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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15화 (15/325)

# 15

우리 모두 다 그러고 있는 중 아닌가?

장향은은 우리가 백화점 매니저들을 만나러 가는 자리를 접대라고 표현했지만, 현실은 접대 보다는 공식적으로 일을 하면서 놀러 가는 자리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최소한 나한테는 그런 자리다.

난 항상 그런 생각으로 약을 치러 다녔으니까.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다른 사람들은 빡세다, 불합리한 오버타임이다라고 생각하는 일이 그 일을 하는 당사자 입장에서는 오히려 기다려지는 일인...

내가 백화점 매니저들을 만나러 가는 자리가 바로 그렇다.

장향은의 입장에서야 마시기 싫은 술을 억지로 마시고 분위기를 띄워야 하는 그 일이 업무의 연속일지 몰라도, 나처럼 회사를 마치고 할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때가 되면 기다려지는 일이기도 하다.

왜?

회사가 돈을 내지 않나.

그런데 생색은 본사 소속인 내가 다 낼 수 있고.

거기다 혼자 마시는 것도 아니고 자그마치 여자들이랑 같이 마시는 자리다.

물론 이상한 마음을 품어선 안된다.

하지만 혼자 마시거나 같은 사무실 사람들과 무거운 회사 이야기만 하면서 마시는 자리 보다는 물론 일적인 이야기가 메인이겠지만 조금은 가볍게 하지만 오피셜하게 마실 수 있는 자리가 훨씬 낫지.

술도 잘 넘어가고.

매일 할 수 있음 얼마나 좋겠냐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고, 거기다 우리 5팀처럼 짬 안되는 팀에서는 그럴 수 있는 기회도 그리 많지가 않다.

하지만 나크리스.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우리에겐 나크리스라는 마땅한 명분이 있고, 월급쟁이 입장에서 이런 기회는 절대 놓칠 수 없다.

비장했던 표정을 사무실을 나서기가 무섭게 바꾼 우리 셋.

"1차 안에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절반 이상 꼬알라로 만들겠습니다."

박기태의 의욕은 대단했다.

그리고 그런 박기태를 코치하는 양 대리의 연륜은 나로써는 흉내도 내지 못할 정도로 높은 경지에 있었고.

"차 실장 술 약하다니까 그러네. 근데 기분파고. 오늘 우리는 차 실장 조지러 가는 거예요. 템포를 차 실장한테 맞춰야지, 지금 뭔 생각 하는 거야? 정작 나크리스 이야기는 꺼내 보기도 전에 꼬알라 되면 어쩔 거야?"

"그러니까 대리님이 차 실장 전담마크 하시고 제가 나머지 실장들 죽이면 되잖아요."

"차 실장이 어디 전국주 할 때 빼놓고 술잔 드는 거 봤어요?"

"아참..."

"아놔, 오늘따라 왜 이렇게 불안해? 그냥 기태 씨는 다른 실장들 분위기 맞추다가 내가 사인 주면 그때 투입해. 괜히 엄한짓 하지말고. 무슨 말인지 알아?"

"우와...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리님 입에서 제가 불안하단 소리가 나올 수 있으세요? 언제는 실장들 접대하는 자리에서 저같은 에이스는 본 적이 없다고 하셨으면서!"

그렇게 우리끼리 여자 직원들의 눈치를 벗어나 한창 신이 나 있을 때였다.

아직 퇴근 시간은 아니고, 그렇다고 술을 마시러 가면서 차를 가지고 갈 수도 없는 상황.

오후 5시가 안됐을 때였는데, 우리가 저마다의 자신감을 가지고 제법 의기양양하게 택시를 잡기 위해 로비 현관으로 걸어갈 때였다.

"...!"

보안팀의 움직임이 평소와 좀 달랐다.

아니나 다를까 뭔가 싶어서 뒤를 돌아보니 전무님 이하 상무, 영업이사님, 재무이사님, 그리고 각 부서장들이 한 엘레베이터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순간 난 나도 모르게 거의 반사적으로 신이 나 들떠있는 박기태에게 그만하라고 주의를 줬고, 그와 동시에 양 대리가 전무 군단으로 고개를 돌렸다.

부서장 회의가 있었던 모양이다.

"제가 다른 건 몰라도 노래방 코스 만큼은 전문 아닙니까, 거기서 다 죽일테니까 저만 믿으시면 됩니다."

