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25화 (25/325)

# 25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

처음 홍성 인터네셔널에 입사를 했을 때, 날 가장 설레게 만들었던 건 부모님이 사주셨던 타임 정장도 아니었고, 삑하고 찍기만 하면 보안팀 앞 개찰구 무사통과, 사내 식당을 이용할 수 있게 도와주는 사원증도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 사원증을 받으면 기분이 날아갈 것처럼 들뜬다고 하던데, 난 뭐 그냥 그닥...

난 오히려 내 책상, 앞으로 내가 앉아서 근무할 수 있는 책상을 보는 순간 가슴이 뛰었다.

누군가가 쓰다가 내 차지가 된 컴퓨터 모니터, 그리고 급하게 치워진 책상을 가리키며 “앞으로 은태 씨 자리는 여기야.” 라고 확인을 받는 순간 그게 그렇게 설레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는 몰랐다.

어째서 신입 사원은 복도쪽 파티션에 붙어있는 책상을 써야하며 내 사무 책상 보다 대리의 사무 책상이 한 뼘 정도는 더 넓은지를.

그렇게 1년 정도 시간이 지나자 함께 입사한 동기들이 하나둘 씩, 자신이 상상한 직장 생활과 다르다는 이유, 상사로부터 받는 굴욕을 자기가 왜 참아야 하느냐는 이유, 자기는 이런 곳에서 이런 대우를 받으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 등으로 회사를 떠났다.

대부분 1년이 딱 고비다.

그 1년을 넘기면 대리까지는 무난하게 진급을 하고 그 뒤로 찾아오는 한 번의 위기만 더 넘기면 또 팀장까지는 어떻게 저떻게 승진이 되는 시스템인 거 같다.

다른 회사는 모르겠지만, 홍성 인터네셔널 영업부는 그렇다.

입사 후 1년.

“내가 여기 아니면 어딜 가겠어...”하는 생각으로 버티는 사람과 “내가 여기 아니면 일 할 곳이 없겠어?” 라는 생각으로 나가는 사람.

누가 맞고 누가 틀린 건 없다.

다만 여기 아니면 어딜 가겠어...하는 생각으로 버티다 보니까 왜 신입사원의 자리가 복도 쪽으로 난 파티션에 딱 달라붙어있는지, 왜 대리의 자리는 어느 팀을 막론하고 다른 팀과의 경계를 만드는 파티션에 딱 달라붙어 있는지, 그리고 어째서 팀장의 자리는 창가쪽, 하지만 복도를 향해 위치해 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조금씩 더 회사라는 집단에 대해 자세히 보이기 시작한다.

팀장의 의자엔 팔걸이가 있다는 것과 차장, 부장으로 올라가면 팔걸이에 목받침까지 있는 의자를 제공받는다는 것, 그리고 책상의 너비 역시 책상에 앉아있는 시간에 비례해 지나치게 넓고 크다는 걸.

그렇게 좁은 세상 안에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만큼의 혜택은 받아보고 나가겠다는 생각으로 오늘을 버티고, 또 내일을 버틸 준비를 하다보니 어느덧 팀장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제 팀장이 되어 창문을 등지고 복도쪽을 향해 사무 책상을 쓰다보니 대리 때엔 신경도 쓰지 못했던 세세한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

삼삼오오 모여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며 점심 시간 복귀를 하고 있는 한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분명 나갈 땐 그들과 함께 나갔는데, 들어올 땐 멀찍이 혼자 떨어져있는 이지혜를 발견했다.

그리고 난 자리에 앉아 모르는 척 이지혜 뿐 아니라 다른 팀 계약직 사원들의 행동과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각자의 팀으로 찢어지며 서로에게 따뜻한 미소를 주고받는 그들.

하지만 그들의 미소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지혜에겐 미치지 않았다.

어떻게든 힘겨운 미소를 잃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이지혜.

난 사무실로 복귀하는 그녀를 한참동안 말없이 지켜봤다.

“팀장님, 벌써 식사 다녀오셨어요?”

“아뇨, 전 아직 안갔어요.”

“네?”

이지혜는 벽에 걸린 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후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있다가 매장 갈 일이 있어서요. 매장에서 바로 퇴근할 겁니다, 오늘은.”

“아...”

“지혜 씨.”

“네, 팀장님.”

“이리 잠깐만 와볼래요?”

아직 다른 팀원들은 점심 복귀를 하지 않은 상황.

난 이지혜에게 꼭 이 말을 해줘야 할 거 같았다.

