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내 앞가림은 내가 알아서 한다
“푸하하하하...”
2차는 수영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광호와 혜림이는 수영 팔도 시장 맞은편, 팜 코리아 나이트 골목쪽에 가게 세 개를 동시에 운영하고 있다.
하나는 징기스라는 양고기 전문점이고 다른 하나는 도톳고기라고 숙성된 돼지고기를 판매하는 가게, 또 다른 하나는 하얀집이라는 산오징어 전문점이다.
자기들이 100퍼센트 주인은 아니고, 광호와 오래 알고 지내는 형님 두 분과 동업을 하고 있다.
광호와 혜림이는 각 가게당 얼마씩 가장 적은 금액을 투자하고 같은 비율로 돈을 가져가는 대신 직접 가게들을 관리하고 있고.
그래도 가게 세 개를 직접 운영하고 있는 사장님이다.
친구들 중에 돈을 가장 잘 벌고 있고, 또 자수성가한 케이스다.
혁재 와이프는 친정에 맡겨놓은 아이를 데리러 간다는 핑계로 먼저 돌아갔다.
사실 나랑은 좀 잘 안맞는 스타일이다.
물론 서로가 서로에게 내색을 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관계가 안 좋은 것도 아니고.
다만 딱히 큰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냥 좀 이유없이 불편해진 관계라고 할까?
아무래도 혁재 와이프는 또래 친구들에 비해 결혼을 빨리한 케이스다 보니 나이에 비해 좀 억척같은 면이 강하다.
그래서 혁재가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술값으로 돈을 쓰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데, 한 번씩 내가 부산에 내려올 때마다 혁재가 밤 늦게까지 나와 술을 마셔주다보니 거기에 은근한 눈치가 더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도 할 말이 있는 게, 나는 꼭 혁재와 그렇게 늦게까지 술을 같이 마시고 싶은 마음이 없다.
일에 치이고, 자신의 고생을 알아줄 사람이 그리워 외롭다 보니 한 번씩 서울에 있는 친구가 부산에 내려오면 그 핑계로 혁재가 날 밤 늦게까지 잡고 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내가 내려오지 않으면 혁재, 지현이, 그리고 혜림이와 광호 커플은 같은 부산에 살면서도 좀처럼 잘 못만나는 모양이다.
내가 한 번씩 내려올 때나 날 핑계로 뭉치지, 다들 나이 먹고 사는 게 바빠지다보니 친구들을 챙길 여력이 부족해지고 있다.
자연스럽고 또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인간관계라고 생각한다.
우린 광호와 혜림이가 운영하는 가게들 중 징기스에서 가볍게 맥주를 마셨다.
어느순간부터 왁자지껄한 곳 보다는 조용한 곳이 편하다.
그건 비단 나 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광호, 혜림이 커플의 가게들은 하나같이 다 술을 파는 집이라 아직 오픈할 시간도 아니어서 알바생들이 오기 전에 우리끼리 치킨 한 마리 배달 시켜놓고 맥주 한 잔 하기엔 그만이었다.
혁재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결혼식장에서 있었던 은행 아가씨 헤프닝을 떠올리며 눈물까지 쏙 빼며 웃었고, 난 그런 혁재의 팔뚝을 몇 차례나 주먹으로 때리며 함께 그 장난에 장단을 맞췄다.
“하지마라고, 하지마라고!”
“아놔, 이 새끼 관심 없는척 하드만 바로 말 거는 거 다들 봤제? 서울말 쓰는데 진짜 탁 마 한대 지박았으면 속이 시원하겠드라. 뭐? 아까 인마 이거 뭐라드노? 저 막 그렇게 이상한 사람 아닙니다?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는 편입니다. 푸하하하하...내가 니 때메 배를 짼다, 배를 째...”
우리 모두는 오버하며 웃음을 터뜨리는 혁재의 모습에 함께 미소를 지었다.
먹고 사느라 평소에 얼마나 웃을 일이 없었으면 별 것도 아닌 걸로 저렇게 웃음의 바닥까지 다 긁어내려고 하는 것일까.
불임이라 애가 들어서지 않는 광호, 혜림이 커플에 비해 속도 위반으로 장가를 빨리 든 혁재.
지금은 부산대에서 백병원 방면으로 있는 에드파 골프 용품 판매점에서 나름 점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혼자 벌어도 애 하나 키우면서 가정을 유지하기엔 크게 부족함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들어보면 업무 스트레스가 보통이 아닌 거 같았다.
쉬는 날에도 단골 손님들이 수시로 전화를 걸어와 공을 좀 싼 값에 몇 개 따로 챙겨달라고 한다거나, 자신들이 필요한 골프채를 구해달라는 연락, 할인 관련 문의, 그리고 같이 골프를 치러 가자는 연락이 시도때도 없이 걸려온다.