박기태가 분위기 파악 못하고 노래방에서 자신이 어떻게 실장들을 사로잡을지 모션을 취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나와 양 대리 뿐 아니라 전무 군단에서도 다 봤다.

물론 전무 군단엔 박 부장도 가장 말석에 포함이 되어 있었고.

"이번엔 레퍼토리를 좀 바꿔서 자옥이, 땡벌 사이에 챔피언을 넣어서 삼단 콤보로 날려드리겠습니다. 땡벌 반주 나오기 시작하면 팀장님이랑 대리님은 분위기만 잡아주시면서..."

"아, 조용히 좀 하라고!"

양 대리가 급하게 박기태를 말리는 사이 박 부장이 가장 말석을 잡고 이동하던 전무 군단을 향해 보안팀 직원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제야 박기태는 이게 뭔가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

박기태는 재빨리 두 손을 공손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와 양 대리 역시 두 손을 공손히 앞으로 모으고 전무 군단 가장 선두에 선 전무님과 상무님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주 그냥 힘들이 넘쳐나는구만."

보기 좋다는 표정으로 전무님이 한 말씀 하셨다.

그러자 옆에 있던 상무님도 끼고 있던 금태 안경을 다시 고쳐쓰며 피식하고 웃음을 흘리셨다.

하지만 가장 말석에서 어떻게든 전무 군단에 끼어보겠다고 내시걸음을 하며 쫓아오던 박 부장의 표정은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공은태."

"네, 전무님!"

우리 셋은 전무 군단의 앞을 막지 않으려고 한쪽으로 비켜서 길을 터줬고, 그런 우리 셋을 향해 전무님이 내 이름을 불렀다.

순간 난 전무님이 내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보다 기억하고 계시단 사실에 더 놀랐다.

살짝 감동스럽기까지 했다.

"왜 요즘에 등산 모임에 안 나와?"

"저 그게..."

"이번에 팀장으로 승진했다고?"

"네, 그렇습니다."

"한창 정신없긴 하겠다. 그래도 그럴 때일 수록 건강 챙겨가면서 해야지. 안그래?"

"네, 맞습니다."

"살살 말해. 살살 말해도 다 들린다."

옆에서 상무님이 다시 피식하고 웃으셨다.

"근데 벌써 퇴근하나?"

우리 셋은 어쩔 수 없이 전무 군단을 에스코트 하듯 옆에 따라 붙어 걸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잠시 뒤 자연스럽게 양 대리가 박기태를 데리고 뒤로 빠졌다.

평소였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전무님이 계속 말을 붙이셔서 난 어쩔 수 없이 상무님과 같은 라인에 서서 전무님을 에스코트 하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그 뒤로 영업 이사님과 각 비서들, 그리고 부장님들이 쭉 따라오는 상황.

"아직 퇴근은 아니고 강남점에 가는 길입니다."

"매장 매니저들 데리고 회식이라도 하는 거야?"

"...네."

"좋을 때네...아참 박 부장."

전무님이 갑자기 뭔가 생각이 나신 듯 걸음을 멈춰 세우셨다.

그 순간 그 뒤를 따르던 모든 전무 군단이 일제히 걸음을 멈춰세웠고, 가장 말석에 있던 박 부장이 자켓을 여미며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나왔다.

"네, 전무님."

"아까 박 부장이 말했던 나크리스...그거 은태, 이 친구가 팀장으로 진행하는 거라고 안했나?"

"네, 그렇습니다. 영업 5팀이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박 부장의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내가 지금 뭐 때문에 강남점에 가는지 대충 알겠다는 표정으로 전무님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지원사격 잘 해줘. 팀장 달고 처음 맡는 브랜드인데, 얼마나 애착이 강할 거야? 몇 푼 되지도 않을 브랜드 매출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런 젊은 친구들이 동기부여를 가지고 계속 회사에 남아있어야 회사가 바르게 성장을 하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아? 기껏 투자해서 키워놓은 인재 다른 회사에 빼앗기지 말라고."

"네, 명심하겠습니다."

"사장님 모시고 여기저기 브랜드 따러 다닐 때 생각나네. 흐음...그래, 술 적당히 마시고."

"네, 전무님."

난 허리까지 숙여가며 대답했다.