“내일 출발하죠, 트레이닝.”

“네.”

“근데 얼굴이 왜 그렇게 어두워요?”

“제가요? 아닌데?”

“어두운데?”

이지혜는 애써 밝은 척, 마치 내가 뭘 잘못 봤다는 식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처음 지혜 씨, 우리 5팀으로 배정 받았을 때 음...같이 어울려다니는...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되지? 그러니까 계약직 사원들끼리 자주 뭉치죠?”

“자주는 아니더라도 일주일에 한 번, 이주일에 한 번씩 회사 마치고 맥주도 마시고 식사도 같이 하고 그럽니다.”

“그러니까요. 그리고 오늘처럼 다같이 점심을 먹으러 가기도 하고.”

“그게 무슨 잘못이라도...”

“아뇨, 잘못은 무슨...그냥 궁금해서요. 도대체 뭘 위해 입사 시기도 다 다르고 같은 팀도 아닌데 저렇게 전우애를 증명이라도 하듯 몰려다닐까...하고 말이에요. 지혜 씨가 우리 5팀으로 처음 배정 받았을 때 다들 뭐라고 하던가요?”

이지혜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피했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나.

계약직 사원에게 영업 5팀과 같은 급설된 팀은 정규직 전환은 커녕 재계약의 기회도 쉽게 따내지 못할만큼 척박한 지역이란 걸.

“다들 걱정하지 않던가?”

“...네.”

“5팀으로 배정받아 어떻게 하냐, 더군다나 팀장도 완전 짬안되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걱정된다...그래도 본인만 열심히 하면 얼마든지 기회가 있으니 용기 잃지말고 열심히 해라...”

“...”

“그거 다 거짓말이에요. 자기들이 그걸 어떻게 알아? 자기들이 본인만 열심히 하면 얼마든지 기회가 있다는 걸 어떻게 아냐고. 자기들도 똑같은 처지들이면서...”

“...!”

“본인만 열심히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절대 아니에요. 더군다나 대리 밑으로는 본인이 아무리 열심히 해도 자기 실적이 겉으로 드러날 수가 없어. 그러니까 지혜 씨.”

“네, 팀장님.”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 듣지마요.”

이지혜는 입술을 숨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지혜 씨랑 같이 점심 먹으러 나갔던 사람들 중 우리 5팀으로 배정을 받은 지혜 씨를 진심으로 걱정했던 사람들이 몇 명이나 있었을 거 같아요? 겉으로는 걱정하는 척 했겠지. 하지만 그런 사람들 대부분은 겉으로는 지혜 씨를 걱정하는 척 하며 속으로는 지혜 씨가 처한 상황에 자기들의 입장을 되돌아보며 그나마 난 다행이다...하는 식으로 안심을 하고 또 위로를 받았을 거란 말이야.”

“...!”

“아닐 거 같아요?”

이지혜는 끝까지 대답을 못했다.

“내가 너무 냉정하게 말하는 거 같아서 나 역시 마음이 안좋은데...그게 현실이에요. 왜 저 사람들이 얼마 전까지는 지혜 씨를 그렇게 챙기는 척 하다가 지혜 씨가 트레이닝에 참석하기로 된 이후부터 냉랭해졌을까?

“...!”

“더이상 지혜 씨를 보며 자기들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없게 됐거든. 위로하고 격려하는 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잘하는 거예요. 왜? 연민이라는 감정 자체가 다른 한편으론 자기 위안을 도와주는 감정이거든. 그런데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 중 남이 자기보다 조금 더 좋은 기회를 얻게 됐을 때 그걸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건 참 힘들어. 그런 걸 힘들어하는 사람들한테 아까운 지혜 씨 에너지 계속 빼앗길 거예요?”

“...아뇨.”

“나 그러라고 지혜 씨 트레이닝 보내는 거 아닙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렇다고 오늘 지혜 씨와 같이 점심을 먹으러 나갔던 사람들을 나쁘게 보란 말은 절대 아니에요. 다만 지혜 씨는 지혜 씨의 직장 생활을 하란 말을 해주고 싶을 뿐이에요.”

“항상 신경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팀장님.”

“항상 미소 잃지 않고 화이팅해줘서 고마워요, 지혜 씨.”

수요일부터 시작되는 나크리스 트레이닝에 참가시키기 위해 장향은과 이지혜의 스케줄은 월요일까지만 잡아놓고 다 빼버렸다.

