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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10화 (10/325)

# 10

다들 고만고만한 사람들이다

장 차장을 피해 1층 로비 화장실에 숨어서 메일 체크를 하다가 미팅 시간 5분 전에 사무실로 올라갔다.

그리고 양 대리를 통해 장 차장이 단단히 굳은 얼굴로 날 찾았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진짜 괜찮으시겠습니까? 차장님 얼굴 표정 많이 안 좋으시던데..."

"제가 알아서 할게요. 자료는 다 준비됐습니까?"

이지혜가 파일 하나에 차례대로 정리해놓은 자료를 건넸다.

"다녀올게요."

난 건네받은 파일을 살짝 들어보이며 팀원들에게 안심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회의실로 가는 동안 정리된 자료들을 타이틀 별로 빠르게 훑었다.

이정도면 충분하다.

어차피 결재를 받을 것도 아니고 이런 자료가 있다는 것만 보여주는 게 목적이니.

회의실엔 이미 손 팀장을 제외하고 장 차장과 박 부장까지 모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난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허리를 깊게 숙여 박 부장에게 인사를 건넸고, 그 옆에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날 노려보는 장 차장을 향해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손 팀장은 브랜드 업체로부터 중요한 전화가 걸려와서 통화가 끝나는대로 바로 참석을 하겠다고 미리 양해를 구해놓은 상태라고 한다.

박 부장은 시간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미팅을 시작하자고 했다.

"퇴근 시간도 다가오는데, 짧게 끝내자고. 영업 5팀이..."

"죄송합니다. 인보이스 관련 컴플레인을 좀 넣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이제 막 회의가 시작하려고 하는데 손 팀장이 자켓을 여미며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박 부장은 말 없이 빈 자리를 턱짓하며 얼른 가서 앉으라는 사인을 보냈고, 손 팀장은 장 차장이 아닌 박 부장을 향해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인 뒤 자리에 앉았다.

"아무튼 영업 5팀이 나크리스 진행하기로 한 건 다 알고 있지? 우리쪽으로 상당히 유리하게 계약을 맺었어. 첫 계약치고 상당히 훌륭해. 박수 한 번 쳐주자."

박 부장의 박수를 시작으로 모든 팀장들이 저마다 다른 의미를 품은 미소를 얼굴에 걸어놓고 박수를 쳤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자켓 단추 부분으로 두 손을 올려놓고 박 부장 이하 모든 팀장들을 향해 일일이 고개를 숙였다.

"막내 팀장이 이렇게 의욕을 보이는데, 다른 팀장들도 다같이 분발 좀 하자고. 응?"

"넵!"

"대답은..."

박 부장은 가장 큰 소리로 대답한 영업 4팀의 정 팀장을 향해 핀잔을 던져놓고 말을 이었다.

"원래라면은 공 팀장한테 나크리스를 맡겨놓고 영업 5팀이 핸들링하고 있는 브랜드 몇 개를 1팀에게 넘기라고 했었는데, 공 팀장이 자기가 한 번 끝까지 가지고 가보겠다고 하네."

박 부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김 팀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리고 손 팀장은 미간을 좁혔고, 이 팀장과 정 팀장은 그 인원으로 어떻게 그걸 다 쳐낼 거냐는 듯한 눈길로 날 쳐다봤다.

"하도 기특해서 다 모이라고 했어. 공 팀장."

"네, 부장님."

"앉어, 앉아. 그냥 편하게 앉아서 이야기 해. 5팀이 다 가지고 가겠다고 하는 이유가 뭐야?"

"그게 저희 5팀이 만들어진 이유니까요."

난 장 차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장 차장을 쳐다 본 이유는 난 어디까지나 당신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뜻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본심은 그게 아니지만, 장 차장에게 미운털이 박혀서 좋을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전혀 떨리지가 않았다.

