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
레벨이 갑이다
240화
“씨팔, 저딴 지질한 새끼가 전장의 지배자라니. 개자식,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지. 절대로!”
어두컴컴한 술집 구석에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사내는 홀로그램 속에 나오는 전장의 지배자의 활약을 보며 이를 갈았다.
그때 술집으로 덩치가 큰 사내가 들어왔다.
사내는 테이블에 놓인 두 개의 양주병을 보며 혀를 찼다.
“벌써부터 취하려고? 이래 갖고 대화나 되겠어?”
“쓸데없는 소리 말고 앉기나 해.”
“새끼, 하여튼 그 성격은 여전하네. 도움을 받을 게 있다고 부르더니 큰소리는.”
덩치 큰 사내는 푹신한 의자에 앉자마자 테이블 바닥에서 튀어나온 잔을 들고는 앞으로 내밀었다.
꼴꼴꼴꼴꼴.
작은 양주잔이 아니라 큰 잔에 반이나 채우더니 양주병을 내려놓았다.
“역시 내 스타일을 잘 안다니까.”
덩치 큰 사내는 단숨에 양주를 털어 넣고는 잔을 테이블에 힘차게 내려놓았다.
탁!
“그래, 도움을 받고 싶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무슨 일이냐?”
“너도 들었지?”
“앞뒤 다 자르고 말하면 내가 아냐?”
“서우.”
“아, 그 놈? 들었지. 근데 그게 왜?”
“넌 화도 안 나냐?”
“화가 나기는 하지. 하지만 이미 우리가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높이 올라간 놈이야. 괜히 건드려봐야 좋을 거 없어.”
“누가 건드린데! 그냥 화가 난다는 거지.”
“내가 널 모르냐. 날 불러서 서우에 대해 알아내고 찝쩍거릴 생각이잖아.”
“찝쩍거리긴 누가! 그냥 옛날 동창이라도 만나고 싶어서 그런 거지.”
“동창은 무슨. 1학년 과정도 제대로 못 하고 그 꼴 났는데. 뭐, 지금은 하늘 위의 사람이 되어 버렸지만.”
덩치 큰 사내는 목이 타는지 양주를 반쯤 채워 다시 한 번에 마셔버렸다.
“야, 자꾸 술 축낼래?”
“부탁이 있어 불러놓고 쪼잔하게 따지냐? 돈도 많이 버는 놈이.”
“많이 벌긴. 개털이다.”
“왜? 너 최근까지만 해도 한 달에 수입이 5천까지 늘어났다고 좋아했잖아.”
“그럴 일이 있었다.”
“설마, 너 손댔냐?”
“……그래.”
“미친놈. 도박판이나 다름없다고 손대지 말라고 그렇게 일렀는데도 손을 댔냐?”
“시팔, 그 새끼가 벼락부자가 됐는데, 몇천 만원으로 만족하라는 거냐!”
“자격지심 쩌는 놈. 너 그러다가 빚더미에 주저앉고, 지금 누리고 있는 것도 다 빼앗길지 몰라. 애초에 손 떼.”
“이미 늦었다.”
“뭐? 설마…….”
“그래. 빚 때문에 신체 포기 각서까지 썼다.”
“신체 포기 각서? 요즘 그런 각서 없는데 무슨 소리야?”
줄기세포를 치료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면서 장기 이식은 사라졌다. 지금은 신체 포기 각서가 아니라 노예각서가 유행이었다. 평생 일을 해 주겠다는 각서였는데, 강요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어서 강제성이 없는데도 당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튼 빚 안 갚으면 죽어나게 생겼다.”
“무슨 일에 휘말린 거냐?”
“그자가 나에게 이서우를 만날 수 있게만 해 주면 빚은 탕감해 주겠다고 했다.”
“서우를 만나기만 해 줘도?”
“그래.”
“빚이 얼만데?”
“큰 거 열 장.”
“뭐? 10억이나 빚을 졌단 말야?”
“그렇게 됐다.”
10억이면 2년 가까이 바짝 벌어야 모을 수 있는 돈이었다.
이자가 엄청날 테니 생활비를 제외하고도 5년은 일을 해야만 벌 수 있는 엄청난 금액이다.
“야, 배진성, 너 진짜 미쳤구나?”
