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우리끼리라도 좀 편하게 가자
팡!
점심 시간을 이용해 코인 야구장에 갔다.
오늘따라 공이 잘 맞는다.
날아오는 공을 양 대리의 얼굴, 장 차장의 얼굴이라고 생각하고 때리니 그렇게 잘 맞을 수가 없었다.
팡!
최소 2루타다.
공을 때리며 17층에서 장 차장과 나눴던 이야기를 다시 떠올려봤다.
"접촉은 당연히 그쪽에서 먼저 했을 거고...조건은 어떻게 됩니까?"
"컨사인먼트.(쉽게 말해 일단 물건부터 받아서 먼저 팔고 물건 값을 나크리스 쪽으로 나중에 지불하는 형식을 말한다. 물건이 안 팔리면 그냥 재고를 모아서 돌려보내면 된다.) 우리가 매장만 잡아주면 그쪽에서 인테리어 공사비 전액 부담하고, 물건은 컨사인먼트로 넘겨주겠다고 약속했어."
"별도의 매장 운영 관리비는 없고요?"
"장사 하루이틀 해? 컨사인먼트라고. 어차피 매장 월세야 판매 수익 페센테이지로 백화점이 가져가는 건데, 그 정도야 나중에 그쪽 담당자랑 자리에 앉아서 차분하게 이야기 하면 되잖아. 그렇게 꽉 막힌 사람은 아니더라고. 우린 그냥 매장에 세워놓을 매장 직원 인건비 정도만 부담하면 된다고 생각해. 그리고 아닌 말로 나크리스 정도면 직원 4명으로 돌려도 충분하잖아. 하루에 두 명 이상 필요없을 거 아냐?"
"마진은요?"
"가죽파트는 60퍼센트, 의류파트는 65퍼센트 부르고 있어. 이정도면 해볼만 하지 않아?"
팡!
이 번에도 2루타.
가죽파트 60에 의류파트 65면 확실히 약하다.
나크리스 정도면 가죽 파트 70에 의류 파트는 75 정도는 따내야 정상이다.
하지만 매장 인테리어 비용 제공에 컨사인먼트.
초기 비용이 거의 안들고 재고를 떠안지 않아도 된다는 큰 메리트가 뒤에 버티고 있다.
그런데...그런데 왜 하필이면 나크리스일까?
아무리 컨사인먼트라도 가죽파트 60에 의류파트 65 뒤에는 뭔가 다른 조건이 붙어있는 게 틀림없다.
아무래도 적지 않은 커미션 베이스를 나크리스 쪽에서 제안을 한 모양이다.
그게 아님 계약이 성사되면 어느정도 성공 커미션을 별도로 챙겨주겠다 약속을 했거나.
이쪽 업계에 있다보면, 이런 장면을 종종 목격하게 된다.
대형 브랜드들은 우리가 그들이 원하는 조건 다 맞춰주고 또 필요에 따라서는 적당한 리베이트까지 해가며 모시고 오지만, 그게 아닌 브랜드들은 그쪽에서 리베이트를 해오기도 한다.
물론 박 부장이 해사 행위를 하는 건 절대 아닐 거다.
부장 타이틀은 어디 딱지치기 해서 땄겠나.
절대 미련한 짓을 할 인물이 아니다, 박 부장은.
상대로 하여금 받게 될 리베이트는 박 부장의 개인 주머니가 아닌 회사로 전액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박 부장은 그에 대한 일정 부분의 커미션을 회사로부터 받는 거고.
박 부장이 진짜로 원하는 건 그런 커미션 몇 푼이 아니라 이사 승진을 위한 실적일 뿐이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을 나에게 넘기냐고?
그야 다른 팀장들은 나크리스는 절대 안되는 브랜드라며 애초에 받지 않겠다는 확고한 입장을 보일 게 너무나 뻔하기 때문이다.
다른 팀장들에 비해 난 아직 경험이 부족하고 또 시키면 시키는대로 잘 하는 스타일이니까 얼마나 만만하겠나.
나크리스가 제시한 조건만 놓고 보면 회사 입장에서도 크게 손해볼 건 없다.
어쨌든 아무리 매출이 낮게 올라와도 매출은 잡힐 거니까.
다만 나크리스를 잡는 팀은 무조건 죽어난다.
