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3
레벨이 갑이다
243화
“죽음의 가루!”
“……!”
이서우는 뜬금없이 외치는 소리에 살짝 긴장했다.
워낙 가까이에서 사용한 기술이어서 얼른 초월가속을 시전해 피하려했다.
하지만 갑자기 리치 킹의 몸이 사라지더니 뼛가루가 날리기 시작했다.
“주, 주인님, 가루를 마시면 안 돼요! 어서 숨을 참으세요!”
“뭐? 숨을? 하지만…….”
백호는 1만의 언데드들을 상대하고 있어 이서우에게 집중할 수 없었는데, 리치 킹이 주문을 외치는 것을 듣고는 다급히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몇 번이나 호흡을 한 뒤였다.
“컥!”
이서우가 갑자기 피를 토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서, 설마. 자폭을 한 것인가.”
-아, 아니에요. 놈은 영혼의 구슬을 파괴하지 않으면 죽지 않아요.
-그렇다면…….
이서우의 의문은 곧 해결되었다. 눈앞에서 리치 킹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크하하하하. 걸려들었구나. 네놈은 이제 죽을 때까지 피를 토하다가 사라질 것이다. 지금이라도 내 노예가 된다고 하면 살려 줄 용의는 있다.”
“비겁한 놈, 독을 사용하다니.”
“독이라. 뭐,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그럴 수도 있겠군. 하지만 병장기만 부딪치는 게 싸움은 아니니까 너무 억울해하지 말라고. 자, 그럼 고통 속에서 죽어 가는 모습을 감상이나 해 보실까.”
리치 킹의 필살기 중 하나로, 자신의 몸을 가루로 만들어 상대의 호흡기를 통해 침투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일단 몸에 들어가면 절대로 죽음의 가루를 배출시킬 수 없다.
가장 먼저 폐를 망가트리고, 산소를 공급하지 못하도록 해서 죽게 만드는 기술이었다.
폐가 망가지기 때문에 점점 말하는 것이 힘들어진다.
이서우도 호흡이 거칠어지더니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게 되었다.
‘쉽게 처치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런 식의 공격을 하다니. 해독제를 만들어야 해.’
이서우는 전설의 약초꾼이다. 만들지 못하는 해독약이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시간.
다행히 한 줌의 미약한 호흡으로도 10분 정도는 버틸 수 있어 해독약을 만들 수 있는 시간은 벌었지만, 눈앞에 리치 킹이 있어 행동을 조심해야 했다.
자칫 이상한 낌새라도 보이게 된다면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간다.
‘다행히 내가 전설의 약초꾼이라는 걸 모르나 보네. 하긴, 펠렌을 보고 누가 약초꾼인 줄 알겠어?’
이서우는 제작 창을 열어 언데드의 독을 중화시키는 해독제를 찾았다.
거래중개소에서 재료들을 왕창 사재기해서 마침 재료는 다 있었다.
‘제길. 뭐가 이리 길어?’
제조 시간이 무려 10분이었다.
단순히 언데드에게 중독되었다면 10초도 되지 않아 해독제를 만들 수 있지만 리치 킹에게 당한 독은 쉽게 고칠 수 없는 것이어서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커억!”
제조를 걸어 두자마자 다시 피를 쏟아냈다.
생명력이 다시 10퍼센트나 빠져나갔다. 생명력회복 물약을 먹었지만 조금씩 차올라서 소용이 없었다.
이서우의 생명력은 이미 500만을 넘기고 있었다. 10퍼센트라고 해도 50만이 넘기 때문에 물약으로 결코 보충할 수가 없었다.
비약과 병행해서 먹고 있지만 생명력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어 어떤 방법으로도 소용이 없었다.
‘이제 남은 생명력은 절반 정도야. 젠장, 7분을 버텨야 하는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
리치 킹은 이서우가 피를 토하는 것이 즐거운지 연신 웃어대며 구경 중이었다.
-주인님…….
-넌 절대로 나서지 마. 괜히 나서 봐야 제물만 될 뿐이야. 만약 나선다면 난 널 소환 해제하는 수밖에 없어.
-하지만 주인님…….
-걱정 마. 모험가는 다시 부활할 수 있으니까.
-그렇지만…….
-괜찮다니까 그러네. 놈의 필살기도 알았으니 다음에는 절대 당하지 않아. 죽음의 가루가 아니면 놈도 별 볼일 없으니 후일을 기약하자고.
-……네, 주인님.
