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는 편입니다
나왔다, 혁재 녀석의 똘끼가...
본식이 거행되기 앞서 이벤트 업체 관계자가 사회자를 찾았다.
그리고 난 무대 바로 아래 사회자 단상으로 올라가 스탠드 마이크에 입술을 붙였다.
“잠시 안내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곧 신랑 송지현 군과 신부 민서영 양의 결혼식이 진행될 예정이오니 양가 하객분들 모두 자리에 앉아주시기 부탁드리겠습니다. 더불어 식이 진행되는 동안 번거로우시겠지만 들고 계신 휴대폰은 잠시 진동 모드로 바꿔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벤트 업체 관계자의 요구대로 행사 시작을 위한 안내멘트를 하고 있을 때였다.
정신 나간 혁재 자식이 신랑측에 비어있는 원탁 테이블도 많은데, 굳이 자기 와이프랑 혜림이, 광호를 데리고 신부측 원탁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는 게 아닌가.
처음엔 왜 저러나 싶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테이블에 신부 대기실 앞에서 봤던 은행 아가씨가 먼저 혼자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난 그 먼 거리에서도 인상을 팍 쓰며 혁재를 노려봤고, 혁재는 마치 자기만 믿으라는 듯 날 향해 검지와 중지로 브이를 만들어 흔들었다.
저거 진짜 미친 놈이다.
원래부터 저런 놈이긴 했지만, 그래도 어떻게 결혼해서 애까지 있는 놈이 저렇게 안 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부창부수라고 했던가.
혁재 와이프는 아예 은행 아가씨 바로 옆자리 의자에다가 자기 가방을 올려 놓으며, 은행 아가씨처럼 혼자 이 결혼식 하객으로 온 젊은 여성에게 여긴 이미 자리가 있다며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도대체 다들 왜 저러는 거지?
아니, 내가 저 은행 아가씨를 마음에 든다고 했던 것도 아니고, 그냥 우연히 은행 업무를 보다가 한 번 봤던 게 전부라고 분명히 말을 했다.
그리고 은행 아가씨는 날 기억도 못할 것이라고.
그런데도 저러는 건 진짜 좀 오버 아닌가?
난 혁재를 노려보며 얼른 신랑측 빈 테이블로 옮기라고 몇 차례나 손짓을 했다.
그럼에도 혁재는 마치 워워...넣어둬, 넣어둬 하는 식으로 두 손 바닥을 내게 보이며 진정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저, 사회자님?”
“네?”
“멘트 한 번만 더 부탁드립니다.”
“...네.”
난 혁재를 다시 한 번 강하게 노려본 뒤 2차 멘트를 시작했다.
2차 멘트를 신호로 바이올린과 첼로를 잡은 연주단이 잔잔한 클래식 음악을 깔기 시작했고, 조명이 잠시 꺼진 뒤 스포트라이트가 내게 집중되는 순간 어쩔 수 없이 혁재 녀석을 뒤로하고 결혼식 사회에 집중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신랑 송지현 군의 20년 지기, 오늘 결혼식의 사회를 맡게 된 공은태라고 합니다.”
스탠드 마이크와 대본을 올려놓은 거치대 앞으로 나와서 하객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터져나오는 박수.
난 다시 자리로 돌아가 마이크를 입술에 붙여놓고 오늘 이 결혼식이 얼마나 축복을 받아야 하는 결혼식이며, 이 결혼식에 참석해준 가족, 친지, 지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단 인사를 양가 부모님들을 대신해 전했다.
그리고 신랑, 신부 측 어머님들을 모셔 초에 불을 밝히게 만들었다.
다행이 몇 주간 은근하게 시달렸던 사회에 대한 부담감은 감쪽같이 사라진 상태였다.
입도 제법 자연스럽게 풀렸고.
신랑 입장을 시키는 순서였는데, 지현이 놈이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꽃길을 걸어오며 살짝 발을 헛디뎌 삐걱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에 하객들은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렸고, 그렇게 진지하게 흘러가면 어떻게 할까 걱정했던 결혼식 분위기는 금방 가볍게 변해버렸다.
그리고 신부 입장.
왜 그랬을까?
결혼식의 진짜 주인공 신부가 입장을 하는데, 정작 주례 없는 결혼식의 사회를 맡은 난 신부가 꽃길을 걸어오는 모습보다 은행 아가씨의 옆 모습을 더 많이 훔쳐봤던 거 같다.
“사회자님, 사회자님.”
“아, 네...!”
바로 옆에서 행사 진행을 도와주던 아가씨가 급하게 날 불렀다.
그리고 난 은행 아가씨를 훔쳐보느라 신랑, 신부 측 아버지를 무대 위로 모시는 멘트를 놓치고 있었단 걸 깨닳았다.
