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공 팀장님은 알고 계셔야 할 거 같아서요
이름이 강혜선이라고 한다, 강혜선...
그동안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이름도 모르면서 혼자 마음속으로 진도를 빼다가 접었던 걸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런 창피함은 나만 아는 것으로 숨겨놓고 나와 강혜선은 각자의 커피가 올려진 좁은 원탁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막상 시간 좀 내어달란 용기까지는 간신히 만들어냈는데, 여기서부터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이 백화점에서 근무하세요?”
“아뇨, 백화점에 들어가는 브랜드들을 컨트롤하는 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러시구나...그런데 상당히 늦게까지 근무를 하시네요?”
7시 반이 넘었다.
“일 자체가 바쁠 때는 정신없이 바쁘고 또 한가할 땐 할 게 없어서 회사 눈치가 보일 정도로 한가하고 그렇습니다.”
“그러시구나...”
“혹시 제가 실례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실례요?”
“괜히 부담스럽게 차를 마시자고 해서...”
“아니에요, 마침 안그래도 집에 가는 길에 커피나 한 잔 사서 갈까...하던 중이었거든요.”
진심인지, 아님 내가 민망해하지 말라고 배려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대답이라도 그렇게 해주니 마음은 조금 가벼워지는 거 같았다.
지현이 와이프의 지인이다.
실수를 만들어선 안된다.
그런 걸 알면서도 이성보다 몸이 먼저 반응을 해버렸고.
물론 여기서 스톱을 해도 된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근데 서영 씨랑은 어떻게 아세요?”
“서영이요? 대학 동창이에요. 저 재수해서 대학 들어갔거든요.”
“아...”
“학교 다닐 땐 저희 집에 와서 잠도 몇 번 같이 잘 정도로 많이 친했는데, 졸업하고 서영이가 다시 부산으로 내려간 뒤부턴 연락이 많이 뜸해졌죠. 한동안 SNS로만 서로 안부를 확인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결혼 한다면서 연락이 왔더라고요.”
“저보다 낫네요. 전 대학 다닐 때 같이 어울려다니던 친구들 중 아직까지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는 아무도 없거든요.”
“저도 비슷해요. 서영이 말고는 딱히 없어요. 그나마도 몇 년 만에 만난 건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오랜만에 만난 거고.”
“그렇군요...그런 의미로 제가 전화번호 좀 물어봐도 될까요?”
“그런 의미는 무슨 의미인가요?”
말과는 달리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간신히 숨기며 강혜선이 말했다.
“혜선 씨는 기억을 못한다고 하시는데, 전 부산에서 혜선 씨를 다시 보고 좀 놀랐습니다.”
“왜요?”
“혜선 씨도 아까 나크리스 매장 앞에서 저 보시고 상당히 놀라셨던 거 아니었어요?”
“그야...”
“딱 그런 느낌으로 제가 결혼식장에서 혜선 씨를 보고 놀랐습니다. 저만 기억하고 있는 거지만, 어쨌든 상당히 반갑더라고요.”
“...”
“만약에...진짜 만약에 다음에 또 우연히 저랑 마주치게 되면 기분이 어떨 거 같으세요?”
“음...글쎄요?”
“아마도 이런 느낌이 드실 거예요.”
“무슨 느낌이요?”
“이건 도대체 뭐지? 두 번까지는 그럴 수도 있다고 치겠는데, 세 번이면 진짜 뭔가 있는 거 아닌가? 하는 느낌이요. 제가 지금 딱 그렇거든요.”
한참동안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 침묵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잠시 후 수줍은 듯 미소를 숨기며 가방에서 자신의 스마트 폰을 꺼낸 강혜선.
그녀는 자신의 스마트 폰을 내게 건네며 내 전화 번호를 찍어달라고 했다.
난 내 번호를 찍어 연결 버튼을 눌러놓고, 바지 주머니에서 폰이 진동을 하는 걸 느낀 다음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여자 친구 없으세요?”
마치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그동안 다 죽어버린 줄 알았던 연애 세포가 솜털을 비집고 하나씩 피부 밖으로 솟아나고 있는 기분이었달까?
“있었음 이렇게 커피 한 잔 같이 하자고 하지도 못했겠죠.”
강혜선은 눈썹만 살짝 들었다 내리며 내가 내놓은 대답에 꽤 진정성이 느껴진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 그녀에게 내가 말했다.
“아마 그때 결혼 할 남자가 있단 말을 안들었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번호를 물어봤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물어보셨음 과연 제가 줬을까요?”