백호는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이서우는 다시 부활할 수 있지만 백호는 한 번 죽으면 끝이다.
다시 소생시킬 수 있는 방법이야 잘 찾아보면 있을지도 모르지만 당장은 그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최대한 조심해야 했다.
이제는 시간 싸움이다.
리치 킹은 이서우가 뭘 하는지도 전혀 알지 못한 채 언데드 하나를 불러 고양이 자세로 엎드리게 하고는 등에 앉았다.
이서우가 피를 토할 때마다 박수도 치고, 깔깔깔 웃으면서 열심히 구경에 빠져 있었다.
* * *
-오빠, 생명력이 갑자기 너무 많이 빠지는데 괜찮아?
-어, 난 괜찮으니 거기부터 처리해. 그쪽에도 꽤 강력한 언데드들이 갔잖아.
-응. 근데 생각보다 강하지 않아서 어렵지 않게 막고 있어.
-그래? 그거 다행이네.
이설아는 이서우의 생명력이 10퍼센트씩 쭉쭉 빠지다가 절반을 남겨 두고 1퍼센트, 혹은 2내지 3퍼센트씩 줄어드는 것을 보며 불안했다.
혹시나 전투 중이어서 방해가 되지 않을까 봐 최대한 대화를 자제했는데, 생명력이 30퍼센트밖에 남지 않았을 때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물은 것인데, 오히려 이서우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사실 이서우는 이설아의 힐이 정말 간절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단지 걱정을 끼치는 게 싫어서 겉으로 표현을 하지 않았을 뿐.
이서우의 말대로 이설아는 얼른 언데드들을 정리하기 위해 마나를 펑펑 써 댔다. 이곳에 있는 언데드들을 처치해야 이서우에게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생명력이 빠지는 속도를 보면 언데드를 처치하고 가면 늦겠지만, 그걸 알면서도 이설아는 포기할 수 없었다.
“설아야, 흥분을 가라앉혀. 단독 행동은 위험해!”
마음이 급해지니 무리수가 나왔고, 그녀로 인해 파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미, 미안해.”
이설아는 즉시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자제했다. 이서우가 위기에 처했다지만 지금은 파티원들도 중요했다.
이설아는 여유가 있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들도 그리 편한 상황은 아니었다. 한 명만 빠져도 전멸할 만큼 위험한 상태였다.
그나마 이서우에게서 높은 등급의 마나 물약과 생명력 회복 물약, 마나 비약과 생명력 비약을 구입했기에 무난하게 버틸 수 있는 것이었다.
* * *
“젠장. 무슨 놈의 언데드들이 이렇게 강해? 신성력으로 어떻게 좀 해 봐!”
“암흑의 정수까지 사용하고 있는 상태여서 신성력으로도 어찌할 수가 없어.”
“그게 말이 돼?”
“눈으로 직접 보고 있잖아. 그나마 이렇게 버티는 것도 용하다고!”
몰디나의 성난 목소리에 아리아도 핏대를 세우며 대꾸했다.
반다이젠 후작이 통신구를 가지고 있었고, 마법사를 구해 텔레포트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어 몰디나가 빠르게 도움을 줄 수 있었다.
한데, 총사령관을 비롯해 언데드 사령관까지 대거 투입되었기에 두 사람으로서도 압도적인 우위에 설 수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암흑의 정수까지 사용하는 것을 보며 좌절했다.
암흑의 정수는 언데드들의 힘을 2배 정도 증폭시켜 준다.
등급에 따라서 더 많은 힘을 뽑아낼 수 있는데, 사령관이 쓴 것은 대략 1.5배 정도 더 강한 힘을 낼 수 있는 것이고 총사령관이 쓴 것은 2배 정도였다.
암흑의 정수를 복용하지 않았을 때야 승리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서우는 대체 뭐한다고 아직 안 오지? 설마 리치 킹에게 죽은 건 아니겠지?”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싸움에 집중해. 버티기만 하면 분명 올 테니까.”
“그냥 답답해서 해 본 소리야. 알았으니 힐이나 잘 줘!”
긴장감을 풀기 위해 투덜거린 것이지만 갈수록 말할 힘도 없어져서 금세 몰디나의 입이 닫혔다.
침묵이 이어질수록 몰디나와 아리아는 언데드들에게 밀렸다.
지금 그들이 믿는 것은 오직 이서우뿐이었다.