재빨리 멘트를 쳐놓고 결혼식 사회에 집중을 해야한다고 계속해서 나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다.
결혼식에 참석해주신 하객들에 대한 양가 아버지들의 감사 인사말씀.
그리고 호텔 연회장 직원들은 일사분란하게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하객들의 와인잔에 와인을 채웠다.
신랑 아버지가 한 말씀 하시고 전체 건배.
그리고 신부 아버지가 한 말씀 하시고 다시 또 전체 건배.
그 뒤 몇가지 순서까지는 문제없이 진행을 했다.
그러다 신부를 위해 지현이가 준비한 깜짝 이벤트 코너 소개를 끝내놓고 난 다시 또 은행 아가씨에게 잠시 정신을 팔렸다.
내가 왜 이러지?
혁재 녀석이 분위기를 이상하게 몰아가서 그런 모양이다.
만약 혁재 녀석이 분위기를 몰아가지 않았다면 내가 절대 이럴리가 없다.
그런데 왜 그런 사람이 있지 않나?
첫 눈에 딱 봤을 땐 그냥 괜찮다...싶은 정도였는데 계속 보다보니까 진짜 좀 예쁜 거 같은 사람.
꼭 이목구비가 예뻐서 예쁘다고 하는 것 보다는 전체적인 느낌이나 자세, 웃는 모습, 웃을 때 보이는 가지런한 치아라던지, 웃음의 온도, 그리고 말투나 단정한 몸가짐 등등...
혼자여서 더 조신하게 앉아있는 것일 수도 있다.
내숭일 수도 있고.
하지만 몇 번을 봤다고, 얼마나 봤다고 확신이 드는 건지는 몰라도 이상하게 은행 아가씨는 스타일 자체가 실제 모습과 내숭에 큰 차이가 없을 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신부를 위해 사랑의 세레나데를 준비한 지현이.
그냥 부르지 말지.
보고 있는 내가 다 민망해 죽을 맛이었다.
지현이는 자기가 노래를 잘 부른다고 착각하는 놈이다.
어릴 때부터 어디서 이상한 염소 바이브레이션을 터득해 와서는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를 때마다 그 바이브레이션으로 사람들 귀를 괴롭혀오던 놈이 바로 지현이다.
이건 진짜 우리 친구들 잘못이 크다고 생각한다.
진작에 너 노래 진짜 별로라고, 친구들 앞에서나 부르지 다른데 가선 절대 부르지 말라고 진실을 말해줬어야 했는데, 그걸 우리 친구들이 못해줬다.
기껏 살아난 결혼식 분위기는 지현이의 노래로 한순간 어색해졌고, 다행히 고음 부분에서 삑사리가 터져나와 그나마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삑사리가 결혼식 분위기를 살렸다고 본다, 난.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할 지현이의 세레나데가 끝이나고 섭외된 가수의 진짜 축가.
그 축가를 시작으로 호텔 연회장 직원들은 본격적으로 코스 메뉴를 차례대로 빼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랑 신부의 영원한 사랑을 기원하는 뜻으로 하객들의 박수를 유도해놓고 꽃길 위에서 신랑 신부를 퇴장시켰다.
식사가 진행되는 동안 연주팀이 바이올린과 챌로로 은은한 클래식 음악을 깔았다.
“이제 다 끝난 건가요?”
“네, 수고 하셨습니다. 이제 자리 가셔서 식사 하시면 될 거 같아요. 나머지 사진 촬영은 스튜디오 팀이 따로 진행할 겁니다.”
결혼식 사회를 제대로 잘 봤는지 모르겠다.
정말 정신없이 끝나버린 사회.
준비하며 받은 스트레스가 한 방에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수고했다, 일로 온나. 와서 앉아라.”
마치 은행 아가씨가 들으라는 듯, 안해도 될 말을 너스레떨며 폭발시키는 혁재.
“우리 은태 못하는기 없네, 못하는기... 난 어데 서울서 전문 사회자가 온 줄 알았네.”
난 혁재 와이프가 가방을 치워준 의자에 앉으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리고 혁재, 혁재 와이프, 혜림이, 광호에게 “고마해라...” 하며 낮게 말했다.
하지만 혁재는 미친놈이다.
내 말을 들을리가 없다.
“요즘 서울 생활은 좀 어떻노?”
바로 어젯밤에 만나서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마시며 몇 번이나 물었던 걸 또 묻고 앉아있다.
아마도 이것 역시 은행 아가씨가 들으라고 하는 말이겠지.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서울 생활은 좀 어떻냐는 혁재의 물음에 은행 아가씨가 살짝 고개를 들어 우리 대화를 엿듣는 기분이 들었다.
