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거기에 흔들리면 영영 못 벗어나는 거예요
5월에 부는 초저녁 바람.
하지만 장 차장이 날린 매서움 때문인지, 볼을 스치는 바람이 날카롭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난 대답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에게 내가 결심한 의지를 제대로 전달해야 했다.
이렇게 저렇게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어설픈 핑계를 갖다붙여볼까도 생각해봤지만, 그럴 거였음 애초에 판을 엎지 말았어야 했다.
어쩌면 난 홍성 인터네셔널에 들어와 장 차장이라는 엘리트 밑에서 갈굼을 받는 게 일을 배우는 거라 착각을 하기 시작할 때부터 지금 이 순간을 항상 꿈꿔왔었는지도 모르겠다.
"왜 대답이 없어? 왜 그랬냐니까."
"..."
"왜 시키는대로 안해?"
"시키신대로 했습니다."
드디어 입을 열었다.
손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입을 열었다는 게 중요하다.
장 차장이 보이는 미세한 표정 변화 하나, 하나에 모든 신경을 집중시켜야 했던 지난 6년.
내가 딱히 실수를 한 게 없는 날에도 장 차장의 기분에 따라 죄송합니다라는 말만 반복해야 했던 내 지난 모습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내가 시킨대로 했다고?"
"나크리스 받으라고 하셔서 받았고, 나크리스와 함께 진행하기에 버거운 브랜드가 있으면 추려서 영업 1팀으로 밀어버리라고 하셔서 추려도 봤습니다. 하지만 괜찮은 센터 한 명만 보강이 된다면 나크리스 진행과 함께 얼마든지 가지고 갈 수 있을 것 같단 판단이 서서 영업 1팀으로 밀기 전에 인원 보충을 요청드렸던 것 뿐입니다. 물론 인원 보충을 거절당한다면 밀 생각이었고요."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담배를 든 손 새끼손가락으로 자신의 눈썹 부분을 긁기 시작하는 장 차장.
"너 뭐 잘못 먹었냐?"
장 차장의 양쪽 귓불이 붉게 변했다.
부하 직원에게 자신의 바닥을 보이는 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인신공격은 기본이고 한 번 물면 상대가 자살 충동을 느낄 정도로 끝없이 코너로 몰아가는 잔인한 공격성도 가지고 있다.
모든 부하 직원들에게 다 그러는 건 아니다.
나처럼 자신을 무서워하고 또 자신이 직접적으로 불이익을 줄 수 있다는 확인이 서는 부하 직원들에게만 유독 그런다.
"너 뭐 잘못 먹었냐고. 왜 평소 안하던 말대꾸를 해? 그것도 아주 작정을 한 놈처럼."
"..."
"팀장 다니까 이제 눈에 보이는 게 없어?"
"팀장을 다니까 이제야 뭔가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하는 거 같습니다."
난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뭐?"
그리고 장 차장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하지만 끝까지 예의를 갖춰 말했다.
"팀장을 달기 전에는 몰랐는데, 막상 팀장을 달고 4달 정도 빡세게 시달려보니까 이제야 팀장이 뭘 해야되는 사람인지 알 것 같습니다."
"웃기고 있네. 팀장이 뭘 해야되는 사람인데? 그런게 정해져 있어? 누가 정했는데? 팀장이고 차장이고 부장이고, 월급받는 직장인들은 회사가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는 사람들이야. 그걸 못할 거 같으면 월급받고 회사를 다닐 게 아니라 나가서 자기 사업을 하는 게 맞는 거고."
"차장님이 회사는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 근데 이 새끼가 오늘 진짜..."
"저 1년차 때 아무것도 모르는 저만 달랑 데리고 마본드 계약하러 파리에 갔었던 일 기억하십니까?"
"뭐?"