“한 방을 노리는 게 뭐 어때서! 그리고 그 덕분에 그 놈만 만나게 해주면 빚 탕감에 10억까지 준다고 했단 말이다!”
“미친놈. 넌 그 말을 믿냐? 어떤 미친놈이 사람 하나 만나게 해 주는 조건으로 20억을 투자하냐?”
“복수를 해야 하는 대상이라면 가능하지.”
“뭐? 복수?”
“그래. 서우 때문에 형제가 죽었다고 했다. 전 재산을 탈탈 털어 그놈을 어떻게든 잡아서 책임을 묻겠다고 이를 갈더라.”
“배진성, 진짜 눈에 봬는 게 없구나. 그게 말이 돼? 아무리 복수라지만 20억을 내놓겠다니. 그리고 혹시라도 그자의 말이 사실이라도 그래. 자칫 분노에 휩싸여서 살인을 저지를지도 모르는데, 거기에 동조를 한다고?”
“뭐, 어때. 재수 없는 새끼가 죽는다고 누가 신경이나 쓴다고.”
“쯧쯧쯧. 서우의 위치가 얼마나 높은지 정말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니지?”
“그딴 지질이 새끼가 높아 봤자지!”
배진성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와 이서우는 대학교 같은 과 동문으로, 1년이 채 되지 않는 시간을 함께 보냈다.
하지만 둘은 성격이 너무 달라 부딪치는 경우가 많았다. 배진성은 편법을 쓰면서까지 학점에 매달렸지만 이서우는 기본 상식에 어긋나는 짓을 하는 걸 무척이나 싫어했다.
결국 2학기 방학이 다가올 때까지 앙숙처럼 지냈다.
“행여 서우를 건드릴 생각은 하지 마. 그러다 진짜 네 남은 인생이 쫑 나는 수가 있으니까.”
“난 그저 자리만 만들어 주면 돼. 누가 했는지 어떻게 알겠어?”
“누가 했는지 모르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동문회 명목으로 초대하면 누가 의심하겠어?”
“지금 와서 동문회를 하자고? 그것부터가 오히려 이상하잖아.”
“지금에 와서라니. 소규모로 매년 동문회는 열리고 있었어. 그걸 좀 키우자는 거야.”
“동문회 같은 소리하네. 그냥 우리끼리 만나서 제 잘난 맛에 술 처먹는 게 전부였는데 그게 무슨 동문회냐?”
“그럼 오히려 잘됐잖아. 지질이도 와서 실컷 자랑할 수 있게 해주면 되니까.”
배진성의 말에 덩치 큰 사내, 황재규는 황당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뭐든 다 자기 위주로 생각한다는 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범죄자가 될지도 모르는 데도 천지분간을 못할 줄은 몰랐다.
황재규도 사실 이서우가 그다지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템 판매로 한 번에 수천억을 벌어들이는 것도 싫었고, 뉴 월드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활약하는 것도 싫었다.
게다가 자신의 우상인 이설아와 연인 관계라는 게 증오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코지를 할 정도냐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술을 마시면서 저주도 퍼붓고, 욕도 하지만 실제 행동으로 분을 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황재규는 최근 한 달 수입을 5천만 원까지 끌어올렸다.
20세 이상 4천 만 인구를 조사한 결과 1년 수입이 6억이면 이제 겨우 소득 상위 0.1퍼센트에 턱걸이를 한 것이다.
진짜 부자는 0.1퍼센트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있기에 황재규는 그동안 부단히 노력했다.
한데, 이서우는 0.1퍼센트가 아니라 0.0000025퍼센트의 사람이었다. 즉, 4천만 중에 1등이라는 소리다.
전체 재산이 아니라 연간 수익만을 따지는 것이기에 1등을 할 수 있었다.
이게 가능한 것은 주식 배당금이나 부동산 등으로 얻은 수익을 제외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걸 포함한다고 해도 이서우는 한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수입이 많다.
주선용이 K사뿐 아니라 글로벌사의 주식까지 사자고 건의를 했고, 이서우도 받아들였다.
중국과 인도의 주식 또한 고공 행진 중이어서 이서우의 전체 재산은 이미 박 대표를 넘어섰다.
최근에는 뉴 월드에서 32개의 초고층 빌딩을 만들면서 하루가 다르게 수입이 늘고 있었다.
