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그 여자가 맞는 거 같다
금요일 오후.
점심 식사중에 한 통의 카톡이 도착한다.
모르는 사람이다.
하지만 누구인지는 알 것 같다.
난 등록을 한 적이 없는데, 새로운 친구 목록에 추가가 되어 있는 상대.
상대는 지현이의 결혼식 진행을 준비하고 있는 결혼 이벤트 업체의 누구누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며칠 전에 이미 지현이로부터 연락을 한 통 받았다.
결혼식 사회 대본을 결혼 업체가 카톡으로 보내줄 거라며, 신부를 위해 자신이 준비한 깜짝 이벤트를 잘 포함해서 사회 준비를 해달라고.
난 업체 측에서 보내준 사회 대본을 쭉 훑어봤다.
주례없는 결혼식.
사회자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
-부산에 계신 게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결혼식 전에 간단하게 리허설을 해야할 거 같은데 언제가 괜찮으실지요.
리허설?
결혼식에 무슨 리허설을 한단 말인가.
난 답장을 보내기 전에 함께 식사중이던 양 대리에게 물어봤다.
“혹시 결혼식도 리허설을 합니까?”
양 대리는 물론이고 장향은 역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가 결혼해요?”
양 대리가 물었다.
“친한 친구가 다음주 토요일에 결혼을 하는데, 제가 사회를 봐야하게 생겼어요. 근데 이게 주례 없는 결혼식이라 은근히 신경 써야할 게 많네요.”
“결혼식을 어디에서 하는데요?”
“해운대 조선호텔에서요.”
“아...”
그제야 양 대리는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분 능력이 좀 되시나 봅니다?”
“처가 될 집이 좀 괜찮은가 보더라고요.”
“호텔 결혼식까지 할 정도면야 이벤트 업체를 당연히 따로 불렀을 거고, 식 전에 리허설 같은 걸 할 수도 있겠죠? 글쎄요, 저도 처음들어보는 이야기긴 하네요.”
나 역시 딱 그정도까지만 생각을 하고 상대에게 답장을 보냈다.
-다음주 금요일 밤이나 돼서 부산에 도착하지 싶은데요.
-대략 몇 시쯤 도착하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많이 늦을 겁니다. 밤 9시 정도?
-아, 그렇군요...
얼굴도 모르는 상대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가 눈에 보이는 착각이 들었다.
-그럼 식 당일날 조금 일찍 와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안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식이 11시니까 한 9시까지 도착하면 안 될까요?
-네, 그럼 저희가 호텔 연회장 측과 이야기 해서 9시부터 리허설 하는 걸로 잡아놓겠습니다.
카톡을 끝내고 잠시 후 영상 파일 하나가 도착했다.
물론 그 자리에서 바로 열어보지는 않았고.
그런데 이벤트 업체와 연락을 하고나니 결혼식 사회를 보는 게 은근히 부담스러워졌다.
처음엔 그냥 프리젠테이션 한다는 생각으로 후딱 해버리면 되는 건줄 알고 지현이 녀석이 사회를 봐달라고 하는 부탁을 받아들였는데, 이렇게 번거로운 건줄 알았음 웨딩카나 준비해주고 말껄...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벤트 업체와 카톡을 주고받은 이후부터 결혼식 사회에 대한 부담감이 알게 모르게 커지기 시작했던 거 같다.
지현이 말을 잠시 빌리자면, 지현이 집 쪽에서 많이 꿀리는 결혼이다.
결혼식 역시 여자 집에서 원하는대로 끌려가고 있는 중이라고.
처가될 집에서 당연하다는 듯 호텔 결혼식을 이야기 하는데, 정작 지현이는 자신의 하객들이 그에 걸맞을지에 대해 많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여자 쪽에서 신혼집을 해주고 또 호텔 결혼식 비용 일체를 부담한다고.
“야, 신혼집은 모르겠지만 결혼식은 부담스러워 하지마라. 니가 부담스러워 할 이유가 어딨노? 그동안 여기저리 뿌린 게 있으니 이번에 딸 시집 보내면서 거둬들이겠단 생각 아니시겠나? 어차피 호텔 결혼식 할 정도면 들어오는 축의금으로 그거 다 커버하고도 주리가 남는다.”
“그래도 이게 당사자 아니면 모르는 스트레스가 있다, 인마.”
난 듣기만 해도 부럽던데, 당사자는 그게 보통 스트레스가 아닌 모양이었다.
