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20화 (20/325)

# 20

그렇게 대해도 되는 사람이니까

"단기 적금 통장 좀 만들러 왔습니다."

점심시간.

날씨도 슬슬 더워지기 시작하는데, 시원한 냉면을 먹으러 가는 게 어떻겠냐고 묻던 양 대리에게 난 개인적으로 볼 일이 있으니 대신 팀원들을 데리고 다녀오라고 했다.

그리고 점심도 먹지 않고 곧바로 은행을 찾았다.

식사 교대를 위함인지 창구 몇 개는 닫혀 있었고, 대기중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처럼 정장 차림의 직장인들이었다.

번호표를 뽑아놓고 30분 넘게 대기를 해야했고, 내 차례가 됐을 땐 내 뒤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많은 업무를 부탁할 수 밖에 없었다.

"2년 만기 20만 원짜리 하나랑 3년 만기 30만 원짜리 하나, 1년 만기 50만 원짜리 하나, 또 1년 만기 80만 원짜리 하나...이렇게 좀 만들어 주세요."

창구 직원은 장난스레 눈을 크게 뜨며 무슨 적금을 한꺼번에 이렇게 많이 만드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난 함께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지출의 교통정리를 좀 하려고 한다는 정도로 대답을 대신했다.

2년 만기 20만 원짜리 적금.

아파트 월세를 돌리다 보면, 기존 세입자가 나가고 새로운 세입자가 들어올 때마다 최소 벽지 도배와 장판 정도는 갈아줘야 할 것이다.

물론 세입자가 재계약을 원한다면 2년 정도는 그냥 굳어지는 돈이 될 것이고.

나갈 돈은 조금 러프하게 잡고 들어올 돈은 최대한 타이트하게 예상해서 지출을 줄이는 것.

어머니한테 배운 방법이다.

어머니는 오랫동안 아파트 월세를 돌리시며 이런 방법으로 한 번에 들어갈 목돈을 미리미리 조금씩 모아두셨다.

매달 조금씩 준비를 하다보면 소비 습관도 경제적으로 바뀔 수 밖에 없고, 또 막상 목돈이 나갈 때에도 큰 타격이 없다.

정말 벽지 도배와 장판 정도만 갈아줘도 되는 상황이라면 500만 원까지도 안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때에 따라 싱크대를 교체해줘야 할 때도 있을 것이고 문을 바꿔줘야 하는 상황도 있을 거니까 조금 러프하게 잡아놓는 거다.

그래서 넉넉하게 2년 동안 500만 원 정도가 모일 수 있도록 2년 만기 20만 원짜리 적금을 하나 들어놓기로 했다.

3년 만기 30만 원짜리 적금.

내년이면 아영이가 고등학교에 들어간다.

3년 뒤면 수능 준비에 정신이 없겠지.

지금처럼 공부를 꾸준히 잘해준다면 틀림없이 인서울을 할 수 있다.

인서울을 못하더라도 학비는 필요할 것이고.

매달 30만 원씩 꾸준히 모아서 천만 원 정도 준비를 해주면 누나 입장에서도 숨통이 크게 트일 것이다.

뭐 지금부터라도 매형이 정신을 차리고 어디 경비일 자리라도 알아보러 다닌다면, 이 역시도 굳어지겠지만, 막상 상황이 닥쳐서 목 돈을 해주는 거 보다 미리미리 조금씩 만들어놓는 게 좋을 것 같았다.

1년 만기 50만 원짜리 적금.

앞으로 1년에 한 번씩이라도 부모님 여행을 시켜드릴 생각이다.

꼭 외국 여행이 아니더라도 부모님과 함께 1년에 한 번 정도는 여행을 다녀야겠다.

자식들에게 부양을 받아야 할 나이에 딸내외에 외손주까지 부양을 해야하는 부모님.

멀리 살아 그 지옥같은 현실로부터 나 혼자 벗어날 수 있다는 게 죄스러운 입장이다.

1년에 600만 원이면 충분하지 않겠나.

부모님을 모시고 유럽을 갈 것도 아니고...