영약도 차곡차곡 모으고 있으니 2034년 수입 1등은 누구라도 이서우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엄청난 존재를 살해하기 위해 가담한다?
이 사실이 드러난다면 그동안 고생한 것이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만다.
“난 생각 없으니 하려면 너 혼자 해.”
“야, 내가 동문회하자고 하면 그놈이 올 것 같아? 너 아는 놈 중에 그놈이랑 친한 녀석 있잖아. 걔한테 말 좀 잘 해 봐.”
“별로 안 친하다는 걸 너도 잘 알 텐데?”
“그래도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는 걔가 젤 친해.”
“여튼, 난 모른다.”
“그렇게 버티면 너만 손해야.”
“손해? 무슨 손해!”
황재규는 살짝 언성을 높였다. 마치 봉변이라도 당할 텐데 하는 뉘앙스가 풍기는 배진성의 목소리에 화가 난 것이다.
“벌써 말해 버렸거든.”
“무슨 말을 했다는 거야?”
“내가 빚진 사람들. 그 사람들 보통이 아냐. 네가 거절하면 널 찾아갈 거야. 몇 군데 부러지거나 칼밥 먹으면 무슨 소용이겠어. 안 그래?”
“너…….”
눈에 어찌나 힘을 줬는지 황재규의 눈동자가 시뻘겋게 충혈되었다.
뉴 월드를 하면서 꽤 가까워졌다고 여겼는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이야.
“그러지 말고 이번 일 맡고 서로 5억씩 가져가자. 어차피 동문회 참가하라고 말 한마디 하는 건데 뭐가 어렵다고 그래. 우리 잘못은 없을 테니 기분 좋게 하자.”
“대체 누가 널 이 일에 엮은 거냐?”
“안 듣는 게 좋을 텐데.”
“들어야겠다. 누군지도 모른 채 눈탱이만 맞을 수는 없지.”
“그게 누구냐면…….”
배진성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을 들은 황재규는 결국 수락하고 말았다.
* * *
“지금 뭐라고 하셨나요?”
이서우는 김명국에게서 듣고 싶지 않은 이름을 들었다.
그동안 잊고 지냈는데, 갑자기 튀어나오다니.
“배진성과 황재규라고 했습니다.”
“그 둘이 문태식을 따르는 자를 만났다는 말입니까?”
“네. 문태식이 상당히 큰 액수의 돈을 건넨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돈으로 배진성과 황재규를 샀다는 뜻이군요.”
“네.”
이서우의 얼굴이 무섭게 변하자 김명국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이제 20대 후반의 나이에 저런 눈빛이라니. 범상치 않은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군.’
김명국은 이번 일을 어렵지 않게 성공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시간을 아끼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경찰청장에게 부탁을 해서 잘 협조할 수 있도록 했다.
동생이 주의를 줬지만 아직 20대의 나이니 대가 세 봐야 얼마나 셀까 싶었다.
한데,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이서우와 대화를 할수록 그가 만만치 않다고 느꼈다.
“그들이 저에게 접근을 할 거고, 그때를 이용해 장수파가 절 납치한다는 뜻이고요.”
“그렇습니다.”
“어떤 식으로 접근을 하든 제가 그의 요구에 응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물론 그가 직접 접근을 했을 때라면 당하지 않겠죠. 하지만 다른 방법을 쓸 수도 있습니다.”
“다른 방법이라뇨?”
“그것까지는 저희도 파악하지 못했지만 놈들은 분명 방법을 찾을 겁니다. 빚더미에 앉은 자가 무슨 수를 못 쓸까요.”
이서우는 ‘빚’이라는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빚이라.’
이서우는 김명국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도 경험을 했으니까 말이다.
그때였다.
이서우의 전화벨이 진동했다.
“민수네. 잠시만요.”
“네.”
이서우는 통화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다.
한데, 생각보다 통화 시간이 길어지더니 10분을 넘기고서야 다시 돌아왔다.
이서우의 표정이 상당히 좋지 않았다.
“오빠, 무슨 일 있어?”
이설아가 조심스럽게 물었고, 이서우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다음 주에 동문회가 있다고 나보고 참석해 달라고 하네.”
“뭐? 동문회? 하지만…….”
이서우는 졸업을 하지 못했다.
1학년도 끝내지 못했는데 동문회에 참석하라니.
