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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30화 (30/325)

# 30

평생 직장이란 게 어딨어

이탈리아 애들하고 미팅을 한 번 하고 나면 속이 쓰리다 못해 타들어가는 느낌까지 들게 된다.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신다.

워낙에 말을 잘하는 애들이 아닌가.

말로 이기려고 해선 절대 안된다.

특히 만토바 애들과 사업 이야기를 할 때엔 정확한 숫자와 기간, 그리고 아이템을 찍어놓고 이야기를 해야지, 자칫 그걸 깜빡하고 이야기를 하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이놈들이 얼렁뚱땅 밀어넣으려고 하는 아이템에 혹해서 사인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한국 영업맨들의 주무기가 데이터와 끈기, 그리고 술빨이라고 한다면, 이탈리아 애들은 콧대와 허세, 그리고 지키지도 않을 약속의 남발이다.

그래도 스폰짜 같은 경우는 어느정도 신뢰가 검증된 인물이다.

홍성과의 인연도 오래됐고,

“커피 한 잔 해야죠.”

왜 그 말이 안나오나 했다.

조금 있다가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가기로 해놓고, 커피를 마시하고 하는 스폰짜.

“네, 한 잔 할까요?”

창고라고 해서 그냥 국내 일반 중대형 물류 창고를 생각하면 곤란다.

끝이 보이지 않는 창고다.

예전에 장 차장이 팀장이었을 시절, 그와 함께 이곳에 왔다가 이 창고에 있는 재고들의 총 가치를 듣고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

한국 돈으로 대략 7천억 원치의 재고를 가지고 있는 애들이다.

미친 애들이다, 한마디로.

진짜 속된 말로 불 한 번 나면 끝나는 거다.

만토바에 많은 명품 창고들이 있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메이저에 속하는 스폰짜의 창고.

마피아 애들이 뒤를 봐주는 비즈니스라고 보면 된다.

그렇다고 스폰짜가 마피아라는 말은 아니고.

스폰짜는 그냥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어느정도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바지사장 정도라고 보는 게 적당할 것이다.

“이번엔 또 무슨 프로젝트를 홍성에서 진행을 하시길래, 연 30밀리언 정도의 물건이 필요하다고 연락을 주신 겁니까?”

연간 30밀리언은 내가 약간 허풍을 섞어서 메일로 보낸 내용이다.

워낙에 허풍이 쎈 이탈리아 애들이 되다보니, 사실 이정도 허풍은 허풍 축에도 못 끼는 게 사실이고.

스폰짜가 다리를 꼬으며 특유의 바람둥이 미소를 얼굴에 걸어놓고 커피잔을 들었다.

파란색 정장.

정말 어지간한 모델들도 쉽게 소화하기 힘든 그 파란색 정장을 위아래로 맞춰입고 양말도 신지 않은채 복숭아 뼈를 훤히 들어내 놓는 수제로퍼 차림의 스폰짜.

멋스럽게 기른 흰 턱수염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스폰짜의 말에 박기태는 열심히 눈알을 굴리기 시작했다.

그럴 수 밖에.

내가 미리 말을 안해줬으니까.

“럭셔리 슈즈 멀티 브랜드 샵을 만들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멀티 브랜드 샵.

한국에선 흔히 편집샵이라고 표현한다.

다양한 브랜드를 한 매장에 모두 넣어놓고 판매하는 샵을 말하는데, 그게 가능하기 위해선 샵 자체를 하나의 브랜드로 만들어 등록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는 브랜드들로부터 허락을 받아야 하고.

박기태의 두 눈에서 지진이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우선 시작은 슈즈로 출발을 하지만, 점차 아이템 종목을 넓혀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게 현재 세계적인 시장 트랜드니까요.”

앞으로 더 많은 물량을 만토바로부터 받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제를 깔아놓는다.

그리고 그 전제의 힘은 그동안 홍성 인터네셔널이 만토바 쪽에 보여준 신뢰와 더해져 베테랑 스폰짜와의 미팅에서 내가 끌려가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빌려준다.

“실험적으로 현재 한국 요지에 있는 백화점 위주로만 샵을 오픈해볼 계획입니다. 하지만 브랜드 멀티샵의 특징상 매장 수가 늘어나는 건 시간 문제일 겁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시즌 안에 소화를 시키지 못한 재고는 다시 주요 아웃렛 쪽으로 풀어서 처리를 할 계획이고요.”

“인터넷 쇼핑쪽은 따로 생각하고 계시지는 않고요?”

