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9
레벨이 갑이다
239화
“이것 참,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박 대표님, 차라리 잘됐어요. 암살자 찾는다고 뒤지지 않았으면 자칫 모르고 지나갈 뻔했잖아요.”
“그건 그렇지. 암살자 덕분에(?) 이자를 찾았으니까. 하지만 고장수, 이 사람은 프로 중에 프로야. 정말 위험해.”
박기준이 다녀가고 장길수에 대해 알아보는데, 의외의 인물이 튀어나왔다.
바로 박 대표가 언급한 고장수였다.
그는 엄청난 조직의 두목으로, 살인을 밥 먹듯이 하던 자였다.
국내에서는 머물 수 없어 해외로 도피했지만, 아직도 여전히 국내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을 거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였다.
“오빠, 경찰에 협조를 구하는 게 낫지 않을까?”
“경찰을 끌어들이면 분명 숨어 버릴 거야. 암살자든, 고장수든.”
“그렇긴 해도 안전이 우선이잖아.”
방송 생활을 하다 보면 여러 정보를 접하게 된다. 대부분 일과 관련된 것이지만 간혹 그 외적인 내용도 듣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고장수에 대한 것이었다.
수많은 살인을 저지른 장본인인데도 법망을 어찌나 잘 피해 다니는지 경찰들은 그를 ‘법꾸라지’라 불렀다.
갖은 협박과 살인으로 대한민국 조직을 평정한 그는 합법을 가장한 불법 사업을 진행했지만 법꾸라지의 특징은 사업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수완도 좋아서 매년 수조 원의 수익을 냈고, 조직원들의 처우를 확실히 보장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더욱 견고히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한 가지 약점이 있었는데, 바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었다.
고장수의 집안은 예순 살을 넘긴 사람이 없을 정도로 명이 짧았고, 고혈압과 당뇨 등 가족력이 있었다.
오죽했으면 그의 아버지가 제발 좀 오래 살라고 이름을 장수長壽라 지었겠는가.
어쨌든 그가 아끼고 사랑하는 아들로 인해 그는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사건은 뉴 월드로부터 시작되었다.
고장수는 손이 귀한 집안이다 보니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원하는 것은 대부분 들어주었다.
일도 하지 않고 놀기만 하는 아들에게 뉴 월드는 신세계였다.
가상현실게임박람회에서 아주 잠깐 체험한 뉴 월드에 빠져서 클로즈베타 때 무조건 참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고장수를 졸랐다.
하는 수 없이 아들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힘을 썼다.
하지만 그게 문제였다.
아들이 식물인간이 되어 버리자 고장수는 뉴 월드와 관련 있는 자들을 무차별적으로 살인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냉정하던 그가 아들이 식물인간이 되면서 무너져 버린 것이다.
그때부터 경찰은 바빠졌다. 무턱대고 살인을 저질렀다고는 하지만 쉽게 그를 잡을 수가 없었다.
엄청난 경찰 인력이 투입되었는데도 결국 고장수가 해외로 도피하는 걸 막지 못했다.
그런 배경을 알고 있는 이설아는 고장수의 등장에 걱정이 앞섰다.
“그를 지금 잡지 못하면 우리가 편하게 여행을 다닐 수 있을까? 제주도는커녕 서울도 벗어나지 못하고 불안에 떨지 않겠어?”
“그건 그렇지만…….”
이서우라고 위험한 일에 나서고 싶을까.
홍영철에게 납치를 당하면서 익사를 당할 뻔한 경험도 있고, 습격으로 피를 본 경험도 있어 게임과 현실은 너무 다르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그다.
하지만 그냥 피해 버린다면 어떻게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을까?
특히나 고장수는 규모가 큰 조직의 보스라고 하니 그를 잡지 않고 일상생활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
“뉴 월드에서는 운영권을 잃은 대형 길드들이 서우를 견제하고 있고, 현실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암살자에게 표적이 된 것도 모자라 고장수까지 노리다니.”
“뉴 월드에서는 대륙이 시끄러워서 황제와 그를 따르는 대귀족들이 이서우를 의지하고 있는 상황인데, 이런 일까지 닥치다니…….”
박 대표와 김소연은 안타까운 얼굴로 이서우를 바라보았다.
일이 터질 때는 한꺼번에 터진다는 말이 있는데, 지금 이서우의 상황이 딱 그랬다.
쉽지 않은 상황이지만 해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누구도 쉽게 그 이야기를 꺼내지 못할 뿐이다.
가장 연장자인 박 대표가 총대를 메고 이서우에게 말했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뉴 월드에 집중하는 게 어때?”
“저더러 감옥과 같은 생활을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잠시 소나기를 피하자는 뜻이야. 어차피 대륙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잖아. 이번 기회에 집중해서 빨리 끝내 버리면 널 노리는 자들도 안달이 나서 무리한 행동을 하겠지. 그때 뒤를 밟는 게 더 낫지 않아?”
“오빠, 박 대표님의 말씀도 일리는 있어.”