브랜드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보통 트레이닝은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삼일에 걸쳐 하는데, 나크리스는 마침 일반적인 스케줄대로 트레이닝을 준비했고, 난 장향은에게 피곤하겠지만 트레이닝 일정을 끝내놓고 이지혜를 데리고 토요일 하루 정도는 파리 투어를 시켜주라고 주문을 했다.

직접 돌아다니며 실제로 보는 게 힘이고, 손으로 만져보는 게 경쟁력인 바닥이다.

아무리 영업팀이지만, 명품 시장에 대한 이해만큼은 꾸준히 공부를 해야한다.

더군다나 아직 사무실에서 컴퓨터로만 명품 시장을 이해하고 있는 이지혜에게 이번 트레이닝은 무척이나 갚진 경험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일주일이 흘러 나크리스 트레이닝을 마치고 파리에서 다시 회사로 복귀한 이지혜의 얼굴엔 내가 백날 사무실에서 꼰대를 자처하며 이런저런 잔소리를 늘어놓았을 때보다 더 확실한 야망뽕이 장착되어 있었다.

눈매는 매서워졌고, 입술은 단단해져 있었다.

“저기 이거...”

장향은이 나크리스 가방 두 개와 나크리스 측에서 뽑아준 세관서류 한 장을 내 책상 위로 올려놓았다.

“크흐...그래, 트레이닝 참가 한다고 짐싸고 주말 반납하는 게 귀찮아서 그렇지, 막상 가면 저런 맛이 있지.”

양 대리는 장향은이 내려놓은 가방 두 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 양 대리에게 내가 농담을 걸었다.

“그럼 본인이 가던가.”

“간다고 했음 잘도 보내줬겠다.”

난 세관서류에 사인을 해놓고 이지혜의 얼굴을 쳐다봤다.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내 눈빛을 피하는 이지혜.

“뭐가 지혜 씨꺼야?”

이지혜가 수줍게 검은색 홀스헤어 가방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자, 한 번 들어봐요.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한 번 보자.”

억지로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숨기며 못이긴척 가방을 손에 든 이지혜.

그런 이지혜를 향해 양 대리가 다시 또 농담을 던진다.

“이야...이제 좀 홍성 인터네셔널 영업사원 티가 나네. 그거 리테일 프라이스 얼마짜리야?”

“6200달라요.”

장향은의 말에 양 대리는 짐짓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잘 쓰겠습니다, 팀장님.”

“인사를 왜 나한테 해요? 준 건 나크리스 본사인데. 자 이거 내 사인 넣은 거 스캔 떠서 나크리스 본사에 보내줘요.”

“네.”

모든 브랜드가 다 그런 건 아닌데, 나크리스처럼 공격적으로 영업을 시도하는 브랜드 회사의 경우는 트레이닝에 참가한 파트너 기업 직원들에게 자기네 상품을 하나씩 선물로 주기도 한다.

그리고 그 선물을 줄 때엔 세관에서 걸리지 않도록 샘플 관련 품목이라는 서류를 따로 만들어주고.

“그나저나 낙스 쪽 레퍼런스 잘못 온 건 어떻게 됐어요? 잘 처리 됐어요?”

“빨리도 물어본다.”

장향은의 물음에 양 대리가 혀를 내두르며 엄살을 부렸다.

그리고 그 옆에서 박기태가 자신의 두 손을 보라는 듯 흔들며 말했다.

“저 지문 다 없어진 거 같아요.”

“왜요?”

“왜긴요. 팀장님이랑 대리님, 그리고 저 셋이서 물류창고까지 가서 이틀동안 들어온 박스 다 깠잖아요.”

“헐...그게 그렇게까지 심각한 문제였어요?”

“심각한 정도가 아니라 그냥 답이 안나오는 수준이었어요.”

“팀장님.”

“네.”

“제가 전화 넣어서 한 번 털어볼까요?”

“놔둬요. 어차피 낙스는 나크리스 성적보고 된다 싶으면 접어야돼. 매출은 둘째 치더라도 꼼꼼하지 못하게 일 처리하는 건 실력이 아니라 자기네 브랜드에 애정이 없다는 말이거든. 이게 벌써 몇 번째야? 그걸 우리가 전전긍긍 꼭 붙들고 있을 이유가 어디에 있어요?”

“그렇죠.”

“안그래도 이번에 박스 까면서 안에 든 내용물들 다 사진으로 찍어서 부장님한테 보고드렸어요. 재무 쪽에서도 보류 판정 나왔고. 일단 안되는 브랜드 잡고 푸쉬하지 말고 나크리스부터 천천히 진행해 보자고요.”

