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이 갑이다-280화 (280/341)

# 280

레벨이 갑이다

280화

“좋아. 네 제안을 받아들이지.”

“저, 정말이냐?”

“아, 그거 참. 말투 듣기 거북하네.”

“저, 정말입니까?”

“그래도 눈치가 아주 없지는 않네. 앞으로도 그렇게 하라고.”

“네.”

대답을 하고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화는 나지만 살기 위해서는 이서우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

어쩌다가 천하의 블랙드래곤 다크가 이런 취급을 받게 되었단 말인가.

아마 동족들이 이 상황을 봤다면 기겁을 했으리라.

드래곤 로드에게도 고개를 빳빳하게 들던 다크다. 어디 해볼 테면 해 보라며 전투도 불사하며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한데, 한낱 인간에게 고개를 숙이다 못 해 비굴한 모습까지 보이다니.

“레어로는 어떻게 들어가지?”

“제가 포털을 열어 드리겠습니다.”

“간단하네.”

“네. 제가 만든 공간이어서 포털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렇군.”

일리가 있는 말이어서 이서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 걸린 마나 속박을 풀어주시면 바로 열겠습니다.”

“아 참.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어.”

“네?”

다크는 이제 고지가 바로 코앞까지 왔다며 속으로 환호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흥분으로 벅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죽인다고 고역이었다.

한데, 갑자기 이서우가 그를 제지했다. 대체 왜, 라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포털을 열고 싶었지만 마나가 속박당한 상태라 그것도 불가능했다.

“네가 나에게 그 모든 것을 다 준다는 보장이 없잖아. 안 그래? 그러니 철저하게 해야지.”

“걱정 마십시오. 드래곤은 거짓말 할 수 없습니다.”

“그건 네 생각이고. 난 확실한 걸 좋아해서 말이야.”

K사와 인연을 맺으면서 계약서를 썼는데, 계약 내용이 변경 될 때마다 새로운 계약서를 작성했다. 당사자가 만나 몇 줄 바꾼다고 될 내용들이 아니어서 새롭게 갱신을 몇 차례나 한 것이다.

주선용과도 계약 후 몇 차례 갱신을 통해 계약서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계약서를 잘못 쓰게 되면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주인이 쓸어 담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서우는 주선용과 계약할 때 다른 변호사에게 조언을 구했다.

비록 게임이지만 이곳은 그의 또 다른 삶의 터전이기에 무슨 일이든 가볍게 처리하지 않았다.

황제나 조세프 백작과 여러 말들이 오갔는데, 빌딩이나 땅 문제 등은 민감한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문서화시켜 보관을 하고 있었다.

NPC뿐 아니라 빌딩에 매장을 둔 유저들과도 철저히 계약서를 작성했다.

드래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다른 경우와 달라 계약서 이상의 뭔가가 필요했다.

“계약서라도 쓰자는 말씀이십니까?”

“당연히 써야지.”

“제게 계약서가 있기는 합니다만…….”

“평범한 계약서로는 안 되지.”

“그럼 뭘 원하시는지…….”

이서우는 얇은 가죽을 꺼내 미리 생각해 둔 것을 적기 시작했다.

계약서는 뉴월드 내에서도 강력한 효력을 지닌다. 현실처럼 사기도 칠 수가 없어 일단 작성을 하면 무조건 지켜야 했다. 만약 계약서 내용에 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시에 소멸을 당한다는 조항을 넣으면 그대로 되기 때문에 그대로 이행해야만 했다.

한참을 작성하던 이서우가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는 계약서를 내밀었다.

계약서를 받아 든 다크는 천천히 읽어 보았다.

부들부들.

내용을 읽을수록 황당해서 찢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살기 위해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이, 이건…….”

“왜? 싫어?”

“…….”

싫다고 말할 수도, 그렇다고 수긍한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이걸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지금껏 1만 년 가까이를 살아왔지만 드래곤에게 이런 요구를 한 인간은 없었다.

아, 있기는 했다, 그에게 악몽을 줬던 펠렌이라는 존재가.

노예가 되라는 요구를 해서 다크는 죽음을 각오하고 몸을 숨겼다.