그런데 또 집에 들어가면 돈, 돈 노래를 불러대는 와이프.
딸 효진이라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끔찍하게 여기는 놈인데, 언제부턴가 일 마치고 바로 집에들어가는 게 그렇게 싫다고.
일종의 직장인 사춘기를 겪고 있다고 보면 된다.
“아...오늘 진짜 많이 웃었네. 인자 고마 가자. 여기도 저녁 장사 준비해야지.”
내가 광호, 혜림이 눈치를 보며 이제 그만 일어나는 게 좋다고 말하자, 혁재는 기다렸다는 듯 둘이 딴데 가서 한 잔만 더 하자고 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난 혁재를 데리고 밖으로 나와 팔도 시장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시장 입구에 있는 아이들 장난감 파는 집에 들어가 딸 효진이 갖다주라며 미미의 집 세트를 하나 사줬다.
“뭐 또 이런 걸 사노?”
“그냥 하나 사주고 싶네.”
광호, 혜림이 커플이 결혼을 할 때에도 그렇고, 이번에 지현이가 장가를 갈 때에도 난 녀석들이 필요로 하다는 건 최대한 다 해주려고 애를 썼었다.
가장 친한 친구들이니까.
그런데 혁재가 장가를 갈 때엔...참석도 못했었다.
이게 참 두고두고 미안한 부분이다.
이탈리아 출장이 급하게 잡혔고, 난 친구 결혼식을 핑계로 그 출장을 거부할 수가 없은 처지였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에 지현이 놈 결혼식 사회를 보면서도 그게 그렇게 마음에 걸릴 수가 없었다..
“한 잔 더 안할래, 진짜?”
“집에 가봐야지. 부산 내려와서 맨날천날 밖으로만 나다니다보니까 부모님이랑 같이 외식 한 번 못하고 있다.”
“...그래, 알았다. 가족도 챙기야지.”
“술 많이 먹지마라, 친구야. 니 지금 얼굴 상당히 퍼석하다.”
“많이 안 먹는다. 광호 점마 저게 괜히 없는 소리 하는 거 아이가. 내가 어디 초빼이가, 허구헌날 술만 먹구로.”
“고생이 많다, 우리 친구.”
“어데 내만 하는 고생이가. 우리 다 같이 하는 고생이지.”
친구의 얼굴에서 주름살을, 그리고 벌써부터 시작된 탈모의 흔적을 볼 때마다, 나도 이제 어른이라는 걸 새삼 다시 깨닫는다.
혁재와 헤어지고 곧바로 집으로 갔다.
저번에 부산에 내려왔을 때와는 달리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조금은 가벼워지고 또 숨이 트이는 이유는 드디어 매형이 일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범일동 자유시장에서 상가 경비 보는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야간 근무인데 일주일에 4일 일하고 월 160만 원 정도를 받는 모양이다.
돈이 중요한 게 아니라 뭐라도 한다는 게 중요했다.
아직 나이 50도 안 된 사람이 무기력하게 집에만 들어앉아 있는 건 본인도 못할 짓이겠지만, 옆에서 지켜봐야 할 다른 가족들 모두가 숨이 막히는 일.
매형 스타일 상 얼마나 오래 그 일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일단은 숨이 좀 트였다.
오후 4시.
집에는 이제 막 출근을 준비하는 매형 밖에 없었다.
부모님 수선 가게도 6시에 끝나고 누나도 아직 퇴근을 하려면 시간이 좀 남았다.
아영이야 지금쯤 독서실에 있을 거고.
“왔나?”
“...네. 일 갑니까, 지금?”
“어, 인자 슬슬 준비해야지.”
“일은 뭐 할만 합니까?”
“뭐 경비 서는 일이 다 그렇지. 딱히 하는 것도 없다.”
“근데 지금 뭐하는 건데요?”
“아...”
보온 밥통에 밥을 담으며 매형이 말했다.
“재래 시장이 되다보니까 새벽에 딱히 시켜먹을 곳이 없어가 그냥 도시락 싸다닌다이가.”
보온 밥통에 밥을 옮겨담는 지금의 모습에서 그 잘나가던 시절의 화려한 매형의 모습이 겹쳐보이는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 김치를 따로 챙기는 매형의 모습에 갑자기 좀 서글퍼졌다.
“밥을 뭐 김치하고만 먹어요? 집에 딴 거 챙겨 갈 만한 반찬이 그렇게 없어요?”
“아이다, 아이다. 고마 놔놔라. 같이 일하는 사람 둘이 더 있는데, 조금씩 가져가서 다같이 나눠먹는다. 그라고 또 가면 컵라면도 있고...”
