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한여름 밤의 꿈
17층.
회사 밖 세상을 바라보며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미 빤히 나와있는 답을 가지고도 왜 내가 생각이라는 걸 계속 해야하는지를.
그러다 그걸 하라고 회사가 월급이란 보상을 준다는 결론을 얻어낸다.
그리고 이런 지리멸렬한 인간 관계가 곧 회사에선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라는 걸 인정하는 순간 시야는 넓어진다.
“후우...”
박기태가 중간에 끼어있어서 생각이 많아졌냐고?
아니, 그런 건 아니다.
난 이미 박기태를 한 번 잡아준 것만으로 내 할 도리는 다 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조용히 따로 불러서 상황이 변했다는 말을 해줄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난 기본적으로 박기태에 대한 신뢰가 그리 크지 않고 또 박기태의 입은 솜털보다 가볍다는 안타까운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내 입으로 인해 팀장 미팅에서 나온 이야기들이 정 팀장 귀에 들어가는 일은 없어야 한다.
뭐 정 팀장 귀에 들어가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을 거다.
하지만 이번 사안 만큼은 장 차장이 시키는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래서 난 도박이라는 걸 하지 않을 생각이다.
이미 떠나겠다고, 마음의 준비를 끝내고 사직서까지 준비한 박기태 보다는 장 차장이 내게 더 중요한 존재 아니겠나.
“후우...”
담배 연기 한 모금을 깊게 빨아 천천히 내어뺀 후 스마트 폰을 꺼냈다.
“혜선 씨, 식사 하셨어요?”
-네, 지금 먹으러 가는 길이에요.
“죄송한데요.”
-...
“아마 금요일 저녁에 같이 영화 보기로 한 거...다음으로 미뤄야 할 거 같아요.”
급하게 출장이 잡히게 될 거 같다라는 말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어쩔 수 없죠, 뭐. 알았어요.
이유는 듣지도 않고 알았다고 하는 강혜선.
아직은 밀당을 하고 있는 단계.
물론 애를 쓰고 있는 쪽은 나다.
상대 역시 적당한 거리를 두고 간을 보고는 있지만, 적극적인 나에 비해 상대는 연애 교과서적인 반응만 보이고 있을 뿐이고.
금요일 저녁에 영화를 보러 가자고 이야기를 꺼낸 쪽은 나다.
그리고 난 어렵게 오케이 사인을 받은 그 약속을 깰 수 밖에 없었고.
“급하게 출장이 잡히게 생겼어요. 일요일엔 시간이 어떠신가요? 아직 출장 스케줄이 나온 건 아니지만 아무리 늦어도 토요일 밤에는 한국에 올 수 있도록...”
-음...아마도 주말은 좀 어렵지 않을까 싶네요.
“...그렇군요.”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말씀하시는 거 들어보니까 외국 출장인 거 같은데, 비행기타고 왔다갔다 하느라 많이 피곤하신텐데 주말엔 쉬셔야죠.
“저는 괜찮습니다, 혜선 씨만 괜찮으시면...”
-아직 시간 많이 남아있으니까 천천히 이야기 하죠. 식사 하셨어요?
“네, 뭐 대충 먹었습니다.”
-알았어요. 나중에 또 연락해요.
분명 실망을 했겠지?
아님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나...하는 생각을 하고 있거나.
내가 생각해도 이건 좀 아닌 거 같다.
그렇게 영화 한 편 같이 같이 보러 가자고 어거지로 약속을 잡을 땐 언제고, 고작 미안하단 말 한마디로 그 약속을 깨어버리는 상대라면 나같아도 이게 뭔가 싶을 거 같다.
회사 일이라는 핑계로 이해를 바라기엔 아직 나와 강혜선은 그렇게까지 가까워지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난 담배 한 개피로 강혜선과의 약속을 취소시키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몇 달 전 보류 판정을 받은 편집샵 건 기획서 파일을 열었다.
만토바 현지 주요 도매업자와 국내 시장성이 좋은 브랜드들은 이미 당시 기획서를 준비할 때 다 조사를 해놓은 상태였다.
당시 난 처음 팀장을 달고 만들었던 이 기획서에 정말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박 부장의 요청으로 해당 기획서를 다시 검토한 후 몇 가지 부분적으로 수정을 해서 박 부장을 찾았다.