“그 부분이야 대형 아웃렛 쪽에서 행사 진행할 때 끼워넣기를 해주도록 유도를 하면 되는 부분이고요.”

“하긴 그런 시스템은 세계적으로 한국이 참 디테일하게 잘 되어있다고 듣긴 했습니다.”

내가 스폰짜에게 말한 홍성 인터네셔널의 사업 계획은 꽤 구체적이었고, 그런 만큼 박기태가 받은 충격은 컸을 것이다.

그렇게 30분 정도 이런저런 시장에 관한 이야기, 현재 갑자기 급부상하고 있는 브랜드들에 관한 이야기, 업계 유명인들의 사생활에 관한 이야기들로 시간을 보내다가 점심을 먹으러 갔다.

“팀장님...”

“미팅 다 끝내놓고 이야기 합시다.”

레스토랑으로 가는 도중에 박기태가 불안한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걸었고, 난 그런 박기태의 불안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다음 아직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이야기 하자는 말만 남기고 스폰짜와 나란히 걸었다.

그리고 박기태는 한 발 떨어져서 우리 뒤를 뒤따랐다.

스폰짜가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창고 근처 파스타 집이었다.

근처에 마땅히 먹을만한 곳이 없다.

괜찮은 레스토랑은 죄다 만토바 시내에 몰려 있으니까.

그나마도 스폰짜가 우릴 안내한 파스타 집 역시도 바깥에서 어느정도 대기를 해야만 하는 곳이었다.

관광지는 아니지만, 스폰짜의 창고를 포함해 대형 창고 몇 군데가 모여있는 지역이다보니 우리처럼 회사 차원에서 계약을 하러 오거나 개인이 소량으로 물건을 사입하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이 손님의 대부분인, 그래서 맛은 그저 그런 파스타 집.

식당 안엔 검은 머리를 가진 아시아인이 절반 이상이었다.

그중에서도 한국인이 가장 많았고.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들은 보나마나 롯데나 신세계 아웃렛 쪽 사람들일 것이고, 명품을 휘감고 있는 사람들은 개인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겠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폰짜와 함께 식당 안으로 들어서는 우리 일행 쪽으로 은근슬쩍 눈길을 돌렸다.

그만큼 스폰짜의 파란색 정장 의상은 파격적이었고, 그 파격적인 의상을 완벽하게 소화해 낸 스폰짜의 옷걸이와 분위기는 고급스러웠으니까.

간단하게 식사를 마친 후 다시 또 당연하다는 듯 커피를 시킨다.

그리고 그 커피를 마시며 사업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박기태는 입을 꼭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미스터 박은 아까부터 뭔가가 꽤 심각하군요.”

스폰짜가 농담을 날린다.

‘시리어스’ 하다는 표현을 써서 뭐가 그렇게 심각하냐는 스폰짜의 농담에 그제야 힘겹게 미소를 짓는 박기태.

그런 박기태의 미소는 식사를 끝내고 다시 돌아간 스폰짜의 창고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그래서 어떤식으로 계약을 하자는 말씀이신가요?”

결국 스폰짜가 미팅의 포인트를 찝었고, 난 그런 스폰짜에게 내가 희망하는 브랜드 몇 가지를 제시하며 현재 창고가 확보하고 있는 모델들을 확인해볼 수 있겠냐고 물었다.

이게 이번 미팅의 핵심이다.

스폰짜가 사람을 하나 불렀다.

스폰짜와는 달리 편안한 청바지 차림의 여성이었다.

A4용지 크기의 오더시트를 아크릴 판에 올려 등장한 여성의 안내를 받으며 스폰짜, 박기태와 함께 브랜드별 산처럼 쌓여있는 창고 안을 돌아다녔다.

주문예행이라고 해서 정식으로 계약을 하기 전 어느정도 물량을 우리쪽에서 주문을 하게 될지, 또 그 주문 물량을 창고가 어떻게 맞춰줄지 미리 연습을 해보는 과정이 있는데, 그걸 해보기 위함이었다.

“여기 이 모델 사이즈 별로 600개 씩. 41(한국식으로는 250)사이즈, 44.5(한국식으로는 285)는 80켤레면 충분할 거 같고, 45(한국식으로는 290)사이즈는 필요 없어요.”

한국인 평균 사이즈, 그리고 가장 많이 나가는 사이즈 제품 위주로 주문을 하고 만약을 대비해 잘 나가지는 않지만 그래도 확보는 하고 있어야 할 사이즈는 최소량으로 주문을 한다.

