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경험해보지 못한 불안함
"그건 그렇고 양 대리님, 미리 나크리스 약 좀 쳐놔야 되지 않겠습니까? 브랜드 잡고 1년 정도 매장 유지 해내려면 첫 달에 오픈빨이라도 확 당겨야 다음 시즌을 내다볼 기회라도 생길 거 아니에요."
"쳐야죠. 진짜 말 그대로 한국에선 아는 사람들만 아는 브랜드인데, 약 없이 진행한다는 건 말이 안되죠."
박기태는 나와 양 대리가 나누는 대화에 흥미를 보이며 귀를 기울였다.
"그쪽으로는 양 대리님이 전문가라고 들었습니다."
"전문가는요, 무슨. 그냥 얼굴에 철판 딱 깔고 같이 좀 먹고 삽시다! 하는 거지..."
"그럼 다음주 쯤에 약 한 번 치러 갈까요?"
"다음주, 다음주라...자리를 마련하는 건 일도 아닌데, 문제는 약이 없지않습니까?"
"아하...그렇네요."
"그럼 이렇게 하시죠, 팀장님."
"어떻게요?"
박기태는 나와 양 대리의 대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차피 나크리스는 약 한 번 친다고 약빨이 먹힐 브랜드가 아니잖아요."
"그렇죠."
"일단 다음주에 나크리스 가격대 브랜드를 핸들링 할 수 있는 매니저들을 몇 명 추려볼게요. 그리고 나크리스 김형찬 씨한테 예전에 한선 물산이 국내에서 나크리스 컨트롤 할 때 나크리스 쪽으로 요청했던 CS 건을 다 뽑아달라고 해서 고객 정보를 좀 모아보죠."
난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을 하듯 양 대리의 작전을 짐작했다.
"파리 본사에서 진짜 약이 도착하기 전에 고객 정보를 약으로 사용하자?"
"어쩌면 그게 진짜 약일 수도 있고요. 저희보다 더 전문가들 아닙니까, 매장 매니저들이. 대충 상황 설명해주고, 고객 정보 뿌려주면 된다, 안된다 그 자리에서 바로 피드백이 올 겁니다."
그러는 사이 장향은으로부터 부탁받은 내용을 모두 메모해서 이지혜가 돌아왔다.
애써 밝은 표정을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딱 봐도 무척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
난 이지혜를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기본 업무죠?"
"네?"
"센터의 기본 업무. 제가 봤을 때 방금 장향은 씨가 와서 이지혜 씨한테 부탁을 한 건 다음주부터 바로 우리 5팀의 센터를 볼 수 있도록 업무 진행을 뽑아달란 소리였어요."
"네, 그래도 혹시 몰라서..."
이지혜의 의욕을 알고 있었기에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장향은 씨가 원래 좀 말이 빠른 스타일이에요. 지혜 씨도 지난 몇 달간 센터 일을 해봐서 알겠지만, 성격이 급해질 수 밖에 없어."
"네."
"이번주 까지만 지혜 씨가 센터 일 보고 다음주 장향은 씨 넘어오면 장향은 씨한테 센터 업무 전부 맡길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요."
"...!"
이지혜는 당황한 표정으로 안절부절 못했다.
"앞으로 지혜 씨한테 다른 업무를 좀 맡겨볼까 해서 그래요. 지혜 씨가 센터 일을 못봐서 그런 게 아니라, 지혜 씨가 소화해낼 수 있는 업무를 맡겨보려는 거니까 쓸데없는 오해는 하지 말고."
"자, 잘할 수 있습니다, 팀장님."
"알아, 아는데 다음주면 우리 팀으로 장향은 씨가 오잖아요. 에이스가 있는데, 그 포지션에 이지혜 씨를 같이 둘 이유가 없잖아요. 안그래?"
"...!"
"만약에 내가 지혜 씨를 진짜 센터로 키워보겠다 마음 먹었음 어떻게든 내 옆에 딱 붙여놓고 계속 교육을 했을 거야. 그런데 내가 봤을 때 지혜 씨는 센터 포지션은 아닌 거 같아요."
"아직 제대로 해보..."
"시간이 걸리잖아요. 지금 우린 지혜 씨를 가르쳐가면서 일을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에요."
"..."
"쓸데없는 오해 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어요. 지혜 씨가 센터 일을 못봐서 그러는 게 절대 아냐. 나크리스까지 들어오면 진짜 에이스 센터가 필요해서 그런 거 뿐이에요. 그리고 우리가 1팀처럼 맨파워가 빵빵한것도 아니고 메인 센터 하나에 어시스턴트 센터까지 둘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서 그런 거라고."
"...네."
"그럼 미팅은 여기까지 하고 일 시작합니다."
미팅 자료를 정리하면서 박기태가 자신과 눈이 마주친 이지혜를 향해 힘내라는 식으로 싱긋이 미소를 지었고, 그 미소에 이지혜 역시 억지로 미소를 얼굴에 띄웠다.
어렴풋이나마 이지혜가 느끼고 있을 불안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이지혜가 견뎌내야 하는 부분이다.
이지혜의 운명을 책임지지도 못할 거면서 나만 믿고 따라오라는 말을 할 자신이 내게는 없었다.