“8밀리언 유로라...”
박 부장은 내가 뽑은 예상 첫 발주 금액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 돈으로 대략 100억 정도다.
큰 돈이지, 큰 돈인데, 우리 업계에선 또 그렇게까지 큰 액수는 아니다.
매장 하나에 들어갈 재고 물량이 100억치라는 게 아니다.
전국 주요 포지션에 위치한 백화점 40여 군데에 깔 물량이 100억치라는 말이다.
물론 우리가 받아오는 가격을 말하는 거다, 소비자 가격이 아니라.
보통 단독 브랜드 매장 같은 경우는 한 매장당 재고 물량 5억에서 주로 단가가 높은 여성가방이 많이 나가는 프리미엄 명품 브랜드 같은 경우 15억 정도는 확보를 하고 있어야 하는 게 기본이다.
하지만 신발이라는 아이템의 특수성과 만토바에서 받는 물건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한 매장당 2억에서 3억 정도의 재고면 충분히 시작할 수 있다.
사실 이것도 많이 잡은 거다.
신발은 헹거 하나에 옷걸이를 이용해 여러 컬렉션을 다같이 걸어놓을 수 있는 옷과 달라서 디스플레이 자리를 많이 잡아먹는다.
거기다 스포츠 웨어도 아니고 명품의 경우는 벽 디스플레이가 아닌 매장 중심 디스플레이를 기본으로 해야하고.
아무리 넓은 매장이라도 그정도 재고라면 꽤 그럴싸한 매장을 만들 수가 있다.
거기다 일단 기획안만 통과를 시키면 이후 이차 발주량을 올리기는 쉬우니까.
보통 만토바에서 받는 물건은 브랜드에 따라 인보이스 가격 곱하기 3에서 3.5 정도를 한 뒤 세금을 포함시켜 소비자 가격을 만든다.
그리고 거기에 환율을 적용시키는데, 현재 환율이 아닌 지난 6개월치 환율을 평균내서 시장 가격을 측정하는 게 가장 일반적이다.
그렇게 따지면 주문하는 물량의 소비자가는 320에서 350억 사이가 된다는 말인데, 전 매장 인테리어를 홍성 인터네셔널 쪽에서 100퍼센트 부담을 해야 한다고 쳐도 크게 리스크가 있는 프로젝트는 아니다.
한철 장사만 하고 말 것이 아니니까.
그리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매출이 시원찮게 올라오더라도 내가 선택한 브랜드들이라면 시즌을 넘겨 아웃렛 쪽으로 풀어버리면 금방 다 나갈 거다.
“떨리겠다?”
팀장 미팅때와는 달리 살짝 장난기 어린 얼굴로 박 부장이 물었다.
이정도 큰 프로젝트를 벌써부터 차고 나가서 부담스럽지 않느냐는 질문이었다.
부담스러울 게 뭐 있나.
내 돈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대박을 이끌어낸다고 해서 그게 내 돈이 되는 것도 아닌데.
성과급이야 좀 나오겠지만, 그 성과급 때문에 떨 이유까지 있을까.
“지점별로 매장 섭외만 제때 차질없이 된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신경 써야 될 게 한두 개가 아닐 거야.”
“당시 제가 신발이라는 아이템을 선택했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
“의류나 기타 악세사리를 포함시켜야 한다면 엄두도 못내는 프로젝트가 될 겁니다. 옷걸이부터 시작해서 마네킹, 기타 디스플레이 소품들까지 하나하나 다 신경을 써야하니까요. 그런데 신발은 박스 부피가 커서 창고를 많이 잡아먹는다는 걸 제외하고는 관리도 수월하고 준비해야 할 것들이 크게 없다는 메리트가 있죠. 아직은 장향은 씨가 영업 5팀으로 오기 전 저를 포함한 네 명이서 쳐낼 각오로 준비했던 기획안이었습니다. 지금 영업 5팀 맨파워로는 아무 문제 없습니다.”
“그래도 브랜드 업체에서 직접 받는 게 아니니까 쇼핑백부터 다 하나하나 신경을 써야할 거 아냐?”
