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기분이 좀...이상했다
월요일 아침.
만토바 출장 보고서를 만들기 위해 평소보다 조금 일찍 출근을 했다.
원래라면 주말을 이용해 보고서를 만들고 월요일 아침 출근과 동시에 사내 메신저를 통해 박 부장과 장 차장에게 보고서를 보낸 다음 출력을 해서 갖다올렸겠지만, 이상하게 귀찮았다.
주말을 좀 주말답게 쉬고 싶었다고 할까?
일종의 일탈을 한 번 해봤다.
그정도 배짱이 생기더라.
데이트 약속까지 깨가며 다녀온 출장이 아닌가.
비행기가 한 번 연착이 되는 바람에 토요일 밤 11시에 인천에 떨어졌다.
주말까지 반납한 출장.
무엇을 위해 그렇게 애를 써야하나 하는 현타가 찾아왔던 거 같다.
일요일엔 강혜선을 만나고 싶어서 연락을 해봤지만, 반응이 영 뜨뜨미지근했다.
분명 마땅히 잡힌 약속은 없어 보이는데,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금요일 영화 데이트 약속을 깬 날 만나겠다고 일요일을 할애하고 싶지는 않은 눈치였다.
자기도 피곤하겠지.
그 피곤을 느낄 정도로 아직까지 내게 뭔가 확실한 느낌이 없는 거거나.
급하게 가고 싶지는 않았다.
천천히 최선은 다하되, 안될 인연을 억지로 구걸하듯 만들고 싶은 마음은 나 역시 없었으니까.
그렇게 일요일을 맞이했는데, 보고서를 만드려고 컴퓨터 앞에 앉으니까 진짜 하기가 싫더라.
이 좋은 날씨에 좁은 원룸에 쳐박혀서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하는 생각에 만사가 다 귀찮아졌다.
그런데 또 뭐에 홀린듯 창문과 현관문을 활짝 열어놓고 집안 대청소를 했다.
변기까지 빡빡 닦고.
그러다 보니 반나절이 후딱 지나갔고, 여전히 보고서를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가진채 또 뭐에 홀린듯 장을 보러 나갔다.
장을 보러 나갔는데, 저 앞에 새로 생긴 커피숍이 참 예뻐 보이더라.
그래서 슬리퍼 차림으로 또 그 커피숍에 들어가 커피를 한 잔 시켰다.
그리고 일광욕을 하듯 야외 테라스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시다 보니 오늘은 그냥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보고서를 안만들었다.
침대에 누워 잠에 들기까지 보고서라는 압박감을 간직한채, 그럼에도 보고서를 만들기 위해 책상 앞에 앉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사실 박기태한테 만들어보라고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지시를 내릴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생각했던 이직을 미룰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당연히 생각이 많아졌을 거 같아 그냥 내가 만들테니 걱정말고 쉬라고 했었다.
아무튼 그래서 조금 일찍 출근을 했다.
10시까지만 만들어서 올리면 되지 않겠나.
왜 보고서를 안만들었냐고 물으면 미안하다고, 최대한 빨리 만들어 올리겠다고 하면 되는 거고.
윗 사람들에게 성실에 대한 점수 좀 깎이는 걸 왜 그렇게 무서워했는지 모르겠다.
사람이 몇 년 간 회사일 하다보면 성실하지 못한 순간도 생기지 않겠나.
그 성실로 매겨지는 점수보다 실적이 가져다주는 점수가 훨씬 더 크다는 걸 분명 알고 있음에도, 그놈의 성실이 회사에 대한 충성도의 평가 기준이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모두가 한 번씩은 놓아버리는 그 성실을 난 뭘 위해 그동안 그렇게도 악착같이 잡고 있었는지...
“팀장님 일찍 출근하셨네요?”
역시 이지혜가 가장 먼저 출근을 했다.
난 손만 살짝 들어 인사를 받아준 뒤 손가락이 안 보일 정도로 자판기를 두드렸다.
확실히 사람은 시간에 쫓길 때 초능력이 나오는 모양이다.
평소 보고서를 작성할 땐 단어 하나를 가지고도 몇 분 이상 고민을 하던 내가 아닌가.