다행히 안전한 곳으로 피할 수는 있었지만 큰 부상을 입어 숨죽인 채 힘을 되찾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자존심을 내팽개치고 긴 세월을 버티면서 복수를 다짐했는데, 이제는 그 후예에게 똑같은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펠렌과는 달리 완전한 복종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오십 보 백보여서 생각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지금은 펠렌을 상대하던 때와 달랐다. 힘을 잃어 도주하는 순간, 목숨이 날아가고 만다.

다크가 망설이자 이서우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뭐, 싫으면 할 수 없지.”

“아, 아닙니다! 계약, 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피를 떨어뜨려.”

“……네.”

뉴 월드에서 가장 강력한 계약은 피로 맺어진다. 사인도 가능하지만 확실한 것을 위해서는 피가 좋다.

이서우는 자신의 피도 떨어뜨려 계약을 완성했다.

-블랙드래곤 다크를 펫으로 등록하시겠습니까?

‘그래.’

-블랙드래곤 다크가 펫으로 등록했습니다. 펫으로 등록하셨기에 새롭게 이름을 정할 수 있습니다. 이름 설정은 펫 창에서 가능합니다.

“역시 이게 깔끔하지.”

“이 약속은 주, 주인님이 죽기 전까지 유효한 겁니다.”

주인님이라는 말이 어색했지만 이미 계약을 했기에 다른 말은 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크는 희망을 갖고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래. 인간의 수명은 짧아. 그때까지만 참으면 돼.’

다크가 힘든 결정을 내린 이유였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이서우의 캐릭터는 뉴 월드가 망하기 전까지는 계속 유지가 된다는 것을 말이다.

“자, 이젠 포털을 열어 봐.”

“네, 주인님.”

계약을 한 이상 다크는 이서우를 공격할 수 없다. 이서우를 공격하는 순간 소멸되기 때문이다.

한 번의 공격으로 이서우를 죽일 수 있다면 이런 계약 따위는 아예 필요가 없었을 테니, 공격 마법을 펼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처음에는 공격을 하겠다는 생각만으로도 소멸을 당한다는 조항을 넣을까도 했었다. 하지만 그러면 계약이 너무 쉽게 깨질 것 같아 바꾼 것이었다.

‘많이 부려먹어 주마.’

이서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다크는 정성껏 포털을 열었다.

“먼저 들어가.”

해를 끼치는 행동 자체를 할 수 없기에 이서우가 먼저 들어가도 상관은 없지만 속았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분이 좋지 않아 매사에 조심했다.

다크가 들어가자 이서우가 그의 뒤를 따라 포털로 들어갔다.

“여기가 저의 레어입니다.”

“평범한 동굴처럼 생겼는데?”

“수만 명의 인간이 살 수 있을 만큼 넓은 공간입니다.”

“계약을 안 했다면 날 여기 가두고 나가도 됐겠군.”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다크는 자신의 의도를 들킨 것이 당황스러워 말까지 더듬었다.

‘그래, 지금 많이 누려 둬라. 어차피 인간은 길어야 200년이지만 난 아직도 수천 년을 살 수 있다.’

‘멍청한 놈. 내가 얼마 못 산다고 생각하고 덥석 계약을 했겠지. 하지만 뉴 월드가 망하기 전까지는 이 캐릭터가 계속 유지된다는 건 몰랐을 거다.’

현실에서 10년이 뉴 월드 60년이다. 뉴 월드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 20년은 갈 텐데 그러면 120년 동안은 유지가 된다는 뜻이다.

그게 아니라도 뉴 월드 캐릭터는 상속이 가능하다. 시대가 변해 다른 게임이 만들어지더라도 뉴 월드 캐릭터의 성장 정도에 따라 혜택도 주고 있어 사람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뉴 월드는 이미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많은 수익을 창출하는 거대한 시스템이었다.

수익도 크고, 노력에 대한 대가도 정당하게 받을 수 있다면 사람들은 모일 수밖에 없다.

글로벌사는 뉴 월드의 생명력을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해 이런 조치를 취했고, 그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막대한 돈을 투자하는 것도 이런 이유가 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그것보다 어서 드워프 장비들과 고대 엘프 수정, 드래곤 하트부터 줘.”

“……네.”

말을 했으니 물릴 수도 없다. 다크는 그가 그토록 자랑했던 아이템들을 꺼냈다.

“드워프도, 엘프도 찬란한 영광을 누린 것은 수천 년 전의 일입니다. 그래서 제가 가진 것들을 감히 최고라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보면 알겠지.”