“이 모델로 다른 컬러들도 다 똑같이 체크를 해주시면 될 거 같아요. 아, 여기 골드랑 실버 컬러는 제외시키고요. 이건 한국에선 안나가는 컬러거든요.”

“죄송한데 기본적으로 45사이즈도 최소물량은 주문을 해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골드, 실버 컬러 역시 최소 물량은...”

“괜찮아.”

만토바 스타일이 그렇다.

딱 내가 원하는 모델만 가져갈 수가 없다.

마진이 기가 막히게 좋은 만큼 그쪽에서 은근하게 푸쉬하는 것들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도 분명 있다.

하지만 우린 홍성 인터네셔널이다.

개인 업자들이 아니지 않나.

거기다 난 창고 사장과 연간 30밀리언이라는 금액을 놓고 개인적으로 약속을 잡고 이 창고를 찾은 것이고.

스폰짜가 직원에게 손을 들어 자기네가 정한 룰 따윈 나중에 따로 이야기 하자는 식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박기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그렇게 두 시간 가까이 주문예행치고는 꼼꼼하게 제품들을 확인했고, 내가 연습삼아 주문한 물량의 가격을 산출하기 위해 여자가 어디론가 간 사이에 우린 다시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총 3.8 밀리언 97930유로 나왔습니다.”

한국돈으로 대충 50억 정도 될 거 같다.

여기서 살짝 장난을 섞어야 된다.

“좀 더 넣을 걸 그랬네요. 그렇게 주문을 해도 4밀리언이 안나오네요. 하하하...”

“창고에 디피가 안된 모델도 있으니까요.”

스폰짜 역시 주문 금액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을 안쓰는 모습이었다.

하루 이틀 거래해온 상대가 아니지 않나.

스폰짜는 홍성이 자기네 창고를 메인 창고로 두고 프로젝트를 진행하고자 하는 부분에 더 큰 관심을 보이는 모습이었다.

“며칠 안으로 미스터 공이 초이스 한 브랜드 안에서 현재 저희가 확보하고 있는 모델 리스트를 다 보내드리죠.”

“그렇게 해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그런데 시작을 하면 언제쯤...”

“코리안 스타일 잘 아시지 않습니까. 거래 창고 선정만 끝나면 아무리 늦어도 하반기엔 오픈이 될 겁니다. 초도 물량 주문은 다음 시즌 컬렉션이 될 거 같고요.”

“여기까지 왔는데, 당연히 저희하고 해야죠.”

“그럼요.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말이. 하하하. 그런데 미스터 스폰짜.”

“말씀하시죠.”

“현재까지 저희 홍성이 미스터 스폰짜에게 직접적으로 고객 블락을 요청했던 적이 있었나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스폰짜의 미간에 주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닳고 닳은 사람이다.

내가 그 말을 꺼내는 이유 정도는 충분히 간파하고 있으리라.

“홍성은 젠틀하죠. 모든 파트너가 홍성만 같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렇게만 된다면 스트레스를 받을 이유가 전혀 없죠.”

“그렇게 평가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저희 홍성은 앞으로도 특별한 경우가 없다면 미스터 스폰짜와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꾸준히 깊은 파트너쉽을 유지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정 팀장의 이야기를 꺼낸다.

“저하고는 개인적으로 세 달 전쯤에 만나서 같이 식사를 했던 기억이 있네요.”

“사실 뭐 상대가 롯데, 신세계도 아니고 홍성을 나가서 자기 사업을 준비하고 있는 개인 업자를 상대로 이런 블락 요청을 넣는다는 게 저희 입장에서도 참 난처합니다. 민망하다는 말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말이 없네요.”

“이해합니다. 그리고 미스터 공 이야기를 들어보니 제가 미스터 정에게 들었던 내용과 상당부분 말이 달라서 조금 당혹스럽기도 하고요. 특히 같은 업종 안에서 그렇게 인원을 한꺼번에 몇 명씩이나 빼가는 건 매너가 아니죠. 매너를 떠나서 그 부분은 홍성이 법적인 응징을 할 수도 있는 부분 아닙니까?”

“그렇게까지 하고싶지 않으니까 이렇게 미스터 스폰짜에게 요청을 드리는 거 아니겠습니까.”

“확실히 너무 관대하시군요. 저희 이탈리아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

잠시 뒤 스폰짜의 화려한 연기가 펼쳐진다.

알고도 그냥 넘어가 주는 거다.

스폰짜는 급하게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이탈리아어로 통화를 진행했기에 정확히 무슨 대화가 오고가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다만 통화를 하고 있는 상대는 정 팀장이 요청한 주문을 담당했던 창고 직원일 가능성이 높았다.