"마침 그 다음주 수요일에 저희 회사에서 모스치노 코리아 관계자와 미팅이 잡혀있어서 토요일 밤 비행기로 출발을 해야했죠. 어떻게든 화요일까지는 복귀를 해서 미팅 준비를 해야했으니까요. 토,일 다 반납을 하고 떠나는 출장이었습니다. 그때 전 당시 팀장이었던 차장님이 외계인처럼 느껴졌습니다. 저야 딱 그 한 주였지만, 차장님은 이미 그 전주, 그리고 전전주까지 주말을 다 반납하고 성 대리를 데리고 만토바 일정, 윤진 씨를 데리고 마드리드 일정을 소화하신 상태였으니까요."
"바빴지, 대신 보낼 사람이 없었으니까."
"아니죠.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진짜 이유는 저 처럼 당시 차장님은 막내 팀장이셨기 때문이죠."
"...!"
"하지만 그거 알고 계십니까? 차장님은 차장님이 당시 막내 팀장이라는 이유로 팀원들한테 그 어떤 불이익도 안가게 하려고 혼자 이리뛰고 저리뛰며 차장님의 바닥까지 저희에게 다 보여주셨지만, 그때 차장님 눈에선 빛이 났었습니다. 그래서 전 단 한 번도 차장님을 막내 팀장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제 눈엔 팀장들 중 유일하게 팀장같은 사람으로 보였던 게 바로 차장님이셨죠."
"흐음..."
"정말 닮고싶은 눈빛이었습니다. 과연 내가 팀장이 되면 저정도 열정을 눈에 담고 불을 뿜어낼 수 있을까? 저렇게까지 에너지를 폭발시킬 수 있을까? 과연 저정도 화력을 만들어내려면 내공을 얼마나 쌓아야 하는 것일가...차장님의 어깨를 보고 있으면 마치 어린 시절 한없이 넓게만 느껴졌던 제 아버지의 어깨를 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여쭸습니다. 피곤하지 않으시냐고. 3주를 하루도 쉬지 못하고 유럽 출장과 회사 출근을 퐁당퐁당 하고 계신데 그러다 몸 상하실까 걱정된다고 말씀을 드렸죠. 그랬더니 차장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몸이 좀 상했으면 좋겠다고. 그래야 그 핑계로 뺑끼를 치지...농담으로 하신 그 말 속에서 차장님이 얼마나 당시 하고 계셨던 일에 깊게 빠져있고 또 의욕을 보이고 있는지 알 거 같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제가 팀장이 되고 나니까 정말 대단했던 건 차장님이 아니라 차장님이 팀장이었을 시절 사내 정치, 파워 게임 따위에는 휘둘리지 않고 오로지 맡은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커버를 쳐주신 안주련 당시 영업부 차장님이었다는 걸 알겠더라고요."
장 차장이 듣기 좋게끔 적당히 포장을 해야했다.
면전에 대놓고 너 진짜 개새끼였어! 라고 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그런 포장지 속에 감춘 속내를 풀어내면서 난 그 당시 장 차장에게 당했던 굴욕들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거의 자동반사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면.
부하 직원들, 다른 부서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얼마나 굴욕적인 인격모독을 많이 당했었나.
하나, 하나 이야기를 하다보면 몇날며칠 밤을 새워도 모자랄 정도다.
"다른 거 다 떠나서 일에 대한 열정 하나만큼은 차장님을 닮고 싶었습니다. 그랬던 차장님이 언제부턴가 일에 대한 열정 보다는...후우...저한테 그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너도 조금만 더 팀장 생활을 해보라고. 결국엔 다 줄이고 라인이라고. 회사라는 전쟁터에 나와서 낭만적인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제가 대리 시절 때부터 줄곧 하셨던 말씀이죠. 그런데 차장님."
장 차장은 귓불 주위 목 전체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차장님은 브랜드 업체와 싸우고, 매장 직원들 비위 맞춰가며 그 모든 업무 스트레스를 소주 한 잔으로 풀어버리는, 그리고 다음날이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새로운 브랜드 업체들과 마진 1퍼센트를 놓고 목에 핏대를 세우는 그런 낭만적인 대리 생활, 팀장 생활을 다 해보셨잖습니까."
"...!"
"그런데 왜 전 그렇게 팀장 생활을 하면 안됩니까?"
이미 필터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빨다가 아차 했던지 급하게 바닥으로 담배 꽁초를 떨어뜨린 장 차장.