새로운 브랜드가 아닌가.
그걸 처음 매장 섭외부터 인테리어 공사, 발주 시스템 새로 만들고, 창고 자리 확보하고...
다른 팀장들은 그 모든 노력 대비 실적으로 잡힐 숫자가 터무니 없이 적을 것을 알기에 애초에 거들떠 보지도 않을 거다.
아무리 일이 빡세도 매장 매출만 확실하게 올라온다면 똥도 갖다 팔 사람들이 우리네 영업팀 사람들이다. 하지만 나크리스는 아니다.
그렇다고 부장의 파워로 너 이거 무조건 맡아! 하는 식으로 강요를 할 수도 없는 시스템이 현재 우리 회사 시스템이고.
팀장의 권한 중 브랜드 선택 권한이 분명히 있다.
아마도 이런 일 때문에 장 차장 밑에서 오래 있었던 날 팀장으로 올렸던 거겠지.
어느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팡!
이번엔 홈런!
나도 안다.
어차피 내 결정이 아니라 위에서 내려온 지시인데, 혼자 이렇게 생각을 많이 할 필요는 없다.
그냥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는 게 가장 속 편한 길이란 걸 왜 나라고 모르겠나.
까라면 까야지.
하지만 영업 1팀과의 관계를 생각해본다면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장 차장은 현재 우리가 핸들링 하고 있는 브랜드들 중 버리고 싶은 브랜드가 있으면 자기가 말을 해놓을테니 1팀에게 다 밀어버리라는 사인을 줬다.
하지만 틀림없이 그 사인대로 움직였을 때 영업 1팀의 항의는 적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기존의 브랜드를 다 안고 가면서 나크리스를 시작할 수는 없는 거고.
팡!
이번에도 홈런...
회사로 복귀한 후 난 곧바로 영업 1팀을 찾았다.
그리고 이제 막 업무를 시작한 김 팀장의 책상으로 걸어갔다.
안경 너머로 넌저시 날 쳐다보기만 하는 김 팀장.
"왜?"
특유의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김 팀장이 물었다.
같이 점심을 하는 거 같더니 아무래도 식사를 하면서 장 차장에게 나크리스 건에 대해 이야기를 전해들은 모양이다.
꼭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러 여기에 왔는지 다 안다는 투로, 자신은 그 결정이 무척 마음에 안든다는 감정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런 감정 속에도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한 이해가 엿보였다.
난 그저 씨익하고 겸연쩍은 미소만 지었다.
"웃기는..."
"아, 어쩌겠습니까. 위에서 까라는데..."
"누가 뭐래?"
"에헤이, 참...이해 좀 해주십시오. 저도 지금 입장 상당히 난처한 상황입니다."
"나보다?"
"거 참 진짜...저녁에 일 마치고 시간 괜찮으십니까?"
"남자하고는 데이트 안한다."
"댁에 계신 사모님이 그 말 들으셨음 퍽이나 좋아라 하셨겠습니다. 소주 한 잔 안 하실랍니까? 제가 팀장님 좋아하시는 막창에 소주 한 잔 사겠습니다."
"지금 이게 막창 가지고 될 일이냐? 소고기 사!"
"감사합니다, 팀장님."
난 영업 1팀 직원들이 다 보는 앞에서 김 팀장에게 허리를 깊게 숙여 이해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아직 나크리스에 대한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을 영업 1팀 직원들은 그저 내가 자기네 팀장과 장난을 치고 있는 줄 알았던지, 피식거리며 웃기에 바빴다.
저들의 미소가 조만간 어떻게 썩어들어갈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소고기를 사라고 했던 김 팀장.
하지만 막상 내가 소고기 집으로 안내를 하자 손사레를 치며 정신이 나갔냐고 했다.
"그냥 해 본 소리지, 이 사람아. 공 팀장 월급 내가 뻔히 다 아는데, 설마하니 진짜로 소고기를 사라고 했겠어?"
"괜찮습니다, 팀장님. 가시죠."
"쓰읍...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그냥 가던 집 가자."
"..."
"돈 모아, 이 친구야. 남들보다 빨리 팀장 달았다고 돈 흥청망청 쓰고 다니지 말고. 한 푼이라도 더 모아서 장가 갈 생각을 해야지."