“여기 뒷장에 보시면 쇼핑백 제작과 시즌 내에 판매가 안되서 아웃렛 쪽으로 빠지게 될 미처분 재고 할인 마진표까지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알았어. 놔두고 가서 일 봐. 이건 내가 직접 재경 부장 만나서 컴펌 받아줄테니까.”
“네, 그럼 가보겠습니다.”
박 부장을 향해 허리를 숙이고 몸을 돌리려고 할 때였다.
“이거 잘만 성공시키면...”
난 다시 몸을 돌려 박 부장을 쳐다봤다.
“회사 차원에서 지원 들어간다.”
“...!”
“이거 역시도 결국엔 다른 회사 브랜드 팔아주는 일이지만, 어쨌거나 처음으로 홍성 브랜드를 노출 시키는 프로젝트 아냐. 위에 보고는 내가 알아서 다 할테니까 공 팀장은 물밑작업에만 집중해.”
그런 사탕발린 소리에 흔들릴 필요는 없다.
그런 실체없는 미끼를 물고 내게 뭔가 떨어질 게 없을까...하고 목 빼놓고 기다리는 미련한 짓은 더이상 안한다.
결국 포인트는 열심히 하라는 거다.
열심히 해서 회사에 큰 돈 벌어다주고, 열심히 해서 자기 실적에 플러스가 되게 만들란 소리다.
그래서 진짜 말 그대로 대박이 나면 회사 차원에서 지원이 들어가는 게 아니라 회사 차원에서 직접 컨트롤을 하겠다는 말이고.
이젠 더이상 그 당연한 차이, 말장난에 헷갈리지 않는다.
하지만 박 부장 앞에서 시니컬한 반응을 할 수는 없으니까, 최대한 미소를 지으며 목소리에 힘을 실어 대답을 하는 수 밖에.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사무실로 돌아와 팀원들에게 만토바 일정 출장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래도 메이저 창고 (만토바 도매장은 말 그대로 창고다.)몇 군데와 미팅을 하려면 최소 이틀은 걸릴텐데, 아무래도 수요일에 출발해서 목요일, 금요일에 일을 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근데 만토바는 왜 가는 겁니까?”
양 대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만토바라는 말에 박기태는 움찔했고.
“시장 조사요.”
“시장 조사요?”
“홍성에 라이센스로 물건을 대주던 대형 브랜드들이 하나같이 지사운영을 시작하면서 남아 있는 프리미엄 브랜드가 많이 빈약해졌다는 지적이 아까 팀장 미팅에서 나왔어요.”
“갑자기? 그게 어디 하루이틀 일이었어요?”
“그러게? 너무 뜬금없는데?”
장향은까지 내가 급하게 만들어 낸 만토바 출장 이유에 의문을 제기했다.
“아, 어쩌겠어요? 나가서 시장 조사 한 번 하고 들어오라고 하시는데.”
“하아...진짜 해도해도 너무하네. 나크리스 런칭 시킨지 얼마나 됐다고 그걸 또 저희팀한테 짬으로 밀어버립니까? 아니구나. 짬으로 밀린 게 아니네. 4팀 있잖아요. 주 대리도 있는데 왜 팀장님을 보냅니까?”
“뭐 어때요? 난 간만에 콧구멍에 바람도 넣을 겸, 만토바 놀러 간단 생각하니까 은근히 설레는데.”
“그게 뭐 어디 놀러 가는 겁니까? 가서 별 성과 없이 돌아오면 경비만 축냈다고 또 눈치를 줄 건데...”
“주면 또 어떻습니까? 막상 보냈는데, 별 소득 없이 그냥 돌아와줘야 다음에 또 안 보내시겠죠.”
“참 평소엔 안그러신 분이 이럴 때 보면 속이 없으신 거 같다니까...”
“기태 씨.”
난 양 대리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재빨리 박기태를 지목했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같이 갈 사람이 기태 씨 밖에 없을 거 같은데...향은 씨야 센터 봐야하고, 지혜 씨는 이번 출장까지 나랑 같이 다녀오면 다른 팀 계약직 직원들이 무슨 소문을 어떻게 만들어낼지 모르고...”