그는 스테인레스 난간을 잡고 내게 등을 돌렸다.
그리고 저 아래 벌써부터 시작된 교통체증을 가만히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난 그런 장 차장의 뒷 모습을 바라보며 두 손을 공손하게 앞으로 모았다.
"저는 공은태 입니다."
장 차장이 세상 밖으로 던지고 있던 시선을 돌려 날 쳐다봤다.
"전 차장님이 아닙니다. 현재 차장님이 하고계신 생각과 똑같은 생각을 하게끔, 현재 차장님과 똑같은 직장생활을 하게끔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난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부탁했다.
"저는...저도...저도 이 회사에서 해보고 싶은 일이, 이 회사를 통해서 이루고 싶은 저 개인적인 목표가 있는 사람입니다."
"훗...직장 생활을 너무 꿈처럼 하겠다고 하는 거 아냐? 이거 괜히 너무 유치해지는데?"
"만약 차장님께서 원하시는대로 움직여줄 아바타로 절 키우고 싶으신 거라면...차장님이 팀장이었을 시절 그렇게 신나게 일하고 받은 보상들을 저도 받을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
"그래야 정상 아닙니까?"
"훗...정말 많이 컸다, 우리 은태. 팀장을 괜히 달아줬나?"
"요즘들어 제 입사 동기들이 부럽습니다."
"...!"
"저처럼 노예 생활을 하지 않아도 남들 하는 만큼만 하면 알아서 때되면 승진 시켜주고 월급 올려주는 게 회사인데, 그 대리 직함 몇 달 일찍 단다고 뭐가 그렇게 크게 바뀐다고 거기에 목숨을 걸고, 팀장 타이틀 일이 년 빨리 단다고 제가 모는 소나타가 벤츠로 바뀌는 것도 아니고, 혼자 살고 있는 쪽방 원룸이 넓은 아파트로 바뀌는 것도 아닌데 왜 경주마처럼 옆은 보지 못하고 앞만 보고, 그것도 내가 보고싶은 앞이 아니라, 차장님이 가고자 하는 앞을 보며 달리고 있었던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너한테 너무 큰 기대를 했던 건가?"
"절 좀 다르게 사용해주실 수는 없었던 겁니까? 절 팀장으로 올려놓고 좀 더 제대로 밥 값을 하게 만들어주실 수도 있었지 않습니까? 차장님이 팀장이었을 시절 다른 차장, 부장님들이 차장님께 해주셨던 것처럼."
"...!"
장 차장은 다시 세상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시작된 침묵.
꽤 오랫동안 우린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각자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너도 네 목표라는 게 있다?"
"차장님의 진심이 뭐였든 그냥 처음부터 저에게 김 팀장님을 좀 도와주자고, 팀장 생활을 너무 오래하셨으니 이번엔 차장으로 올릴 수 있게 영업 1팀으로 저희 영업 5팀이 지난 4개월 동안 간신히 회생시켜놓은 브랜드들을 다시 넘겨주라고 하셨음 억울하긴 했겠지만 두 말 안하고 시키시는대로 했을 겁니다."
"재밌네. 진짜 대단했던 건 내가 아니라 당시 안주련 차장이었단 말이지? 너 혹시 뭐 어디 다른 회사로부터 스카웃 제의 받았냐?"
"...?"
"왜 갑자기 안하던 짓을 해? 하긴 팀장 달면 여기저기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오기도 하지. 하물며 홍성 최연소 팀장인데..."
"뭔가 다른 선택권, 기회가 생겼다고 해서 한순간 얼굴을 바꾸는 짓을 하지는 않습니다."
내 말에 장 차장의 눈썹 끝이 바르르 떨렸다.
그리고 또 한참동안 이어진 침묵.
"내려가자, 더 할 말 없으면."
사무실까지 다시 내려가는 동안 나와 장 차장은 서로 앞만 보며 침묵을 유지했다.
손끝이 떨렸다.
떠는 모습을 들키기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좀처럼 숨겨지지 않는 떨림이었다.