“하긴 그건 또 그렇네요.”
“좋은 날이잖아요, 서영이 입장에서는. 축하하러 내려가서 위로받고 오고싶지는 않더라고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좀 했어요.”
결혼 할 남자가 진짜로 있긴 있었던 모양이다.
“헤어진지 얼마 안됐을 때였어요. 서영이한테 결혼한단 소리 처음 들었을 때까진 만나던 남자가 있었거든요. 결혼이야기는 서영이가 조금 오버해서 한 말이고, 그냥 좀 진지하게 만나던 남자가 있었는데, 서영이 결혼식 있기 2주 전쯤에 이미 헤어진 상태였어요.”
내 나이 서른 넷.
대학교 1학년 때 만난 같은과 동기와 2년 정도 교제를 하다가 군대에 가서 헤어졌었다.
그게 내 두 번째 연애였고, 또 마지막 연애였다.
첫 번째 연애는 고등학교 때 했던 풋사랑이라 연애라고 하기도 좀 민망한 수준이고.
군대 전역과 동시에 기울기 시작한 집안 형편.
그때부터 난 참 열심히만 살았던 거 같다.
그렇게라도 살지 않으면 집안을 기울어뜨린 누군가를 원망하게 될 거 같았으니까.
집, 강의실, 도서관, 집, 강의실, 도서관...
그게 전역 후 복학한 학교 생활의 전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집안이 누군가로부터 발칵 뒤집어졌을 땐 취업을 핑계로 부산을 도망쳐나왔다.
그렇게 지금까지 연애다운 연애 한 번 못해보고 나이만 먹어가고 있었던 거다.
그런 내 앞에 강혜선이라는 여자가 나타났다.
미소가 참 따뜻한 여자였다.
“연락 드려도 될까요?”
참 바보같은 질문이지.
하지만 나이가 사람을 겁쟁이로 만든 거지, 원래부터 내가 그렇게 답답한 놈은 아니란 거.
지현이가 아닌 지현이의 와이프라는 존재가 끼어있는 관계다보니 신중해질 수 밖에 없었다.
강혜선이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전화번호 수집이 취미세요?”
잠시 후에야 난 그녀가 한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출근을 했더니 이미 팀원들 모두가 전날 백화점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알고 있는 눈치였다.
역시 박기태 입 가벼운 건 알아줘야한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얼굴에 걸어놓고 날 바라보는 팀원들.
양 대리는 아주 노골적으로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리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팀장님.”
“좀 떨어지죠?”
“인사는 상대방 눈을 보고 하는 거라고 배워서요.”
“진작에 좀 그러시죠.”
“그러니까요. 그래서 오늘부터는 그렇게 인사를 하겠다는 거 아닙니까.”
“아, 됐으니까 좀 떨어지라고요.”
“누굽니까?”
“뭐가요?”
“저희 몰래 선보셨습니까?”
“제가 뭐 죄지었습니까? 몰래 선을 보게...”
“오호...선을 본 게 맞으시다?”
“아침부터 아주 그냥 힘이 넘쳐나십니다?”
“진짜 누굽니까?”
바로 그때였다.
4팀의 팀장진 주 대리가 우리팀 파티션을 노크했다.
“저기 공 팀장님?”
“아, 네. 들어오세요.”
“저기...시간 괜찮으시면 저랑 커피 한 잔 안하시겠습니까?”
안 그래도 커피는 마셔야 하는 거니까.
그런데 주 대리가 무슨 일이지?
평소에 나랑은 지나치다 인사 정도 하는 게 고작인 사람인데...
탕비실 옆으로 난 휴게실 테이블로 주 대리와 마주보고 앉았다.
“오늘 또 외근이시죠?”
“네, 나크리스 오픈 전까지는 계속 외근일 거 같습니다. 조금 있다가 또 나가봐야 합니다.”
“안그래도 그러실 거 같아서 나가시기 전에 말씀을 좀 드리려고요.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정 팀장님 말입니다.”
똥이란 똥은 다 싸지르고 퇴사한 정 팀장 소리를 듣는 순간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벌써부터 불편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업무 인수인계 보류기간 한 달을 그냥 자기 개인 시간으로 보내다가 퇴사를 한 사람이다.
뭐 보통 그정도는 그동안의 노고를 참작해서 보고도 못 본척 그냥 넘어가주는 게 관례이긴 하지만, 정 팀장은 그 정도가 많이 지나쳤었다.