그렇게 오전 업무가 시작되고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이지혜는 화장실 한 번 가지않고 컴퓨터 모니터 안으로 기어들어갈 기세로 열심히 뭔가를 만들었다.
11시 55분.
점심 시간이 다가왔지만, 양 대리와 박기태와는 달리 이지혜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컴퓨터 앞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결국 양 대리가 이지혜 뒤로 서서 작성중인 내용을 확인하며 입맛을 다셨다.
"이거 이렇게까지 안해도 돼. 뭘 이렇게 꼼꼼하게 만들어요?"
"그래도 혹시 몰라서요."
"모르긴 뭘 몰라? 지혜 씨가 인수인계를 받는 입장이라고 생각을 해봐. 작년 크레딧노트가 왜 필요해? 이건 어차피 우리랑 상관도 없는 건데. 이 브랜드는 3팀한테 짬당한 브랜드잖아. 그냥 지난 분기랑 현 분기 크레딧노트 어마운트만 표기해요. 그럼 돼."
"...네, 제가 깔끔하게 정리해보겠습니다."
"..."
양 대리는 양쪽 볼에 바람을 불어넣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식사하러 갑시다."
"전 조금 있다가 가겠습니다, 이것만 금방 끝내놓고."
"그..."
"갑시다."
양 대리가 한 마디 더 붙이려고 할 때 내가 자켓을 챙겨 일어나며 식사를 하러 가자고 말했다.
양 대리는 마치 이건 아닌데...하는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며 자신의 자켓을 챙겨 사무실을 나섰다.
"천천히 해요, 지혜 씨. 급한 거 아니잖아."
"...네."
"알았어, 알았어. 우리 신경 쓰지마. 알아서 점심 챙겨먹어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점심을 먹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난 한가지 의심이 들었다.
과연 점심은 먹고 저러고 있는 걸까, 아님 점심도 못먹고 저러고 있는 걸까...
아무리 봐도 움직였던 흔적이 없다.
"지혜 씨."
"네, 팀장님."
"점심은 먹었어요?"
"네, 간단하게 먹었습니다."
"..."
뭘 먹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이상하게 안 먹어놓고 먹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물어보지 못했다.
각자의 업무 스타일이라는 게 있고, 내가 내 업무 스타일을 타인으로 하여금 관섭받고 싶지 않듯, 이지혜 역시 자신의 업무 스타일을 다른 누군가로부터 강요 당하고 싶지 않을테니.
"흐음..."
이지혜의 모니터 화면을 볼 수는 없었지만, 난 자리에 앉아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는 이지혜의 뒷 모습을 한참동안 쳐다봤다.
이상하게 불안했다.
그리고 양 대리 역시 수시로 고개를 돌려 필요 이상으로 과몰입을 해있는 이지혜를 훔쳐봤다.
"저기 지혜 씨."
"네, 대리님."
"혹시 아침 미팅 때 내가 말했던 B/L 계약 복사본 보냈어요?"
"네, 메일로 보내놨습니다. 프린트 해드릴까요?"
"아냐, 아냐, 내가 할게요. 하던 거 해, 하던 거 해."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잠시 뒤.
양 대리로부터 한 통의 사내 메신저 메시지가 도착했다.
-제가 지혜 씨 데리고 나가서 뭐라도 좀 먹이고 들어올까요?
난 고개를 들어 양 대리를 쳐다봤다.
양 대리 역시 나와 비슷한 의심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와 눈이 마주친 양 대리는 어서 오케이 사인을 달라는 식으로 날 쳐다봤다.
-그냥 놔둬보세요. 지금은 가만히 내버려두는 게 도와주는 거 같으니까.
그렇게 이지혜는 퇴근 시간이 다가올 때까지 화장실을 갈 때를 제외하고는 하루종일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점심 시간이 다가올 때쯤 장향은이 우리 사무실을 다시 찾았다.
"팀장님."
"네, 향은 씨."
"저 부탁 드릴 게 하나 더 있는데요."
장향은은 박기태와 이지혜가 깔끔하게 비워놓은 자신의 자리를 눈짓하며 말했다.
"제 프린터 좀 이쪽으로 옮겨 놓으면 안될까요?"
"왜 안돼요? 다 비워놨잖아요."
"그럼 점심 시간 이용해서 자리 세팅 좀 해놓겠습니다."
난 박기태에게 수고스럽겠지만, 장향은을 좀 도와주라고 말했다.
그렇게 장향은의 개인 프린터가 우리 팀으로 옮겨와 세팅이 되었고, 장향은은 점심 시간을 이용해 자신의 키보드 손목 받침대부터 잡다한 사무 용품을 가져와 월요일부터 본격적으로 5팀의 업무를 시작할 준비를 했다.
세팅을 끝낸 장향은에게 내가 웃으며 물었다.
"손 팀장님 서운해 하시겠어요. 어차피 갈 사람이지만, 이렇게 벌써부터 준비를 하는 거 보시면."
"제가 부탁을 좀 드렸어요."
"무슨 부탁?"
