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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12화 (12/325)

# 12

마땅한 상대가 없네요

시원한 소맥 한 잔과 함께 하루의 긴장이 모두 사라진다.

하지만 빈속에 들어간 소맥은 금새 취기를 불러일으키고, 그 취기에 우린 또 회사 이야기를 안주삼아 소맥을 말게 된다.

어제의 적은 오늘의 동지가 되었고, 예전의 사수는 오늘의 술안주 메인이 되었다.

치지직...

양 대리와 난 각자의 생각을 서로에게 숨긴채 그저 불판 위에서 구워지는 고기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리고 고기를 구워주시는 이모님이 앞 접시에 옮겨 준 고기 한 점으로 다시 한 잔.

"김 팀장님한테 듣자하니까 양 대리님은 아직 부모님과 함께 살고 계시다고 하던데..."

"네, 아직 부모님 그늘에 비비고 있는 중입니다."

"부럽네요. 저도 부모님만 근처 사신다면 당장이라도 들어가 살고 싶네요."

"모르는 소리 하지마세요. 불편한 게 한두 갠 줄 아세요? 저만 불편하면 모르겠지만, 부모님들도 불편하시죠. 한 번씩 회식한다고 늦게 들어갈 때면 아직까지 어머니는 거실 바닥에 이불 깔아놓고 저 올 때까지 기다리고 계세요."

난 피식하고 웃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이렇게라도 버티며 한 푼 두 푼 모아야 장가라도 갈 거 아닙니까?"

"장가는 어디 혼자서 갑니까? 여자도 없으시면서..."

"여자가 없어서 장가를 못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긴..."

"그래도 전 다른 동기 대리들에 비해 그나마 여유가 있는 편입니다. 부모님한테 얹혀 살면서 남들 월세로 빠질 돈 차곡차곡 모아서 아파트라도 하나 해놨으니까요."

난 두 눈을 크게 뜨며 양 대리를 쳐다봤다.

"양 대리님 이름으로 된 아파트가 있으세요?"

"조그만한 거요."

"그래도 그게 어딥니까?"

"전세 끼고 또 은행 대출 왕창 내서 그렇게 샀습니다. 어머니가 부동산을 맹신하시는 분이시거든요. 뭐 결론만 놓고 보면 어머니 말씀 듣길 잘했죠. 그래도 처음 샀을 때 대비 실거래가가 6천 정도는 올랐거든요."

"우와..."

"뭐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에요. 6천이 오르면 뭐합니까? 내놓는다고 누가 바로 사갈 것도 아니고. 그리고 처음 살 때 들어갔던 세금, 또 팔 때 내야하는 세금까지, 매달 갚고 있는 대출 이자까지 다 따져서 계산해 보면 크게 재미를 본 것도 아니에요."

"그래도 어쨌거나 오르긴 오른 거 아닙니까?"

"그렇죠. 은행에 가만히 꽂아둔 것 보다야 훨씬 낫죠. 근데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오네요."

"왜요?"

"전세 계약이 4달 정도 밖에 안남았거든요. 아직 세입자가 재계약을 하고싶단 말이 없네요.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이 2년 정도 재계약을 해서 더 살겠다고 하면 다행이지만, 다른데로 이사를 가겠다고 하면 보증금을 만들어줘야 할 거 아닙니까. 바로 다른 세입자를 받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만 그게 어디 제 마음대로 되나요. 그래도 마음은 든든합니다. 결혼을 하게 되면 그냥 거기 들어가서 살면 되니까요."

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음 배가 아팠을 거다.

배도 아프고, 난 언제쯤 저정도 인생 세팅을 해놓을 수 있을까 초조해지기도 하고 그래서 더 막막해졌을 거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진심으로 양 대리가 가지고 있는 만족감에 함께 기분 좋은 미소를 보내줄 수 있었다.

"팀장님은요? 팀장님은 연애 안하십니까?"

"하고싶죠, 연애. 근데 우리 나이에 재미로만 연애를 할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이제 여자를 만난다면 가급적 결혼까지 염두에 두고 만나야 하는데...쓰읍, 마땅한 상대가 없네요."

양 대리는 공감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람 참 괜찮아 보여서 한 번 만나봤음 좋겠다 싶은 여자들은 절 마땅한 상대로 생각해주지 않고."

"하하하. 그게 정답이죠."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저도 모르게 이 생활에 익숙해져 버렸다는 거예요."

"흐음..."