그런데 막상 월요일이 오고 장 차장, 박 부장의 출근 시간이 다가오자 마치 손가락에 모터가 달린듯 보고서가 줄줄줄 써내려져갔다.
중간, 중간 그 내용을 읽어봐도, 평소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던 보고서와 퀄리티 상에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안녕하십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그리고 출근한 박기태.
난 이지혜 때와는 달리 잠시 하던 작업을 멈추고 박기태를 쳐다봤다.
다행히 편안해 보였다.
“못 보던 넥타이네요?”
“아, 네...저 이 회사 처음 입사했을 때 아버지께서 선물로 사주셨던 겁니다.”
“음...”
“이거 매고 첫 출근을 했었는데...오늘따라 이걸 매고 싶더라고요.”
“잘 어울린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 다시 빛의 속도로 키보드 위에서 손가락을 움직였다.
분명 평소 같았음 출근과 동시에 보고서를 만들어야 하는 이런 장면을 만들지도 않았을 뿐더러 피치 못해 시간에 쫓겨가며 보고서를 만들어야 될 일이 있으면 쫓기는 마음만큼 뭔가가 상당히 불안했을텐데, 의외로 상쾌한 기분까지 들었다.
“지혜 씨.”
“네, 선배님.”
출근한 장향은이 이지혜를 부른다.
그리고 곧 양 대리가 출근을 할 거라고 말한다.
“엘레베이터에 사람이 많아서 내가 먼저 올라왔거든. 나 탕비실 가서 양 대리님 마실 커피 준비할테니까, 혹시 커피 내리러 가시면 그냥 자리에 앉아서 기다리라고 전해줘요.”
“네.”
순간 난 뭘 잘못 들었는 줄 알았다.
양 대리가 마실 커피를 왜 장향은이 타지?
겉으로 말은 안했지만, 실실거리는 웃음을 흘리며 탕비실로 향하는 장향은의 모습이나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양 대리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이지혜의 모습은 결코 정상이 아니었다.
“뭐...”
이지혜에게 무슨 일 있었냐고 물으려는 찰나!
양 대리가 출근을 했다.
“팀장님 일찍 오셨네요?”
“네, 보고서 좀 만드느라고...”
“대리님...”
애교 섞인 비음.
이지혜에게 저런 면이 있었던가?
“어떻게 되셨어요?”
“뭐가요?”
“에이, 왜 그러세요. 월요일 출근하면 말씀해주시기로 하셨잖아요.”
커피가 든 종이컵을 들고 장향은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요?”
장향은 역시 양 대리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어떻게 됐느냐고 물었다.
양 대리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피했고, 그의 앞으로 커피가 든 종이컵을 내밀며 뭔가를 바라는 눈빛으로 장향은이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아, 뭐? 뭐가 그렇게 궁금한데? 커피는 또 뭐야? 내 커피는 내가 타먹을라니까, 이건 그냥 향은 씨 마셔요.”
“제껀 여기.”
“아, 뭐 어쩌라고...”
“어떻게 됐냐니까요.”
도대체 뭔데 저러지?
아놔, 보고서 써야 되는데...
“뭔데 그래요?”
결국 난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양 대리님 어제 선 보셨어요.”
“네?”
대박...
나와 박기태가 만토바에 가 있는 동안 결혼 정보업체로부터 맞선이 주선됐던 모양이다.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이정도 뉴스라면 다들 저렇게 호들갑을 떨만하지.
난 이왕 늦은 거 보고서는 나중에 마저 만들기로 하고 양 대리의 자리로 갔다.
“아, 팀장님까지 왜 오십니까? 그냥 하시던 일 하세요.”
“예뻤습니까?”
“일 안합니까, 다들?”
“아직 출근시간 10분 정도 남았습니다.”
내 말에 양 대리는 기가 찬다는 식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예뻤습니까, 안 예뻤습니까. 그것만 말하십시오.”
“...예뻤습니다.”
“크흐...”
예뻤다는 말에 우리팀 전원은 뭐에 그렇게 소름이 돋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각자의 몸을 베베꼬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잘 안됐습니다.”