“네.”

“지혜 씨.”

“네, 팀장님.”

“그거 누가 골랐어요?”

난 이지혜가 들고 있는 홀스헤어 가방을 눈짓하며 물었다.

“제가요.”

“어울린다. 보는 눈이 있어. 아끼지 말고 들고다녀요. 그게 닳아야 그 핑계로 또 다른 트레이닝에 참석하지.”

“넵!”

그렇게 다시 한주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런데...

“야, 손 팀장! 말 자꾸 그따구로 할래? 내가 네 친구야?”

“제가 뭘요! 그러는 김 팀장님이야 말로 너무하시는 거 아닙니까?”

“뭐? 아니 진짜 이 친구 이거 못쓰겠네...내가 그동안 별 말 안하고 이래도 허, 저래도 허 하니까 사람이 좋아보여? 살살 기어오르는 거 못본채 가만히 있으니까 보자기로 보이냐고!”

“말씀 좀 가려하시죠. 누가 누구한테 기어오른단 말이에요! 같은 팀장들끼리 말씀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닙니까?”

싸움이 났다.

물론 구경만 하면 된다.

불구경 다음으로 재밌는 게 옆집에 난 싸움구경이라고 하지 않나.

그동안 차장 진급을 사이에 놓고 보이지 않는 알력 다툼을 진행하던 1팀의 김 팀장과 2팀의 손 팀장이 간만에 영업부에 활기를 불어넣어주겠다고 정면으로 충돌을 했다.

1팀과 2팀 직원들은 몸싸움으로 발전되기 일보직전인 두 팀장 사이에서 안절부절 못했다.

“아침부터 뭔데 이렇게 시끄러워!”

그리고 터져나온 박 부장의 사자후.

우와, 진짜 간만에 재밌는 상황이다.

그래, 한 번씩 이런 이벤트라도 열려야 일할 맛 나지.

김 팀장과 손 팀장의 정면충돌이라...

영업부 안에서는 빅 매치 중 빅 매치다.

이유야 뻔하지.

안봐도 비디오다.

4팀의 정 팀장이 퇴사 신청을 하면서 주 대리가 팀장 대행을 맡게 됐고, 그러는 과정에서 4팀이 가지고 있던 몇몇 브랜드가 공중으로 뜰 수 밖에 없었다.

주 대리의 능력으로는 핸들링이 힘들고, 그렇다고 방치를 할 수는 없는 브랜드.

일명 들고만 있어도 알아서 매출이 찍히는 중형 사이즈 브랜드.

그걸 서로 먹겠다고 지난주부터 1팀과 2팀이 알게 모르게 기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우리 5팀이야 욕심이 나도 맨파워가 부족해 입맛조차 다실 수 없는 브랜드들.

사실 그런 브랜드들은 1팀과 2팀 팀원들 입장에선 자기들 성과급과 직결되는 것들이니 욕심을 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욕심이 기싸움으로 발전되면서 묵인하지 못할 정도로 팀장들 코앞까지 번지다보니 어쩔 수 없이 팀장들이 액션을 할 수 밖에.

누군가는 말한다.

도대체 월급으로 얼마를 받는다고 그렇게 간이며 쓸개까지 다 빼놓고 직장 생활을 계속하냐고.

대기업이라고 별 거 있느냐고.

네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넌 그냥 한 덩어리의 거대한 기계 속 얼마든지 교체가 가능한 부품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차라리 그렇게 볼 꼴 못볼 꼴 다 봐가며 일하지 말고 회사를 때려치우고 나와서 자기 장사나 해라고.

그게 훨씬 더 돈은 많이 벌 거라고.

왜 회사에 나가서 노예 생활을 하느냐고.

임원?

이사, 상무, 전무?

그들 역시 같은 노예 아니냐고.

월급이 좀 많고, 더 많은 혜택이 주어진다 뿐이지, 그들 역시 너희와 별 반 다를 것 없는, 약간 더 높은 등급의 노예일 뿐이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가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여전히 사직서를 품에 안고 출근을 해야만 하는 우리는 변명한다.

어쩌다보니 이직을 할 타이밍을 놓쳐버린 우리에게 회사는...

어쩌다보니 바쁜 회사 일로 친구들까지 잃어버린 우리에게 회사는...

어쩌다보니 신발만 벗으면 진동을 하는 시큼한 발냄새 때문에 식당을 하나 선택할 때에도 가급적 신발을 벗지 않아도 되는 식당만 선택하는 우리에게 회사는...팀장 쯤 달고 보면 회사가 바로 내 집이고, 친구며, 가족이라고...