"영업 1팀은 누가 뭐래도 저희 영업부 전체 실적의 30퍼센트 이상을 책임지고 있는 핵심인데, 현재 핸들링하고 있는 간판 브랜드에 집중을 해야지 답도 안나오는 브랜드에 정신을 빼앗기면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크리스...저희 영업 5팀의 입장에서 좀 부담스럽긴 하지만, 고작 그 브랜드 하나 새로 시작한다고 홍성의 영업부 전체에 혼란이 와서야 되겠습니까? 저희 영업 5팀이 책임지고 핸들링하도록 하겠습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박 부장은 다른 팀장들과 차례대로 시선을 마주쳤다.

박 부장의 눈빛을 피하는 팀장도 있었고, 어색하게 웃는 팀장, 환하게 웃는 팀장까지 제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손 팀장."

"네, 부장님."

"어떻게 생각해?"

"기특하네요. 아직 선배 기수 대리들이 많이 있는데, 부장님께서 괜히 팀장을 먼저 달아주신 게 아니란 걸 이제 알겠습니다."

"기특해?"

박 부장의 표정이 한순간 굳어졌고, 그와 동시에 회의실 전체에 차가운 냉기가 흘렀다.

"부끄럽단 생각이 드는 게 아니라?"

살얼음이 얼기 시작한다.

"야, 김 팀장."

"네, 부장님."

"넌 어떻게 생각해?"

"..."

김 팀장은 합죽이가 되었다.

이가 빠져서 입과 볼이 움푹 들어간 사람마냥 위아래 입술을 안으로 숨긴 채 고개를 떨궈버린 김 팀장.

그런 김 팀장을 보고 한숨을 내쉰 박 부장은 이번엔 이 팀장에게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부끄럽습니다."

"부끄러운 건 알아?"

"...네."

"진짜 알아서 안다고 하는 거야, 아님 안다고 대답을 해야할 거 같으니까 안다고 대답을 하는 거야?"

"..."

"정 팀장."

"네, 부장님."

"네가 제일 부끄러워해야겠지?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원하는 맨파워 다 맞춰줬는데, 지난 4개월 간 나한테 보여준 게 뭐가 있어? 언제까지 기다려야 돼?"

"..."

"그렇게 계속 할 거면 그냥 공 팀장이랑 팀 바꿔. 내가 봤을 때 공 팀장한테 4팀 맡아나가라고 하면 최소 현재 4팀이 올리는 매출보다 30퍼센트는 더 올라올 거 같은데? 그 30퍼센트면 5팀 전체 매출보다 더 높은 거야."

"분발하겠습니다."

"분발만 할 게 아니라 눈에 보이는 매출을 가지고 오라니까?"

"...네."

나로 인해 모든 선배 팀장들이 줄줄이 깨지고 있다.

이 불편함을 극복해야 한다.

팀장을 달고 단 하루라도 불편하지 않았던 날이 있었던가.

잘해도 불편하고, 못해도 불편해야 하는 포지션이라면 그냥 차라리 잘해놓고 불편함을 극복해버리는 쪽을 선택하는 게 현명한 거 아닐까?

어차피 더이상 일반 사원은 아니다.

커버 쳐줄 팀장이 있는 대리도 아니고.

이젠 죽이되든 밥이되든 내 지시대로 움직여줄 팀이 생겼다.

이리저리 선배 팀장들 눈치 살피면서 그들이 싸놓은 똥만 치우는 일은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지난 4개월 동안 충분히 했다.

여기서 끊지 않으면 앞으로 얼마나 더 그게 당연하다는 듯 그들이 싸지르는 똥을 치워야할지 모른다.

이제 더이상 나 혼자가 아니다.

팀장이 막내라는 이유로 내 팀 전체가 다같이 막내 취급을 받게 할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얼굴에 철판 딱 깔고 버텨보자.

사원일 때엔 대리가 산처럼 느껴졌었고, 대리를 달았을 때엔 팀장이 하늘처럼 느껴졌었다.

그런데 막상 팀장이 되고보니 난 하늘도 아닐 뿐더러 이사 밑으로는 차장도 부장도 그저 타이틀이 있는 사원일 뿐이라는 걸 알겠다.

프로는 몸값으로 이야기 한다고 하지 않았나.

여기 있는 선배 팀장들 중 성과급 빼고 측정된 월급만 놓고 봤을 때 나보다 월등히 많이 가져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기껏 차이가 난다고 해봤자 백만 원 안팎이다.