진짜 이 놈의 소고기 한 번 먹기가 왜 이렇게 힘들단 말인가.
돈이 있는데, 지금 내 농협 통장에 13억이라는 돈이 들어가 있는데, 그 돈으로 내가 사치를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누가 구워주는 소고기 한 번 먹어보겠다는데, 그게 이렇게까지 힘들 줄이야.
어제 집에서 분위기를 낸답시고 꽃등심에 소맥을 마셨지만, 그래도 누가 구워주는 거랑 궁상맞게 원룸에 신문지 깔아놓고 낚시 의자에 앉아서 구워먹는 게 같을까.
하지만 결국 오늘도 실패다.
김 팀장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막창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래서 내가 장 차장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니까. 나도 그렇고, 공 팀장도 그렇고 이건 좀 아닌 거 같은데...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따라갈 수 밖에 없잖아."
장 차장 보다 입사 선배인 김 팀장.
비록 나와 양 대리처럼 같은 팀에서 지지고 볶는 관계는 아니지만, 그래도 장 차장과 김 팀장의 관계는 나와 양 대리와 비슷하다.
하지만 김 팀장과 양 대리의 차이점은 김 팀장에겐 지켜야 할 가정이 있다는 것과 양 대리는 지켜야 할 가정이 아직 없다는 것.
아닌 말로 양 대리는 내가 조금만 뭐같이 굴어버리면 언제든지 사직서를 집어던지고 자유의 몸이 될 수가 있다.
"내가 또 부장님 밑에서 대리 생활을 오래했잖아. 부장님이 추진력은 있어도 디테일은 많이 떨어진단 말이야. 그런데 공 팀장을 팀장으로 올린 거나, 영업 5팀이 떨거지 브랜드 다 쳐내고 어느정도 정상화가 되자마자 바로 나크리스를 가지고 오는 것만 봐도 이건 부장님이 아니라 장 차장 스타일이라고 봐야 돼."
"...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장 차장님 밑에서 5년을 있었는데, 제가 그걸 모르겠습니까."
"나한테 그러더라. 이번에 차장 달아야 하지 않겠냐고."
"후우..."
"부장님 이사 승진이야 거의 확실시 된 거고, 그럼 부장 자리에 장 차장이 올라갈 건 누가 봐도 당연한 거잖아. 막상 결과는 나와봐야 아는 거겠지만, 그 비게 될 차장 자리를 나한테 이야기 해놓고 나크리스 이야기를 꺼내는데, 내가 거기서 어떻게 싫다는 말을 할 수 있겠어? 안 그래?"
"그렇죠."
"그냥 하자. 부장님, 장 차장이라고 우리 때가 없었겠어? 우리 보다 빨리 거치고 또 아무렇지도 않게 견뎌냈으니 지금 차장, 부장 달고 있는 거지."
"김 팀장님께 죄송해서 그렇죠."
"공 팀장이 나한테 미안해 할 게 뭐가 있어? 작정하고 날 물 먹이겠다고 그러는 것도 아니고, 아닌 말로 나크리스 받겠다고 공 팀장이 먼저 작업 들어갔던 것도 아니잖아."
"속이 탑니다, 속이 타."
"어차피 해야 되는 거 잘 한 번 해봐. 그렇게 완전 쓰레기는 아니잖아, 나크리스가. 요즘같은 상황에선 의외로 잘 터질 수도 있어."
"진짜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김 팀장님."
"우리끼리라도 좀 편하게 가자. 안 그래도 팍팍한데, 우리끼리 지지고 볶아서 뭐하겠어? 아닌말로 그렇게 지지고 볶는다고 월급이 더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렇죠."
"대신 너무 많이 밀지는 마라. 한 세 개 정도만 추려줘. 우리 애들 숨은 쉬어야 하지 않겠냐?"
"최대한 노력해보겠습니다. 아시겠지만, 현재 저희 팀 상태가 그리 좋지가 못합니다. 양 대리는 어제 봐서 알겠지만 저러고 있고 막내는 아직 이게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도 못하는 상태라, 과연 이 팀원들을 데리고 제가 나크리스를 실수 없이 오픈 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바로 그 때였다.
"어, 여기!"
갑자기 김 팀장이 어딘가로 향해 손을 번쩍 들더니, 자신의 서류 가방을 올려놓은 의자를 비웠다.
