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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32화 (32/325)

# 32

겸손하지마라

“공 팀장.”

11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영업 2팀 손 팀장이 우리 사무실을 찾았다.

파일철 하나를 손에 들고 들어왔는데, 아무래도 우리 사무실을 찾은 이유와는 별 상관이 없는 파일철 같았다.

“네, 손 팀장님.”

난 하던 업무를 잠시 멈춰놓고 자리에서 있어났다.

“점심때 약속 있나?”

“오늘요?”

“응.”

“아뇨, 딱히...그냥 팀원들이랑 다같이 사내식당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마침 오늘 메뉴도 괜찮은 거 같아서...”

“나랑 나가서 먹자.”

“네?”

“날도 더운데 몸 보신도 할 겸 나랑 같이 삼계탕이나 한 그릇 하러가자.”

양 대리가 눈알만 살짝 돌려 손 팀장을 견제했다.

물론 서 있는 위치상 손 팀장은 양 대리의 견제를 눈치채지 못했을 거고.

이건 또 뭘까...

분명 뭔가가 있는 거다.

“둘이서만요?”

“할 이야기도 좀 있고.”

손 팀장이 돌아간 후 기다렸다는 듯 양 대리로부터 사내 메신저 쪽지 하나가 도착한다.

-고래 싸움에 등 터집니다.

쪽지를 확인한 후 양 대리와 눈을 마주쳤다.

백 마디 말보다 양 대리는 단단한 표정 한 번으로 자신의 염려를 대신 전달했다.

그리고 난 그런 양 대리에게 답장을 보냈다.

-전 새우가 아니라서요.

그제야 양 대리는 안심한다는 표정으로 다시 하던 업무에 집중했다.

그렇게 손 팀장과 삼계탕을 먹으러 갔다.

회사 근처에도 삼계탕 전문점이 두어군데 있는 걸로 아는데, 손 팀장은 굳이 길 건너 번화가 쪽에 있는 삼계탕 집으로 날 데리고 갔다.

아마도 회사 사람들과 마주칠 확률이 적은 식당을 선택한 것이겠지.

전복 삼계탕 두 그릇을 시켜놓고, 먼저 서비스로 나온 인삼주병을 만지작거리며 손 팀장이 물었다.

“소주 한 잔 안할래?”

“먹고 들어가서 일해야죠.”

“한 병만 시켜서 나눠먹자.”

“그냥 서비스로 나온 이거나 한 잔씩 하시죠.”

난 인삼주가 든 병을 들어 작은 사기 술잔에 따르려고 했다.

그런 날 막아세우며 손 팀장이 말했다.

“밍밍해. 한 병만 시키자. 공 팀장 신입 때 기억 안나? 왜 지금처럼 회사 분위기 싹 다 바뀌기 전엔 가끔씩 점심 먹으러 나가서 반주도 한 잔씩 하고 그랬잖아.”

“그렇네요. 그럴 때도 있었네요. 저희는 장 차장님이 당구에 빠지셔서 점심 시간만 되면 남자 직원들끼리 당구장 가서 짜장면 시켜먹고 그랬었는데.”

“내가 신입 땐 박 부장님이 우리 팀장님이었거든.”

“네,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때 부장님이 사우나를 그렇게 좋아하셨단 말이야. 난 일주일에 두세 번은 점심 때 부장님 따라 사우나 가고 그랬어. 지금 생각하면 그게 또 그때니까 할 수 있었던 직장생활의 낭만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그러게요. 이모님. 여기 진로 새로 나온 거 있죠? 그거 한 병만 주세요. 시원한 놈으로다가.”

불편한 마음 반, 궁금한 마음 반이었다.

삼계탕이 나오기 전 미리 깔려있는 밑반찬과 소주 한 잔씩을 나눠 마셨다.

“크흐...어때? 일은 좀 할만 해?”

“그냥 그렇죠 뭐.”

“그냥 그렇긴 뭐가 그냥 그래? 요즘 뭐 훨훨 날아다니고 있으면서. 비결이 뭐야?”

풋고추를 안주삼아 쌈장에 찍어 한 입 베어먹으며 손 팀장이 물었다.

“무슨 비결요?”

“어떻게 그 짧은 시간 안에 팀을 그렇게까지 단단하게 만들어냈어?”

“그런가요? 전 잘 모르겠는데...”