장 차장?

내가 알기로 차장 월급 역시 거기서 거기.

다들 고만고만한 사람들이다.

여기서 신처럼 군림하는 박 부장 역시도 상무나 전무 앞에서는 덜덜덜 떨지 않을까?

그런 상무나 전무도 회사 밖에서 모르는 상태로 만나면 그냥 동네 아저씨, 지나가는 행인 1에 불과한 사람일 뿐인데.

막내 팀장이라고 해서 주눅 들 필요도 없고,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예의는 지키되, 동네북은 되지 말자.

박 부장은 자리에 모인 모든 팀장들과 일일이 눈을 맞춘 다음 말을 이어갔다.

"내가 너네들 보고 맨땅에 헤딩을 하라고 했냐, 아님 계란으로 바위를 치라고 했냐? 그것도 아님 마른 오징어 쥐어짜서 액기스를 뽑아오라고 했냐? 너네들이 원하는 근무환경 다 만들어주고, 너네가 직접 가지고 와서 해보다가 결국 핸들링 안되는 브랜드들까지 영업 5팀 따로 만들어서 패널티 하나 안 주고 짬처리 다 해줬는데, 그럼 너희도 인간적으로 나한테 해주는 게 조금이라도 있어야 할 거 아냐."

"..."

"야, 장 차장."

"네, 부장님."

"내가 지금 못 할 말 하는 거냐?"

"아닙니다."

"내가 지금 너무 하는 거야?"

"아닙니다."

"내 입에서 꼭 이런 말이 나와야겠냐?"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짜고치는 고스톱이다.

회의 테이블 위에서 까딱까딱 거리고 있는 장 차장의 검지.

누구보다 장 차장의 습관을 잘 알고 있는 나다.

장 차장은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서 코너로 몰리면 귓불 부터 빨개진다.

하지만 지금 장 차장의 귓불은 정상이었고, 뭔가 생각이 많을 때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버릇인, 검지로 테이블을 타닥타닥 두드리고 있었다.

박 부장이 김 팀장과 손 팀장을 차례대로 쳐다본 후 말했다.

"회사가 성장기 진통 끝내고 어느정도 정상화가 되니까, 이제 긴장을 좀 풀어도 될 거 같아? 손 팀장."

"네, 부장님."

"장향은이 영업 5팀으로 보내."

1초 정도 망설였나?

손 팀장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잠시 망설이는 동안 박 부장은 불길이 이는 눈으로 손 팀장을 노려봤다.

"네, 알겠습니다."

"부끄러운 줄 알아. 너희가 이건 무조건 된다고 해서 가지고 왔던 브랜드들 중에 진짜로 됐던 브랜드가 몇 개나 돼?"

"..."

"아니지, 그렇게 물으면 안되지. 영업 5팀으로 짬 시켰던 브랜드들 중에 너희가 이건 무조건 된다고 해서 가지고 왔던 브랜드가 아니었던 게 몇 개나 돼?"

"..."

"다지?"

"..."

"대답을 해, 이 친구야."

"...네."

"김 팀장."

"네, 부장님."

"최기록이 영업 4팀으로 보내."

"...네."

"대답이 왜 그렇게 뜨뜨미지근해?"

"아, 아닙니다."

"왜? 현재 맡고 있는 브랜드는 태산같은데, 인원을 보충해주지는 못할 망정 어떻게 거기서 인원을 빼갈 생각을 하나...뭐 그런 생각이야?"

"아닙니다."

"장 차장."

"네, 부장님."

"예전에 네가 팀장으로 있었을 당시에 데리고 있던 팀원들 총 몇 명이었어?"

"저 포함해서 여섯이었습니다."

"그때 핸들링했던 브랜드가 몇 개였어?"

"정확한 갯수는 저도 기억이 잘 안나는데, 회사 전체가 핸들링하고 있던 브랜드의 44퍼센트까지 저희 팀이 핸들링 해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들었어?"

박 부장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김 팀장은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장 차장."

"네, 부장님."

"인사부장한테 말해서 경력직원으로 두 명 정도 인원보충 해달라고 하고, 보충되면 하나는 손 팀장한테 다른 하나는 김 팀장한테 붙여줘."