난 김 팀장의 손이 향하고 있는 출입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그곳에서 나 못지 않게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양 대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불렀어."
"..."
"표정 좀 풀어라, 공 팀장."
표정은 내가 아니라 양 대리가 풀어야 할 것 같았다.
화가 난 얼굴은 아니었지만, 지금 이 상황 자체가 상당히 당혹스러운지 오다말고 걸음을 멈춰서서 마치 못 볼 거라도 본 사람마냥 두 눈을 끔뻑거리고 있었다.
난 어쩔 수 없이 김 팀장의 서류 가방을 넘겨받아 내 옆 자리로 올려놓았다.
"어서 와서 앉아."
"저도 몰랐습니다."
난 양 대리에게 나 역시 몰랐던 상황이라고 말했다.
양 대리가 어색한 모습으로 김 팀장의 옆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고, 난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부른 뒤 소주 한 병과 막창 2인 분을 더 시키며 소주잔을 하나 더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부모 죽인 원수들도 아니고, 쥐꼬리만한 월급받아가며 다들 어렵게 하는 직장 생활인데 뭐하러 그렇게 모든 에너지를 감정 싸움에 소모하나, 이 혈기 왕성한 친구들아."
"..."
"오늘 술은 내가 산다. 난 집사람 바가지 때문에 먼저 들어갈테니까, 두 사람 같이 한 잔 하면서 그동안 쌓여있던 거 확실히 풀어."
난 양 대리가 오자마자 자리를 일어서는 김 팀장의 모습에 그제야 내가 당했다는 걸 눈치챘다.
"안 그럼 영업 5팀이 우리한테 밀 브랜드들 다 거부한다. 거부는 아니겠다,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대신 우리 애들 시켜서 컴플레인 계속 만들어낼 거야. 농담 아니야. 나크리스 진행하면서 우리한테 계속 발목 잡혀있고 싶지 않으면 내가 시키는대로 해."
"..."
양 대리는 나크리스라는 말에 두 눈을 크게 뜨며 나와 김 팀장을 번갈아쳐다봤다.
"너는 막창 굽고 있어라. 난 공 팀장 데리고 나가서 담배 한 대 핀 다음에 바로 집에 갈 테니까."
밖에 나가서 담배를 입에 물며 김 팀장이 말했다.
"어제 같이 술을 한 잔 하자고 하더라고."
"양 대리가요?"
"응. 같이 술 마시면서 회사를 그만둬야 될 거 같다고 말을 하는 거야."
"흐음..."
“내가 오래 데리고 있었던 놈이야. 기회 한 번만 더 줘라, 공 팀장. 공 팀장도 이리저리 치인다는 거 내가 누구보다 잘 알지만, 그래서 양 대리 저 놈이 공 팀장한테 했던 짓 생각하면 내가 다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지만...그래도 기회 한 번만 더 줘라. 내가 부탁 좀 하자.”
“팀장님...”
“우리 마누라 세 째 가졌다.”
“...!”
“그래서 나 그나마 월 50만 원 받아오던 용돈도 월요일부로 30만 원으로 줄었어. 그 돈으로 어젠 양 대리, 저놈. 오늘은 공 팀장한테 술 사는 거야.”
“팀장님...”
“애가 좀 가볍긴 해도 일머리 하나 만큼은 뛰어나잖아. 어떻게 사람이 다 가질 수 있나. 조금씩 부족한 부분도 있어야 인간미도 있는 거지. 겁이 많아, 양 대리 저 놈이. 겉으로는 겁 없는 척을 해도 겁이 많아."
"그런 거 같더라고요."
"싫어도 그냥 양 대리 안고 가. 평생 데리고 살란 말 아니잖아. 어차피 시간 되면 회사가 알아서 찢어져줄 거, 그때까지만 좀 참고 안고 가줘라, 공 팀장. 응? 내가 부탁 좀 하자."
"..."
"물론 공 팀장 상대로 양 대리가 절대 해선 안될 짓을 한 건 맞지만, 지금 공 팀장 입장에서 양 대리 빠지면 답 없잖아. 양 대리 없이 무슨 수로 나크리스 진행할 거야? 나 간다. 들어가서 양 대리하고 이야기 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