1년 만기 80만 원짜리 적금.

인터넷으로 이것저것 좀 알아보니까 갑자기 부동산 법이 바뀌면서 일정 금액 이상 되는 고가 아파트의 경우 재산세가 많이 올랐다고 한다.

거기다 그정도 금액되는 아파트를 가지고 있으면 의료보험도 당연히 많이 올라갈 것이고.

정확한 금액은 세무사를 찾아가봐야겠지만, 일단 올현금으로 처음 아파트를 매입할 때 감수해야 할 세금 폭탄을 제외하고 부양가족이 하나 없는 내가 앞으로 매년 내야할 재산세와 의료보험을 계산해보니 천만 원정도면 크게 세금 걱정을 안해도 될 거 같았다.

분명 많이 남을 거다.

남는 건 뭐 CMA 통장이라도 새로 하나 만들어서 따로 관리를 하면 될 일이고...

그렇게 매달 월급 통장에서 자동이체가 되게끔 적금 통장 네 개 개설을 신청해놓고 있을 때였다.

옆 창구에서 유창한 영어가 흘러나왔다.

뭔가 싶어 고개를 돌려보니 하얀 블라우스에 웨이브가 들어간 단발머리의 창구 직원이 갓난 아이를 안고 있는 외국인을 상대로 뭔가를 설명하고 있는 게 아닌가.

예뻤다.

나도 모르게 창구에 붙어있는 직원의 네임카드로 눈이 갔다.

대리 강혜선.

귀옆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외국인 고객에게 은행 상품을 소개하고 있었다.

갓난 아이는 한국인 아버지와 미국 아니면 캐나다, 호주? 아무튼 그쪽 계열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열이었다.

다문화가정을 타겟으로 잡은 4퍼센트 가까운 이율의 적금 상품이 있는 모양이다.

창구 직원은 그 상품을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었고, 수시로 갓난 아이와 눈을 마주치며 미소를 지었다.

꼭 그 창구 직원에게 관심이 있었던 게 아니라 저런 여자와 결혼을 전제로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저 미소가 업무용 미소인지 아닌지는 내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보기엔 따뜻한 미소였고 은행이라는 보장된 직장을 가지고 있으며, 감히 내가 누구 외모를 평가한다는 게 우습긴 하지만, 내가 봤을 땐 상당히 괜찮아 보였다.

거기다 유창한 외국어 실력까지.

어쩌다보니 연애 결혼은 힘든 나이가 되어버렸다.

물론 할 수만 있다면 연애 결혼을 하고 싶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나오기 시작한 아랫배와 점점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닮아가기 시작하는 외모, 거기에 빼박 대한민국 나이까지.

그나마 아직까지 자신이 있는 부분은 패션 정도?

그야 뭐 하는 일이 이쪽이니 당연한 건가?

아무튼 꼭 맞선이 아니더라도 누군가로부터 소개를 받지 않으면 여자를 만나기가 힘든 나이가 되었는데, 만약 누군가의 소개로 여자를 만날 기회가 생기더라도 일을 하는 여자였으면 좋겠고 항상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이야 로또가 있으니 여유가 있지만, 사실 톡까놓고 말해서 요즘같은 시대에 혼자 벌어서 자식까지 낳아 키우며 서울에서 가정을 꾸려나간다는 건 많이 힘들다.

그러다 보니 직업이 있는 여성을 만나고 싶다, 아니 만나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고 또 정말 가능만 하다면 안정된 직장을 가진 여자이면 더 좋겠다는 욕심 아닌 욕심을 품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직 그 생각엔 크게 변화가 오지 않는다.

로또가 있음에도 난...커리어 우먼이 좋다.

그런 생각으로 옆 창구 직원의 모습을 봤던 거 같다.

저 여자가 아니라 저런 여자를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은행 업무를 끝내고 밖으로 나왔을 땐 이미 점심 시간이 30분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급하게 근처 편의점에서 샌드위치와 삼각김밥, 그리고 바나나 우유로 점심을 해결해놓고 사무실로 복귀를 했을 때였다.

