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33화 (33/325)

# 33

영업 5팀의 팀장, 공은태 입니다

“주재원 근무라...정말 생각도 못했던 카드네요.”

난 양 대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요. 저도 손 팀장님이 주재원 근무를 신청할 거란 말씀을 하셨을 때 겉으로 표현은 못했지만, 살짝 소름이 올라오는 기분이었어요. 확실히 수가 많은 분이세요.”

“그 수를 일할 때 쓰지 않고, 파워게임할 때만 쓴다는 게 문제죠. 겉으로 김 팀장님한테 양보하는 모습을 보여줘놓고, 안으로 챙길 건 다 챙기네요. 진짜 여웁니다, 여우.”

“지키는 것부터 배운 세대 아닙니까, 손 팀장님까지는.”

“그렇죠. 그래서 어쩌실 거예요?”

양 대리의 질문에 난 잠시 입을 다물고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어쩌면 이게 기회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드네요.”

“...?”

“우리가 굳이 김 팀장님 차장 승진에 모든 초점을 맞출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손 팀장님한테는 브랜드 몇 개 김 팀장님한테 밀어주겠다고 약속하셨다면서요?”

“그야 브랜드 몇 개 추려서 주면 되는 거고요. 우리 입장에서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한 부분이겠습니까.”

“하긴...할 수만 있다면 정말 나크리스 빼놓고는 다 가져가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네요.”

“미팅 한 번 합시다. 회의실에서 기다릴 테니까, 양 대리님이 팀원들 좀 데리고 와주세요.”

두 시간에 걸친 미팅.

나크리스를 제외한 현재 영업 5팀이 가지고 있는 모든 브랜드들을 도마 위로 올려놓고 하나하나 세밀하게 분석했다.

잘 둬야하는 수다.

어쩌면 지금 두는 이 수로 인해 앞으로 영업 5팀은 물론이고 나의 팀장 이미지까지 결정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계탕 한 그릇 얻어먹고 호구짓을 하느냐, 아님 숨기고 있던 발톱을 보여주느냐의 차이였다.

물론 내가 선택할 답은 뻔하게 나와있는 상태였고.

“팀장 달고 1년 만에 공 팀장이 팀장 실세 되겠네.”

미팅 중간중간 삼계탕집에서 손 팀장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겸손하지마라.”

그래, 난 아직 겸손할 자격이 다 갖춰져있지 못한 사람이다.

대신 뭔가를 요구할 자격은 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에겐 자격이 있었고, 영업 5팀에겐 명분이 있었다.

미팅을 끝내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을 땐 이미 오후 3시 반.

난 곧바로 미팅 결과를 가지고 장 차장을 찾았다

파티션을 가볍게 노크했다.

박 부장과 장 차장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난 재빨리 박 부장에게 먼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장 차장 앞으로 걸어갔다.

“왜? 무슨 일이야?”

“부탁드릴 게 좀 있습니다, 차장님.”

장 차장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듣고 있을테니 계속 말을 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저기, 이거...확인 한 번만 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이게 뭔데?”

난 미팅 내용이 정리된 서류를 장 차장 앞으로 내밀었다.

보던 서류를 내려놓고 내가 건넨 미팅 관련 서류부터 살피기 시작한 장 차장.

무척이나 꼼꼼하게 확인했다.

그리고 확인을 하는 중간중간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무슨 생각으로 그나마 영업 5팀에서 매출을 만들어내고 있는 브랜드 두 개를 이 목록에 올려놓았냐는 듯 날 쳐다봤다.

“이게 뭐야...설마 지금 이 두 브랜드를 버리겠다는 건 아니지?”

“아뇨, 아닙니다. 버리겠다는 게 아니라 영업 5팀에의 역할이 끝난 브랜드란 판단이 돼서 차장님의 조언을 좀 듣고자 정리한 겁니다.”

박 부장이 옆에 있으니 장 차장을 위해서라도 이건 어디까지나 영업 5팀의 결정이라는 걸 확실하게 보여줘야 한다.

장 차장이 미간을 좁히며 날 쳐다봤다.

“영업 5팀의 역할이 끝난 브랜드다? 그건 또 무슨 말이야?”