"이렇게 혼자 사는 게 언제부턴가 너무 편해져버렸네요. 연애세포가 다 죽어버린 거 같아요. 참 이게 저 스스로도 걱정스러운데, 저나 양 대리님 월급이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기엔 넉넉하지 못한 금액이지만, 부모님 용돈 챙겨드리면서, 시즌 지날 때마다 기분전환 겸 옷 한 벌씩 해입고...그렇게 혼자 살기엔 아쉬울 게 전혀 없는 액수잖아요."

"그렇죠."

"처음엔 주위 친구들이 결혼을 한다고 청첩장을 보내올 때마다 난 언제 장가를 갈까...하고 괜히 초조하고 불안했었는데, 이렇게 서른 중반이 되고보니까 불안한 것도 없고 그냥 이렇게 혼자 사는 것도 크게 나쁠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도 들고...아무튼 좀 그렇네요."

그래, 이런 사이도 크게 나쁠 거 같지는 않았다.

비슷한 또래의 상사, 부하직원이 한 팀에 있다는 것.

아마도 양 대리와는 길어봤자 2년 정도 한 팀을 이루게 될 것이다.

길어봤자 2년.

그 안에 영업부가 새로 재편이 될 수도 있고 또 양 대리가 팀장으로 승진을 할 수도 있다.

길어봤자 2년인데 양 대리 실력을 뽑아먹으며, 또 부하직원들 앞에서는 그의 짬밥을 존중해주는 형태로 함께 가는 것도 크게 나쁠 것 같지는 않았다.

장 차장이 묶어놓은 족쇄를 풀어버리니, 그 족쇄와 함께 야망이라는 수갑도 덩달아 풀려버린 기분이다.

마음이 편안했다.

양 대리라는 사람이 좀 더 자세히 보였고, 난 그런 양 대리 앞에서 내가 쓰고 있던 갑갑한 가면을 시원하게 벗어낼 수 있었다.

저녁만 간단히 먹고 양 대리와는 헤어졌다.

이틀 연속 차를 회사 주차장에 세워놓고 지하철로 출퇴근을 하고 있다.

마침 빈자리가 하나 있어 자리에 앉아 서류 가방을 무릎 위로 올려놓았다.

그리고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을 잊어버리기 위해 농협 어플을 클릭했다.

13억.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른 숫자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본다.

과연 난 여기 이 지하철 칸에 탄 사람들 중 몇 번째로 부자일까?

그런 심리가 있지 않나.

대놓고 하지는 못하지만, 그냥 속으로 다른 사람과 현재의 나 자신을 비교해보며 괜히 열등감을 느끼고 또 때론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는 심리.

취기가 살짝 오른 상태에서 여전히 가시지 않는 장 차장의 냄새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13억이라는 숫자에게 너무나 고마웠다.

넌 그냥 그 안에 가만히 있었지만, 네가 내 것이란 생각에 난 오늘 지난 6년간 엄두도 내지 못한 용기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고맙다.

그렇게 어제와는 다른 새로운 하루가 시작됐다.

보고 있는 것 만으로도 질식을 할 것 같은 지옥철.

하지만 난 오늘도 어제처럼 택시보다는 지하철을 선택했다.

13억이 생겼다고 해서 소비 습관을 흐트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13억은 그대로 놔두고, 평소 살던대로 살고 싶었다.

진짜 아껴야 하는 상황에서 아끼는 것과, 아끼는 재미를 즐기면서 아끼는 건 하루를 시작하는 마인드에서부터 크게 달랐다.

모르는 사람들과 몸을 부대껴야 하는 이 기분이 더이상 불쾌하거나 짜증스럽지 않았고, 오히려 이렇게 출근시간에 세이브 한 택시비 2만 원으로 13억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에 뿌듯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시작된 업무.

"차장님 오십니다."

미팅 중에 양 대리가 속삭이듯 내게 말했다.

난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평소보다 더 밝은 얼굴, 공손한 태도로 우리팀 사무실 파티션 앞을 스쳐지나가는 장 차장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고개만 살짝 돌린 장 차장.

무표정하게 지나치다가 이내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피식하고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한쪽 손을 들어 나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래, 김 팀장이 내게 해줬던 말처럼 장 차장이 내 부모를 죽인 원수도 아닌데, 또 내가 양 대리에게 했던 말처럼 장 차장이 내 인생에 그렇게까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도 아닌데, 그냥 이렇게 적당한 가식의 가면을 쓰고 또 적당한 거리를 두고 대하자.

산이라는 게 꼭 넘어야만 하는 대상은 아니니까.

돌아갈 수도 있다, 얼마든지.

그렇게 아침 미팅이 끝을 향해 달려갈 때였다.

"똑똑똑..."

입으로 만들어진 노크소리.