이서우는 다크가 건네는 드워프 아이템을 받아 들었다.

‘헉!’

등급을 확인한 이서우는 헛바람이 나오는 것을 애써 삼켰다.

‘신화 등급이잖아. 헉, 이것도? 이런 미친.’

이서우는 연속해서 신화 등급의 아이템을 보자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기분이 나빠서가 아니라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놀라서다.

엘프의 수정도 장난이 아니었다. 주먹만 한 보석이었는데, 각가지 색상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전부 다 불순물이 전혀 없었다.

이서우는 드디어 마지막으로 드래곤 하트를 받아 들었다.

총 77개의 드래곤 하트를 얻으니 절로 환호성이 나왔다. 물론 다크가 보지 않도록 속으로만 말이다.

이서우는 즉시 소생의 정수를 만들었다.

2천 살의 드래곤 하트 3개, 3천 살 3개, 4천 살 2개, 5천 살 2개로 말이다.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나이대의 드래곤 하트를 사용했다.

‘드래곤 하트는 충분해. 아무리 극악한 확률이라도 일흔일곱 번 중에 한 번은 되겠지.’

이서우는 벌써 정민후가 깨어나는 날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이서우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던 다크는 그가 미소를 짓자 안도했다. 이제 생사여탈권은 모두 그에게 있었다.

“만족하시는 듯하니 다행입니다.”

“만족이라.”

대만족 중이었지만 이서우는 다크를 편하게 해 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살아왔으니 지금부터는 반대되는 삶을 실컷 살도록 해 줄 계획이었다.

“혹시 다른 필요한 물건이 있으신지요?”

“골드부터 네가 가진 걸 싹 가져가야 될 것 같아.”

“네?”

“왜? 싫어?”

“아, 아닙니다. 주인님이시니 당연히 가져가셔야죠.”

“그럼 품목별로 내놔 봐.”

“……네.”

다크는 울며 겨자 먹기로 하나씩 아껴 뒀던 물건들을 꺼냈다.

무려 1만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모아 온 것들이었다.

다크는 쉬지 않고 아이템들을 쏟아 냈다. 얼마나 많았는지 꼬박 이틀 동안 정리해야만 했다.

다크는 물건이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눈물을 머금었다. 드래곤 하트를 준 것도 억울한데, 하나부터 열까지 싹 털렸으니 눈물이 핑 돌 만도 했다.

“이, 이제 정말 끝입니다.”

“그래? 뭐, 아쉽지만 이 정도로 만족해야겠네.”

“네? 네.”

다크는 그 많은 양의 아이템을 쓸어 담고도 또 욕심이 생기는 이서우를 보며 치를 떨었다. 그도 아름답고, 뛰어난 물건들을 보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구했지만 이서우의 욕심도 만만치 않았다.

“자,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있지?”

“네?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라뇨?”

“내가 왜 널 살려 뒀을 것 같아?”

“그거야…….”

차마 ‘제 레어를 털기 위해서죠.’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이제는 주종관계에 있어 말 한마디도 조심스러웠다.

“쯧쯧쯧, 이렇게 둔해서야.”

“죄송합니다. 제가 아둔해서 주인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말씀해 주시면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자세는 좋네.”

“칭찬 감사합니다.”

주종관계가 형성되자 다크는 빠르게 적응했다. 자유롭게 활동하는 유저가 아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너랑 같이 있던 놈, 그놈 하이 레벨이지?”

“네? 네. 한데, 그걸 어떻게…….”

“다 아는 수가 있어. 그놈과 안 지 얼마나 됐지?”

“꽤 오래됐습니다.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아마 수천 년은 됐을 겁니다.”

“그렇군. 그럼 그놈에 대해 잘 알겠네?”

“물론이죠! 너무 잘 알아서 탈일 정도니까요.”

“잘됐네.”

“네? 잘됐다뇨?”

“그놈 이곳 통치자잖아. 그렇지?”

“네. 통치자가 맞습니다. 한데, 그게 왜…….”

“난 이곳에 있는 여러 통치자들에게 관심이 있거든.”

“이곳에 있는 통치자들에게요?”

“그래.”

“설마…….”

“맞아. 그 설마가.”

다크는 왜 이서우가 그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서우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