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
남아 있는 사람들의 사기
“정 팀장 이 새끼는 진짜 양심이 있는 새끼야, 없는 새끼야?”
갑자기 터져나온 박 부장의 사자후.
박기태와 이야기를 끝내고 다시 회사로 복귀를 했을 때였다.
박기태에게 받은 사직서를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을까 잠시 고민을 하고 있는데, 박 부장의 호통 소리가 터져나왔고, 한 순간 영업부 전체로 정적이 흐르기 시작했다.
고개만 빼꼼히 빼내어 도대체 박 부장의 사자후를 받아내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확인해봤다.
4팀의 주 대리였다.
그 옆에서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고 있는 장 차장.
장 차장이 흘리는 웃음엔 살기와 인내가 절묘하게 섞여있는 듯 했다.
그 와중에 박기태는 불안한 눈빛을 숨긴채 애써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려고 애를 썼다.
박 부장의 호통만으로는 정확하게 무슨 일 때문에 저렇게까지 화가 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정 팀장이 화근인 건 확실했다.
잠시 뒤 급하게 팀장 미팅이 잡힌다.
그리고 그 미팅 자리엔 4팀의 팀장대행을 하고있는 주 대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는 내가 너희들을 대하는 스타일을 좀 바꿔야 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름 냉정을 되찾으려고 애를 쓰고는 있지만, 박 부장의 모습은 불안불안했다.
마치 금방이라도 사자후를 터뜨릴 것만 같은 긴장감.
하지만 박 부장은 제법 오랫동안 냉정을 유지했다.
“선이라는 게 있잖아.”
장 차장의 표정 역시 단단하게 굳어있었다.
박 부장의 눈치를 보느라 굳어진 표정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장 차장 역시 뭔가에 단단히 빡이 쳐있는 모습이었다.
도대체 뭘까...
“이 선은 긋는 사람에 따라서 조금 휘어질 수도 있고, 한 쪽으로 치우칠 수도 있다고 생각하거든, 난.”
“...”
우리 모두는 침묵했다.
그저 저마다의 다이어리에 의미없는 끄적임으로 시간을 벌 뿐이었다.
“어떻게 영업하는 사람들이 사람 관계에 그 선을 자로대고 그은 것처럼 정확하게 그을 수 있겠어? 인간미 없이 말이야. 난 그을 수 있다고 해도 너희들한테 그러고 싶지 않다. 왜? 난 그게 우리 영업하는 사람들의 마지막 로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팀장들아. 지킬 건 지켜줘야지. 내가, 그리고 회사가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잖아. 정말 최소한의 것들만큼은 지켜줘야 하지 않겠냐?”
난 조심히 고개를 들어 박 부장의 눈치를 살폈다.
“누가 나가서 자기 사업 하지 말래? 아니잖아. 하라고 하잖아. 회사가 만들어 놓은 루트 뽑아다 거기에 파이프 꼽는 거까지 보고도 그냥 그러려니 하며 이해해주잖아. 그런데 거기서 더 나가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저기 부장님.”
김 팀장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물었고, 그 질문에 장 차장이 영업 4팀 2년차 누구누구와 계약직 누구누구가 정 팀장이 차린 회사로 이직을 하기 위해 사직서를 제출했다고 대신 대답했다.
장 차장의 설명이 끝나는 순간 김 팀장과 손 팀장은 거의 동시에 이건 진짜 좀 아니지...하는 표정으로, 각자 들고 있던 펜을 테이블 위로 아무렇게나 내려놓으며 박 부장이 가지고 있는 울분에 동참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반반이었다.
똥을 한보따리 싸질러놓고 나간 정 팀장에 대한 감정은 당연히 별로였지만, 저렇게까지 흥분을 할 일인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 같다.
그런데 잠시 후, 난 내가 부족해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박 부장 이하 손 팀장까지, 나를 제외한 모두가 회사의 입장에서 이번 사안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만토바 쪽에 클레임 한 번 넣으시지요, 부장님.”
평소 세상 사람 좋은 김 팀장까지 인상을 쓰며 먼저 만토바 쪽으로 클레임을 넣자는 말을 할 때부터 난 뭔가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나?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던 거 같다.
김 팀장이 평소 저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보이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겠지.
“네, 맞습니다. 만약 회사차원에서 먼가 제스처를 보여주지 않으면 앞으로 제 2의 정 팀장, 제 3의 정 팀장이 계속 나올 수도 있습니다, 부장님. 영원한 관계라는 건 없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기본은 지켜줘야 한다는 걸 이번 기회에 남아있는 직원들 모두에게 본보기로 보여줄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차장 자리를 놓고 박 터지게 물밑에서 경쟁을 벌이는 김 팀장과 손 팀장이 저렇게까지 입을 모아 공통된 의견을 말할 땐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 아닐까.
그리고 난 손 팀장의 말을 듣는 순간 아차! 할 수 밖에 없었다.
아직 팀장으로서의 경험이 부족했던 난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던 거다.
남아 있는 사람들의 사기.