영업 2팀의 장향은이 환한 미소를 얼굴에 띄워놓고 우리가 회의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장향은의 등장에 막내 이지혜는 바짝 긴장을 타기 시작한다.

홍성 인터네셔널 최강의 여자 센터, 장향은.

이지혜가 긴장을 타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앞으로 영업 5팀의 안방을 책임지게 될 센터이자, 또 여자 신입 직원들 사이에서는 절대 걸리지 말아야 할 끝판대장 선배가 자기 눈앞에 서있으니 말이다.

"2팀에서 한창 잘 나가고 있는데, 주워먹을 거 하나 없는 우리 팀으로 오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내가 보낸 환한 미소에 장향은은 가볍게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미안하긴요.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팀장님. 이제야 좀 센터 보는 맛이 나겠네요."

"쉿...듣겠어요."

난 2팀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낮게 말했다.

그러자 장향은은 짐짓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목소리가 2팀에까지 들릴 정도로 컸냐고 물었다.

그리고 다시 표정을 풀며 말했다.

"뭐 어때요, 제가 없는 말 한 것도 아닌데. 현재 2팀이 가지고 있는 브랜드 중 센터의 역할이 필요한 브랜드가 하나라도 있나요, 어디. 꼭 센터가 있어야 하는 브랜드는 죄다 5팀으로 몰려있잖아요."

"거 참 조용히 좀 말하라니까..."

"손가락이 근질거려서 지난 4달 동안 혼났네요. 안녕하세요, 양 대리님."

"앞으로 잘해봅시다."

"넵! 근데 앞으로 제 자리는 어디인가요?"

박기태가 잽싸게 일어나 자신이 현재 쓰고 있는 책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깁니다. 선배님 오시기 전까지 깨끗하게 비워놓겠습니다."

"천천히 하셔도 돼요. 5팀으로 정식 출근을 하는 건 다음주 월요일부터니까. 지혜 씨가 현재 5팀 센터를 보고 있죠?"

장향은의 눈빛을 받은 이지혜는 벌떡 일어나서 대답했다.

"네, 선배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부탁이라니요. 서로 힘 합쳐서  잘해봐요.”

“넵!”

이지혜의 패기 넘치는 대답에 장향은은 특유의 보조개를 만들어내며 환하게 웃었다.

"근데 팀장님."

"네, 향은 씨."

"저 괜찮으시다면 이지혜 씨한테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편하게 해요. 어차피 다음주부터 같이 일할 사이에 뭘 또 그런 걸 묻고 있어? 괜찮죠, 지혜 씨?"

"네, 괜찮습니다."

이지혜는 여전히 두 손을 앞으로 공손히 모으고 긴장한 상태로 장향은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힘든 부탁은 아니고...나 다음주 월요일 5팀으로 출근 시작하면 바로 볼 수 있게 현재 영업 5팀이 핸들링하고 있는 브랜드들 마진 베이스랑 커스터머 프라이스, 브랜드 별 CS 대처 메뉴얼, 크레딧노트 관리표, 인보이스 체크리스트, 패널티 누적 포인트, 브랜드 별 담당자들 직통 번호, 이메일 까지 한 눈에 다 확인할 수 있도록 정리 좀 해놔 주실 수 있겠어요?"

"...!"

이지혜는 멍한 눈으로 조금 전 장향은이 주문한 것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리기에 여념이 없었고, 박기태 역시 넋이 반쯤 나간 표정으로 두 눈을 끔뻑거렸다.

그리고 양 대리는 박기태와 이지혜 몰래 고개를 돌리며 소리없는 감탄사를 만들어냈다.

마치 양 대리가 만들어 낸 감탄사엔 앞으로 이지혜는 죽었다...하는 뜻이 담겨있는 거 같았다.

"월요일 아침까지 좀 부탁해요. 괜찮죠?"

"...네. 하,하, 하하하...마진 베이스, 커스터머 프라이스...그리고..."

"센터는 머리로 기억하는 사람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기록을 하는 사람이죠?"

"...!"

보조개까지 만들어내며 웃는 얼굴로 하는 말치고는 제법 무게가 있는 지적이었다.

"그럼 전 이만. 팀장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 양 대리님도요."

장향은이 날 향해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리는 순간 이지혜는 급하게 다이어리를 들고 장향은을 뒤쫓았다.

"선배님! 죄송한데 다시 한 번만 말씀해주시면 안될까요? 마진 베이스, 커스터머 프라이스, 그리고..."

열심히 뭔가를 받아적고 있는 이지혜의 뒷모습을 보며 박기태가 낮게 중얼거렸다.

"역시 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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