그의 말에 지금까지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은 바로 촉이 왔다.
“타이밍이 참 묘하네요. 제 생각으로는 배진성과 황재규가 손을 쓴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뻔하게 하지는 않았겠죠. 다른 사람에게 연락이 오지 않았나요?”
“맞아요. 제가 전장의 지배자라는 것을 알고 동문회를 빛내 달라고 요청이 왔다는군요.”
“원래 이 시기에 동문회를 하나요?”
“분기별로 모임을 갖는 것 같기는 한데, 끼리끼리 모임이라더군요.”
“그렇다면 확실히 그자들일 확률이 높습니다. 나가면 분명 봉변을 당할 겁니다.”
“하지만 놈들을 잡을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 말은 제가 해야 하는데, 서우 씨에게 들으니 어색하네요.”
“후후, 그런가요?”
이서우는 어떻게든 이번 일을 빨리 해결하고 싶었다.
뉴 월드를 하면서도 자꾸 고장수에 대해 신경을 쓰니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게임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져도 당황하지 않는 그였지만 현실은 달랐다.
“오빠, 설마 서우를 그 모임에 참여하라고 할 건 아니지?”
“내가 제안한 거 아냐.”
“그거나 그거나 똑같지. 지금 이 상황이 서우를 위험 속으로 가라고 만든 거나 다름없잖아.”
“누나, 내가 다른 사람의 강요에 의해 결정을 내릴 사람으로 보여?”
“그건 아니지. 하지만 설아도 생각을 해야지.”
“알아. 그래서 나도 망설여지기는 해.”
이서우는 이설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예쁜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 먹구름이 잔뜩 껴 있었다.
“난 솔직히 오빠가 거기에 안 나갔으면 좋겠어. 호랑이 입속으로 머리를 들이미는 격이니까. 하지만 난 오빠의 결정을 존중해.”
미묘하게 떨리는 음성이지만 그녀는 비교적 차분하게 말했다.
그 모습에 이서우는 더욱 힘이 났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한한 신뢰를 받는 것은 행복한 일이었다.
“제가 가지 않고 놈들을 잡는 방법이 있나요?”
“어차피 거기에 나오는 놈들은 조무래깁니다. 그놈들이 서우 씨를 잡아서 문태식에게 가야 제대로 잡을 수 있지요.”
“결국 인질이 되어야 한다는 거군요.”
“지금 상황으로는 그렇습니다. 배진성이나 황재규를 잡아봐야 문태식이 있는 곳을 모를 테니까요.”
“흠.”
이서우는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칫 잘 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니 더욱 고민이 되었다.
“만약 참여할 생각이라면 우리가 따라붙을 겁니다. 나노로봇을 주입하면 우주라도 쫓아갈 수 있으니 서우 씨를 놓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나노로봇이라고요?”
“네. 최첨단 기술로 서우 씨의 상태를 나타내 줍니다. 혹시라도 심장이 멎는다면 전기충격도 가능하고, 독도 해독할 수 있지요. 30분 동안 산소를 들이마시지 않아도 나노로봇이 해결해 줍니다. 응급상황에 발 빠르게 대처할 수 있으니 서우 씨는 안전할 겁니다.”
“엄청나네요.”
“작전이 끝나면 체외로 배출시킬 수 있기 때문에 뒤처리도 깔끔하게 됩니다. 두 분께서 크게 걱정하실 일은 없는 거지요.”
이서우는 이설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김명국이 자신 있게 말을 하고 있지만 그녀는 여전히 불안감을 씻지 못했다.
하지만 피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결국 이서우는 김명국의 제안을 수락했다.
“좋습니다. 그럼 김 과장님의 작전을 믿어 보도록 하죠. 다음 주 주말이라고 하니 작전 브리핑을 준비해 주세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자를 반드시 잡겠습니다.”
“한번 믿어 보죠.”
김 과장은 은밀히 K사를 빠져나갔다.
이서우를 감시하고 있다면 적에게 발각될 염려가 있어 조심해야 했다.
이서우를 잡으려는 문태식, 그리고 그를 잡으려는 김명국.
그 사이에서 이서우는 자신의 안전을 지켜야 했다.
두 번의 위기를 경험하면서 자신감이 약간은 붙었지만 막상 동문회가 다가오니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