"그렇게 하겠습니다."

"김 팀장, 손 팀장."

"네, 부장님."

"쪽팔릴 상황은 알아서들 피해가라. 난 내 선에서 해줄 수 있는 건 최대한 다 해줬다고 생각한다."

"네, 부장님."

그리고 이어지는 마라톤 잔소리.

말이 회의지, 박 부장과 장 차장이 참석하는 회의 자리는 잔소리로 시작해서 결국은 밥 값 좀 하라는 소리로 끝이 나기 일쑤다.

"장 차장만 잠시 남고 나머지는 퇴근들 해."

"..."

"다들 퇴근하라니까?"

팀장들이 하나 둘 씩 회의실을 빠져나가고 있을 때였다.

박 부장이 날 불렀다.

"공 팀장."

"네, 부장님."

난 재빨리 몸을 돌려 박 부장을 쳐다봤다.

"아까부터 들고 있던 거 그거 뭐야?"

난 모든 팀장들이 회의실을 빠져나가고 난 뒤 파일철을 들고 박 부장 앞으로 섰다.

"혹시 몰라서 준비했던 겁니다."

"그래서 그게 뭐냐니까?"

난 우물쭈물 들고 있던 파일을 박 부장 앞으로 내려놓으며 말했다.

"알렉산더 머린부터 시작해서 매출 패널티 라인에 걸려있는 브랜드들을 모아봤습니다."

"그걸 왜 준비했는데?"

"정리가 필요한 브랜드들이 몇몇 있어서 차장님께 보고를 드리고 진행을 하려고 준비했습니다."

난 장 차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서류들은 박 부장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들이 아니라, 장 차장 당신에게 보고하기 위해 준비한 서류라는 걸 말해주기 위함이었다.

난 절대 당신을 거치지 않고 바로 부장에게 뭔가를 다이렉트로 보고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정확하게 말해주고 싶었다.

"알았어. 놓고 가."

난 다시 한 번 장 차장을 쳐다봤다.

마치 이건 내 시나리오가 아니라는 눈빛으로.

그러자 장 차장은 숨을 크게 한 번 들이마신 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난 박 부장과 장 차장을 향해 허리를 숙인 뒤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어떻게 됐습니까?"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팀원들이 일제히 하던 업무를 내려놓고 내 앞으로 모였다.

"일단은 퇴근들 하세요. 전 아무래도 장 차장님을 기다려야 할 거 같아요."

"...?"

"장향은 씨가 오게 될 겁니다."

양 대리는 주먹을 말아쥐며 소리없는 환호성을 질렀다.

"오늘 하루 다들 정말 수고 많았어요. 퇴근들 하시고 내일 봅시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텅 빈 사무실을 혼자서 지키고 있는데, 박 부장과 장 차장이 조근조근 이야기를 나누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내가 준비해갔던 자료는 박 부장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파티션 앞으로 나왔고, 다들 퇴근을 시키고 혼자 우리팀을 지키고 있는 날 박 부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쳐다봤다.

하지만 장 차장은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날 쳐다봤다.

마치 그래도 겁은 났던 모양이야?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궁지에 몰린 쥐를 쳐다보는 고양이처럼, 날 빤히 쳐다보는 장 차장.

상황을 눈치챈 박 부장이 자리를 비켜줬다.

17층.

장 차장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처음 나크리스를 맡아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할 때와는 다르게 내게 한 대 피우라고 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난 그가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여주기 위해 라이터를 꺼냈고, 장 차장은 내가 라이터를 담배 앞으로 가져가기도 전에 자신의 라이터로 직접 불을 붙였다.

바로 밑에서 오랜 세월 시달리며 정말 볼 꼴 못 볼 꼴 다 봤지만, 그가 한 번씩 보여주는 사이코패스적인 모습 만큼은 여전히 적응이 안된다.

하지만 난 지금부터 그동안 장 차장에게 보였던 거짓 충성심을 담보로 상황을 수습해야 한다.

"왜 그랬냐?"

차가운 장 차장의 음성에 살짝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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