 천천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한국 유통 시장의 장벽 마저도 어떻게 하지 못하는 프리미엄 브랜드들은 여전히 지사로 운영이 되고 있죠.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발렌시아가. 우리 홍성이 가질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몇 해 째 계속 장외 홈런만 치고 있는 몽클레어. 저걸 잡아야 되는데...도대체 저 단순한 디자인에 왜 유독 한국인들만 저렇게까지 열광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골든구스. 홍성이 띄우면 더 대박을 칠 수 있을 거 같은데...그 브랜드들을 홍성의 브랜드로 만드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이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편안하게 날 쳐다보는 장 차장과 눈이 마주쳤다.
“해당 브랜드 지사의 매출보다 더 많이 팔아버리면 되지 않을까. 그럼 굳이 그 브랜드들이 인건비, 사무실 임대료, 창고 운영비, 재고처리비, 세금까지 감당하며 지사 운영을 하려고 할까...그냥 유통 라이센스를 넘기고 속 편하게 물건만 보내주면 홍성이 알아서 매출을 확보해줄텐데 말입니다. 슈즈 편집샵 아이디어는 바로 거기서부터 출발이 됐습니다. 홍성 인터네셔널이 가지고 있는 전국의 모든 백화점, 아웃렛의 유통경로를 최대한 활용해서 그들이 뚫지 못하는 곳까지 브랜드를 넣어준다면, 그리고 그렇게 야금야금 지사 기업들의 매출을 갉아먹는다면 언젠가는 기회가 올 거란 확신이 들었습니다.”
“여기 보면 한 브랜드당 평균 1.5밀리언, 한국돈으로 20억 정도 되는 물량을 시즌별로 만토바를 통해 사입을 하겠다...라고 나와있는데, 고작 이거 가지고 해당 브랜드 지사들을 압박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동안 입을 꼭 다물고 있던 상무님의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1991년 9월 9일. 홍성 인터네셔널의 설립일입니다. 사장님과 전무님께서 홍콩 루트를 통해 사필로 아시아 공급자를 섭외하고 당시 돈으로 자본금 1억원 치의 럭셔리 브랜드 선그라스를 국내에 유통시키면서 설립된 회사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홍성 인터네셔널로 키워내신 건 업계의 전설 중에 전설이죠. 당시엔 국내에 브랜드 라이센스 개념이 거의 없다시피 해서 큰 어려움 없이 백화점 뿐 아니라 고급 안경점에도 물건을 공급할 수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때에 비해 브랜드 라이센스 개념은 철저해졌지만, 그때 홍성 인터네셔널이 가지지 못했던 유통 채널이 확보되어 있습니다.”
전무님이 회의의자 깊숙하게 등을 기대는 순간이었다.
“물론 하면 무조건 된다는 확신과 해낼 수도 있을 거 같다는 자신은 분명히 크게 다를 겁니다. 그리고 전 지금 확신이 아닌 자신만 가지고 편집샵 프로젝트를 발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업맨에게 있어 무모할지도 모를 자신은 확신 못지 않은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걸 전 자본금 1억으로 지금의 홍성 인터네셔널을 만들어내신 사장님과 전무님을 통해 배웠습니다.”
“흐음...그런데 말이야.”
회의 의자 등받이 깊숙하게 기대어 스탠드 마이크를 뽑으며 전무님이 말하셨다.
“여기서 내가 궁금한 게, 이렇게 진행을 하면 편집샵에서 팔리는 나크리스 매출은 나크리스 매장으로 잡히는 거야, 아님 해당 편집샵 매출로 잡히는 거야?”
이 역시 날카로운 질문이다.
하지만 이미 재무 리스크팀의 조언을 받아들인 상태.
“복잡한 시스템이 적용되긴 하겠지만, 나크리스 매장으로 매출을 잡을 생각입니다.”
“이유는?”
“강남점 나크리스 매장 임대료는 나크리스 본사가 컨사인먼트 물건 값에서 차감시켜주기로 되어있는 사안입니다. 백화점, 아웃렛 할 거 없이 모두 매출 대비 퍼센테이지로 임대료를 지불하는데, 그걸 굳이 편집샵 매출로 잡아서 저희 홍성이 부담을 할 이유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어차피 어디에서 판매를 하더라도 나크리스 쪽에 컨사인먼트로 지불해야 할 물건값은 동일할테니까요.”
