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8
레벨이 갑이다
218화
이서우가 자리에 앉아 있으니 노래와 악기 연주는 계속되었다.
황금 테이블에 손도 대지 않은 음식이 그대로 있어 하인들은 계속 이서우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20분이 지나도 쿠아노 후작이 나타나지 않자 이서우는 속으로 ‘어색하게 만들어서 사람을 죽이려 하나.’라는 의심마저 들었다.
그렇게 5분쯤 더 지났을까.
드디어 쿠아노 후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 그럼 가지.”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태연하게 행동하자 이서우도 별다른 대꾸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사라졌지만 연회는 조금 더 이어진 뒤에야 멈췄다.
‘불쌍하다, 불쌍해. 주인 잘못 만나서 뭔 고생이람.’
단 두 사람을 위해 수십 명의 사람이 고생을 했다.
짧은 시간 연회를 준비해야 해서 실제로는 더 많은 인원이 투입되었으리라.
연회장을 나가서 한참을 걸었지만 기사들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기사들이 꽤 멀리 떨어져 있나 보네.”
“엘사둔의 첩자가 있을지도 몰라 비밀 장소에서 훈련을 하고 있는 것뿐이라네. 이제 다 왔으니 조금만 참아 주게.”
후작성의 규모에 비하면 10분 정도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다.
하지만 기사란 자고로 자신들이 섬기는 주군을 위해 언제, 어디서든 신속히 나타나야 해서 가까이에 있는 게 보통이다.
‘함정에 빠뜨려서 날 제거하려는 건가.’
걸리적거리는 존재를 처치하기 위해서는 수행기사 하나 없는 지금이 기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서우는 걱정하거나 염려하는 모습이 전혀 없었다.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듯 앞만 보며 성큼성큼 걸었다.
“다 왔네.”
“…….”
투박한 통나무 문을 보며 이서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사들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정녕 함정이 맞다는 건가. 그러기에는 너무 허술하고. 대체 꿍꿍이속이 뭐지?’
이서우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기사들이 훈련 중이라면 문 안쪽에서 많은 기운들이 느껴져야 한다.
한데, 어찌 된 일인지 단 한 명의 기운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그마저도 그리 강한 기운이 아니어서 더욱 의아했다.
혹시 멀리 기사들을 숨겨 두고 함정에 빠트리려는 게 아닌지 면밀히 검토했지만 전혀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쿠아노 후작이 다가가자 문이 저절로 열렸다.
마법이 걸려 있는 것인지 꽤 커다란 문이었는데도 아무론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은빛 갑옷은 입은 사내가 후작을 맞이했다.
“후작 각하를 뵙습니다.”
“바쁜데 귀찮게 하는 건 아닌가 모르겠구먼.”
“오히려 영광입니다.”
“인사하게. 이쪽은 은빛기사단 단장이네.”
“카이젠 수호기사다.”
“당신이 그 유명한 수호기사군. 나곤이다.”
쿠아노에게도 하대를 했으니 그 이하급은 모두 하대를 하는 게 어색하지 않아 이서우는 처음 모습은 유지했다.
나곤은 40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강직한 인상이었지만 이서우가 생각했던 것만큼 강한 기운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내가 너무 강해진 건가.’
황제를 위해 치료제를 만들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이제는 몰디나와 아리아가 힘을 합친다고 해도 어렵지 않게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래, 이제 내가 걱정해야 하는 건 리치 킹과 블랙드래곤이야. 대귀족들은 내 상대가 안 돼.’
혹시나 함정을 만들어 공격할까 봐 신경을 썼는데, 나곤을 보니 모든 걱정이 눈 녹듯 사라졌다.
“기사 단장이나 소개해 주려고 날 이곳으로 데려온 건가?”
“대련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주려고 부른 걸세.”
“대련?”
“나곤 단장이 수호기사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하더군.”
“그랜드 소드 마스터급에도 오르지 못한 자와 대련을 하라는 건가?”
이서우는 살짝 기분 나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봐도 자신과 대련을 펼칠 만큼 강하지 않았다.
지도 대련이라면 몰라도 말이다.
그래서 이서우는 피식 웃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뭐, 지도 대련이라면 너그럽게 수락하지.”
“…….”
나곤의 표정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쿠아노 후작이 없었다면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공격을 펼쳤을 것이다.
“그럼 수락한 것으로 알겠네. 각자 자리를 잡게.”
쿠아노 후작의 말이 떨어지자 나곤은 못 이기는 척 거대한 실내훈련장의 중앙으로 갔다.
이서우도 그와 5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마주보고 섰다.
‘내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려는 수작이군. 실력을 보고 어느 정도 대비를 해야 할지 판단하려는 것 같은데, 욕심 따위는 아예 못 내도록 만들어 주지.’
