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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16화 (16/325)

# 16

로또 당첨을 가족들에게 알리지 못하는 이유

"저기요...죄송한데 좀 지나갈게요."

난 서둘러 입가에 맺힌 침을 닦아내며 다리를 의자 쪽으로 바짝 당겼다.

창가 쪽에 앉은 여자가 이번에 내리나 보다.

KTX에 오르자마자 바로 자기 시작해서 동대구 역까지 한 번도 안 깨고 쭉 잤다.

상당히 개운했다.

열차 밖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동대구역.

로또에 당첨이 되고 2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정말 숨가프게 지나간 2주.

처음 대리를 달고 중고 소나타를 뽑았을 때엔 운전하는 재미에 한 번씩 부산에 내려갈 일이 있음 차를 가지고 다녔는데, 그것도 잠시.

이제는 정말 한 번씩 내려가는 부산이지만, 내려갈 일이 있음 잠시 눈이라도 붙이는 게 현명하단 생각으로 다시 KTX를 이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젠 더이상 금요일 근무를 끝내자마자 하루라도 부산에서 더 보내기 위해 무리하게 서울역으로 향하지 않는다.

이젠 부산에 내려가도 내가 잘 방이 없으니까.

괜히 나 하나 때문에 여러 사람이 신경을 써야하는 난처한 상황이 싫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정말 특별한 일이 아니면 잘 내려가지도 않는다.

시간을 확인해봤다.

11시 21분.

부산역에 도착해서 지하철 갈아타고 아버지 수선집에 도착하면 얼추 점심 시간 끝물일 거 같았다.

진동으로 맞춰진 스마트 폰으로는 어머니로 부터 걸려온 부재중 전화가 2통 있었다.

정신도 차릴 겸, 생수 한 모금으로 까끌해진 입안을 헹궈놓고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 하셨어요?"

-와 전화를 안받노?

"잤어요. 금방 깼어. 왜요?"

-어딘쯤 오고있나 해서 걸어봤지.

"동대구네요."

-점심은 와서 먹을 거제?

"그래야죠."

-집으로 바로 갈끼가 아님 가게로 올래?

"집에 아영이 있는 거 아니에요?"

-없을끼다. 있으면 또 뭐 어떻노.

"그냥 물어봤어요, 뭘 또 목에 핏대를 올리고...그냥 바로 가게로 갈게요."

-그라면 아부지랑 점심 안먹고 기다리고 있을까?

"1시 정도 되면 도착하겠네요."

-알았다. 천천히 온나.

전화를 끊고 다시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낀채 잠을 청해보지만, 한 번 달아난 잠이 다시 올리는 만무했다.

부모님은 명륜동 지하철 역 근처에서 옷수선 집을 하신다.

롯데 백화점이 들어오기 훨씬 이전부터 한 곳에서 수선일을 하셨다.

작은 상가건물이라도 싯가로 1억 조금 넘게 가는 아버지 명의의 자가 건물이고, 그 좁은 공간에서 수선일을 하시며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와 누나를 대학공부까지 시키셨다.

원래부터 찾는 손님들은 많았는데, 롯데 백화점이 들어오고나서부터 아버지 수선집을 찾는 손님들은 더 늘어났다.

백화점에 근무하는 아가씨들이 자기들 개인 명품 가방이나 옷들을 가지고 리폼을 해달라고 많이 찾아오는 모양이다.

그리고 자기들 단골 손님들에게 아버지 수선집을 소개해주기도 하고.

아버지는 귀가 잘 안들리는 대신 눈이 참 좋으시다.

그리고 50년 넘게 수선관련 일을 해오실 정도로 한결같은 분이시고.

지금은 수선집 상가와 살고 계신 아파트를 제외하고는 다 날아간 재산이지만, 누나가 시집을 가기 전까지는 돈도 제법 많이 모으셨다.

난 솔직히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돈 걱정이라는 걸 크게 해본 적이 없었다.

친구들 중에서는 용돈도 많이 받는 편에 속했고, 또 고등학교 다닐 땐 과외라는 과외는 다 받았을 정도로 부모님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은 축복받은 케이스다.