2주 뒤 손 팀장의 어머님께서 오랜 투병 끝에 돌아가셨다.

치매가 있으셨다.

자식이라고는 손 팀장님 뿐인 걸로 알고 있고.

당연히 전 영업팀 직원들은 퇴근과 동시에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회사가 보내주는 화환이 없다면, 미우나 고우나 같은 부서 사람이라고 퇴근 후 다같이 몰려가주는 사람들이 없다면 얼마나 쓸쓸한 장례식장이었겠나.

“지혜 씨.”

“네, 선배님.”

“자켓 벗어요. 음식 나르는 거라도 좀 돕자.”

“네.”

박기태가 이지혜에게 눈빛을 주는 순간, 양 대리가 손을 뻗어 두 사람을 말렸다.

그리고 한 쪽에선 김 팀장과 손 팀장이 마주보고 섰다.

김 팀장의 뒤로는 1팀 직원들이 서있었고.

“좋은 곳 가셨을 거야.”

“...네.”

“그동안 수고 많았어. 내가 어디 손 팀장 고생하는 거 하루 이틀 봤나. 틀림없이 어머님 좋은 곳 가셨을테니까 너무 죄스러워 하지 말라고.”

“하아...감사합니다, 김 팀장님.”

그리고 고인을 향해 1팀 전원이 절을 하고, 상주와 맞절.

이미 2팀 직원들이 조문을 온 사람들 식사 준비를 하느라 정신 없이 뛰어다니고 있었지만, 그래도 워낙에 빈소를 찾는 2팀의 거래처, 2팀이 관리하는 매장 직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기에 2팀 직원들 만으로는 손이 부족했다.

하지만 우리에겐 동지가 있다.

그 동지는 어제의 적이었고, 또 내일의 적으로 바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린 안다.

그래도 우린 한솥밥을 먹는 동료들이라는 걸.

김 팀장의 지시로 1팀 직원들 모두가 자켓을 벗고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그래, 맞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우린 노예다.

노예가 맞다.

하지만 우리 논리대로는 우린 노예가 아니다.

회사는 그저 우리의 일터일 뿐이고, 그 일터가 삶터로 바뀌는 순간 우린 더이상 회사의 노예가 아니다.

그래서 난 로또에 당첨이 되고도 여전히 출근을 한다.

회사가 이젠 내게 부모님 집보다 더 편하고, 회사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가 혁재나 지현이, 광호, 혜림이와 나누는 대화보다 더 공감이 가고 즐거우니까.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나크리스 입점을 위해 홍성과 계약이 종료된 알렉산더 머린 매장을 비우기 시작했다.

보통 매장을 비우는 작업은 백화점 영업 시간이 종료된 이후부터 한다.

하지만 전체적인 리모델링이 필요한 매장이었다.

그래서 백화점 운영 시간대에 해당 매장 앞으로 가벽을 설치해놓고 나크리스 본사에서 보내준 시안을 가지고 인테리어 업체와 지지고 볶고 있을 때였다.

“아니, 이게 왜 안돼요!”

“에헤이, 공 팀장님 또 어거지 쓰신다. 여기 나와있는대로 조명 설치하려면 천장 다 뜯어내야 돼.”

“아, 그럼 진작에 안된다고 말씀을 하셨어야죠.”

“시안이 그땐 이게 아니었다니까?”

“아, 몰라, 몰라. 뜯어서라도 해줘요.”

“뜯으면 우리야 좋지. 그럼 공사 기간도 길어질 뿐더러 단가가 올라간다니까?”

“이거 천장 싹 다 합반인데 이거 뜯는데 무슨 시간이 걸린다고...아, 소장님. 나랑 지금 장사 원 박 투 데이 해요? 왜 엄살을 부려, 엄살은?”

“공 팀장, 이거 합반이 문제가 아니라, 이거 뜯어내면 흉해서 마판지 붙여야 돼요. 마판지 그게 좀 울어? 습기 조금만 차도 바로 울어버리는데, 나중에 어쩌려고?”

“아, 여기에 마판지를 왜 붙여요. 나크리스에서 요구하는 컨셉이 그냥 그거라고요.”

“하아...”

“계속 이런 식이면 육회고 나발이고 없어요.”

“또 술 가지고 협박한다, 씨...”

“해줍시다. 네?”

“아놔, 진짜...”

“나 소장님만 믿고 다른 매장 확인하러 갑니다?”