지현이는 부랴부랴 결혼식 당일 신랑측 하객쪽에 빈자리를 만들지 않겠다고 그동안 연락이 끊어졌던 친구, 지인들에게 결혼 사실을 알렸지만, 돌아오는 반응들은 하나같이 건조했다고 한다.
그건 뭐 나같아도 그럴 거 같다.
그동안 연락 한 번 안하다가 결혼식 한다고 연락이 오면 누가 좋아라 할까.
그래서일까.
처음해보는 결혼식 사회이기도 하거니와, 지현이 녀석이 처한 상황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다면 결혼식 사회라도 좀 괜찮게 봐주고 싶었다.
물론 누가 사회자를 신경이나 쓰겠냐만.
그렇게 주말이 찾아왔고, 난 주말동안 다시 다른 공인 중개소를 통해 아파트들을 알아보러 다녔다.
아파트를 보러다니는 게 이렇게 재미있는 일일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
세상이 나와 좀 가까워지고 있는 느낌이었다고할까?
이런데 사는 사람들 역시 사는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구나...
이런 아파트 주차장에도 국산 소형차, 경차들은 얼마든지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집을 보러 다닐 때마다 내가 알지 못해서 막연히 크게만 보고 있었던 세상과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한 세상 사이에서 참 여러가지 감정들이 교차했고, 또 그런 감정들로 인해 내 삶을 다시금 설계해볼 수 있는 동기를 가지게 된 거 같다.
그리고 일요일 오후 2시 경 찾아간 곳에서 내 마음에 쏙 드는 집을 하나 보게 된다.
사실 이 단지는 며칠 전에도 다른 공인 중개소 소장과 함께 한 번 와봤었다.
그런데 그땐 집을 보여주는 집주인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어서 제대로 보지도 않고 그냥 나왔는데, 거의 신축에 가까운 연식이나 집안 구조, 초등학교를 끼고 있는 입지 등은 무척 탐이 나는 물건이었다.
그리고 이번엔 다른 공인 중개소를 통해 같은 단지내 같은 평수, 하지만 다른 집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비어있는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이상하게 이걸로 해야겠다는 이유없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거의 가볼만 한 곳은 다 가본 거 같다.
그리고 총 5명의 공인 중개소 소장들을 만나는 동안, 그들의 공통적인 영업 스타일과 입에 발린 소리들도 다 파악을 했고.
결론은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상품을 선택해서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다는 당연한 결론에 도달한 상태.
“언제부터 비어있던 겁니까?”
“저희한테 나오긴 2주 정도 밖에 안됐는데, 비어있긴 1년 넘게 비어있던 집이에요.”
“왜요?”
“글쎄...그냥 우리끼리 하는 말이에요. 아시죠?”
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돈 푼 꽤나 있는 사장님 세컨드가 아닐까 싶어요.”
“아...”
“확실한 건 아니고요. 보통 이런 집은 그런 경우가 많더라고요. 하하하. 아무튼 여기 주방 쪽 한 번 보세요. 깔끔하잖아요. 거의 새거예요, 새거. 사실 이거 벽지, 장판도 그대로 써도 돼요. 손 볼 곳이 없어요, 여기는.”
도배 정도는 새로 해야겠지만, 주방과 바닥 장판, 그리고 화장실 타일은 중개소 소장의 말처럼 거의 새거나 다름이 없었다.
“들어보니까 여기 방 두 개는 거의 사용을 안했던 모양이에요. 젊은 여자 혼자 살던 집이라 여기 작은방은 드레스 룸으로 사용을 했던 거 같고, 여기 이 방은 창고 비슷하게 썼던 거 같아요. 혼자 살면서 강아지나 고양이도 안 키웠다고 하고.”
대충 현재 집주인이 이 집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이건 얼마라고 했습니까?”
“14억 6천에 나왔어요.”
그동안 아파트만 보러 다닌 건 아니다.
집에서 부동산 관련 카페나 아파트 시세 사이트를 통해 브랜드 별 평수에 따른 대략의 시세가 대충 머릿속에 들어있는 상태.
14억 6천이면 진짜 급매가 확실하다.
그걸 다 믿을 수는 없지만 인터넷에 떠다니는 이 아파트 같은 평수의 작년 매매거래 가격은 13억 2천에서 16억 8천 사이에 걸려있다.
물론 작년에 비해 매매 물건이 시장에 많이 나와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겠지만.