“겸손은...사실 공 팀장은 잘 모르겠지만, 처음 영업 5팀 맨파워 발표 났을 때 나 포함해서 팀장들 모두 공 팀장이 상당히 고생을 할 거라고 걱정 했었거든. 쓰레기 브랜드 짬처리 시키려고 공 팀장을 승진시켰구나...하면서. 거기다 양 대리가 어디 좀 별나?”

“별나긴요. 순합니다, 양 대리.”

“순하긴...지나가는 개가 웃겠다. 공 팀장이 제대로 휘어잡았으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지, 양 대리 그 친구 김 팀장님 밑에 있었을 때 기억 안나?”

난 그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 팀장이 원샷을 때릴때 반만 잘라먹었던 소주를 마저 입 안으로 털어넣었다.

“하긴, 공 팀장이라면 충분히 컨트롤 할 수 있을 거라 믿었으니 부장님이나 장 차장이 공 팀장을 팀장으로 올렸던 거겠지. 그정도 사람 보는 눈이 없으니 나나 김 팀장님은 여지껏 팀장인 거고.”

비어있는 손 팀장의 소줏잔에 술을 따라놓고 내 잔에 술을 채우는 동안 주문한 삼계탕이 나왔다.

“먹자.”

“네,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돌솥에 담긴 닭을 빈 접시에 옮겨담으며 손 팀장이 이런 말을 한다.

“왜 저번에 우리팀 이 대리가 실수 한 번 했던 적 있잖아. 이지혜 트레이닝 가는 일 때문에 말이야.”

“에이, 뭐 이미 다 지나간 일을 왜 또 꺼내고 그러십니까.”

난 그저 웃음으로 당시 서로가 불편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나 사실 말은 안했는데, 그때 양 대리가 그렇게까지 눈에 칼을 달고 공 팀장 커버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이 대리도 뭐 잘한 건 없지만, 그렇게까지 생각이 없는 친구는 아니잖아. 그냥 뭐 우스갯소리로 영업 5팀 직원들 다 있는데 공 팀장만 자리에 없고 해서 아직까지 공 팀장이랑 양 대리가 사이가 좀 서먹서먹한 줄 알고 농담 비슷하게 던진 말이었는데, 양 대리가 그렇게까지 정색을 해서 얼마나 놀랐다고.”

“그랬나요?”

“속으로 부럽더라, 사실. 과연 이 대리는 나 없는 자리에서 양 대리처럼 해줄 수 있을까...”

“에이, 당연히 하죠.”

“글쎄, 그게 과연 쉬운 일일까? 김 팀장님과 나 둘 중 하나는 차기 차장으로 올라간다는 게 기정사실화 되어있는 상태에서 운이 좋아 내가 먼저 차장 타이틀을 거머쥘 수도 있는 일인데, 그런 내가 앞에 있는데서 그렇게 정색을 하며 자기 팀장 커버치는 거...난 아무나 못하는 거라고 봐. 이건 성격하고 상관이 있는 게 아니라 양 대리가 공 팀장을 그만큼 생각을 하고 있단 말이거든. 부럽더라고.”

“말씀 듣고보니까 또 그렇네요. 조만간 양 대리 따로 불러서 술이라도 한 잔 사야겠습니다. 하하하...”

손 팀장의 입에서 차기 차장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난 어떻게해서라도 깊게 관여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 더 없는 미소를 만들어내며 최대한 능구렁이처럼 굴었고.

“거기다 그 맨파워로 나크리스까지 깔끔하게 런칭시켜버리고 말이야.”

“저희가 한 건가요, 그게 어디. 나크리스 본사에서 인테리어 비용까지 다 대주고, 저희는 그냥 교통정리만 한 게 전분데요, 뭐.”

“그 교통정리를 그 맨파워만 가지고, 그것도 다른 브랜드들까지 다 끌고가면서 그정도로 깔끔하게 해내는 건 사실 쉬운 일이 아니지,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에이, 아닙니다. 막상 시작해...”

“겸손하지마라.”

“...!”

“오래 전 박 부장님께서 나한테 해주셨던 말씀이야. 겸손하지마라. 그때 내가 조금이라도 똑똑했었다면 그게 무슨 뜻이었는지 이해를 했을텐데, 아니 그때 내가 조금이라도 단단했었더라면 그렇게 했었을텐데...”

“...?”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누구라도 한 번의 전성기는 맞이한다. 그게 사원일 때든, 아님 대리일 때든, 팀장일 때든...누구라도 한 번은 전성기가 있어.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한테 제 2의 전성기라는 건 없지. 최소한 한 직장 안에서는 말이야.”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었다.