"괜히 또 아줌마들 술 한잔 돼서 추근덕댄다고 헤벌레 정신 줄 놓지 말고, 응? 그러다 저기 그 예전에 누구야? 성심 물산으로 차장 달고 옮긴 놈 이름 뭐지? 갑자기 왜 그 놈 이름이 기억이 안나?"

재빠르게 박 부장이 대답했다.

"이진혁이..."

"그래, 이진혁이. 그 놈 처럼 애 있는 아줌마한테 코 끼어서 새신랑 헌장가들지 말고 말이야. 하하하..."

전무님의 말에 전무 군단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난 함께 어색한 미소를 띄우며 두 손을 앞으로 공손하게 모아놓고 대답했다.

"절대 그럴 일은 없습니다."

"그래, 알았어. 일 봐."

난 다시 한 번 전무님 앞으로 공손하게 손을 모아놓고 허리를 숙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받아주신 전무님.

"가지."

크흐, 저 카리스마...

전무님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열 명이 넘는 전무 군단은 기계처럼 그를 뒤따랐다.

전무 군단이 로비 현관으로 향하는 동안 나와 양 대리, 그리고 박기태는 전무 군단의 말석에 간신히 끼어있는 박 부장을 향해 끝까지 고개를 숙인 채 인사를 했고.

그리고 우리가 로비 현관 앞에 도착을 했을 땐 검은색 에쿠스 리무진 차량 뒷자리에 전무님이 오르셨고, 상무님을 제외한 모든 전무 군단이 허리를 숙여 전무님을 태우고 떠나는 에쿠스 차량의 뒤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택시를 잡고 강남점으로 가는 동안 난 우리 회사 최강라인 전무 군단과 그 군단을 이끄는 전무님, 그리고 그 말석에 간신히 끼어 있는 박 부장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내 안에 있는 불편한 이중성과 마주하게 됐다.

13억이 생긴 지금, 더이상 예전처럼 간이고 쓸개까지 다 빼놓고 노예처럼 절실하게 일하고 싶지는 않으면서도, 그럼에도 전무 군단에 끼어 그 일원이 되고, 더 나아가 그런 군단을 이끌어보고 싶다는 말도 안되는 상상, 그런 불편한 이중성...

"그런데 팀장님."

택시 조수석에 앉은 박기태가 몸을 뒤로 돌리며 내게 물었다.

"장 선배님 말입니다."

"향은 씨?"

"네."

"향은 씨가 왜?"

"전 사실 장 선배님이 저희팀으로 오시기 전까지 장 선배님이 그렇게 다정한 분이실 거라고 전혀 생각을 못했어요."

"그럼요?"

"진짜 무서우실 줄 알았어요. 사실 후배들 사이에서 장 선배님 소문 장난 아니거든요."

"소문...난 소문으로 기태 씨가 베트맨이라고 들었는데, 의외로 진득해서 놀라고 있는 중인데?"

"베트맨요? 제가 왜 베트맨입니까?"

"박쥐라고 소문이 자자한데 본인은 몰랐나보네?"

"네? 박쥐요?"

내 옆에서 양 대리가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크게 터뜨렸다.

"푸하하하..."

"여기저기 붙어다닌다고 박쥐라던데...기태 씨는 몰랐어요?"

"팀장님!"

"크흐흐흐...농담 쬐금 해봤어요."

양 대리는 배를 잡고 옆으로 쓰러졌고, 박기태는 양 볼에 심술을 가득 채워놓고 다시 앞으로 몸을 돌렸다.

"향은 씨...보기하고는 다르게 참 여린 사람이에요."

눈물까지 쏙 빼가며 웃던 양 대리도, 애써 심술을 부리며 앞으로 몸을 돌린 박기태도 내 말에 조심히 고개를 돌렸다.

"처음부터 영업부 소속이 아니었다는 건 양 대리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알죠, MD팀에서 문제가 생겨 영업부로 트랜스퍼 된 거잖아요."

"아무래도 여자들이 많은 부서가 되다보니까 여자들만의 똥군기가 대단했을 뿐더러,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외모도 수준급이고 또 스펙도 짱짱하고...시기 질투가 많았던 모양이에요. 근데 또 향은 씨가 기질 자체가 모질지 못하다보니까 이리저리 순둥이처럼 당하기만 했고. 근데 또 향은 씨처럼 여린 사람들이 한 번 뚜껑 열리면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법이거든."