엘레베이터에 내려 우리팀 사무실로 가는 중간에 영업 2팀 손 팀장과 잠시 눈이 마주쳤다.

"...?"

내가 고개를 숙여 가볍게 인사를 건넸는데, 그 인사를 받는 손 팀장의 표정이 어딘가 모르게 상당히 불편해 보였다.

꼭 마치 나한테 뭔가 잘못한 게 있는 사람마냥 겸연쩍게 미소를 짓는 게 아닌가.

난 고개를 갸웃거리며 우리팀 사무실로 들어왔고, 또 거기서 억지로 화를 삭히고 있는 양 대리와 불안한 표정으로 내 눈치를 살피는 장향은, 박기태, 이지혜와 마주했다.

"왜들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아뇨, 아무 일도 없습니다."

장향은이 별일 아니라고 말했지만, 양 대리의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일이 있었던 게 확실하다.

난 양 대리의 모습을 훔쳐보며 자리에 앉았고, 내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사내 메신저로 손 팀장이 보낸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공 팀장, 괜찮으면 담배나 한 대 피러 갈까?

고개를 돌려 저 멀리 여러 파티션 넘어의 손 팀장을 쳐다봤다.

나와 눈이 마주친 손 팀장은 검지와 중지를 입술 위로 붙이며 담배를 피러 가자는 제스처를 보냈다.

-네, 지금 가겠습니다.

메시지를 보내놓고 다시 양 대리의 표정을 확인했다.

아무래도 손 팀장과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손 팀장이 좀처럼 보내지 않는 사내 메신저 메시지를 나에게 보낼 이유가 없지 않나.

17층.

담배 두 개피를 꺼내 손 팀장에게 하나를 권한 다음 불을 붙여줬다.

그리고 내가 물고 있는 담배에 불을 붙이려고 하는데, 갑자기 손 팀장이 자신의 라이터로 대신 불을 붙여주는 게 아닌가.

진짜 뭔가 싶었다.

데크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손 팀장은 지압 슬리퍼에서 한쪽 발을 빼어내 다리를 꼬운채 발바닥을 긁적였다.

"휴우...참 진짜 안그래도 이것저것 신경 쓸 거 많은데, 왜 하필이면 거기서 만나가지고..."

"왜 무슨 일 있었습니까?"

"아니, 점심 때 이 대리랑 개인적으로 할 이야기가 좀 있어서 밖에 데리고 나갔단 말이야."

난 담배 한 모금을 깊게 빨아놓은 후 손 팀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근데 또 마침 그 식당으로 5팀 직원들이 오더라고."

"냉면 드시러 가셨어요?"

"어."

"근데요?"

"어쩌다보니까 또 우리 옆자리로 5팀이 앉게 된 거야. 마침 또 향은이도 있고 해서 5팀으로 가니까 좋냐, 이제 센터 볼 맛 좀 나냐...뭐 이런 농담을 좀 주고받았거든. 그러다가 이번에 나크리스 트레이닝 가는 이야기가 나왔어."

"...?"

"이지혜도...간다며?"

"네, 근데 그게 왜..."

"아니, 이 대리가 말 실수를 좀 했어, 그 자리에서."

"무슨..."

"하아...참, 진짜 별 거도 아닌데, 내가 이렇게 해명을 해야한다는 거 자체가 좀 그렇다, 공 팀장."

"무슨 말 실수를 했길래요?"

"이 대리 입장에선 진짜 별 생각 없이 툭하고 내 뱉은 말이야."

난 가만히 손 팀장을 쳐다봤고, 손 팀장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은 후 힘들게 입을 열었다.

"공 팀장이 팀장 달고 나서 너무 유별나게 하는 거 아니냐고...좀 이렇게...왜 그런 거 있잖아, 서로 입장도 좀 생각해주면서 말이야..."

"...!"