“그래서 육회는 언제 살 건데!”

“천장 공사 되는 거 봐서!”

“이런 씨이...”

난 박기태의 어깨를 때리며 얼른 도망가자는 사인을 보냈다.

말은 저렇게 해도 은근히 츤데레다.

분명 내일 다시 와보면 천장 공사는 내가 원하는대로 완성이 되어있을 거다.

그렇게 박기태를 데리고 가벽문을 열고 매장 밖으로 나갔을 때였다.

“...!”

“...?”

“어?”

“어...”

“맞죠?”

단발 머리의 여자가 이제 막 가벽문을 통해 밖으로 나온 날 보며 깜짝 놀란 눈으로 물었다.

그녀의 어깨엔 대짜 버버리 쇼핑백이 걸려있었다.

“부산에서...맞죠?”

“...네, 맞습니다.”

여자는 조금 전 내가 나온 나크리스 로고가 들어간 가벽과 날 번갈아쳐다 보며 자기도 신기한지 미소를 지었다.

“여긴 어떻게...”

얼마 만인가?

어느덧 계절이 바뀌었다.

그리고 난 그동안 은행 아가씨를 새까맣게 잊고 지냈다.

그런데 왜일까?

왜 그동안 새까맣게 잊고 지냈으면서, 고작 얼굴 한 번 다시 마주쳤다고 그동안 꾸준히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처럼 심장이 뛰기 시작하는 것일까...

“백화점에 뭐 사러 왔지, 뭐 하러 왔겠어요?”

여자는 혼자였다.

그리고 난 매장 리모델링 공사 현장에 있느라 몰골이 말이 아니었고.

여름이 시작되고 있었다.

공사 중이라 에어컨도 나오지 않았던 매장안에서, 어느새 내 셔츠 겨드랑이 부분엔 땀이 흥건했다.

“혼자...오셨나보네요?”

“네.”

여자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대답을 해서 나도 모르게 실수를 해버린다.

“남자친구분은...”

미쳤지.

내가 미쳤지...

거기서 얼굴도 모르는 남의 남자친구 이야기는 왜 꺼냈을까?

“남자친구요?”

여자는 미간을 좁히며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그 표정 속엔 네가 뭔데 내 남자친구를 묻느냐는 의미와, 남자친구가 뭐냐는 듯한 의미가 반반씩 섞여있는 거 같았다.

“아니, 그때 부산에서...”

“저 남자친구 없는데요?”

“...!”

머릿속에서 폭죽이 터지는 느낌이었다.

형형색색의 폭죽이 시끄러운 소리를 만들어내며 뻥뻥하고 터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럼...”

여자는 고개를 살짝 끄덕인 뒤 환한 미소를 남기고 가던 길을 갔다.

“누구예요?”

박기태가 물었다.

난 그런 박기태에게 들고 있던 매장 인테리어 시안과 도면 모두를 떠넘기고 재빨리 자켓을 고쳐입었다.

“저 먼저 퇴근합니다.”

“네? 퇴근이라니요. 낙스 매장...”

“나머지는 기태 씨가 알아서 할 수 있죠?”

“...?”

“못해요?”

“하, 할 수 있긴 한데, 그래도...

“오케이. 그럼 내일 봅시다. 수고.”

“팀장님? 팀장님!”

모르겠다,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난 저 멀리 사라지는 여자의 뒷 모습을 확인하고 잠시 안심을 했고, 그녀와의 거리를 좁히면서 내가 이래도 되는 건지 몇 차례나 스스로에게 물으면서도, 그럼에도 마땅한 대답을 얻어내지 못한 채로 그녀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저기...”

3미터 정도?

딱 그 정도 거리에서 난 용기를 내어 여자를 불렀다.

이름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자는 어떻게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걸음을 멈춰세우더니 날 향해 몸을 돌렸다.

“네?”

“저기...”

“...?”

“저기 괜찮으시면 같이 차라도 한 잔...”

여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 말았어야 할 짓을 해버린 걸까?

“일하시는 중 아니었어요?”

“아뇨, 아뇨. 끝났습니다.”

“그동안 많이 바쁘셨어요?”

“...네?”

“그때 저희 은행 이용하신다고 안하셨어요? 그동안 한 번도 못 뵌 거 같아서요.”

“아, 네...그게...”

“백화점 지하에 폴밧 있던데, 그럼 거기서 커피 한 잔 할까요?”

“네, 감사합니...아니, 네...폴밧...저 거기 커피 완전 좋아합니다.”

여자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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