리치 킹을 처치하고 당장이라도 와서 도와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이서우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 * *
“흐흐흐. 거 봐. 내 말이 맞잖아. 제 놈도 부자가 됐으니 자랑하고 싶었겠지. 곧 줄을 줄도 모르고 동문회에 참석해서 자랑질해 댈 녀석을 생각하니 우습네.”
“진짜 자랑이나 하려고 오는 걸까?”
“당연하지. 소문으로는 은행에 꽂혀 있는 현금만 벌써 1조를 넘겼다니 자랑하고 싶지 않겠어? 놈이 죽으면 DNA라도 채취해서 놈의 금고나 털어 볼까?”
“미친놈. 지금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냐?”
“그래, 인마. 내 머릿속에는 오직 돈밖에 없다!”
당당하게 말하는 배진성을 보며 황재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떻게 하면 사람이 이렇게 타락할 수 있단 말인가.
평소 배진성은 욕심이 많은 인물이었지만 지금처럼 온통 돈 생각만 하지는 않았다.
‘빚 독촉에 시달리더니 아주 애가 맛이 갔네. 그러게 왜 사체는 써 가지고. 시팔, 그러고 보니 열 받네. 결국 저놈 빚 때문에 나까지 덫에 걸린 거잖아. 이번 일만 마무리되면 보자.’
하는 수 없이 이번 일에 가담했지만 황재규는 배진성에게 악감정이 생겼다.
그동안은 서로 얼마나 많은 돈을 버는지를 놓고 경쟁하면서 좋은 영향을 받았기에 관계를 유지했는데, 지금은 증오심이 더 강했다.
“이제 내일이네. 민수랑 종명이도 오겠지?”
“그렇겠지. 셋은 삼총사였으니까.”
어릴 때부터 함께해 왔다는 것을 알기에 당연히 함께 동문회에 참석할 거라는 예상이 가능했다.
“방해되지는 않을까?”
“어차피 우리는 들러리잖아. 그때 그 사람이 온다면서?”
“오기는 온다고 했지. 동문회 장소도 그 사람이 잡은 거니 만반의 준비를 하지 않았겠어?”
“그건 그렇겠지. 한데, 이렇게 공을 들이는 걸 보면 정말 사무치도록 깊은 복수심이 있나 봐?”
“나도 그놈을 죽이고 싶은데, 형제가 죽었으니 당연히 복수에 사무치겠지. 잔인하게 고문하다 죽일 거라 예상해 본다.”
“빚이 사람을 아주 버려 놨네, 버려 놨어.”
“뭐?”
“그냥 혼잣말이다. 귀는 밝아 가지고.”
황재규는 너무 변해 버린 배진성을 보며 혀를 찼다.
일주일 가까이 함께 생활하면서 빚 독촉에 시달리는 걸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
그때마다 배진성은 미친 사람처럼 이서우를 욕하거나 잔인성을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황재규는 절대로 빚을 지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 일을 무사히 끝내야 했다.
‘제발 아무 일이 없어야 할 텐데.’
모든 계획은 완벽하다. 삼총사 중에서 가장 의심이 적은 박민수를 통해 동문회 이야기를 꺼내서 별다른 의심을 사지 않았다.
만약 서우에게 직접 전달했다면 분명 이상하게 여겼을지도 몰랐다.
그나마 박민수와 친한 동문을 내세워 지나가는 식으로 말을 한 것이 탁월한 선택이었다.
“넌 왜 똥 씹은 표정을 하고 그래? 술이나 푸자.”
“그놈의 술은. 내일이 모임인데 맑은 정신을 유지해야지.”
“저녁까지는 충분히 깨. 그리고 어차피 다 잡은 물고긴데 왜 그리 긴장하고 그래, 사내놈이 배짱 없이?”
“배짱 좋아서 좋겠다.”
“시끄럽고, 술이나 마셔!”
배진성은 양주와 큰 잔 두 개를 가져와 반 정도 양주를 따랐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아침까지 부어라, 마셔라를 반복한 두 사람은 술이 떡이 되어 널브러졌다.
하지만 배진성은 몰랐다, 황재규가 아침 일찍 일어나 무엇을 했는지를.
‘뭘 하든 안전이 제일이지. 난 내 살길을 만들 테니 넌 받지도 못할 10억에 열심히 집착해라.’
황재규는 배진성에게 이번 일의 배후에 대해 듣자마자 피할 구멍을 만들기 위해 은밀히 움직였다. 행여나 드러나도록 행동하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것이 두려워서였다.
그렇게 황재규는 술에 취한 얼굴 속으로 미소를 숨긴 채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