잠시 후 스타일리쉬한 정장차림을 한 젊은 남성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이름을 라자노라고 스스로 소개했다.

정 팀장이 요청한 주문을 진행했던 담당자라고 한다.

“미스터 정이 한 주문, 그것들 다 취소시켜.”

스폰짜는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영어로 대화를 진행했다.

“한 달 전에 받았던 주문입니다. 이미 물건은 다 보냈죠. 인보이스 처리까지 다 끝났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이탈리아 애들을 하루이틀 상대해보는 것도 아니고, 이정도 능청스러움은 당연히 감안을 해야하는 부분이다.

물론 거짓말을 하는 건 절대 아닐거다.

타이밍상 이미 한국에서 물건을 받아 인보이스 처리까지 다 끝냈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연기를 하는 것 자체가 앞으로의 의지를 보여주는 이탈리아 애들의 스타일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스폰짜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난 그런 스폰짜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가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해라니요. 오히려 저희가 이런 성가신 요청을 드려서 죄송할 뿐이죠.”

스폰짜는 젊은 남성을 이용해 홍성에 대한 자신의 의리를 다시금 내게 보여주었다.

“뭐 얼마치나 주문을 했던 거야?”

“정확히 기억은 안나는데...”

“대충.”

“14만 유로 정도였던 거 같습니다.”

14만 유로라는 말에 스폰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입맛을 다셨다.

마치 고작 그것밖에 주문을 안했어?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앞으로 미스터 정으로부터 들어오는 일체의 주문은 받지 않는 걸로 해.”

“네, 그렇게 하죠.”

“미스터 공.”

“네.”

“커피 한 잔 더 하시겠습니까?”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충분합니다.”

스폰짜의 창고를 나왔다.

그리고 시작되는 박기태와의 어색한 침묵.

생각이 많아진 얼굴이다.

난 그런 박기태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자켓 안주머니에서 그에게 받은 사직서를 꺼냈다.

반으로 접혀있는 사직서.

“이거...제가 어떻게 해야하나요?”

박기태는 그 후로도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정 팀장을 블락 시키자는 건 박 부장님 이하 모든 팀장님들의 결정. 그리고 그 결정을 만토바쪽 창고 사람들과 직접 만나기 전까지는 비밀로 하라는 건 장 차장님의 지시. 미리 귀띔을 해줄 수도 있었겠지만, 장 차장님의 지시를 어기고 모험을 하고싶지는 않았습니다. 그게 제 스타일입니다. 전 그렇게 직장 생활을 합니다. 입이 간지러워도 참을 건 참아가며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걸 잘 못하는 기태 씨를 이번 출장에 데리고 온 건 제 진심입니다.”

“...!”

“그때 제가 기태 씨를 한 번 잡았던 건...일종의 의리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진짜 기태 씨가 필요해서 한 번 더 잡고 싶어요. 이 프로젝트...아무래도 우리 5팀이 진행하기엔 기태 씨 빠지면 좀 버거워. 뭐 정 팀장님이 차린 회사에 대해선 이야기 하지 않겠습니다. 관심 없어요. 제가 스폰짜를 상대로 정 팀장 블락 요청을 넣은 건 회사의 뜻이지 제 뜻이 아니거든요. 전 지금 가게 될 다른 창고에서도, 그리고 내일 가게 될 두 군데 창고에서도 이곳과 똑같이 딜을 할 겁니다. 그렇게 해야 됩니다.”

난 들고 있던 박기태의 사표를 봉투에서 꺼냈다.

“회사의 결정이니까요. 하지만 이건 좀 다른 문제 아닐까요?”

“...감사합니다, 팀장님.”

“제가 찢을까요, 아님 기태 씨가 직접 찢을래요?”

“제가 찢겠습니다.”

“요즘같은 시대에 평생 직장이란 게 어딨어. 다들 뭐 고만고만한 회사로 타이밍 맞춰 이직해가며 경력 쌓는 거지. 그러다 자기 장사 하는 거고. 하지만 사원으로 이직하는 거 보단 대리 직함이라도 하나 달고 이직하는 게 훨씬 더 유리하잖아요. 곧바로 자기 장사 시작할 거 아니라면.”

“...네.”

“사람 때문에, 혹은 업무 때문에 정말 출근하는 게 숨이 막혀서 죽을 것 같은 게 아니라면 대리까지는 해요. 지금까지 한 게 아깝잖아. 기태 씨가 1년차였다면 이런 말도 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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