하지만 해당 물건의 동은 같은 평수대에서 단지내 가장 선두에 있어 뷰가 좋고 향도 남향에 1303호 로얄층이다.
마침 타이밍상 부동산 거래건수가 팍 줄어버린 시기라 아직 이런 물건이 남아있는 거지, 중개소 소장의 말처럼 이런 컨디션의 물건은 누가 가져가도 가져가는 물건이 맞다.
“한 3천 정도만 조정해보자고 말해보세요.”
“에이...”
중개소 소장은 짧게 고개를 흔들며 거의 불가능하다는 식으로 말했다.
하지만 누가 모를까.
3천이 누구집 개이름이겠냐만, 충분히 말은 꺼내볼 수 있는 액수라는 걸.
누가 집 사면서 중개소가 부르는 제 값을 다 주고 사겠나.
이건 꼭 내가 지난 몇 주간 인터넷 카페 같은 곳들을 돌아다니며 들은 정보가 아니더라도, 어머니가 해오셨던 것들만 살짝 기억해보면 충분히 해볼만한 딜이다.
“14억 3천에 한 번 맞춰봐주세요. 된다고 하면 하고요.”
어제 오늘 제법 까다롭게 집을 봤다.
그런 내 입에서 “된다고 하면 하고요.” 하고 시원한 대답이 나오자 중개소 소장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는 곧바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그 어딘가는 틀림없이 이 물건을 직접 컨트롤하고 있는 또다른 중개소 소장일 것이다.
한 며칠 다녀보니까 여러 중개소 소장들이 얽혀있었다.
자기들끼리 중개 수수료를 나눠먹으며 영업을 하는 모양이지.
통화를 끝낸 중개소 소장이 입을 열기 전에 내가 먼저 말했다.
“그리고 월세 들어오겠다는 사람 찾아지면 바로 계약할게요.”
“...!”
난 당황해하는 중개소 소장을 향해 영업할 때 사용하는 특유의 미소를 얼굴에 걸었다.
“보통 다 그렇게 한다면서요?”
“그때까지 이 물건이 다른 사람한테 안 팔리고 남아있다는 보장은 없죠.”
“다른 사람은 안 깎고 제 값 다 주고 바로 사겠다고 한다는 보장도 없잖아요. 만약에 그 전에 다른 사람이 가져가면 뭐...처음부터 제 물건이 아니었던 거겠죠.”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녀보셨다니까 잘 알겠지만, 진짜 잘 나온 물건이에요.”
“월세 들어올 사람이 가져올 보증금 없이는 조금 힘들 거 같네요.”
“흐음...”
“잘 한 번 맞춰봐주세요. 그렇게 맞춰만 주시면 바로 계약 할 수 있을 거 같으니까.”
될려고 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고.
이 집이 아니더라도 집은 많다.
그리고 급하게 지금 당장 사지 않는다고 해서 통장에 들어있는 내 돈이 썩는 것도 아니고.
자그마치 14억 6천이다.
시장에 나온 가격보다 조금 싸게 나왔다고, 그걸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마치 큰 손해를 보는 것처럼 조급해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마땅히 신중하게 결정을 해야하고, 또 그 신중한 결정 끝에도 내가 만족할 수 있는 딜을 이끌어내야만 나중에 후회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그런 촉이 발동했다.
내게 떨어질 거 같다는 촉.
근거는 없다.
말 그대로 그냥 촉이다.
집으로 돌아와 곧바로 지난 몇 주간 즐겨찾았던 부동산 카페에 접속을 해서 처음으로 게시판에 글을 하나 올렸다.
정확한 호수는 밝히지 않고 동과 로얄층이라는 조건을 올려 조금 전 보고 온 집에 대해 문의를 넣었다.
전문가가 너무 많은 세상.
난 마치 내가 그렇게 매입을 한 것처럼 부동산 전문가들에게 내가 좋은 가격으로 물건을 산 게 맞는지 물었고, 곧바로 모든 게시물마다 댓글을 달며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기 좋아하는 한 유저가 무척 성공적인 계약이라며, 축하한다는 말을 덧붙여놓았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한주.
마치 난 최종 면접까지 봐놓고 입사 확인을 기다리는 취준생이 된 기분이었다.
안됐을 때를 대비해 다른 회사 정보를 확인하고, 또다른 이력서를 미리부터 준비하는 취준생.
그런데 화요일 점심 시간 때 중개소 소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마침 그의 번호를 폰에 저장시켜 놓은 상태였다.
