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부장님 지시야
8시 44분.
사무실로 올라가기 전 마지막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고 서류 가방을 반대 손으로 고쳐들고 엘레베이터가 내려오길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부장님."
"어, 공 팀장."
박 부장이 손을 들며 다가왔다.
"어쩐일로 정문으로 들어오십니까?"
"확실히 지하철이 빡빡하긴 해도 빠르긴 빠르다."
"지하철 타고 오셨습니까?"
"어제 한 잔 꺾었거든. 새벽 2시까지 마셨다. 티 나냐?”
"아뇨, 전혀 몰랐습니다. 근데 대리 부르시죠, 왜."
"아예 처음부터 회사에 차를 놓고 나갔어. 장 차장 차로 움직였거든."
"아..."
엘레베이터가 내려왔고 난 박 부장 보다 한 발 앞서 엘레베이터 안으로 들어가 박 부장이 들어올 때까지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이제야 박 부장의 몸에서 술냄새가 풍기는 기분이었다.
"어제 일은 잘 마무리 했어?"
"어떤 일 말씀이십니까?"
"양 대리 건 말이야."
"아, 네..."
박 부장은 엘레베이터 벽에 기대 서서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얼굴에 걸어놓고 날 쳐다봤다.
"입사 선배 데리고 일하려니까 생각처럼 쉽지가 않지?"
난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슬며시 미소를 짓는 것만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대답인 거 같았다.
"그럴거야. 거기다 양 대리 그 놈이 좀 별나?"
"양 대리가 별나서라고 하기 보다는 그동안 제가 팀장으로서 제 역할을 제대로 못한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소리. 공 팀장은 잘하고 있어. 진짜 잘하고 있는 거야. 다들 공 팀장 만큼만 해주면 내가 무슨 걱정이 있겠어?”
“감사합니다.”
“힘내라고."
"네, 좀 더 신경 쓰겠습니다."
그리고 엘레베이터 문이 열렸다.
난 여전히 버튼 코너에 서서 박 부장이 내릴 때까지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그리고 박 부장이 내린 다음 뒤따라 사무실로 향했다.
박 부장의 등장으로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나의 시선과 관심은 처음부터 줄곧 우리 부서 사무실에 꽂혀있었다.
양 대리가...출근을 했다.
그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안심이 되는 걸까?
솔직히 출근을 하는 내내, 전날 그렇게까지 엄하게 말을 했는데 또 평소처럼 9시 정각에 출근을 하면 어떻게 해야할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었다.
정말 별 거 아닌데, 난 양 대리의 출근 시간에 적지 않게 스트레스를 받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어제는 다른 부서 사람들까지 다 들으라고 큰 소리로 지적까지 하지 않았나.
정작 오늘도 9시 정각에 출근을 하면 다시 또 하는 사람 입장이나 듣는 사람 입장 모두가 피곤해질 수 밖에 없는 잔소리를 해야하는데, 그게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업무 외적인 부분에서 서로의 자존심 때문에 양쪽 모두가 에너지를 낭비하는 짓은 그만하고 싶었다고 할까?
그런데 다행히 오늘은 나보다 먼저 출근을 해서 자기 책상을 지키고 앉아있었다.
박 부장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양 대리.
분명 아직 나에게는 인사를 안했다.
그래서 난 파티션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춰 세우고 양 대리를 지켜봤다.
"오셨습니까."
"네, 일찍 오셨네요."
박 부장에게 인사를 한 뒤 어정쩡한 자세로 가만히 있던 양 대리.
결국 나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내가 인사를 받자 자리에 앉았다.
겉으로 표현은 못했지만, 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몇 번이나 내쉬었다.
"오셨습니까, 팀장님."
"오셨습니까."
박기태와 이지혜의 인사까지 다 받은 뒤 난 내 책상으로 걸음을 옮기며 미팅을 하자고 말했다.
잠시 후 박기태와 이지혜, 그리고 양 대리까지 자신의 다이어리를 챙겨 내 책상 쪽으로 다가왔다.
"나가서 하죠."
"네?"