정 팀장이 그런 온갖 반칙을 다 저지르고 있는대도 회사가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는다면 남아 있는 사람들은 회사가 우습게 보이지 않을까?
아니 우습게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착실하게 반칙 안하고 일하는 사람들 입장에선 뭔가를 손해를 보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
만약 내가 로또에 당첨되지 않아 건조하기 짝이 없는 직장 생활을 계속 이어나가고 있었다면, 정 팀장이 했던 얌체짓에 화가 안났을까?
내 이름으로 된 14억짜리 아파트가 생긴 뒤부터 난 지나치게 여유를 부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여유...
부릴 수 있음 부려야지.
하지만 난 여전히 회사로부터 팀장의 월급을 받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팀장의 월급과 팀장의 타이틀.
둘 다 지키고 싶었으면서 그 무게는 지고싶지 않았던 걸까?
자켓 안 주머니에 반으로 접혀 들어가 있는 박기태의 사직서.
만약 내가 이걸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박 부장에게 보고를 했다면 과연 난 뭐가 됐을까?
“아뇨.”
장 차장이 말했다.
“콧대 높은 브랜드 본사도 쉽게 못건드리는 애들이 만토바 애들인데, 저희가 클레임을 건다고 씨알이나 먹히겠습니까? 그런 일이 있었냐? 몰랐다. 그런데 나더러 뭐 어쩌라고? 이렇게 나올 게 너무 뻔하잖아요.”
장 차장의 말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던 김 팀장과 손 팀장은 곧바로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말고 부장님...”
난 장 차장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벌써부터 기대가 됐다.
유능한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이 장 차장의 뒤에서 그의 인성에 대해 욕은 하지만, 실력 하나 만큼은 트집 잡을 곳이 하나 없는 철두철미한 사람이 아닌가.
“만토바 애들...그냥 다 잡아버리죠, 이 참에.”
“...!”
팀장들 모두는 그게 무슨 허무맹랑한 소리인가...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 역시 어이가 없었다.
무슨 수로 천하의 만토바 애들을 잡자는 소린가.
하지만 그 와중에도 박 부장의 자세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테이블 위로 두 팔꿈치를 올려놓고 깍지낀 손에 턱을 괴며 깊은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만토바 애들을 다 잡아버리자니.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그리고 박 부장은 지금 저 허무맹랑한 소리 앞에 무슨 고민을 저렇게까지 깊게 하는 것일까?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정 팀장 사정 모르는 사람 있습니까?”
“그런 게 아니라...”
“정 팀장 집안 사정이야 개인적인 부분인 거고, 또 일은 일 아니겠습니까. 지금 정 팀장 하나 때문에 몇 명이 고생을 하고 있습니까. 나갈 때 인보이스 빵구내고 나간 거, 그 중에서 현재 주 대리가 큰 소리 나올까봐 일부러 보고 안하고 혼자 이리저리 막고 있는 게 몇 개나 되겠습니까?”
“흐음...”
“사람 아닙니다, 정 팀장. 뭘 그렇게 미련을 가지십니까?”
“너희는 제발 그러지 마라, 내가 부탁 좀 하자. 엉?”
“...”
“다들 사정 빤히 다 아는 사람들끼리 이게 지금 할 짓이냐?”
이상하게 오늘따라 박 부장이 하는 의미없는 말들이 꼰대 잔소리처럼 들리지 않는 이유는 뭘까.
“그때 잠시 이야기 나왔다가 들어갔던 편집샵 건, 이참에 진행해버리시죠.”
“흐음...”
“어차피 언젠간 저희 홍성도 뛰어들어야 하는 판 아니었습니까.”
우와...이게 지금 장 차장 입에서 편집샵 건을 진행하자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심각한 사안이었단 말인가?
편집샵 건은 우리 홍성 인터네셔널이 업계 후발주자인 성심 물산을 따라한다는 소리가 나올 가능성이 있어서 이야기만 살짝 나왔다가 다시 뭍힌 사업이었다.
백화점에 명품 편집샵을 오픈시켰던 성심 물산.
물론 따지고 보면 성심 물산 역시 미국의 알제이 유통 그룹을 벤치마케팅 한 것 뿐이다.
하지만 그 유통 시스템을 국내 백화점에 처음 접목시킨 건 성심 물산이 확실하고.
당시 그 건에 대해 조금 더 지켜보자는 말을 했던 사람이 바로 장 차장이었다.
그리고 지금 장 차장은 자신이 보류를 하자고 박 부장을 설득했었던 그 편집샵 건을 다시 수면 위로 띄울만큼 빡이 쳤다는 말이고.
박 부장의 눈빛이 달라진다.
그리고 김 팀장은 물론이고, 평소 장 차장과 사이가 좋지 않은 손 팀장 마저 지금 꺼내기에 아주 적절한 패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언제 뛰어들어도 뛰어들어야 하는 판은 맞아.”
박 부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를 포함한 모든 팀장들은 저마다 머리를 굴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일이 많은 사업이다.
나크리스 런칭과는 비교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접촉을 해야하는 곳이 많고, 또 만토바에서 물건을 받아오는 만큼 재고관리가 까다롭다.