황 소장이라는 이름이 스마트 폰 액정에 뜨는 순간 난 오히려 침착해졌다.
-통화 가능하세요?
“네, 물론이죠.”
-그...집 주인하고 이야기를 좀 나눠봤는데, 3천까지는 힘들고...1500정도 서로가 조금씩 양보를 하는 게 어떻겠냐고 하더라고요.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할까...이미 처음 상대가 제시한 가격도 충분히 괜찮은 금액이기는 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조금 더 깎을 수 있을 거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제 사정 혹시 전달했나요? 진짜 깎고 싶어서 깎는 게 아니라, 진짜 다 긁어도 그것밖에 안되서 그래요.”
-사는 사람은 한 푼이라도 더 깎고 싶고, 파는 사람은 한 푼이라도 더 받고 싶은 게 사람 심리 아니겠습니까? 제가 진짜 장담하는데, 여기서 1500을 더 내린 건 집주인 입장에서 많이 양보한 겁니다.
“500만 더 내려달라고 하세요. 최소한 벽지랑 장판은 갈아야 할 거 아니냐고. 아무리 깨끗하게 썼다고 해도 어떻게 남이 살던 거 그대로 해서 들어가 살 수 있겠어요?”
-에이 원래 그런 부분은 들어가는 사람이...
“원래가 어디에 있습니까, 소장님도 참...부탁 좀 드립니다.”
딱 30분 뒤 다시 걸려온 황 소장의 전화.
집주인이 그렇게 하자고 했단다.
그래서 난 월세 들어올 사람은 어떻게 됐냐고 물었고, 그에 황 소장은 안그래도 어제, 오늘 몇 사람이 집을 보고 갔다고 대답했다.
하긴, 그게 어디 내놓는다고 바로 나가겠나.
그래 이만하면 됐다 싶었다.
월세야 내놓으면 언제 나가도 나갈 집이 확실하니까.
어차피 2천이나 깎는데 성공을 했다.
월세로 들어올 7,8개월치 돈을 세이브 한 거나 마찬가지인데, 이쯤에서 그만 계약을 해버리고, 이제 내 머릿속에서 로또 당첨금으로 받은 현금 13억을 완전히 지워버리자.
그런데 참 재밌는 게 뭔지 아나?
목요일 오후에 중개소 황 소장으로부터 전화가 다시 한 통 걸려오는데, 월세를 들어오길 희망하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거다.
세입자를 받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거란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바로 나타날 줄은 미처 예상을 못하고 있었다.
아이 교육 때문에 집을 알아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초등학교 2학년인 여자 아이를 하나 둔 부부라고.
-그런데 월세를 조금 낮출 수 없겠냐고 물어보네요.
“뭐 얼마나요?”
-한 20만 원 정도만 조정을 해주면 바로 들어와 살고싶다고 하는데...
“20만 원, 20만 원...”
참 재밌지 않나?
월 260만 원짜리 월세에 들어와 살 형편이 되는 사람도, 14억짜리 집을 가지고 있는 나도 이 20만 원 때문에 고민을 해야한다는 사실이.
어째서 그동안 난 이 20만 원을 큰 돈이라고 여기지 못했던 것일까?
그리고 어째서 난 있는 사람들에게 이 20만 원은 돈도 아닐 거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럼 이렇게 하자고 해보세요. 월세 240으로 낮춰주는 대신 도배는 그쪽에서 알아서 하는 걸로. 사실 뭐 제가 봐도 딱히 도배를 새로할 이유는 없을 거 같던데...”
-그렇게 한 번 말해볼게요.
말하나 마나지, 뭐.
크게 얼룩이 진 곳도 없고, 또 있다면 가구로 가리면 될 거니까.
그리고 도배는 꼭 해줘야 한다고 하면 해줄테니 그냥 260에 들어와 살라고 하면 되는 거고.
로또 당첨금 13억.
이 13억은 지난 몇 주간 내게 단번에 인생을 바꿔주지는 못했지만, 내가 상황에 끌려가지 않고 상황을 내게 맞추도록 만드는 힘을 계속해서 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난 새롭게 기대해 본다.
앞으로는 그 힘을 14억 4천에 산 아파트가 대신 빌려줄 거라고...
그리고 난 그 힘으로 내가 꿈꾸는 괜찮은 인생에 한 발짝씩 다가갈 것이라고...