“암만 그래도 그렇지, 딸랑 맨밥에 김치가 뭡니까, 진짜...”
“느그 누나가 밑반찬 따로 챙겨준다카는 거 고마 내가 놔두라캤다.”
“집에 딴 반찬이 없는 것도 아이고...”
나오는 한숨을 매형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갔다.
“은태야.”
“네, 매형.”
“내 인자 간다이.”
난 다시 화장실에서 나왔다.
이미 현관 앞으로 서서 신발을 신고 있는 매형.
“내일 몇시에 올라가노?”
“뭐 점심 시간 때 쯤 올라가야지요.”
“알았다. 내일 아침이나 같이 먹자.”
“밤에 안 추워요?”
“내일 모레 여름이다. 춥기는...”
“뭐 일하다가 잠깐 눈이라도 붙일 자리는 있습니까?”
“있다, 그런 거 다 있다. 신경 쓰지마라.”
“...”
“내 간다이.”
“네, 다녀오세요.”
텅 빈 집.
어떻게 누나 내외에 아영이까지 같이 들어와 살고 있는데, 부모님만 사실 때보다 집안 공기가 더 차가운 거 같았다.
냉장고 문을 열어봤다.
그리고 한숨만 짧게 내쉬고 다시 문을 닫았다.
저녁에 누나가 퇴근을 하고 왔을 때, 아영이 몰래 누나한테 말했다.
“그...”
“와? 뭔데 말을 하다마노?”
“꽈리 고추하고 멸치 같이 넣고 간장에 좀 쪼리놔라, 넉넉하게.”
“와? 서울 올라갈 때 가져갈라고? 미리 말을 하지. 오는 길에 사가 올 거 아이가. 있으봐라, 내 지금 마트 금방...”
“아니, 그게 아이고...그거 매형 좋아한다이가. 아까 일하러 갈 때 보니까 맨밥에 김치만 싸가더라. 냉장고 안에 딴 반찬들도 많더만...”
“...김치만 싸가더나?”
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고, 잠시 뒤 누나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
“오늘 지현이는 결혼식 잘했나?”
“잘하고 자시고 할 게 어딨노, 그냥 하는거지.”
“신혼여행 어디로 간다든데?”
“미국 간다는 거 같던데, 기억도 안난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맀다.”
“니한테는...누나가 미안하데이.”
“그런 말 하지마라니까. 누나가 내한테 미안할끼 뭐있노? 와 쓸데없는 소릴 하노? 어데 벌써 갱년기 오나?”
누나는 그제야 피식하고 웃었고, 난 그런 누나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려 뭉친 목 근육을 풀어주며 말했다.
“내 신경 쓰지말고 누나는 아영이만 챙기라. 내 앞가림은 내가 알아서 한다. 거기 밖에 똥깡아지. 몰래 숨어가 엿듣지 말고 이리 들어와봐라.”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방문이 열렸다.
“삼촌이 항상 말하제, 눈치보지 말라고.”
“내가 언제 눈치를 봤다고 그라노?”
“근데 와 밖에 숨어가 엄마, 삼촌 이야기 하는 거 몰래 훔쳐듣노?”
“...”
“밖에 나가서 딴 사람들 눈치나 살살 살피다가 삼촌한테 함 걸리라...죽는다, 진짜.”
그렇게 한 주가 끝이나고 있었다.
다시 서울로 돌아와 시작된 한주의 월요일.
금요일 퇴근과 동시에 KTX를 이용해 부산으로 내려가느라 차를 회사에 놔두고 갔었다.
그 덕에 월요일 아침부터 지옥철에 시달려야 했고..
지하철을 빠져나와 회사로 가는 도중에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국민은행 앞을 지나가게 됐다.
지난 토요일, 지현이 결혼식에서 은행 아가씨에게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던 건 생각만 해도 손발이 오그라들고 쪽팔린다.
앞으로 가급적이면 이 앞으로는 안 지나다녀야겠다.
그런데...
도대체 뭐 그리 큰 실례되는 걸 물어봤다고, 그때 일을 떠올리면 손발이 오그라들고 이불킥을 하고싶을 만큼 쪽팔리는 걸까?
딱히 물어본 것도 없잖아?
은행에서 근무하지 않느냐, 얼마 전에 적금 통장을 만들러 갔다가 본 기억이 있다. 딱 그정도만 말했을 뿐인데 그게 무슨 실례라고...
그리고 진짜 이건 뭘까?
그냥 국민은행 앞을 지나가고 있을 뿐인데, 왜 결혼 할 상대가 있는 남의 여자 얼굴이 계속 눈 앞에 아른거리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