하지만 지금은 아버지께서 실땀으로 만들어 놓은 그 노력의 댓가들이 다 어디로 증발을 해버렸는지...만약 그렇게 착실하게 모으신 돈들을 잘 가지고 계셨다면 나의 서울 생활이 이렇게까지 팍팍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저 왔어요."

알루미늄 소재 틀에 반투명 유리의 미닫이 문.

난 그 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갔다.

"저 왔다고요."

귀가 잘 안들리시는 아버지는 아들이 어깨에 손을 올려서야 고개를 돌렸다.

"왔나?"

귀가 잘 안들리시는 분들의 특징은 목소리가 크다는 거다.

모르는 사람이 나와 아버지가 나누는 대화를 들으면 아마도 아버지가 화가 나신 걸로 오해를 할 거다.

그만큼 목소리가 크시다.

아버지는 손에 들고 있던 구찌 가방 자크를 내려놓고 환하게 웃으셨다.

"엄마는?"

소리가 아닌 아들의 입모양과 대화를 하시는 아버지.

"아구찜 시키러 갔다."

"아구찜? 뭘 또 아구찜이고, 점심부터."

"와? 누가 니 무라고 시킸나, 내가 먹고싶어가 시키라고 했는데...껄껄껄..."

"위도 안좋으시면서 매운 것만 골라드신다니까...배달 안되는 집이에요?"

"가서 들고와야 된다. 소짜 만이천 원. 근데 어지간한 집 중짜보다 더 양이 많다. 우리 셋이서 소짜 하나 시키면 충분하다."

"소짜 만이천 원? 아구찜이?"

"서울서는 말도 안되는 가격이제?"

"가격이 중요하나, 어디. 맛이 중요하지."

"맛도 그럭저럭 괜찮다. 먹을만 해."

난 아버지 옆으로 앉아서 스마트 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때 내려와가 느그 매형하고 싸웠다메?"

"싸우긴 뭘 또 싸워..."

"오 서방이 그라던데? 지 때매 니가 화가 많이 났을끼라고."

"하이고...아니네요, 그런 거."

"너무 그라지마라. 지는 어데 그라고 싶어가 그라긋나. 지가 제일로 답답할낀데, 니까지 그라믄 쓰나. 느그 매형이 니를 얼마나 끔찍하게 챙깄는데 그라노. 어이? 어쨌든동 미우나 고우나 가족아이가."

"..."

한숨이 절로 나온다.

"눈치 주지마라이. 아빠가 분명히 말했다이. 알았제?"

"눈치를 주긴 누가 눈치를 줘? 아빠도 진짜...그냥 계속 장가 언제가냐고 쉰소리를 하니까 내가 짜증이 나, 안나. 누군 뭐 장가 가기 싫어서 안가나? 아닌 말로 집안 돈 다 해먹은 게 누군데 지금 누가 누구한테 장가..."

"쓰읍!"

아버지는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지으시며 눈을 부라리셨다.

그리고 난 거기까지만 하고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지도 미안해가 그냥 하는 소리 아이가."

"아, 누가 그걸 몰라? 가만히 있음 누가 뭐라고 하냐고요. 근데 왜 꼭 안해도 될 말을 해서 사람 허파를 뒤집어 놓냐고. 그게 싫어서 그냥 그런 소리 그만하라고 싫은 소리 한 번 했던 거야. 그게 전부라고요."

"그래도 오 서방이 걱정 하더라."

"하아...알았어요, 알았다고."

그렇게 다시 또 난 스마트 폰으로 시선을 돌려놓고 애써 그때의 기억을 지워내기 위해 애를 썼다.

잠시 이어지는 침묵.

아버지는 그 침묵 속에서 가만히 아들의 손을 잡으셨다.

부산 남자치고 꽤 다정하신 아버지.

손가락 끝마디마다 각질이 갈라져 사포보다 더 까끌거리는 손이지만, 난 한 번씩 아버지가 그런 거친 손으로 내 손을 잡아주실 때마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살이 와이리 빠짓노? 일하는 거 많이 힘드나?"

