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7화 (7/325)

# 7

다른 사람 때문에 선택한 회사가 아니잖아

공교롭게도 로또에 당첨된 이후 처음으로 같이 술잔을 기울이게 된 사람이 바로 양 대리다.

가족도, 친구도 그렇다고 평소 가깝게 지내고 있던 입사 동기들도 아닌, 날 엿먹이지 못해 안달이 나 있던 양 대리와 로또 당첨 이후 처음으로 같이 술잔을 기울이게 된 거다.

"김 팀장님은 가셨습니까?"

내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양 대리가 물었다.

난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어색한 침묵.

양 대리는 돌판 위에서 지글지글 굽히고 있는 막창을 뒤집기라도 했지, 난 아무것도 할 게 없는 상태에서 무거운 침묵을 버텨내야만 했다.

하지만 이 침묵을 피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졌을까.

양 대리가 얼추 익은 막창을 편을 썬 감자 위로 올려놓으며 내게 먹으라고 했다.

그런 양 대리 앞으로 술잔을 내밀었다.

"나크리스는 무슨 소립니까?"

술잔을 비워낸 뒤 막창 한 점을 집어 먹으며 양 대리가 말했다.

그리고 난 나크리스 보다 더 중요한 할 말이 우리 두 사람 사이에 남아있지 않느냐는 투로 양 대리를 바라봤다.

"김 팀장님이 가시면서 저더러 양 대리님과 이야기를 잘 해보라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솔직히 양 대리님과 무슨 이야기를 해야하는 건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양 대리님은 혹시 아십니까? 지금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나눠야하는 건지..."

"흐음..."

난 양 대리의 잔을 채웠다.

양 대리는 내가 주는 술을 두 손으로 받았고 곧바로 술병을 건네받아 내 잔을 채웠다.

나 역시 양 대리가 주는 술을 두 손으로 받았다.

"술이 조금 들어가야 될 거 같습니다. 그렇죠?"

"아무래도 그래야 할 거 같습니다."

양 대리 앞으로 다시 술잔을 들었고, 우린 그렇게 몇 잔을 연거푸 마신 뒤에야 비로소 그동안의 본심을 서로에게 털어놓을 수 있었다.

"양 대리님, 제가 뭐 하나 물어봐도 됩니까?"

"편하게 말씀하세요."

"양 대리님 인생에 저란 사람이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습니까?"

"...!"

"언제부터요?"

순간 양 대리의 두 눈에 강도 7짜리 큰 지진이 일어났다.

"지난 주말에 저 개인적으로 제 삶을 되돌아볼 수 밖에 없는 큰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말동안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집안에 가만히 있으면서 제 지난 인생, 그리고 현재 하고 있는 직장 생활을 되돌아봤죠. 저 역시 당장은 양 대리님과의 관계가 가장 큰 골치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과연 양준호라는 사람이 내가 쉬는 주말에까지 계속 생각을 해야 할 정도로 내 인생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인가..."

"..."

"미안한 말이지만 그건 아닌 거 같더라고요. 양 대리님도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30년 가까이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다가 직장에서 만난 사람들 아닙니까. 거기다 같은 부서이긴 해도 같은 팀이 된 건 이번이 처음이고. 안 맞는 건 당연한 거라고 봅니다. 처음부터 잘 맞으면 감사한 일이지만, 안 맞다고 해서 거기에 불안을 느끼고 초조해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전. 맞춰가는 거죠. 그게 프로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고작 4개월 조금 안되게 같이 일했을 뿐인데, 그 짧은 기간동안 서로를 알면 얼마나 알 것이며, 또 트러블이 생길 건덕지가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물론 양 대리님의 입장도 이해가 가고 또 불협화음을 내신 이유를 어느정도는 알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저랑 양 대리님이 불편한 관계로 발전할 필요까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한테 왜 그랬습니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다 제가 이렇게 한심한 인간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는지..."

양 대리는 스스로 자기 잔을 채운 다음 같이 마시자는 신호도 없이 단숨에 술잔을 비워버렸다.

그리고 내가 미처 술병을 잡기도 전에 다시 자신의 잔을 채웠다.

"처음엔 단순한 질투였겠죠. 나보다 늦게 입사한 입사 후배가 나보다 먼저 팀장을 다니까 거기에서 오는 다급함과 질투심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난 술잔을 비우며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그게 전부는 아니었던 거 같습니다."

"그럼요?"

양 대리는 다시 술잔을 비웠고, 이번엔 내가 그의 잔을 채워주며 소주를 한 병 더 시켰다.

"넉 달째죠? 저희 영업 5팀이 생긴 게..."

"얼추 넉 달 다 되어갑니다."