"나만 앉아있고 다 서서 하는 건 어제부로 끝. 오늘부터는 다같이 앉아서 합시다."
난 내 의자를 빼서 우리팀 사무실 공간 중간으로 끌고 나갔다.
그리고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다들 각자 의자 가지고 와요."
박기태가 양 대리의 눈치를 살피더니 먼저 자신의 의자를 빼서 끌고나왔다.
그리고 이지혜가 자신의 자리로 갔고 양 대리 역시 자신의 자리에서 의자를 뺐다.
모두가 이건 또 뭐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사무실 중간으로 의자를 모으는 동안 난 다이어리를 펼쳐 간단한 업무 보고를 받았다.
"그건 지혜 씨한테 받아서 기태 씨가 마무리하면 될 거 같은데."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지혜 씨는 기태 씨한테 그 내용 넘기고 바로 주문 물량 체크해서 발주 내역 만드세요."
"네."
"내일 아침까지 가능해요?"
"오늘 퇴근 전에 마무리해서 올리겠습니다."
"그럼 오늘 아무도 지혜 씨 건드리지 않는 걸로 합시다. 괜찮겠죠?"
"네."
"그리고 양 대리."
"네."
"..."
"...팀장님."
"지난 주에 입고된 베르사체 진 슈즈 물량 중에 박스 표기랑 내용물 다르게 입고된 거 어떻게 진행되고 있어요?"
"아직 매장들로 빠진 게 거의 없어서 창고 작업 하면 될 거 같습니다. 이미 들어간 매장들한테는 박스 뜯지 말고 기다려달라고 다 전달해 놓은 상태고요. 일괄 수거해서 동시에 창고 작업 하도록 하겠습니다."
"창고 작업도 작업이지만, 그거 회수하는데 들어가는 경비랑 창고 작업에 필요한 인원 인건비까지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영수증 첨부해서 다음 입고시 인보이스에 차감시켜 달라고 전달하세요. 이탈리아 애들 한 번 말하면 절대 말 안 듣습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계속 전화로 말하고 메일을 보내야 될 거예요."
"제가 책임지고 처리하겠습니다."
"창고 쪽에 연락해서 헬퍼 몇 명이나 필요한지 알아보고, 영수증 처리 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일단 난 끝났는데, 다른 내용 있습니까?"
난 양 대리부터 차례대로 박기태와 이지혜를 쳐다봤다.
서로 눈치만 살피다가 박기태가 손을 들었다.
"말씀하세요."
"저기, 차장님 와계시는데요."
"네?"
난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장 차장이 파티션 앞으로 몸을 기대고 서서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나 엿듣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장 차장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슬며시 웃기만 했다.
"그럼 오늘 미팅은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합시다. 오늘 하루 점심 시간 말고는 아무도 이지혜 씨 건드리지 마세요."
"네, 알겠습니다."
서둘러 미팅을 끝내놓고 장 차장이 서있는 곳으로 갔다.
그 사이 박기태는 내가 앉았던 의자를 내 자리로 옮기고 있었다.
"바빠?"
"괜찮습니다."
"그럼 커피나 한 잔 할까?"
"...네."
장 차장.
내가 5년 동안 바로 옆에서 모셨던 사람이다.
처음 내가 입사했을 때 같은 팀 대리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다른 팀 팀장으로 승진을 해서 이동했다.
그러다 내가 1년차때 날 자기 팀으로 끌어들여 혹독한 1년차를 보내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짧은 기간 동안 날 폭풍 성장 시켜줬다는 부분에서는 고마운 것도 많지만 또 그만큼 이가 갈리는 기억을 많이 심어준 사람이다.
회사가 확장을 준비하던 시절 곧바로 박 부장에게 붙어서 자신의 노선을 확실히 정했고, 확장이 진행되던 과도기 시절엔 박 부장의 도움으로 영업 이익만 놓고 봤을 때, 다른 영업팀 모두를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영업 이익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당시 박 부장이 에이급 브랜드를 우리 팀으로 몰빵해줬었다.
물론 팀원들을 달달 볶아 박 부장으로부터 몰빵 받은 브랜드를 어떻게든 다 소화해낸 건 장 차장의 능력이 확실하고.