“현재 영업 5팀내 매출 1,2위 하고 있는 브랜드들입니다. 물론 어차피 다 다른팀에서 짬처리 되어온 브랜드들 사이에서 영업 5팀 매출 1,2위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만...어쨌든 이정도 매출까지 회복을 시켜놨으면 이제 다른팀으로 다시 돌려보내도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표정은 최대한 공손해야 했다.

살짝 미소를 지으며 박 부장을 쳐다봤다.

박 부장이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낀채 의자 등받이 깊숙히 몸을 기댔다.

대놓고 나와 장 차장의 이야기를 듣겠다는 뜻처럼 보였다.

“허락만 해주신다면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

“안될 브랜드는 당연히 버려야 하겠지만, 버리기로 결심하기 전에 다시 한 번 마지막으로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그런 브랜드들도 처음엔 다 잘 될 거란 기대를 가지고 시작을 했던 브랜드들 아니었겠습니까. 브랜드가 제대로 뜨지 못한 데에는 브랜드 자체 문제도 있겠지만, 그걸 제대로 띄우지 못한 저희 홍성의 책임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이건 그렇게 감성적으로 접근할 내용은 아니고...”

“네, 알고 있습니다. 다만...그렇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보고 살릴 수 있는 건 살려서 다른 팀으로 다시 돌려주고 또 그래도 안되는 브랜드는 버리도록 하겠습니다.”

“흐음...”

“그렇게 저희 영업 5팀도 앞으로는 다른팀들과 마찬가지로 다른팀에서 짬처리 된 브랜드가 아닌 저희가 선택한 브랜드들로 채워나가보고 싶습니다. 나크리스를 시작으로 편집샵 프로젝트까지...이제 짬처리 전담팀이라는 이미지는 벗어던질 때가 된 거 같습니다.”

난 다시 한 번 박 부장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난 그런 박 부장의 노골적인 눈빛에 주눅들지 않고 준비한 다른 보고서를 하나 더 장 차장에게 건넸다.

“짬처리 전담반은 무슨...근데 이건 또 뭐야? H.I샵 브랜드 구성?”

“이번에 만토바에서 초이스 한 브랜드 외에 나크리스 슈즈도 편집샵에 함께 넣어보고 싶습니다.”

“...!”

허를 찌르는 공격.

나보다 강한 상대들이다.

더이상 예전처럼 미련하게 정공법만 고집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상대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변초들을 섞어보기로 했다.

“현재 나크리스는 강남점 한 곳 말고는 없습니다. 거기서 올릴 수 있는 매출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어차피 나크리스 쪽에서도 한국에 나크리스 브랜드를 노출시킬 이미지 샵이 필요했던 거지 강남점 한 곳에서 올라올 매출엔 큰 관심이 없을 걸로 예상합니다. 그러니 마진 베이스를 저희가 원하는 쪽으로 다 양보해준 거 아니겠습니까?”

“흐음...”

“기회가 좋지 않습니까. 컨사인먼트에 마진 베이스만 놓고 보면 만토바 보다 더 좋습니다. 팔려면 마진 좋을 걸 팔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생각할 시간을 줘야한다.

진짜 결정타는 상대가 흔들리는 타이밍에 쇄기를 박기 위해 날리는 거니까.

“나크리스 단독 매장 수를 늘여가는 건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아무리 컨사인먼트라도 강남점을 제외하고는 단독 매장을 더 열어봤자 절대 손익분기점 못 넘깁니다. 하지만 편집샵 안에서 골든구스, 발렌티노, 발렌시아가, 몽클레어, 지미추랑 어깨를 나란히 하게끔 깔아버리면 말이 달라지겠죠.”

“...!”

“가방을 팔든, 신발을 팔든, 옷을 팔든 매출만 나와주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처음 계약할 당시 나크리스 쪽에서 제안한 매출 커트라인이 있었습니다. 그 매출 커트라인을 넘기면 자체 마케팅 비용을 마진에서 차감시켜줄 수도 있다는 뉘앙스를 흘리더군요. 물론 그쪽에선 저희가 자신들이 제안한 매출 커트라인을 넘겨봤자 얼마나 넘길까 큰 신경도 안쓰고 있을 겁니다. 딱 세 배 초과시켜서 마케팅 비용으로 마진 5퍼센트 더 내려보겠습니다.”

“흐음...”