"너무 급하게 이뤄진 팀 이동이잖아요. 브랜드 업체 쪽으로 컴플레인 레터 걸어둔 게 있는데, 피드백은 아무리 빨리 와도 다음주 월요일은 돼야 올 거 같거든요. 피드백 받고 또 전화로 한 바탕 싸워야 될 거 같아요. 상대 피드백이 있기 전까지는 혼자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다음주 월요일에 여기로 출근을 해서 마무리를 지어야 할 거 같다고 말씀드렸더니, 그럼 시간 있을 때 짐을 옮겨놓으라고 하시더라고요."
"아...그런 거라면 뭐."
그때까지만 해도 어수선하기는 했지만 장향은은 큰 문제 없이 이동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렇게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이 시작됐다.
그리고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난처한 문제가 터져버렸다.
"이, 이게..."
장향은은 난처한 표정으로 이지혜를 쳐다보고 있었다.
난 이제 막 출근을 했고, 우리팀 사무실에 도착하기도 전에 저 멀리에서 풍겨져나오는 어색한 공기에 뭔가 일이 터졌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양 대리가 서류 가방을 풀며 무슨 일인지 기웃거리고 있었고, 박기태는 장향은이 왜 난처한 표정으로 이지혜를 쳐다보는지 전혀 모르겠단 표정으로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이지혜는 자신이 큰 잘못을 한 줄 알고 불안한 눈으로 이리저리 눈알을 굴렸다.
"왜 그래요? 뭔데?"
내가 이제 막 사무실 파티션 앞으로 섰을 때였다.
양 대리가 장향은 손에 들린 서류를 건네받고는 빠르게 훑어보더니 두 눈을 끔뻑거렸다.
"헐..."
양 대리 역시 무척이나 당황한 얼굴로 이지혜를 쳐다봤다.
"오셨습니까, 팀장님."
박기태의 인사를 시작으로 팀원들이 내게 인사를 건넸고, 그 사이 양 대리는 들고 있던 서류를 마치 내게 들키지 않으려는 듯 자신의 등뒤로 잽싸게 숨겼다.
"뭔데요? 뭔데 그렇게 숨겨요?"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난 고개를 갸웃거리며 양 대리를 쳐다봤고, 양 대리는 이내 등 뒤로 숨긴 서류를 내게 건넸다.
그리고 장향은이 목근처를 긁으며 이지혜에게 물었다.
"지혜 씨, 혹시 이거...아...내 뜻은 그게 아니었는데."
"...?"
난 도대체 뭔가 싶어서 양 대리가 건넨 서류를 훑어봤다.
"...!"
정말 헐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완벽하게 만들어진 보고서였다.
이지혜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듯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거 만드는데 얼마나 걸렸어요?"
"..."
"혹시 주말까지 매달려서 만든 건 아니죠? 제발 그건 아니라고 말해줘요, 지혜 씨."
장향은은 이지혜가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자 두 눈을 감고 천장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죄, 죄송합니다, 선배님. 혹시 빠진 부분이나 잘못된 부분이 있음 말씀해주세요.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아니, 그런게 아니라 내 말은..."
"흐음..."
솔직히 웃음이 나왔는데, 이지혜의 표정이 너무 심각해서 웃음을 들킬 수가 없었다.
"지혜 씨, 혹시 이거 원본 파일 가지고 있어요?"
"네. 팀장님. 가지고 있습니다."
"크흠...잘됐네. 잘 가지고 있다가 앞으로 우리팀 메뉴얼로 사용하면 되겠어요. 진짜 잘 만들었어요. 손 많이 갔겠는데...””
양 대리 역시 웃음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장향은이 이지혜의 손을 꼬옥 잡으며 말했다.
"지혜 씨, 진짜 미안해요. 내가 전달을 잘못했나봐. 아니 전달을 잘못한 게 아닌데? 보통 우린 그렇게 이야기를 하거든. 내가 부탁했던 건 내가 와서 바로 업무 시작할 수 있도록 현 영업 5팀 상황을 간단한 문서로 알려달라고 했던 거지, 이렇게 보고서 형식으로 만들어 놓으란 말은 아니었어요."
"...네?"
"아니, 내가 뭐라고 팀장님도 아니고 차장님, 부장님도 아닌데, 지혜 씨한테 이런 완벽한 보고서 형식을 요구하겠어요? 아니, 이런 보고서는 나도 못 만들어, 솔직하게 말해서."
"..."
"아니, 이건 진짜 지금 당장 부장님한테 올려도 될 정도로 완벽한 보고서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터진다.
갑자기 이지혜의 두 눈에 촉촉하게 물기가 맺히기 시작했다.
“...!”
“왜, 왜 울어요, 지혜 씨..”
난처해하던 장향은도, 웃음을 참고 있던 나와 양 대리도 예고에 없던 이지혜의 눈물 앞에 얼음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
이지혜는 급하게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저도 갑자기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
우리 모두는 그 짧은 순간 이지혜의 두 눈에 들어찬 눈물의 내용을 눈치챌 수 있었다.
이지혜의 두 눈에 들어찬 눈물은 나와 양 대리, 그리고 장향은과 박기태가 경험해보지 못한 계약직원의 불안함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