만토바가 물건은 싼데, 싼 만큼 하자 있는 물건이 들어올 확률도 높다.
그리고 AS쪽은 아예 포기를 해야하는 애들이고.
하지만 그런 만큼 마진이 엄청나다.
최소 주문 금액도 개인 업자가 아닌 홍성 인터네셔널의 기준에선 없는 거나 마찬가지고.
만약 마진을 좀 더 빼앗아 오려면 주문하는 금액을 올려버리면 된다.
완전 동대문 스타일이다, 만토바 애들 장사하는 스타일은.
주문 물량을 높혀주면 기분에 따라 앉은 자리에서 제품 한 박스 정도는 그냥 서비스로 가져가라고 하는 경우도 있는 애들이다.
“그때 신발 편집샵 만들어보자고 했던 게 누구였어?”
이런 씨댕...
그땐 나크리스를 받을지 몰랐다.
팀장으로 승진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열린 팀장 미팅에서 다른 팀이 짬시킨 브랜드들 만으로는 팀 매출을 올리기가 힘들단 판단, 그래서 이것저것 궁리를 하다가 신발 편집샵을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아이디어를 냈었다.
그리고 그 아이디어를 듣고 박 부장이 예상보다 더 적극적으로 반응을 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결론은 장 차장의 커트에 걸리기는 했지만.
지금 영업 5팀에선 버거워진 프로젝트다.
박기태가 빠진다고 하지 않나.
아무리 장향은이 들어왔다고는 해도 장향은은 어디까지나 센터.
현장을 뛰어다닐 파워풀한 인원이 빠진 상태에서 이지혜는 나크리스를 맡아 나가야 하고 나랑 양 대리 둘이서 그걸 진행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힘들다.
“공 팀장이 낸 아이디어였잖습니까. 그때 부장님께서 앞으로 영업 5팀 팀매출을 어떻게 올릴거냐고 물으셨고.”
“그랬지. 공 팀장.”
“네, 부장님.”
“나크리스 런칭 했잖아.”
“...네.”
“이제 좀 여유 있을 거 아냐?”
“그게...”
“버릴 브랜드 있음 이참에 과감하게 버려. 그리고 진행해, 그때 해보겠다고 했던 거.”
하기만 하면 팀매출은 무조건 오른다.
당시 몇 가지 생각해둔 브랜드가 있었는데, 한국에서 불티나게 팔리는 골든구스를 시작으로 발렌티노, 발렌시아가, 몽클레어, 지미추 정도만 잡을 수 있다면 매장에 까는 순간 다 팔려나갈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여기서 난 자켓 안주머니 안에 들어있는 박기태의 사직서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재경 부장 컨펌은 내가 받아줄테니까.”
박 부장의 마지막 말은...그렇게 해서라도 회사 차원에서 정 팀장을 죽이겠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공 팀장 넌 만토바 가서 브랜드 초이스만 해.”
장 차장이 말했다.
“무슨 브랜드를 잡아오더라도 편집샵으로 깔 수 있도록 해당 브랜드 본사쪽하고는 내가 직접 딜을 쳐줄테니까.”
“...!”
“없는 인원가지고 그거까지 신경 쓰면서 하려면 머리 깨질 거 아냐.”
확실히 장 차장이다.
그게 제일 골치 아픈 부분이다.
현재 머릿속으로 떠오른 브랜드들 모두 홍성 인터네셔널에서 취급하는 브랜드들이 아니다.
하나같이 본사가 직접 한국에 가지고 들어와서 브랜드 뒤에 코리아라는 타이틀을 붙여 지사로 운영되는 브랜드들.
그런 브랜드들로부터 컨펌을 받아내는 건 보통 까다로운 작업이 아니다.
지사들은 당연히 자기네들 파이를 나눠먹어야 하기 때문에 거절을 할 것이고, 이런 경우 본사의 문을 두드려야 한다.
그런데 본사들이라고 자기들이 지사를 낸 나라에서 반 병행처럼 그레이 마켓을 통해 유통시키는 걸 깔겠다고 하면 누가 좋아라 할까.
자기네 전체 매출이 조금이라도 올라간다는 부분에선 두 손을 번쩍들어 반기겠지만, 홍성 인터네셔널이 편집샵으로 해당 브랜드를 팔아보겠다고 하면 한국 지사가 해당 브랜드 본사에 브랜드 컨트롤을 요규하는 항의를 할 것이 분명하다.
솔직히 이 부분을 풀어내는 작업은 결코 쉽지가 않다.
그런데 장 차장이라면 틀림없이 해낼 것이다.
여기서 난 잠시 고민을 해본다.
그리고 짧은 고민 끝에 자리에서 일어나 장 차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한 번 해보겠습니다.”
“대신...”
“...?”
“책임지고 만토바에서 정 팀장 나가리 시켜라. 그리고 여기 모이신 팀장님들 모두 공 팀장이 만토바 쪽 접촉하기 전까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있었던 미팅 내용 밖으로 안 흘러나가게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