"계약직 직원이 어디 5팀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다들 한 명씩 데리고 있는데, 왜 유별나게 이지혜를 그 트레이닝에 참석을 시키느냐는 뉘앙스로 말을 해버렸어. 사실 그렇잖아. 계약직 직원들도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이야기가 있을 건데, 이지혜가 거기에 가버리면 다른 계약직 직원들 기분은 어떻겠어? 거기다 또 다른 팀 팀장들 입장은 뭐가 되느냐고. 우리도 공 팀장 못지 않게 신경 쓰고 있는 부분이야, 그 부분은. 그런데 현실이...그런 거고. 잘 알면서..."

화가 났다.

정확히 뭐에 화가 난 건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런데 화가 나는 건 확실했다.

"보낼 인원이 안나오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알지, 알아. 내가 그걸 왜 몰라. 그걸 아니까 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거고."

"..."

"근데 거기서 양 대리가 가만히 있었음 진짜 별 일 없었을 건데, 네가 뭔데 남의 팀 일에 참견이냐고 바로 되받아쳤고."

"거기서 왜 양 대리가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겁니까?"

"공 팀장, 나 지금 사과하러 온 거야."

"아니, 그러니까요. 그건 알겠는데, 말씀을 그렇게 하시면 안되죠. 제가 없는 자리에서 양 대리라도 한 마디 해야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하아...쩝."

"손 팀장님이랑 이 대리 둘 만 식사하고 있던 자리였다면서요. 그런데 우리팀은 이지혜 씨까지 있는 자리였고. 당사자를 바로 앞에 놔두고 그런 소릴 한다는 게 제정신은 아니죠."

"안 그래도 내가 진짜 따끔하게 혼줄을 냈어. 나중에 물어보면 알겠지만, 5팀 직원들한테 사과까지 했고."

적을 만들 이유는 없다.

거기다 손 팀장이 이렇게 저자세를 유지하며 이 대리의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를 하고 있고.

그런데 가장 부실한 맨파워지만, 한 팀을 이끌어가는 팀장의 입장에서 결코 간과해선 안되는 부분이 있다.

우리팀을 동네북으로, 그렇게 생각해도 되는 팀으로 만들어선 안된다는 거다.

오죽 날, 그리고 우리팀을 만만하게 봤으면 손 팀장도 아닌, 나보다도 한참 입사 후배인 이 대리가 양 대리 앞에서 그런 실수를 할 수 있을까.

이건 비단 이 대리의 말 실수가 문제가 아니라 손 팀장이 얼마나 나를 비롯한 우리팀을 우습게 여기고 또 이 대리 앞에서 그런 모습을 자주 보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그걸 알았기에 양 대리가 항의를 했을 것이고, 그 항의에 손 팀장은 아차싶었던 게 틀림없다.

“...”

그 짧은 순간 버릇처럼 영업부 내의 팀장 서열, 박 부장과 손 팀장의 관계, 장 차장과 손 팀장과의 관계 등이 눈 앞에 그려졌다.

원래라면 난 여기서 손 팀장이 유도하는 반응을 해줘야하는 것이겠지.

그런데...

내가 왜?

내가 왜 없는 자리에서 후배 대리에게 그런 소리를 듣고도 손 팀장이 유도하는 반응을 해줘야 하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고작 이런 일 앞에서도 이것저것 눈치보며, 자세를 낮추면 상대들은 내가 낮춘 자세만큼만 날, 그리고 우리팀을 계속 그렇게 대하지 않을까?

그렇게 대해도 되는 사람, 그렇게 대해도 되는 팀이니까...

"미약하나마 제가 개인적으로 손 팀장님 생각 많이 하고 있는 거 아시죠?"

난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손 팀장에게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저희가 들고 있는 브랜드들 김 팀장님이 있는 1팀으로 안 밀고 저희가 다 가지고 가면서 나크리스 진행하는 거고요."

"알지, 내가 왜 그걸 몰라. 사실 좀 놀랐어. 저번 미팅 때 공 팀장이 김 팀장님이 아니라 내 쪽으로 서있다는 거 보고...그래서 내가 향은이 달라고 할 때 두 말 안하고 보낸 거 아냐.”

물론 나도 당시 내가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일은 아마도 로또뽕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 었을 거다.