그리고 한순간 차가운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일제히 표정이 굳었다.
“아, 왜요? 여자가 대리님을 마음에 안든다고 하던가요?”
장향은이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근데 저 두 사람은 언제부터 저렇게 친해졌지?
저런 질문을 막 던질 정도로 그렇게 가까워졌었나?
“제가 하라는대로 하셨어요?”
“해볼 기회도 없었어요.”
“왜요?”
“그냥 뭐...일 합시다, 일. 차장님, 부장님 오시겠다.”
“그럼...뭐 할 수 없죠. 다들 미팅 대열로 세팅합시다.”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양 대리를 제외한 모든 팀원들이 각자의 의자를 가지고 와서 팀 사무실 중간으로 모였다.
그 모습에 양 대리는 다시 한 번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건 누가봐도 미팅을 하는 모습이다.
이지혜와 박기태는 다이어리를 펼쳤고, 장향은은 파일철을 열어 펜을 잡았다.
“팀장님까지 진짜 왜이러세요?”
“궁금하니까 그러죠.”
“진짜 별 거 없어요. 그냥 딱 만났는데, 인사 주고받고 바로 서로 어떤 일을 하는지, 집안은 어떤지 그런 질문이 오고갔어요. 그런데 갑자기 연봉을 묻더라고요. 거기서 현타가 왔어요.”
“맞선이면 당연히 물어볼 수도 있는 부분 아닌가? 설마 뭐...적대요?”
“그런 게 아니라...갑자기 내가 이렇게까지 해서 굳이 결혼을 하려는 이유가 뭘까...하는 현타가 오더라고요. 처음 만난 여자. 잘 되면 모르겠지만, 잘 안되면 한 번 보고 끝일 여자한테 가까운 친구들도 잘 모르는 우리집 집안 사정 다 이야기하고, 현재 내가 받고 있는 월급까지 까야한다는 사실이 좀...아무래도 맞선은 저랑 잘 안맞는 거 같아요.”
“아직 덜 급한 거죠.”
“덜 급한 게 아니라 아마도 자리에 나온 여자가 대리님 취향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더 높아요.”
“그래서 그런가?”
장향은이 확신하듯 말했다.
“마음에만 들었어 봐, 현타가 올 겨를이 어딨겠어요?”
“하긴, 그건 또 그렇네요. 아무튼 여자는 괜찮았어요. 직업도 괜찮고 또 얼굴도 뭐 그만하면 준수하고 무엇보다 경우가 상당히 바른 여자 같았어요. 저는 처음이었지만, 여자는 맞선 경험이 몇 번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다음에 맞선을 나갈 땐 어떻게, 어떻게 하라는 조언까지 해주더라고요. 하하하...그게 끝.”
“...”
“아무튼 향은 씨, 지혜 씨한테 받아간 팁 하나도 못 쓰고 그냥 왔네요. 잘 안됐지만, 조만간 내가 두 사람한테 꼭 맛있는 거 쏠 게요. 아, 차장님 오신다.”
팀이 좀 팀다워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활기가 느껴졌다고 할까?
그전엔 다들 좀비같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마치 억지로 하기 싫은 출근을 하는 사람들 같았다.
나부터도 그랬으니.
그런데 장향은이 우리팀으로 온 이후, 나크리스 런칭까지 문제없이 쳐내며 우리도 모르는 사이 팀웍이라는 게 생겨버린 거 같다.
“좋은 아침입니다, 차장님.”
“어, 그래. 공 팀장. 부장님 오시면 출장 보고서 들고 자리로 좀 와.”
“저 그게...”
미처 아직 마무리가 안됐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장 차장은 특유의 빠른 걸음으로 자기 할 말만 하고 사라져버렸다.
큰 일 났네.
얼굴을 보자마자 출장 보고서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다.
아직 반도 못했는데...
그리고 오늘따라 박 부장은 왜 이렇게 일찍 출근을 하는 걸까?
보고서 작성을 위해 아침 미팅을 뒤로 미루고 자리에 앉았는데, 곧바로 박 부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결국 난 빈손으로 박 부장을 찾아갈 수 밖에 없었다.