“...”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모르겠지만 캐비어처럼 생긴 게 뿌려진 새우 칵테일이 에피타이저로 나왔다.
난 녀석들을 아예 무시한채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고, 눈만 살짝 옆으로 돌려 은행 아가씨를 쳐다봤다.
그런데 순간 말이나 한 번 걸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뭘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정도는 물어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 같다.
혁재 새끼가 분위기를 묘하게 끌고가서 그런가?
“저기, 근데...”
은행 아가씨가 고개를 돌리며 혹시 자기에게 말을 거는 거냐는 듯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네?”
“혹시 국민은행 근무하고 계시지 않으세요?”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을 혁재의 얼굴이 뒷통수에 달린 눈으로 훤히 다 보이는 기분이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은행 직원은 화들짝 놀라며 내가 앉은 쪽으로 자세를 틀었다.
그리고 경계하는 듯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아, 오해는 하지 마세요. 저 막 이상한 사람 아닙니다. 정확하게 언제였는지 기억은 안나는데, 한 2주 정도? 왜 그때 혼혈 아기 안고 온 외국인 상대로 그 뭐지? 왜 아기 태어나면 주는 행복 카드 같은 거 있잖아요.”
“네, 맞아요.”
“그때 바로 옆 창구에서 적금 통장을 만들고 있었거든요.”
“아...”
“제가 한 번 본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는 편입니다. 당시 외국인도 한국에서 적금 통장을 만들 수 있구나...하는 생각에 신기해서 저도 모르게 엿들었던 기억이 있네요.”
“아, 네...그때 그 외국인 고객은 기억이 나는데...아무튼 좀 신기하네요. 저희 은행 이용하시나 봐요?”
“네, 그냥 뭐...회사에서 가까워서...”
“그러시구나...”
딱 거기까지지 뭐.
거기서 무슨 대화를 더 이어갈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이건 핑계를 대는 게 아니라 친구 와이프랑 아는 사람과 엮여서 좋을 게 뭐가 있겠나.
우리가 어디 줄줄이 새끼쳐서 여자친구 만들던 혈기 왕성한 10대, 20대도 아니고 만났다 하면 진짜 결혼을 염두에 두고 상대를 만나야 하는 처지에 그건 좀 아니지.
그런데 막상 대화가 끊어지자 무슨 말이라도 꺼내서 대화를 좀 더 이어가고 싶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물론 마음이 그랬다는 거고, 난 더이상 실례를 하지 않기 위해 여자에게 식사 맛있게 하란 말만 남기고 더이상 여자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렇게 식사가 이어졌고, 잠시 뒤 지현이는 넥타이만 다른 컬러로 교체하고 또 제수 씨 될 사람은 세컨드 드레스로 갈아입은 상태로 연회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테이블마다 돌아다니며 하객들과 인사를 나누는 두 사람.
부러웠다.
아니, 부럽다고 하기 보단 그냥 보기가 좋았다.
그리고 양가 어른들이 앉은 테이블을 다 돌아다니며 인사를 건넨 신랑, 신부가 우리 테이블에 왔을 때였다.
“느그 와 여기 앉아 있노? 저기 안 앉고.”
지현이가 신랑 측 테이블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고, 그에 혁재는 말도 안되는 핑계를 쓸어담아 위기를 모면했다.
바로 그때였다.
“남자친구랑 같이 오라니까.”
띠리링...
은행 아가씨를 향한 신부의 한 마디에 우리 모두는 얼음이 되었다.
짜자작...
그리고 그 얼음에 여러갈래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까 말했잖아, 갑자기 급한 출장이 잡혔어. 그 사람 하는 일이 좀 그래. 얼굴은 다음에 너 서울 올 일 있음 그때 보여줄게.”
“부산에 나 말고는 아는 사람도 없을 건데 언니 혼자 괜찮겠어? 우린 여기서 바로 신혼여행 가야돼서...”
“나도 식사만 끝내고 다시 가봐야지. 나 신경쓰지마.”
“난 당연히 남자친구랑 같이 내려와서 짧게 부산 여행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그나저나 결혼식 날짜는 잡혔어?”
“...아직.”
“날짜 잡히면 꼭 연락줘. 나도 언니 결혼식에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참석할 테니까.”
“당연하지.”
당연하지, 당연하지...
그래, 당연한 거다.
저렇게 괜찮은 여자에게 남자가 없다는 게 말이 안되는 거지.
아놔, 갑자기 왜 이렇게 웃기지?
그 짧은 사이 난 이 여자를 상대로 무슨 말도 안되는 로맨스를 상상했던 걸까?
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