"안 힘든 일이 어딨노, 다 힘들지."

"밥 단디 챙기묵고 댕기라이. 원래 사람이 그란다 안하나. 잘 한 번 살아볼끼라고 건강 해치가며 일해 번 돈 결국엔 그 건강 다시 살끼라고 다 쓴다고. 건강이 최우선이다이. 스트레스 받지말고."

"아빠 걱정이나 하세요, 아들은 멀쩡하니까."

"보약이라도 한 재 지어줄까?"

"아, 됐다고. 아빠나 많이 지어 드시라고."

"짜슥이 아빠가 말하는데..."

"장사는 좀 돼요?"

"똑같지 뭐."

"이제 일 그만두고 편하게 놀러다니고 싶지 않아요?"

"놀면 아프다."

"푸흡..."

"평생을 하고 있는 일인데, 일하는 게 쉬는 거고 노는 거지 뭐...아빠 끄떡없다. 엄마, 아빠 걱정하지 말고 니는 니 앞가림이나 잘해라."

"승진 했어요."

난 아버지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니 저번에 왔을 때 팀장으로 승진했다고 안했나? 그기 얼마나 된다고 또 승진을 하노. 구멍가게도 아니고 명색이 대기업이라는데서 그렇게 막 승진을 시키주고 그라나?"

"일을 잘하니까..."

확실히 거짓말은 힘들다.

난 아버지와 눈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하고 준비해온 어설픈 거짓말들만 늘어놓았다.

"이리저리 일 잘하고 성실하게 하니까 위에서 많이 예뻐해주네..."

"그람 뭐 팀장 위에 차장이가?"

"아니, 그런 건 아니고...그냥 팀장인데...월급을...좀 많이 올려주겠다네요."

"와?"

"아, 와는 뭐가 와고. 그야 당연히 아들이 일을 잘 하니까 그런 거지."

"흐음..."

"그래서 앞으로 매달 엄마, 아빠 용돈을 좀 따로 챙겨드릴라고."

"됐다. 명절, 어버이날, 엄마, 아빠 생일 때마다 챙기주는 용돈이면 충분하다. 한 푼 두 푼 모아가 장가갈 생각을 해야지..."

"장가갈 밑천 모으고도 남을만큼 월급이 올랐어요. 아무튼 매달 엄마, 아빠 통장으로...백만 원씩 붙여줄테니까 그렇게 아세요. 누나하고 매형한테는 꼭 비밀로 하고."

"뭐? 얼마?"

내가 로또에 당첨이 되고도 가족들에게 속 시원하게 고백을 하지 못하는 이유.

이것저것 다 말아먹고 결국엔 월세 보증금까지 비트코인으로 날려먹은 뒤 중학교 다니는 딸과 함께 처가에 얹혀 살고 있는 자랑스런 우리 매형 때문이다.

로또에 당첨이 됐다고 하면 틀림없이 이것저것 되지도 않는 사업 아이템을 가지고 와서 도와달라고 할 것이 뻔하다.

아니, 매형이 그런 말을 안하더라도 어머니가 앞장서서 누나와 매형이 분가를 할 수 있도록 아파트 전세 보증금이라도 맞춰주라고 하실 게 분명하다.

해주는 건 문제가 안된다.

아니, 해주고 싶다.

하지만 그러기엔 내가 매형을 너무 잘 안다.

틀림없이 그 보증금을 가지고 또 뻘짓을 할 게 너무나 뻔하니까...그러면 난 정말 더이상 매형을 사람으로 보지 않을 거니까.

사람은 괜찮다라는 말...

난 우리 매형 덕분에 언제부턴가 그 말을 무척 무서워하게 됐다.

사람은 진짜 괜찮다, 사람은...그래서 가족들을 힘들게 만들지.

그게 우리 매형이다.

그래서 난 우리 매형 덕에 사람은 괜찮다가 아니라 사람도 괜찮다라는 소리를 듣기 위해 그렇게도 애를 쓰며 살고 있는 거다.

로또에 당첨이 되고도 가족들에게 말도 못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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