오죽했음 직접적인 상관도 없는 다른 팀에서까지 그의 마지막 업무 인수인계 하는 모습에 하나같이 실망을 했을까.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양심적인 퇴사는 아니지 않나.
회사 루트로 만토바 쪽 도매업자들과 접촉해 물건을 따로 받기로 하고, 그렇게 자기 사업 플랜을 다 만들어 놓고 퇴사를 한 몰염치한 사람이다.
백 번 양보해서 거기까지는 인정.
그래선 안되는 거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기준인 것이고 정 팀장 입장에선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참 비양심적이었다.
만토바 쪽 도매업자를 뚫는 일에 회사 루트를 이용하더라도 사직서를 내기 바로 직전까지 회사 경비로 만토바 출장을 다니며, 회사 일이 아닌 자기 사업 아이템을 팠다는 건 정말 비양심이라고 봐야한다.
그러한 사실들이 밝혀진 뒤에도 영업부 모두가 쉬쉬하며 모르는 척 했던 건 만약 그걸 누군가가 문제를 삼기라도 하면 그 책임은 회사를 나가면 그만일 정 팀장이 아니라 영업이사 진급을 코 앞에 둔 박 부장이 고스란히 떠안게 될 것이니까, 그렇게 되면 틀림없이 그 불똥은 크나 작으나 우리에게도 튈 것이 나무나 명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 팀장님이 왜요?”
“현재 회사를 차리고 일손이 좀 부족한 모양이에요.”
“그래도 생각했던 것 보단 일이 잘 되고 있나보네요?”
“프라다, 돌체엔가바나, 베르사체, 모스치노, 까발리, 필립플레인까지 잡은 모양이에요.”
“크흐...”
“지금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사필로 쪽에 연줄이 있는 도매업자한테 선그라스도 받기로 되어있는 모양이고.”
“능력 좋네...아무리 그레이 마켓(회색시장. 위법이면서도 합법적인 면도 있는 시장 - 주로 이탈리아 만토바 쪽 명품 시장을 그레이 마켓이라고 부른다.)이라도 브랜드만 놓고 보면 우리 홍성보다 더 알짜네요. 하하하.”
“그걸 또 한국이 아니라 중국쪽으로 집중 유통시키는 모양이더라고요.”
“중국이요? 듣고보니 그렇네. 브랜드가 하나같이 다 한국에선 지나가고 이제 막 중국에서 뜨는 브랜드들이네.”
“아무래도 한국을 한 번 찍고 보내는 게 관세 부분에선 유리하니까. 진짜 타겟은 중국시장이다 이거죠.”
“혹시 뭐 관세 장사하는 거예요.”
“아마도 거기서 남겨먹는 시스템인 거 같아요.”
“간도 크다. 혹시 뭐 인천에서 배로 띄워 보내는 거예요?”
내 말에 주 대리는 바깥은 조심히 살핀 후 고개를 끄덕였다.
“느낌이 그래요.”
“뭐 그러거나 말거나. 전 관심 없습니다. 주 대리님도 신경 쓰지마세요. 어차피 나간 사람인데, 뭣하러 신경 써요?”
“당연히 저도 그러고 싶은데, 저희팀 직원들에게 몰래, 몰래 접촉을 하고 있는 모양이더라고요. 홍성 대리 월급 맞춰줄테니까 생각 있으면 와서 일하라는 식으로...”
“답 없네, 진짜...”
“뭐 원래 그런 분이셨으니까, 크게 놀랍지도 않습니다. 다만...공 팀장님 팀의 기태 씨한테도 접촉을 한 모양입니다.”
“...!”
“공 팀장님은 알고 계셔야 할 거 같아서요. 정 팀장님한테 연락을 받은 저희팀 직원이 저한테 말해주더라고요.”
“뭐라...고요?”
“5팀의 박기태도 이야기 중에 있다면서, 홍성에서 2년 정도 했으면 홍성에선 배울 거 다 배웠다는 식으로 이쪽 업계에 들어와서 자기 장사 한 번 안해보고 끝내는 건 바보라고 말을 했다네요. 거기에 월급까지 높게 부르니 멋 모르는 애들은 눈 돌아가죠. 사실 뭐 공 팀장님도 아시겠지만, 2,3년차 정도 되면 대충 시장 돌아가는 거 눈에 보이잖아요. 어느정도 보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직접 해볼만하다 착각들을 하게 되고. 어차피 나중에 개인 장사 할 거 스타트업 회사 같은 좀 더 현장 가까운 곳에서 일을 해보고 싶은 욕심도 생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