“나도 박 대표님의 생각에 찬성!”
이서우를 제외한 세 사람이 한목소리를 내자 그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목소리에 힘을 주어 자신의 생각을 꺼내 놓았다.
“죄송하지만 전 타의에 의해 뉴 월드에 집중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렇다고 보란 듯이 대놓고 바깥출입을 하고 싶지도 않고요.”
이제 남에 의해 자신의 삶이 침해받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침대에서 5년 동안 식물인간으로 살아왔다.
자신의 선택이었지만 위험하다는 것을 속이고 테스트를 받은 것이어서 분노가 일었다.
깨어난 이후 이서우는 두 번 다시 타인에 의해 인생을 방해받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식물인간으로 지낼 때와 똑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타인에 의해 모든 생활이 바뀐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았다.
당장 뚜렷한 해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범죄자들에게 질질 끌려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상황은 하루 만에 바뀌고 만다.
다음 날 박 대표, 김소연과 함께 30대 중반의 훤칠한 사내가 이서우에게 찾아왔다.
“안녕하십니까. 특수수사대 과장 김명국입니다.”
“특수수사대 과장이라고요?”
“네.”
이서우는 특수사사대 과장이 왜 여기에 있냐는 표정으로 박 대표와 김소연을 쳐다보았다.
“서우…….”
“그건 제가 설명드리죠. 전 고장수 수사를 진두지휘하고 있습니다. 한데, 최근 서우 씨와 접촉하기 위해 고장수 조직의 2인자라고 할 수 있는 문태식이 국내로 들어왔습니다.”
“그가 왜 저와 접촉을 한다는 건지 모르겠군요.”
“모르지 않으실 텐데요?”
김명국과 이서우의 뜨거운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이서우는 왜 그걸 나에게 와서 묻느냐는 얼굴이었고, 김명국은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시치미를 떼시는군요라는 의미가 담긴 표정이었다.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실 거라면 전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박 대표님, 한 번 더 약속 없이 누군가가 제 영역에 침범한다면 전 따로 집을 구해서 일을 하겠습니다.”
“이거, 죄송합니다. 제가 박 대표님께 사정해서 이 자리를 부탁한 것이니 너그럽게 이해해 주십시오.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
“다음부터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은데요?”
약속도 없이 방문한 것도 싫지만 김명국의 고압적인 태도가 더 싫었다.
그의 아버지가 홀로 글로벌사와 싸우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제 속을 다 보여 드리죠. 정 회장님이 당신에게 접근했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요?”
이서우는 속으로 살짝 놀랐다. 정 회장과의 접촉을 언급한다는 것은 그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이서우의 모습은 여전히 태연했다.
“정 회장이 손자를 위해 접근했듯 고장수도 아들을 위해 접근할 겁니다.”
“저는 약속 없이 사람을 만나지 않습니다.”
“이거 제가 제대로 찍혔군요. 이럴 줄 알았으면 동생의 말을 들을 걸 그랬습니다.”
“오빠, 사적인 관계는 배제하기로 했잖아!”
“오빠?”
이서우는 김소연을 쳐다보았다. 대체 무슨 일인지 속 시원하게 설명을 해 달라는 뜻이다.
“미안해. 우리 오빠야.”
“친오빠?”
“응.”
이서우는 김소연과 김명국을 번갈아 가며 공통점이 있나 찾아보았다. 남매라면 닮은 구석이 있어야 하는데, 두 사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굳이 비슷한 점을 찾자면 김소연은 예쁘고, 김명국은 잘 생겼다는 정도?
“설마 누나가 공과 사를 구분 못 했을 리 없고, 어떻게 된 거야?”
이서우의 말에 김명국의 눈빛이 반짝였다.
누군가를 믿고 신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데, 이서우는 김소연에 대한 믿음이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원래 서로 교류를 거의 안 하는데, 어제 뜬금없이 연락이 왔더라고. 그래서 만났는데 고장수 이야기를 하지 뭐야. 오랫동안 뒤쫓고 있었는데 기회가 왔다고. 난 분명 널 만나려면 제대로 절차를 밟으라고 했는데, 경찰청장님이 박 대표님께 연락을 해서 어쩔 수가 없었어.”
“힘을 썼다는 뜻이야?”
“아, 그건 내가 실수한 거야. 고장수가 워낙 악랄한 짓을 저질러서 경찰들뿐 아니라 국민들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어찌나 한탄을 하던지 어쩔 수가 없었어.”
박 대표는 전날 저녁 늦게 받은 경찰청장의 전화를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청장님도 어쩔 수가 없었을 겁니다. 아직은 문태식이 국내에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극소수지만, 훗날 알려지게 되면 잡아들이지 않고 뭘 했냐는 질타가 이어질 테니까요.”
“그건 제 알 바가 아니군요. 어쨌든 소연 누나를 봐서 고압적인 태도를 보인 것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가기로 하죠. 하지만 다시 한 번 그런 식으로 대화를 주도하려 한다면 전 바로 돌아서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김명국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한 발 물러섰다.