난 사무실에서 서류 가방만 챙겨 장 차장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장 차장이 자신의 서류 가방을 들고 나오는 모습을 확인한 후 엘레베이터를 잡았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동안에도 우린 침묵을 유지했다.
"...!"
장 차장의 차가 세워져있는 곳으로 함께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양 대리의 모습이 보였는데, 이상하게 날 기다리고 있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풍겨졌다.
양 대리 역시 내가 장 차장과 함께 나오는 모습을 보고 적지않게 당황한 모습이었다.
"퇴근 한 거 아니었어?"
장 차장이 물었다.
그러자 양 대리는 우물쭈물 뒷통수만 긁적이며 대답을 제대로 못했다.
나 역시 궁금했다.
지금까지 왜 양 대리가 여기에 있는 건지.
삐빅.
장 자창은 차 리모컨을 눌러놓고 조수석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으로 서류 가방과 자켓을 벗어 던져놓고 나와 양 대리를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설마 내가 너네 팀장 잡아먹기라도 했을까봐 걱정돼서 기다리고 있었냐?"
"..."
"캐릭터 참 희한하네. 바로 며칠 전까지 자기 팀장 못 잡아먹어서 안달을 하던 놈이 어떻게 그 며칠 사이에 태도를 이렇게 바꿀 수가 있어?"
그리고 운전석 문을 열어 그 안으로 올랐다.
"양 대리."
"네, 차장님."
"너 너네 팀장이 뭐 좋아하는지는 알고 있냐?"
"..."
"소고기라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놈이다, 너네 팀장이. 둘이 술 한 잔 할 거면 소고기 먹으러 가라. 영수증 끊어오고. 내가 내일 영수증처리 해줄테니까."
장 차장은 그렇게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괜찮으..."
"공 팀장!"
벌써 저만치 나갔던 장 차장의 차가 섰다.
그리고 차창 밖으로 고개를 빼낸 장 차장이 날 불렀다.
난 서류 가방을 양 대리에게 잠시 맡겨놓고 서둘러 장 차장에게 뛰어갔다.
"네, 차장님."
"나크리스...그거 되는 거다."
"네?"
"제대로 프로모션만 넣어주면 충분히 띄울 수 있는 브랜드라고. 내가 설마하니 너한테 아무런 가능성도 없는 걸 맡으라고 던져줬겠냐? 진짜 안되는 브랜드였음 꼴보기 싫은 손 팀장한테 밀었지."
"...!"
"제법이네. 이럴 때 몰래 기다려주는 부하직원도 다 만들 줄 알고. 내일 보자."
장 차장의 차가 주차장을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난 가만히 서서 17층에서 천하의 장 차장을 상대로 속에 있던 말들을 모두 쏟아낸 날 다시 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내 옆으로 다가와서 양 대리가 물었다.
"이야기는 잘 나누셨습니까?
"일단 전 그런 거 같은데, 차장님은 어떠신지 모르겠네요."
"그럼 됐습니다. 영수증 처리 해줄테니 소고기 먹으라고 하시는 거 보면 모르겠습니까?"
"근데 아직 안가고 여기서 뭐하고 계셨던 겁니까?"
"뭐하고 있었긴요, 팀장님 기다리고 있었지."
"그니까 왜요?"
"술 생각 나실 거 같아서요. 저라고 왜 차장님을 모르겠습니까?"
"훗..."
"가시죠, 소고기 먹으러."
걸음을 옮기며 양 대리가 말했다.
"그런데 의외네요."
"뭐가요?"
"차장님 말입니다. 가시기 전에 팀장님 뭐 좋아하는지 아냐고 물으셨을 땐 좀 감동이었습니다."
"감동은 무슨...거기에 흔들리면 영영 차장님 손아귀에서 못 벗어나는 거예요."
"...?"
"원래 저런 분이에요. 채찍과 당근을 언제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너무 잘 아는 사람이죠. 그래서 이젠 차장님의 진심이 뭐든 믿음이 안갑니다."
"흐음..."
"이 나이 먹고 누굴 믿는다는 것도 말이 안되는 거고. 그래요, 일단 갑시다. 영수증 처리 해준다는데, 그걸 마다할 이유는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