내 말에 팀원들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 계약직 직원들 사이에서 나와 이지혜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서 내가 기를 쓰고 이지혜에게 특혜를 주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그리고 양 대리님은 당연히 나 없는 동안 팀 컨트롤 해야하니까 불가능이고...좀 귀찮겠지만, 기태 씨가 나랑 같이 좀 갑시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기태 씨가 호텔 좀 알아봐줄래요? 비행기 티켓은 내가 확인할게요.”
그날 저녁 퇴근을 하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박기태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게 된다.
운전 중에 받은 전화였다.
“네, 기태 씨. 무슨 일이에요?”
-저기 팀장님.
“네.”
-왜 저랑 가자고 하셨는지 여쭤봐도 됩니까? 만토바 출장 말입니다.
“왜요? 나랑 같이 가는 거 부담스러워요?”
-그런 게 아니라 낮에 사직서까지 제출했는데 저한테 그 출장을 같이 가자고 하시는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 같단 생각이 들어서요. 아직 다른 팀원들한테는 제 퇴사 이야기도 안 꺼내시고...
“확실히 기태 씨가 생각이 참 많다.”
-...
“낮에 부장님 고함 치시는 거 못 들었어요? 그거 정 팀장이 주 대리 팀에서 인원 빼간 거 때문에 빡쳐서 그러신 거잖아.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곧바로 팀원들한테 기태 씨 퇴사 이야기를 꺼내나? 기태 씨는 사람들 입을 믿어요? 전 잘 안 믿어요. 백화점에서 제가 여자 따라간 거까지 다음날 바로 다 소문이 나는 곳이 회사 아냐.”
-...!
“어차피 나갈 사람이라고 시킬 일 안 시키고 퇴사일까지 정 팀장처럼 책상만 지키게 만들 생각은 없어요. 혹시 일손 딸리는 우리팀에서 그럴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던 건 아니죠?”
“아닙니다.”
“그럼 질문에 대답이 됐나요?”
-...네.
“가서 기태 씨가 할 일은 거의 없을 거예요. 저 역시 시장 조사 차원에서 도매업자들 만나러 가는 거니까. 그 자리에서 뭔가 물건을 주문하거나 계약을 하는 일 같은 건 없어요. 그냥 편하게 생각해요.”
-네, 이런 일로 연락드려서 죄송합니다.
“죄송은 무슨.”
그렇게 출발한 만토바 출장이었다.
가장 저렴한 항공권을 알아보고, 또 최대한 가성비 좋은 3성급 호텔을 검색해서 예약을 해야한다.
그나마도 팀장 출장이니 각방을 쓸 수 있지, 대리가 메인으로 가는 출장엔 남녀가 가지 않는 다음에야 한 방을 둘이서 나눠써야 하는 경우도 태반이다.
하지만 그런 만토바 출장이라도, 많은 홍성 영업맨들은 바로 이 만토바 출장 중에 꾸지 않아도 되는 한여름 밤의 꿈을 꼭 한 번씩은 꾸게 된다.
더군다나 만토바 출장이 처음인 사람들은 업계의 생리를 직접 볼 수 있고, 또 그래서 없던 욕심까지 스물스물 생겨날 수 밖에 없다.
패션 업계 유통 종사자들 사이에서는 별천지 같은 곳이 바로 이곳 만토바다.
프라다 작은 이브닝 백 하나가 30만 원, 40만 원 선에서 거래가 된다.
그런데 그 이브닝 백은 인터넷에 올리면 최소 120만 원, 130만 원은 거뜬하게 받을 수가 있다.
어디 그 뿐인가.
한국에선 없어서 못파는 토치 백이 여기엔 널리고 널렸다.
왜?
프리미엄 럭셔리 브랜드를 제외하고는 나라마다 선호하는 명품 브랜드가 다 다르고 또 유행하고 잘나가는 컬렉션이 다 다르니까.
한국이라는 좁은 시장만 봐오다가 유럽 그레이 마켓의 원투를 찍는 만토바에 직접 와서 세계 명품 시장 돌아가는 걸 직접 한 번 보고 나면 없던 욕심도 생겨날 수 밖에.
자기가 직접 떼다가 갖다팔면 몇 개만 팔아도 회사에서 욕 얻어먹어가며, 마시기 싫은 술 억지로 먹어가며, 며칠 연속 야근을 해가며 받는 월급보다 더 많이 가져갈 수 있을 거 같거든.