“남들과 다른 걸 원하는 사람들에겐 나크리스같은 개성있는 브랜드만큼 잘 먹히는 브랜드도 찾기 힘들죠. 전 된다고 확신합니다. 편집샵으로 예상하는 매장수가 전국 주요 포인트 40군데 입니다. 안깔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리고 결정타.

“편집샵 브랜드 구성에 나크리스가 포함되면 나크리스가 깔리는 만큼 저희가 만토바에 해야 할 주문량은 줄어들 거 아닙니까.”

“...!”

“8밀리언이 아니라 7밀리언, 6.5밀리언으로 시작할 수 있는 사업으로 프리젠테이션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크크크...푸하하하...공 팀장 저거 진짜 물건이네.”

박 부장이 말했다.

“야, 이 놈아. 아무리 그래도 양심이라는 게 있지, 그 매장 40군데에 다 깔려면 나크리스 쪽에 물건을 얼마나 공짜로 받아다 깔아야 되는지 몰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홍성과의 계약은 나크리스 쪽에서 먼저 원했던 거 아닙니까.”

“우와, 진짜 뻔대네. 그렇게 쥐어짜내면 마른 오징어에서도 물 떨어지겠다.”

“대신 또 그만큼 팔아주도록 하겠습니다.”

“나크리스 애들 우는 거 아냐?”

박 부장의 장난 섞인 한 마디에 그제야 장 차장의 얼굴이 부드럽게 펴졌다.

그리고 말했다.

“그 편집샵에 나크리스도 함께 들어간다고 하면 다른 브랜드들에서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게 분명한데...”

물론이다.

명품이 괜히 명품이겠나.

자기네 역사와 이미지를 상품으로 파는 애들인데, 나크리스가 한 매장안에 같이 들어간다고 하면 누가 좋아라 하겠나.

하지만 그건 내가 신경 쓸 부분이 아닌 게 분명하다.

“브랜드 업체 컨펌은 차장님께서 책임지고 받아준다고 하셨잖습니까. 책임지고 받아줄테니까 다른 거 신경 쓰지말고 브랜드 초이스만 확실하게 하라고...”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박 부장을 쳐다보는 장 차장.

박 부장 역시 만족스런 미소를 얼굴에 걸어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장 차장아.”

“네, 부장님.”

“재무 리스크팀 연락해서 디테일 한 번 잡아줘라. 방금 공 팀장이 말한대로 해서 전무님 프리젠테이션 한 번 하자.”

“네, 알겠습니다.”

“공 팀장.”

“네, 부장님.”

“프리젠테이션 준비 확실하게 해.”

“넵!”

하나의 프로젝트가 진행되기 위해선 무조건 된다고 하는 쪽과 무조건 트집부터 잡고 보는 쪽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먼저 펼쳐지는데, 반드시 여기에서 가뿐하게 이겨내야만 한다.

그게 시작이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라는 최종 컨펌이 떨어지기도 전에 아이템을 선정, 팀 경비로 시장조사를 하고, 들어갈 투자비용과 올라올 매출, 매장운영 고정비에 재고처리 방법 등을 꼼꼼하게 챙기는 건 무조건 트집부터 잡고 보는 재무 리스크팀과의 줄다리기에서 이기기 위함이다.

다음날 장 차장이 참석한 자리에서 나와 양 대리는 재무 리스크팀을 상대로 슈즈 편집샵 프로젝트에 A등급을 받아낸다.

쾅!

A등급이 떨어지는 순간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내야했던 재무 리스크팀은 얼굴을 싹 바꿔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게 된다.

영업팀 최고의 지원자가 되는 셈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넘어야 할 산.

나크리스처럼 매장 하나 오픈하는 게 아니다.

전국 40개 매장에, 그것도 홍성 자체 브랜드를 오픈하는 일이다.

며칠 뒤 전무님이 직접 참석한 자리에서 상무, 이사진들 이하 전 부장들이 다 참석한 자리에서 슈즈 편집샵 프로젝트 프리젠테이션을 하게 된다.

“안녕하십니까, 영업 5팀의 팀장, 공은태 입니다.”

반응이 차갑다.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을 향해 내 소개를 하고 고개까지 숙이지만 반응은 냉랭하기만 했다.

이사진 앞에서는 처음 해보는 프리젠테이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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