나곤은 1미터가 넘는 장검을 뽑아 들었고, 이서우는 뒷짐을 쥔 채 그런 나곤을 바라보았다.
“무기를 뽑아라.”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말이야.”
“자만심에 가득 찬 수호기사라니. 통탄한 일이군.”
“은빛기사단은 입으로 싸우나?”
“자자, 내가 신호를 할 테니 으르렁거리지들 말게. 준비 됐나?”
“네. 후작 각하.”
나곤과 달리 이서우는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다.
쿠아노 후작은 약간 거리를 두고는 나곤과 이서우를 차례로 쳐다보며 힘주어 말했다.
“시작!”
쿠아노 후작의 시작 소리와 함께 이서우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서우는 단 한 수로 나곤을 무력화시킬 생각으로 초월 가속을 시전했다.
가속화보다 무려 5배나 강해진 필살기였다.
초월가속이 시전되자 모든 것이 느려졌다.
‘정말 환상적이네. 마치 나만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기분이야.’
이서우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크헉!”
나곤이 5미터나 날아가 바닥에 볼썽사납게 널브러졌다.
시작을 외친 쿠아노 후작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이 빠질 것처럼 크게 뜨고는 쓰러진 나단과 이서우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입을 어찌나 크게 벌리고 있었는지 턱이 빠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다음엔 한 수라도 제대로 받을 정도의 실력을 키우도록.”
저벅, 저벅.
몸을 돌려 쿠아노 후작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때까지도 쿠아노 후작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가까이 다가간 이서우는 쿠아노 후작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너무 그리 놀라지 마. 죽지는 않았으니까. 그럼 다음에 보자고.”
나곤이 떡실신이 되어 있는 상황이어서 더 이상 쿠아노 후작의 의중을 파악하기는 힘들었다.
머물러 있어 봐야 쿠아노 후작에게서 얻을 게 없었기 때문에 이서우는 가속화를 사용해 후작 성을 빠져나왔다.
‘조금 더 떠볼 걸 그랬나. 아냐, 그정도밖에 안 되는 인물이었다면 반황제파를 결집시키지는 못했을 거야. 뭐, 리치킹과 블랙드래곤을 처치할 동안만 조용하면 되니 이 정도에서 빠져도 되겠지.’
쿠아노 후작과 대화를 하면서 물증을 잡기는 힘들 것이라 파악하고 당분간 욕심을 부리지 못하도록 확실히 조치를 취했다.
단 한 수였지만 워낙 강렬해서 쿠아노 후작은 대책을 마련할 때까지 조용히 지낼 것이다.
‘퀘스트를 완료하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쿠아노 후작을 따르는 귀족들 사이에 분열은 조장할 수 있어. 이제 알아서 증거를 내놓도록 기다리기만 하면 돼.’
쿠아노 후작은 분명 다곤과의 일을 숨기려 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비밀이 없듯 소문이 퍼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물론 떠들썩하게 소문이 나지는 않겠지만 오늘 이서우가 펼친 활약에 대해서는 알음알음 기사들에게 전달이 될 것이다.
그렇게만 되어도 반황제파 귀족들은 몸을 사릴 것이기에 시간은 충분히 벌 수 있었다.
‘쿠아노 후작의 일은 조금 더 여유가 있으니 일단은 란셀 님을 찾으면서 언데드들을 처치하자. 그러면 리치 킹에게로 자연스럽게 연결될 거야.’
이서우는 곧장 개척자 도시에 있는 저택으로 가서 이설아와 합류했다. 한데, 이설아의 곁에 낯선 사람이 있었다.
* * *
“후작 각하, 제가 그자를 너무 쉽게 봤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오?”
“죄송하지만 저도 그자의 움직임을 보지 못했습니다.”
“나곤이야 그렇다 쳐도, 설마 자네도 보지 못했단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나곤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해 바닥에 그대로 쓰러져 있었고, 그 곁에 후작과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내가 있었다.
쿠아노 후작은 나곤을 기사 단장으로 소개했지만 사실은 그가 바로 은빛기사단의 진짜 단장인 토첸이었다.
쿠아노 후작은 이서우를 20분 동안 기다리게 하면서 토첸과 한 가지 계획을 세웠다.
대련을 유도해 이서우의 진짜 실력을 보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토첸이 직접 나서지 않고, 부단장을 내세워 조금 더 확실히 이서우를 관찰하고 싶었다.
그가 나서지 않은 것은 만약 이서우의 실력이 감당할 수준이 된다면 은빛기사단을 움직여 즉시 제거하면 된다.
만의 하나라도 이서우의 실력이 생각보다 강해 감당할 수준이 안 된다면 토첸이라는 실력자를 이서우는 모를 테니 훗날 격돌을 할 때 유리했다.