내가 로또 당첨금을 가지고 거의 올현금으로 집을 산 게 잘한 일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런 내 결정을 어떻게 생각할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하다.
내가 무슨 결정을 하든 그 결정보다 더 나은 결정이 있었을 거라고 말 할 사람들은 계속 생겨나겠지만, 어쨌든 난 내가 내린 결정을 행동으로 옮겼고, 만족하고 있으며 내가 한 결정에 만족할 수 있는 것 만큼 중요한 건 없다는 걸.
토요일 아침 부산 조선호텔.
지현이의 처가가 빵빵하긴 빵빵한 모양이다.
자그마치 호텔 연회장 4개를 다 빌렸다.
본식이 진행될 1층 대연회장은 물론이고, 2층에 있는 몇몇 연회장과 그걸로도 부족해 해운대 바다를 정면으로 볼 수 있는 오킴스 웨스턴 바까지 빌려서 거기에 하객들을 앉힐 계획을 잡고 있었다.
이런 결혼식에 내가 사회라니.
리허설이라고 해서 뭐 대단한 게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시시했다.
다이닝 코스 메뉴와 함께 진행되는 예식이니 만큼 급하게 식을 진행하지 말아달라는 주문, 조명의 움직임을 미리 파악을 해달라는 주문, 그리고 신랑의 깜짝 이벤트 때 해줘야 할 멘트, 거기에 신부 입장때 피아노를 쳐줄 피아니스트와 축가로 섭외된 유명 가수에 관한 소개 정도만 꼼꼼하게 숙지를 하면 되는 거였다.
그렇게 30분 정도 두 번의 간단한 리허설을 끝낸 뒤, 이제 막 자기 차로 지현이 부모님을 모시고 호텔로 도착한 혁재와 만났다.
혁재는 나보다 더 빨리 일어나서 서둘렀다고 한다.
새벽부터 일어나 지현이 집에 가서 부모님들 모시고 메이크업을 받으러 갔다가 오는 길이라고.
혁재의 차 트렁크에서 미리 웨딩사진 액자를 꺼내 호텔 연회장 직원들에게 전달을 할 때였다.
바로 그때였다!
“어?”
“와? 아는 사람이가?”
“아, 아이다. 아이다, 아무것도...”
말은 아니라고 했지만, 분명 어디서 본 여자다.
근데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안난다.
단정한 치마 정장차림에 단발머리 끝을 귀 옆으로 살짝 넘기는 여자.
아...
기억이 날 것도 같은데, 누군지 기억이 안난다.
분명 어디서 봤는데...
그 여자는 밖에서 자기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리다가, 이내 한 무리의 여자들이 빠져나온 뒤에야 혼자 신부 대기실로 들어갔다.
난 멀리서 신부 대기실 안의 상황을 지켜봤다.
지현이의 와이프 될 사람과 반갑게 두 손을 마주잡고 인사를 나누는 여자.
“침 닦아라.”
혁재가 재밌다는 표정으로 놀리듯 말했다.
그런데 난 여자의 외모 때문이 아니라, 분명 어디서 봤는데, 누군지 기억이 안나서 그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쳐다보고 있는 거 뿐이었다.
정말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잠시 뒤 여자가 뒤로 줄을 서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신부와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기회를 넘겨주고자 신부 대기실을 빠져나올 때 여자에 대한 기억이 팍! 하고 떠올랐다.
“아, 은행!”
난 내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때리며 결국 여자를 어디서 봤는지 기억해냈다.
“뭐? 뭐라노?”
혁재는 마치 이상한 사람을 보듯 날 쳐다봤다.
하지만 난 그런 혁재의 반응 보단 혼혈 아기를 안고 은행을 찾았던 외국인 고객을 상대로 적금 상품을 소개하던 여자의 모습을 떠올리기에 바빴다.
“아는 사람이가?”
“아니, 그냥 내 혼자.”
“니 혼자 안다고?”
“우리 회사 앞에 있는 은행에서 일하는 여자지 싶다.”
“서울서 내려왔단 말이가?”
“그 여자가 맞는 거 같다.”
사복을 차려입었지만, 그게 원래 그녀의 취향인 듯, 은행에서 봤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는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직함이 대리였다는 것과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더라는 것, 그리고 갓난 아이에게 따뜻한 미소를 짓던 얼굴 표정은 확실히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그 미소는 고객들을 상대하기 위한 업무용 미소가 아니라, 그녀의 자연스러운 미소였다는 걸 이번에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