개인으로 찾아오면 얼굴도 보기 힘든 창고 사장들.
하지만 홍성의 이름으로 찾아가면 창고 사장들이 밥도 사주고 차도 대접해주거든.
롯데 아울렛, 신세계 아웃렛 본사 직원들도 이곳 만토바에 참 자주 온다.
그런 롯데 아울렛, 신세계 아울렛 본사 직원들보다 홍성의 이름으로 찾아가면 더 나은 대우를 받으니 눈이 돌아갈 수 밖에.
그렇게 홍성의 인맥인 창고 사장들을 자기 개인의 인맥으로 만들 수 있다는 착각을 하는 순간 사람은 맛이 갈 수 밖에 없다.
나라고 왜 그런 생각을 안 해봤겠나.
그리고 또 얼마나 많은 업계 종사자들이 도전을 해왔겠나, 그동안.
실제로 회사를 나가서 만토바 도매상들로부터 물건을 떼다 팔아서 제법 돈을 만진 사람들도 꽤 있다.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다만 잘 안된 사람이 훨씬 더 많다는 게 문제지.
그런데 참 희한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잘 안된 사람들은 안 보고 잘된 사람들만 보려고 한다.
잘 안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데.
자기는 뭔가 특별해서 무조건 잘 된 사람들 축에 낄 거란 기대를 하면서 말이다.
한 돈 천만 원 투자해서 시작을 해볼까?
그런 마음을 처음엔 누구라도 다 가진다.
내가 직접 안하더라도 내 가족 누군가를 시켜서 부업 비슷하게 하라고 해볼까?
그런 생각은 누구라도 다 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천하의 만토바 도매업자들이 한국돈 천만 원치 물건을 주겠나.
최소 5천 단위지.
그나마도 억단위 밑으로는 귀찮아서 상대도 안하려고 한다.
창고 사장을 직접 만난다는 건 말도 안되고.
그렇게 5천을 때려박아 물건을 구하는거 까지는 어떻게든 성공을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다음엔?
어디에다가 팔 건데?
어디 그런 물건을 싸게 떼다가 파는 사람이 한둘이냐는 말이지.
정 팀장처럼 아예 여기저기 돈을 끌어다가 제법 사이즈가 나오는 회사를 차린다면 말은 좀 달라진다.
하지만 그래도 힘들다.
더군다나 홍성이 작정하고 중간에 끼어버리면 답이 없어지는 거고.
정 팀장.
참 안타깝다.
더 솔직한 생각으론 샘통이고.
내가 직접 칼을 휘둘러야 한다는 부분이 좀 불편하기는 해도 어쨌든 누가 휘둘러도 휘둘러야 하는 홍성의 칼 아니었겠나.
딱 홍성이 만들어 놓은 만토바 루트에 파이프를 꼽는 거 까지만 했었어야 했다.
거기까지는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라도 알고도 모르는 척 눈을 감아줄 박 부장이었으니까.
그런데 거기서 홍성 영업팀 직원들을 하나도 아니고 거의 동시에 셋이나 빼가는 건 진짜 선을 넘어도 너무 넘은 거다.
대기업이 왜 대기업이겠나.
법무팀, 감사팀이라는 게 있다.
여기서 박 부장이 법무팀을 움직이지 않은 이유.
법무팀이 움직이면 자연스레 감사팀이 따라 움직일 것인데, 영업이사 계약을 눈 앞에 두고 그런 불미스런 일을 만들고 싶지 않은 거다.
그래서 처음 정 팀장이 만토바 루트를 가지고 나간다고 했을 때 웃으면서 참은 거고.
그걸 너무 잘 알고 이용했던 정 팀장.
그런데 하나는 알고 둘은 몰랐다.
박 부장 옆에서 이빨을 감추고 떡하니 버티고 있는 브레인 장 차장이 얼마나 공격적인 인물인지.
“하이, 미스터 공!”
“오랜만입니다, 미스터 스폰짜!”
마테오 스폰짜.
만토바 명품 도매시장의 큰 손 중 한 명.
정 팀장이 홍성 루트에 파이프를 꼽았다면 거기엔 무조건 스폰짜 창고가 포함되어 있을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