양 대리는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고, 박기태는 다시 몸을 뒤로 돌려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회사 그만 둘 생각으로 자기 사수를 상대로 크게 한 번 뒤집고 당시 내가 있던 팀으로 강제 트랜스퍼가 됐던 거였어요. 그때 향은 씨도 진지하게 퇴사를 고민하고 있었고. 근데 제가 잡았죠."

"..."

"아깝더라고. 당시 나한테 향은 씨 불어 능력이 필요하기도 했을 뿐더러, 저렇게 능력 있는 사람이 사람에 치여서 회사를 그만둘 생각을 한다는 게 너무 아까웠어요. 그래서 내가 그랬죠. 지금 이미지 딱 좋다. 아무도 못 건드는 이 구역의 미친년 컨셉. 내가 센터로 키워보고 싶은데, 나랑 같이 참으면서 조금만 더 해보는 게 어떻겠냐...당시 내가 향은 씨 사수였거든."

"아..."

"사실 센터를 보다보면 브랜드 업체를 상대로 싸우기도 해야하지만 다른 팀, 다른 부서랑도 계속 싸워야 하잖아요. 향은 씨는 그걸 잘 해내보겠다고 그 컨셉을 아직까지 계속 유지하고 있는 거고. 센터가 뭐야? 가정으로 따지면 엄마의 역할이잖아요. 밖에선 강하고 안에선 한없이 부드러워야 하는...향은 씨가 괜히 에이스 센터가 아니에요."

"진짜 적성을 영업부에 와서 찾은 거군요."

"자신의 적성을 절실함에 억지로 맞추고 있는 거죠."

"..."

"우리 모두 다 그러고 있는 중 아닌가?"

그 말을 끝으로 우리 모두는 약속 장소로 가는 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그리고 매장 매니저들과의 술자리.

술이 술을 마시고 또 술맛과 물맛을 구별하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가있는 상태에서도 우린 나크리스라는 목표만 보고 달리고 또 달렸다.

아줌마들의 선을 넘는 음담패설에도 억지 웃음을 흘리고, 본사를 향한 그녀들의 끝없는 원성에도 본사가 아닌 그녀들의 편에 서서 함께 본사를 욕해주며 다시 한 잔.

그리고 그녀들의 원성과 애로사항을 잠재우기 위해 애써 더 강하게 본사의 시스템과 메뉴얼을 지적하며 먹고살기 힘들어죽겠다는 연기를 하고 또 그녀들의 위로를 이끌어낸다.

왜.

이게 우리 영업팀의 진짜 업무니까.

이게 우리 화이트 칼라 넥타이 부대원들이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차 실장님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같이 좀 먹고 삽시다!"

"내가 진짜 양 대리님 때문에 못 살아..."

"이번에 나크리스 디피 샘플본 들어오면 거기서 홀스헤어 가방 하나 멋진 놈으로 따로 빼서 차 실장님 가을 아이템으로 선물 할게."

"기왕 해주는 거 홀스헤어 말고 엘리게이터나 타조가죽으로 하나 해 줘."

"에헤이...할매도 아니고 무슨 엘리게이터...디자인 봐놓고도 그런다. 엘리게이터는 너무 노땅이야. 차 실장님한테는 홀스헤어 와인칼라 라인이 딱이라니까?"

"하여간 비싼 거 안해주려고 용 쓰는 거 봐."

"그런 게 아니라니까? 홀스헤어 와인칼라 라인 직접 봐요. 바로 눈 돌아갈테니까..."

"알면서도 동생 같아서 또 속아주는 거예요. 그래서 언제부터 나크리스 매장 맡아나가면 되는 거야?"

"사랑합니다, 누님!

"누님은 무슨...아, 몰라, 몰라! 기껏 맨파워 맞춰놔서 이제 좀 쉽게 매장 운영하나 했는데, 다시 하게 생겼어. 내가 진짜 못살아..."

"기태 씨!"

"넵, 대리님."

"나 오늘 차 실장님이랑 찐하게 노래 한 곡 할라니까 내 18번 좀 장전해줘요."

"사랑하는 영자씨 갑니다!"

"아니지, 사랑하는 차 실장님이지."

"지금 바로 들어갑니다, 사랑하는 차 실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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