이번 계획을 세우면서 쿠아노 후작이 신경을 쓴 것은 바로 이서우가 토첸 단장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 장소를 정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마법이 걸려 있어 토첸이 머무는 곳은 기운이 퍼져 나가지 않았다.
안에서 밖의 상황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는 장점도 있어 굳이 이곳을 선택한 것이었다.
“은빛기사단이 모두 동원되면 그자를 어느 정도 묶어 둘 수 있소?”
“단 1분도 묶어 둘 수 없습니다.”
“그, 그게 말이 되는 소리요?”
쿠아노 후작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이 바로 은빛기사단이다.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고 쏟아부었는데, 한 사람을 단 1분도 잡아두지 못하다니.
“저도 그의 단 한 수를 버틸 수 없는데, 어떻게 기사들이 그를 붙잡아둘 수 있겠습니까. 죄송합니다.”
“허허, 어찌 그런.”
“아무래도 시기를 조금 늦추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반다이젠 후작이 곧 카이젠을 쳐들어올 거라는 걸 잊은 건가? 제국이 어수선할 때가 아니라면 힘들어.”
“하지만 은빛기사단 전원에, 수만의 병사들까지 다 덤벼도 그 자를 오래 붙잡아 둘 수 없습니다.”
“그 정도란 말인가.”
“저 혼자서도 1만 명의 병사들을 상대할 수 있습니다. 치고 빠지면 훨씬 많은 숫자를 감당할 수 있지요. 그건 후작각하께서도 잘 알지 않습니까.”
“알지. 내가 자네의 실력을 왜 모르겠나. 알기 때문에 자네를 부른 게 아닌가.”
“그런 제가 한 수를 버티지 못하는데 어찌 병사들이 그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토첸은 어떻게든 쿠아노 후작의 생각을 돌리기 위해 간절하게 호소했다.
하지만 쿠아노 후작은 반다이젠 후작이 제국을 공격할 때가 아니라면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고 여겼다.
“기회가 왔는데 움직이지 않는다면 과연 다른 귀족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그들을 설득해야합니다.”
“설득이 되지 않을 것이네. 날 겁쟁이로 생각하겠지. 그렇게 되면 거사도 치르지 못하고, 나의 입지도 좁아질 것이야. 그것만은 막아야 하네.”
“그러면 반다이젠 후작에게 조금 더 공격을 늦추라고 하시는 게 어떨까요?”
“복수에 눈이 먼 녀석이 과연 내 말을 듣겠나.”
“리치 킹에 대해 언급하면 됩니다. 리치 킹이 곧 카이젠 제국을 넘볼 것 같으니 그때 치라고 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리치 킹과 카이젠 제국이 서로 싸우면서 힘이 약화될 때를 노린다라…….”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던 쿠아노 후작의 표정이 약간이지만 밝아졌다.
쿠아노 후작은 카이젠 제국을 삼키기 위해 엘사둔 제국의 반다이젠 후작과 접촉했다.
막대한 돈을 요구한 반다이젠 후작이지만 카이젠 제국만 얻을 수 있다면 그깟 돈은 얼마든지 줄 수 있었다.
“반다이젠 후작도 바보가 아닌 이상 수긍을 할 겁니다.”
“그렇겠지. 리치 킹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카이젠을 먹으려 하지는 않을 거야.”
“맞습니다. 자칫 카이젠을 얻고도 리치 킹 때문에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요.”
“좋아. 그러면 그 방법으로 가닥을 잡지. 하지만 리치 킹의 존재에 대해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해.”
“그 점은 제게 맡겨 주십시오. 하지만 다른 귀족들에게 계획이 늦어진데 대해 어느 정도 보상은 줘야 할 겁니다.”
“그렇겠지. 아무리 반다이젠 후작이 계획을 늦춰서 일이 미뤄졌다고 해도 워낙 욕심이 많은 자들이니 불만이 쉽게 가라앉지는 않을 거야. 뭐,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자넨 리치 킹에 대한 확실한 증거나 찾아오게.”
“네. 후작 각하.”
토첸은 쿠아노 후작을 주인으로 모시기 위해 이곳으로 오지 않았다.
그는 공작이 되는 것이 목표였고, 그를 위해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
누구를 이용할까, 고민하는데 쿠아노 후작이 찾아왔고 그는 그의 손을 잡았다.
한데, 느닷없이 이서우라는 장벽이 나타났다.
하지만 토첸은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아직 게임이 끝난 게 아냐. 넌 반드시 이번 일을 후회하게 될 거야.’
‘이번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공작은커녕 백작의 작위도 힘들어.’
쿠아노 후작도, 토첸도 강한 의욕을 무장한 채 각자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의 욕망을 이루겠다는 다짐을 안고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