따지고 보면 지금 손 팀장에게 나의 팀장 파워를 존중해달란 뉘앙스를 계속 풍기고 있는 것도 로또뽕의 위력일지도...

"그런데 저희한테 이러시면 안되죠. 5팀이 가지고 있는 쓰레기 브랜드 절반 이상이 2팀으로부터 넘겨받은 브랜드입니다."

"..."

"저희가 뭐 거기에 토를 달 입장도 아니지만, 싫은 내색 한 번이라도 했습니까?"

"여기서 또 그런 이야기가 왜 나와?"

"저 이 대리한테 한 마디 해도 되겠습니까?"

"하아..."

"물론 딱히 할 말도 없습니다, 이 대리한테. 제가 좋아하는 손 팀장님께서 이렇게까지 나오시는데, 제가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그래, 그냥 조용히 넘어가자."

"그런데..."

"...?"

"제가 여기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끝내버리면 저희 팀 직원들 사기는 어떻게 합니까? 저 없는 자리에서 제 욕을 했다면서요?”

“욕이 아니라...”

“그것도 한창 입사 선배인 양 대리까지 앞에 있는데.”

"알았다. 이것만 피고 내려가서 이 대리 올려보낼게. 살살해."

"아뇨, 내려가서 할게요. 길게 할 말도 없습니다."

그렇게 손 팀장과 함께 다시 사무실로 내려갔다.

그리고 2팀 사무실로 들어가 불편한 모습으로 날 쳐다보는 이 대리 앞으로 갔다.

"아뇨, 아뇨. 그냥 앉아 있으세요."

이 대리를 앉은 상태에서 컴퓨터 모니터를 보게끔 만들어 놓고 말했다.

그의 귀 근처에 입을 갖다놓고 속삭이듯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이 대리, 이 회사가 제 회사입니까?"

"..."

"제 회사 아니죠? 저도 이 대리처럼 월급받고 일하는 사람이죠? 제가 좀 유별나게 한다고 해서 제 월급이 더 오르고, 없던 보너스가 생기는 거 아니잖아요."

"...네."

"그럼 저도 그럴테니까 이 대리도 할 말만 합시다, 할 말만. 그리고 자기 맡은 할 일만 하자고요. 주제넘게 다른 팀 일, 팀장들이 하는 일에까지 신경 쓰지말고. 그러고 싶으면 팀장을 달아요. 달고 나서 해요. 다른 팀장님들이 우리팀 계약직원이 트레이닝을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가만히 계시는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겁니다. 왜 손 팀장님도 가만히 계시는데, 이 대리가 그래요?"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회사에 불만이 있는 건 그만큼 애정이 있다는 소리죠. 근데 없는 불만까지 만드는 건 병이에요.”

그리고 손 팀장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우리팀 사무실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때였다!

“...!”

이제 막 점심을 끝내고 돌아온 박 부장과 장 차장.

두 사람은 분명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을 건데도 아무것도 못 본듯 그냥 지나쳤다.

그리고 난 우리팀 사무실로 들어서며 한 마디 했다.

“이 대리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영 개념이 없네.”

물론 그 말은 우리팀 직원들 들으라고 한 말이 아니라, 파티션을 사이에 두고 있는 다른 팀들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

"양 대리님."

"네, 팀장님."

사실 억지로 최대한의 박력을 만들어내면서도 속으로는 두근두근했다.

박 부장이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게 느껴졌으니까.

"잘하셨어요, 근데 손 팀장님한테는..."

"네, 알고 있습니다."

내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양 대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2팀으로 가서는 손 팀장 앞으로 서서 고개를 숙였다.

손 팀장 역시 손을 내저으며 난처하다는 듯 머쓱한 미소를 지었고.

이 대리 역시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양 대리에게 허리를 숙였다.

양 대리는 그런 이 대리의 어깨를 가볍게 때려놓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다.

이런 팀장 생활을 버티고 차장, 부장을 달고 있는 장 차장과, 박 부장.

일을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그냥 저 자리까지 올라간 것 자체가 능력이란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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