"처음 두 달은 저도 그렇고 팀장님도 다른 팀에서 저희쪽으로 짬 시키는 브랜드 쳐내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랬죠."

"아침 출근시간 말고는 거의 얼굴 마주칠 일이 없었으니 저도 사실 편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어쩌겠나, 위에서 내린 결정인데...내가 못하는 게 아니라 공 팀장님이 뛰어난 거다. 동기 대리들 중 아직 아무도 팀장을 단 놈이 없는데, 조급해하지 말고 그냥 이게 내 운인가보다 하며 받아들이고 버티자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순간 알겠더라고요. 제가 공 팀장님 테스트를 받는 도구가 되어있는 상태라는 걸."

"테스트를 받는 도구요?"

"선배 대리들 다 재치고 최연소 팀장이 되셨죠. 어린 팀장을 세워놨으니 위에서도 테스트라는 걸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팀을 잘 이끌어가는지, 아님 혼자서는 잘 하는데 아직 팀을 이끌 자질은 부족한지...그걸 테스트 해봐야 하지 않겠냐고요."

"왜 그렇게 생각하셨죠?"

"제 생각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 모든 사람들은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일단 제 이야기부터 들어주세요."

"죄송합니다. 계속 하세요."

"그게 전 상당히 기분이 나쁘더라고요. 그동안 딱히 윗선에 밉보인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왜 하필이면 나지? 2팀의 장 대리도 있고, 4팀의 이 대리도 있는데 왜 하필이면 날 공 팀장님 밑으로 넣었지? 그런 생각들이 계속 꼬리를 물면서 절 괴롭히더라고요. 그러다 저도 모르게 못난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팀장으로 앉히기 전에 하는 것도 아니고, 벌써 팀장으로 앉혀놓고 도대체 뭘 위한 테스트를 하겠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좀 방해를 하고 싶었습니다."

양 대리는 이미 어느정도 생각을 정리한 사람의 모습 같았다.

어제 김 팀장에게 회사를 그만둬야 할 것 같단 말까지 했다니 이정도 솔직함은 그리 놀라울 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게 이렇게 유치한 방법이 될 거라고는 저도 예상을 못했습니다."

"어제 김 팀장님께 회사를 그만둬야 할 거 같다라는 말을 하셨다고요?"

"어제 공 팀장님께 한 번 털리고 나니까 제 자신이 그렇게 초라해 보일 수가 없는 겁니다. 정말 제가 경멸했던 짓을 제가 팀장님을 상대로 해왔더라고요. 팀장님도 팀장님이지만, 기태 씨나 지혜 씨 얼굴 볼 면목도 없고 또 다른 팀 사람들한테도 고개를 들 수가 없네요, 현재 제 입장이."

"아까 했던 질문이랑 비슷한 내용인데, 기태 씨나 지혜 씨, 그리고 다른 팀 사람들이 양 대리님 인생에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들입니까?"

"...!"

"아, 오해는 하지 마시고요. 양 대리님이 회사를 그만두시겠다는데 억지로 말릴 생각은 없습니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겁니다. 정말 다른 사람들 시선 때문에, 그게 불편해서 그만두겠다고 하시는 건지, 만약 그렇다면 제 입장에선 더 양 대리님을 이해할 수 없을 거 같아서요."

양 대리는 다시 한 번 술잔을 비워냈다.

그리고는 다리를 꼬고 앉아 막창 한 점을 집어먹었다.

아무런 대답을 못하고 있는 양 대리.

"처음 이 회사 들어오실 때, 방금 양 대리님이 말씀하셨던 기태 씨나, 지혜 씨, 그리고 저를 포함한 다른 팀 사람들이 양 대리님이 저희 회사를 선택하는데 1퍼센트라도 영향을 끼쳤던 사람들인가요? 그 사람들 때문에 선택한 회사가 아니잖아요. 양 대리님이 이 회사를 선택하셨을 당시엔 양 대리님 만의 뭔가 목표가 있었을 거 아닙니까."

"..."

"혹시 그 목표를 벌써 이루셨습니까?"

"..."

"아님 저희 회사에선 힘들 것 같다는 판단이 서신 겁니까? 저희 회사에선 힘들지만, 다른 회사에선 이룰 수 있는 뭐 그런 것들 입니까?"

양 대리는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그런 거 아니라면 그냥 계속 다니세요. 저한테 잘못을 하셨으니 제 눈치를 보시는 건 이해합니다. 그런데 잘못은 저한테 하셔놓고 왜 다른 사람들 눈치까지 봅니까? 그리고 전 어제 분명히 제 입장을 말씀드렸던 거 같은데요. 어제까지 양 대리님이 제게 하셨던 잘못들은 그냥 제가 미리 제 기준을 확실하게 말씀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 생각하고 넘기기로 전 이미 마음 먹었습니다."