무슨 일인지, 장 차장은 휴게실이 아닌 17층으로 올라가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
17층은 흡연이 가능한 옥상이다.
담배갑을 꺼내 자신이 물기도 전에 한 개피를 내게 건넨 장 차장.
난 두 손으로 담배를 받아 장 차장이 담배를 입에 물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장 차장이 담배를 입에 무는 순간 준비하고 있던 라이터로 불을 붙여줬다.
"후우..."
뽀얀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장 차장이 말했다.
"나크리스 알지?"
"그게 언제였는지 정확하게 기억은 안나지만 몇 년 전에 갤러리아에 들어가서 2년 정도 버티다가 철수한 브랜드 아닙니까?"
"철수를 한 건 맞지만 버텼다고 보기는 좀 그렇지."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영업의 달인이다.
그 영업 기술은 거래처 뿐 아니라 부하직원, 박 부장을 상대로도 펼치는 인물이다.
"입점해 있는 동안 꾸준히 럭셔리 브랜드 매출 순위 10위 안에는 들었던 브랜드야."
그렇게 또 교묘하게 숫자를 앞세워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수월하게 꺼낼 준비를 하는 장 차장이었다.
럭셔리 브랜드 매출 순위 10위라는 건 어디까지나 나크리스가 들어가 있었던 여성복 코너에 한정된 말일 것이다.
력셔리 여성 의류 브랜드 매출 순위에서 교묘하게 여성 의류라는 키워드를 빼놓고 말을 이어가는 장 차장.
걸러 들을 건 걸러 들어야 한다.
난 정확한 팩트를 알고 있지만, 일단 그의 말에 수긍을 하는 척하며 귀를 기울였다.
"나크리스 받아서 한 번 해볼 생각 없어?"
"좀 어려운 브랜드 아닙니까, 솔직하게 말해서."
"어려워? 뭐가?"
"너무 하이엔드 아닙니까, 가격 자체가. 거기다 대중적인 인지도도 많이 떨어지고, 가방을 밀어보려고 해도 가방 컬렉션 자체가 제가 알기로는 4개 정도 밖에 안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컬렉션 수가 중요하나, 어디. 가지고 있는 컬렉션으로 얼마나 많은 패턴을 뽑아내느냐가 중요하지."
항상 말이 바뀐다.
언제는 아무리 패턴을 많이 뽑아내는 브랜드라도 컬렉션이 한정되어 있으면 답이 없다라고 말을 해놓고, 이젠 그 말을 180도 바꿔버린다.
"그리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 여자들이 나크리스 디자인을 이해를 못했어. 그게 가장 큰 이유였어. 근데 또 아는 사람은 찾는 브랜드거든, 나크리스가."
"당시 갤러리아에 나크리스 프랑스 본사가 직접 넣었던 겁니까, 아님 라이센스를 가진 한국 업체가 넣었던 겁니까?"
"한국 업체가 넣었던 거야. 한선이 넣었던 거잖아."
"아, 나크리스가 한선 물산이 했던 겁니까?"
"걔네들 사이즈로는 감당하기 애매한 브랜드였던 게 확실해. 그거 공 팀장 네가 한 번 맡아서 해봐라. 가능성 있어."
그럴 줄 알았다.
이렇게 나와야 장 차장이지.
"지금 저희 인원 가지고 그게 되겠습니까? 세팅이 끝나있는 브랜드도 아니고...”
"안 되는 브랜드 있음 과감하게 빼. 빼서 1팀한테 넘겨. 걔네들 맨파워 빵빵하잖아."
"에이,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김 팀장 한테 짬을 시킬 수 있겠습니까?"
"김 팀장한테는 내가 말 해놓을 테니까, 쓸데없는 걱정하지말고 들고 있어도 답 안나올 거 같은 브랜드는 이번 기회에 1팀한테 밀어. 정리할 거 싹 다 정리하고 핵심 몇 개만 들고 가. 공 팀장 입장에서도 그게 더 낫지 않나?”
“하지만...”
“부장님 지시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