빈 손으로 부장, 차장 자리로 온 날 장 차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쳐다봤다.
왜 빈손이냐는 듯한 표정.
“죄송합니다. 아직 출장 보고서를 다 못 만들었습니다.”
장 차장의 눈썹 끝이 꿈틀거리는 순간이었다.
박 부장과는 아예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왜?”
딱딱해진 장 차장의 음성.
“죄송합니다...주말에 몸이 좀 안좋았습니다.”
개기는 건 아니다.
개겨서 남는 게 있어야 개겨보는 시늉이라도 해볼 거 아닌가.
약간의 거짓말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마도 출장 내내 부담감이 컸던 거 같습니다. 창고 네 군데와 미팅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나니까 살짝 긴장이 풀렸던 모양입니다. 한국 돌아오는 비행편도 갑자기 딜레이가 되는...”
“약은 먹었어?”
“네, 네?”
돌아온 장 차장의 반응이 너무나 뜻밖이라 당황했다.
“약은 먹였냐고.”
“네, 저 그게...”
“알아서 챙겨라, 네 몸. 서른 중반 되니까 이제 슬슬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거 같다는 게 무슨 말인지 실감이 되지?”
저 양반이 아침부터 뭘 잘 못 먹었나...
박 부장 앞이라 욕은 안하더라도, 최소 면박 정도는 줄 거라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 촉촉하지?
박 부장은 내가 출장 보고서를 아직 준비 못했다는 사실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그저 자켓을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어놓은 뒤 출장 결과는 어떻냐고 물었다.
“지시하신대로 정 팀장 블락 걸어놨습니다.”
“그야 당연한 거고. 우리가 어디 뭐 정 팀장 그 자식 하나 엿 먹이겠다고 경비 비행기표로 털어가며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거야?”
“아, 네. 마진도 그때 말씀하셨던 퍼센테이지로 조정해놨고, AS가 불가능한 대신, CS걸리는 품목에 한해서 하자 난 제품 이미지 첨부해서 보내주면 추가 오더 때 크레딧노트로 대체해주겠다 약속을 받았습니다.”
“알았어. 그럼 그렇게 진행해. 어후...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장 차장 넌 괜찮아?”
“저도 지금 죽겠습니다.”
“무슨 씨발 결혼식을 일요일 저녁에 하고 난리야. 아, 피곤해 죽겠네.”
“어제 뭐 누구 결혼식 있으셨습니까?”
“저기 성심물산으로 옮기신 전 상무님 기억하지.”
“네, 당연히 기억하죠.”
“어제 전 상무님 아들 장가갔잖아.”
“아...”
“원래라면 안가도 되는 건데, 전무님 입장이 좀 그렇잖아. 전 상무님 계실 때 전무님이랑 두 분이 오죽 친하셨어? 그래서 장 차장이랑 같이 전무님 대신 다녀왔어. 가봐. 가서 일 봐.”
“네, 알겠습니다. 보고서는 최대한 오전 중으로 완성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박 부장과 장 차장에게 차례대로 고개를 숙이고 돌아설 때였다.
“야, 공 팀장.”
장 차장이 불렀다.
“...네, 차장님.”
“이거 가져가라.”
책상 밑에서 뭔가 주섬주섬 챙기더니 한약봉투 같은 뭔가 액기스가 담긴 비닐팩 세 개를 내 앞으로 건네는 장 차장이었다.
“이게 뭡니까?”
“장어즙.”
“이야...장 차장 너 진짜 너무 하는 거 아니냐? 내가 하나만 먹어보자고 할 땐 들은 체도 안하더니 하나도 아니고 세 개씩이나 주냐?”
“제 새끼 제가 챙기지 누가 챙깁니까? 부장님은 사모님한테 해달라고 하십시오. 아, 얼른 가져가. 팔 아프다. 그거 비싼 거야. 자연산 민물 장어로 짠 거다.”
“...”
“건강 챙겨가면서 해라. 서른 중반 넘어가면 감기 한 번 걸려도 잘 떨어지지도 않는다.”
“...네, 감사합니다.”
기분이 좀...이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