"...!"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죄송한 말이지만 제 인생에서 양 대리님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가 않습니다. 제게는 양 대리님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두고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양 대리님에게 제 모든 에너지를 집중시킬 마음도 없고, 또 계속해서 신경을 써야하는 상황이 온다라고 하면 거절하고 싶네요, 솔직한 제 심정은. 저한테 미안한 마음이 눈꼽만큼이라도 있으십니까?"

"...네."

"그럼 그 미안한 마음 잊지말고 가지고 계시다가 업무 실적으로 갚아주세요. 제가 양 대리님께 당당하게 기대할 수 있는 건 업무실적 밖에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혹시 뭐 저랑 개인적으로 친해지고 싶으신 겁니까? 그런 건 아니잖아요. 회사에 돈 벌러 온 거 아닙니까, 저나 양 대리님이나. 사람 사귀자고 오는 거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시고, 혹시라도 저한테 눈꼽만큼이라도 미안한 마음이 있으시다면 앞으로 업무 실적으로 갚아주세요. 그럼 전 그동안 저희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쯤은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잊어버리겠습니다. 약속 드리죠."

그리고 다음날.

8시 46분.

버릇처럼 로비 엘레베이터에서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고 사무실에 올라갔을 땐 유독 우리 영업 5팀만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파티션을 사이에 두고 바로 옆에 붙어있는 영업 2팀에서 무슨 일인지 궁금해 훔쳐볼 정도로 양 대리를 비롯해 박기태와 이지혜는 내가 온 것도 모를 정도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팀장님 오셨습니까."

걸어다니며 서류 파일을 넘기고 있던 박기태가 먼저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내선 전화기를 붙잡고 있던 이지혜가 고개만 까딱이며 인사를 받았고, 양 대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벼운 고갯인사로 나와 인사를 다시 주고받았다.

딱 이정도 선이면 원만한 합의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양 대리 짬밥이 있는데, 박기태나 이지혜처럼 고개까지 푹 숙여서 인사를 하게 만들 마음은 없었다.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네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다들 왜 이렇게 바쁩니까?"

난 어쩐일이냐는 식으로 양 대리를 한 번 쳐다본 다음 자리로 가서 서류가방을 풀었다.

그리고 이제 막 통화를 끝낸 이지혜를 불렀다.

"지혜 씨, 미안한데 지금 지원과에 전화넣어서 회의실 사용 가능한 시간 좀 확인해봐주세요."

"방금 확인했습니다.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사용하는 걸로 예약 잡아놨습니다."

"...?"

난 미간을 찌푸리며 이지혜를 쳐다봤다.

이지혜는 자신이 뭘 잘못한 줄 알고 표정을 굳혔고, 난 그런 이지혜에게 내가 회의실 섭외를 하라고 할 줄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다.

"오늘 나크리스 담당자랑 미팅 있으시다고, 양 대리님이 확인 해보라고 하셨습니다."

"...?"

난 나도 모르게 양 대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양 대리는 자신의 컴퓨터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작성중인 뭔가에 깊게 집중해 있는 상태였다.

"박기태 씨."

"네, 팀장님."

"지금 보고 있는 게 뭔지는 몰라도 그거 잠깐만 덮어놓고 알렉산더 머린 마진표랑 상반기 매출 현황 좀 뽑아서 갔다줘요. 급해."

"이게 지금 그건데요?"

"...?"

박기태는 자신이 들고 있던 서류 파일을 덮어 표지에 적혀있는 알렉산더 머린 로고를 내게 보였다.

"제가 시켜놨습니다."

양 대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공용 복합기 쪽으로 가면서 내게 말했다.

공용 복합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복합기에서 프린트 한 용지를 파일에 꼽아 내 앞으로 건네는 양 대리.

"현재 저희가 안고 있는 브랜드들이 입점된 전국의 백화점, 아울렛 정보입니다. 뒤로 넘기시면 올해 안으로 계약이 끝나는 브랜드들만 따로 모아놨습니다. 나중에 나크리스 담당자하고 미팅 할 때 참고하시면 될 겁니다."

"..."

"이지혜 씨, 지금 할 거 없지."

"네, 대리님."

"그럼 지금 지원과 내려가서 임시 출입카드 두 개만 만들어서 올라와요. 나중에 또 나크리스 쪽 사람들 왔는데 부랴부랴 만들겠다고 애먹지 말고, 지원과 한가할 때 내려가서 만들어놔요."

"네, 알겠습니다."

난 그런 양 대리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서류 가방을 풀며 말했다.

"양 대리님."

"네, 팀장님."

"오늘 나크리스 미팅에 양 대리님도 같이 들어갈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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