“나 처음 팀장 달았을 때, 딱 지금 공 팀장이랑 상황이 비슷했어. 막내 팀장이긴 해도 영업부 전체 실세가 박 부장님이셨거든. 팔은 안으로 굽어. 절대 바깥으로 굽을 수가 없어. 장 차장도 마찬가지다.”

“...그럴까요?”

“당연하지. 그때 막 나한테 이것저것 기회들이 찾아왔단 말이야. 부장님께서 이 브랜드, 저 브랜드 주시면서 해보라고...근데 내가 그때 실수를 했어.”

“...”

“그게 부담스럽더라고. 박 부장님 라인을 타서 실력도 부족한데, 거기다 팀장 막내인데 알짜 브랜드만 맡게 되는 거 같고, 나 때문에 내 위로 있는 다른 팀장들이 피해를 입는 거 같고...그때 겸손하지 말았어야 했어. 왜? 당시 난 겸손할 수 있는 실력이 아니었거든. 그냥 나한테 주시는 브랜드들을 다 받아먹으면서 전성기를 최대한 이어가야 하는 거였는데, 내가 그걸 못했어.”

“흐음...”

“그러는 사이 장 차장이 하나씩, 하나씩 내 기회들을 가져가더라? 그리고 이건 좀 아닌 거 같단 생각이 들었을 땐, 내가 달라고 해도 장 차장한테 밀리게 되더라고. 결국 난 겸손이라는 주제넘는 짓을 하느라 내 팀원들만 손해보게 만드는 무능한 팀장이 될 수 밖에 없었고. 겸손은 실력이 갖춰진 다음에 하는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잔소리를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공 팀장은 나처럼 되지 말라고.”

“손 팀장님이 뭐가 어때서요.”

“지금 내가 뭐 어거지로 발악을 해본들, 장 차장이 김 팀장님 차장 만들겠다고 저렇게까지 밀어부치는데 어디 용 빼는 재주가 있겠어?”

“그래도 박 부장님이 계시는...”

“에휴...영업이사 계약 들어가면 그때부턴 진짜 회사 사람 되시는 거지, 지금처럼 살펴주실 여력이나 있으시겠어? 그래서 말인데 공 팀장.”

“네.”

“나 부탁 하나만 하자.”

난 침묵을 지켰다.

대답을 피하는 날 잠시 쳐다보던 손 팀장.

그는 직접 자신의 술잔을 채워놓고 입을 열었다.

“지금 신발 편집샵 진행하면서 가지고 있는 브랜드들 중에 버릴 브랜드 추리고 있지?”

“...네.”

“버리지말고 다 가지고 가.”

“...?”

“그리고 진짜 미안한 말인데, 현재 가지고 있는 브랜드 중에서 매출 좀 괜찮게 나오는 브랜드 두어개 정도 김 팀장님한테 넘겨주면 안되겠어?”

뭔 소리지?

잠시 헷갈렸다.

그 브랜드를 자기한테 달라는 것도 아니고 김 팀장한테 밀어주라고?

난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같이 김 팀장님 밀어드리자.”

“손 팀장님...”

“팀장들이 차장 진급에 무슨 힘을 쓸 수 있겠냐만, 일단 현재 1팀 같은 경우는 맨파워 대비 매출이 부족한 게 사실이잖아. 그것만 좀 채워지면 김 팀장님 차장 진급은 나만 손 빼면 크게 어려울 건 없을 거 같고...그렇다고 공 팀장도 알겠지만 우리 2팀에서 브랜드 빼주는 것도 너무 속보이잖아. 어차피 영업 5팀은 당분간 나크리스에 집중해야되고, 또 편집샵 프로젝트까지 걸려있어서 가지고 있는 브랜드들 다 핸들링 못하잖아. 공 팀장한테는 명분이 있는데, 다른팀 팀장들한테는 그 명분이라는 게 없어. 거기다 부장님도 공 팀장한테 안될 브랜드 몇 개는 과감하게 버리라고 하셨고.”

“...”

“좀 될만한 걸로 몇 개 김 팀장님한테 밀어주면 안돼? 승진기간 다가와서까지 김 팀장님이 뭔가 보여주지 못하면 차장 자리 다른 부서에서 폭탄 떨어질 수 있어. 어차피 5팀 입장에선 편집샵 다 오픈하기만 하면 지금껏 공쳤던 성과급 뻥하고 터질 거 분명하고.”

“이유를 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지난주에 공 팀장 만토바 출장 가 있는 동안 김 팀장님이랑 술을 한 잔 했어. 어머니 장례 치룰 때도 그랬고, 어쨌든 술은 한 잔 사야될 거 같더라고.”