특수수사대 과장은 엄청난 힘을 가진 자리다.
검찰이 휘두르던 수사권이 일정부분 경찰에게로 넘어오면서 특수수사대가 생겼다.
검찰이나 경찰들의 비리를 주로 수사하는 곳이었는데,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법에 따라 심판을 하는 곳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경찰 조직에 속하지만 경찰총장도 어찌할 수 없는 조직.
그래서 다들 그들을 ‘저승사자’라 불렀다.
엘리트 집단으로 구성이 되어 있어 실적도 좋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 것이 바로 김명국이었다.
김소연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녀보다 더 천재성을 띠고 있는 것이 김명국이어서 30대 중반의 나이로 과장이 될 수 있었다.
능력을 인정받은 김명국은 국내 주요한 사건 중에서도 가장 이슈가 되는 사건을 맡았는데, 그게 바로 고장수에 대한 것이었다.
전임 과장이 고장수에 대한 사건을 맡았지만 실패로 돌아가면서 옷을 벗었고, 그 뒤를 김명국이 이었다.
과장은 현장을 나가지 않는 게 보통이지만 특수수사대는 달랐다. 모든 일이 국내에서도 큰 이슈가 되다 보니 직접 나서서 사건을 진두지휘했다.
하지만 운이 안 좋게도 수사를 맡게 되자마자 고장수가 해외로 도피하는 바람에 체포는 할 수 없었다.
김명국은 포기하지 않고 고장수를 쫓아 조금씩 성과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 드디어 고장수 조직의 2인자가 국내로 들어왔다는 것을 알아냈다.
김명국은 다시없는 기회로 여기고 수사에 총력을 기울였고, 이서우에게 접촉할 거라는 정보까지 얻어 낼 수 있었다.
그렇게 김명국은 이서우의 앞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김명국은 수사가 쉽게 진행될 것이라 자신했다. 특수수사대의 이름을 들으면 웬만해서는 다 협조를 한다.
한데, 이서우를 만나고 보니 만만치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자존심이 아니라 성과를 내야 하는 시점이다.
김명국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나도 권력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나 보군.’
김명국은 확고한 의지를 담은 이서우의 눈빛을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꽤 사람이 괜찮네.’
김소연의 핑계를 댔지만 김명국의 무례를 넘어가겠다고 한 것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태도 때문이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무례에 대한 행동을 그냥 넘어가줄 만큼 이서우는 마음이 착하지 않았다.
“이제야 대화를 나눌 조건이 갖춰졌네요. 이왕 발걸음을 하셨으니 왜 절 찾았는지 자세히 들어 보죠.”
“그러죠.”
이서우의 허락에 박 대표와 김소연이 안도했고, 이설아도 밝은 표정이었다.
자리를 옮긴 다섯 사람은 원탁에 둘러 앉아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 * *
“부회장님, 아니, 형님.”
“무슨 일인데 그리 급히 나를 찾은 것이냐?”
문태식은 주먹을 쓰는 일을 좋아한다. 양복을 입고 폼을 잡는 자들을 좋아하지 않아 고장수가 없을 때는 형님으로 부르라고 명령했다.
고장수도 문태식이 어떤 성격인지 알지만 시대에 발맞춰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회장이라는 말을 고집했다.
사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름이 아니라 특수수사대 김명국 과장이 움직였습니다.”
“김 과장이?”
“네. 어찌할까요?”
“독종이 나섰군. 돈 싫다는 놈 없는 세상인데, 참 별종이란 말이야. 일단 우리가 직접 나선 일이 아니니 조용히 지켜봐.”
“그러고 싶은데, 조금 전에 김과장이 K사로 들어갔습니다.”
“뭐? 이 새끼야, 그렇게 중요한 일은 진즉 말했어야지!”
퍽!
문태식은 어디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듯 조소를 머금고 있다가 이어진 사내의 말에 화가 나서 발로 사내의 복부를 차 버렸다.
명치를 정확히 맞은 사내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무릎을 꿇어야 했다.
“특수수사대에 꽂아 놓은 놈 있지?”
“……네, 이, 있습니다.”
숨을 못 쉴 지경이지만 즉답을 하지 않으면 더 큰 고통이 온다는 것을 알기에 사내는 쥐어짜 내듯 대답했다.
“놈들의 행동을 지켜보고 어떻게 할지 결정한다. 일단은 그놈에게 맡겨 뒀으니 당분간은 구경이나 해.”
“네, 혀, 형님.”
문태식은 어떤 일이 있어도 이번 일을 제대로 해내야 했다. 다른 일은 몰라도 고장수의 아들과 관련된 일은 절대로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기 때문에 무조건 성공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무턱대고 나설 수는 없어 일단은 홍영철을 이용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돈을 쓴 만큼 보람이 있어야 할 텐데. 뭐, 영 시원찮으면 지우면 되니까.’
문태식의 눈빛에 살기가 맺혔다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