난 장 차장이 저렇게 흐뭇하게 날 쳐다보는 걸 오늘 처음 봤다.
박 부장의 얼굴에도 미소가 걸려있었고, 양 대리는 웃음을 참기 위해 콧구멍까지 벌렁거렸다.
“그리고...”
난 다시 한 번 전무님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편집샵 브랜드 H.I는...임의로 만든 게 아닙니다.”
전무님은 흥미가 돈다는 듯한 표정으로 의자 등받이에 붙이고 있던 상체를 다시 앞으로 숙여 날 바라보셨다.
“의미도 없고, 네이밍에 성의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셔서 속으로 제가 많이 부족하단 걸 인정하면서도 그 부분에 대한 전무님의 오해는 풀어드려야 후회가 없을 것 같습니다. 제 머리로는 H.I 이상의 브랜드 네이밍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홍성 인터네셔널. 전 제가 홍성맨인 것이 진심으로 자랑스럽습니다. 그래서 홍성 인터네셔널이라는 회사 이름이 홍성이 취급하는 명품 브랜드에게 가려지는 것이 항상 아쉬웠습니다. 홍성이 취급하는 브랜드를 말해주면 다들 아...하는 사람들도 막상 그 브랜드를 컨트롤 하는 기업이 홍성이라고 하면 다들 응? 하는 반응을 보일 때면 제가 홍성맨이라는 이유로 자존심이 상할 때가 참 많았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업계 1위 기업인데, 업계 사람들 말고는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입니다. 물론 상당히 단순한 이유지만, 절대 성의가 없는 네이밍은 아니었다는 걸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프리젠테이션이 끝이나고 전무님은 박 부장과 장 차장을 따로 불렀다.
그리고 난 아직 진정이 되지 않는 마음을 억지로 추스르며 양 대리와 사무실로 돌아갔다.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보는 순간 긴장이 모두 풀리며, 온 힘이 발 끝으로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고장난 경운기마냥 달달달 떨렸다.
프리젠테이션은 잘했냐는 장향은의 물음에 과한 포장을 하며 최고였다고 의기양양하게 대답하는 양 대리의 소리가 들렸지만, 그쪽으로 시선을 돌릴 힘조차 없었다.
“괜찮습니까?”
양 대리가 다가와 물었다.
“...네.”
“팀장님?”
“...네.”
“진짜 괜찮습니까?”
“저...아까 전무님한테 너무 공격적으로 말하지 않던가요?”
“...?”
“아...씨바 진짜 큰일 났네. 아까 너무 공격적이었죠?”
양 대리는 자기는 내가 공격적이었다는 걸 잘 못 느꼈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무척 공격적이었다는 걸 난 안다.
왜?
계속 내가 무슨 말만 하려고 하면 내가 하는 말에 트집을 잡길래 살짝 화가 난 상태에서 될대로 되란 식으로 들어오는 질문을 다 받아쳐버렸으니까.
아마 그래서 박 부장과 장 차장만 따로 불려간 게 아닐까 싶다.
그 이유가 맞을 거다.
그리고 잠시 뒤 박 부장과 장 차장의 모습이 보였다.
난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고했어.”
수고했단 말만 남기고 박 부장은 자기 자리로 가버렸다.
그리고 그런 박 부장을 따라가지 않고 우리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며 장 차장이 말했다.
“오늘 너희 회식해야겠다.”
“...?”
장 차장은 내 앞으로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전무님 카드다. 비싼 거 먹으라고 하시더라. 얼마나 비싼 거 먹었는지 나중에 확인해보고 성에 안 차시면 다음부턴 영업부에 카드 주는 일 없을 거라고 하시니까 눈치보지 말고 막 긁어, 오늘은.”
“예쓰!”
“앗싸!”
양 대리와 박기태가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동시에 호들갑을 떨었고, 뜬금없는 호들갑에 깜짝 놀란 장 차장이 양 대리의 팔뚝을 때리며 장난을 걸었다.
“놀래라, 이 자식들아!”
“죄송합니다.”
“아무튼 뭐...공 팀장.”
“네, 차장님.”
“오늘 최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