“...”

“난 그냥 곧바로 부장 달아버리려고. 크크크...”

뭐라는 거야?

소주 몇 잔에 벌써 취했나?

“부장님 계실 때 말씀드려서 중국 주재원 근무나 한 번 하고 들어올까 싶어.”

“...!”

“어차피 주재원 가면 한 직급 승진 시켜서 보내주잖아. 어머니 살아계셨을 때야 나나 집사람이 한국에 안 붙어있으면 안되는 상황이니까 어쩔 수 없이 김 팀장님이랑 지지고 볶았던 거지, 사실 나라고 김 팀장님 사정 모르겠어?”

“흐음...”

“이참에 우리 딸래미 중국어 공부도 좀 시킬 겸 말이야. 인간적으로 4년 정도 차장 달고 주재원 생활 하고 돌아오면 해외사업부 부장 자리 하나 정도는 주겠지. 김 팀장님 사모님 셋째 가지셨다는데, 김 팀장님이 주재원 근무 가실 수는 없는 거 아냐, 그렇다고 장 차장한테도 한 번 밀렸는데, 나한테까지 밀려서 내 밑에서 계속 일하실 수도 없는 거고, 솔직한 말로.”

“...그건 그렇죠. 근데 중국 주재원 근무가 하고싶다고 다 시켜주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 정도는 박 부장님이 알아서 다 해주실거야. 안그래도 나랑 김 팀장님 때문에 머리가 아프실텐데, 내가 먼저 말씀드리고 고민거리 하나 덜어드리는 거지.”

“...”

“그동안 부장님한테 받기만 했지, 보답해드린 게 아무것도 없더라고. 이참에 마음이라도 좀 덜 불편하게 해드리고 싶어. 도와줄 수 있겠어?”

난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고민해볼 이유가 전혀 없는 부탁이었다.

손 팀장 말대로 현재 영업 5팀이 가지고 있는 브랜드들 중 쓸만한 브랜드는 하나도 없다.

다 고만고만한 브랜드들.

그나마도 내가 떠안고 악착같이 매출을 쥐어짜내고 있으니 망정이지, 안그랬음 진작에 다 회사로부터 패널티를 받았어야 하는 브랜드들이다.

다행히 그 중에 몇몇 브랜드는 김 팀장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 팀에선 성과급 커트라인을 넘길만큼 매출이 올라오는 브랜드는 아니지만, 이미 성과급 커트라인을 넘기고 있는 김 팀장님 입장에선 단돈 1원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브랜드가 몇 개 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맙다, 공 팀장.”

“고맙긴요. 오히려 손 팀장님께서 이렇게 교통정리를 해주시니 제 마음이 한결 더 가벼워졌습니다.”

“그래, 알게 모르게 나랑 김 팀장님 사이에서 다른 팀장들도 좀 그랬을 거야. 그치?”

“좀이 아니라 많이요. 하하하.”

“하하하...근데 5팀 직원들 사이에서 말 안나올까? 은근히 걱정되네.”

“양 대리야 김 팀장님이랑 오래 했잖습니까.”

“그렇지.”

“향은 씨는 뭐 그런 거 신경 안쓰는 사람이고, 나머지 기태랑 지혜는...아무 생각이 없을 겁니다.”

“그래, 오늘 여긴 내가 살게.”

“회사 앞에 시골밥상 새로 생겼던데, 괜찮더라고요. 다음에 거기서 제가 한 번 사도록 하겠습니다.”

“부럽다, 공 팀장...진짜.”

“...?”

“김 팀장님 차장 달고, 나 해외사업부로 빠지고 나면 팀장 달고 1년만에 공 팀장이 팀장 실세 되겠네. 신발 편집샵 건만 무난하게 성공시키면 말이야.”

“에이, 말도 안됩니다. 3팀에 이 팀장님도 계시고...”

“아까 내가 말했던 것처럼 겸손하지말고, 장 차장이 던져주는 기회 하나도 흘리지 말고 다 받아먹어. 안 그럼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한테 금방 따라잡힌다. 원래 팀장 실세쯤 되면 그때부턴 위에 있는 차장, 부장이 아니라 겁 없이 치고 올라오는 실력있는 후배들이 더 무서운 법이야. 오히려 차장, 부장은 실력있는 팀장있음 딴 회사 못가게끔 어떻게든 잡아두려고 큰 소리도 못 쳐, 더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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