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
레벨이 갑이다
193화
“좋은 아침.”
“오빠도 좋은 아침!”
“참 오빠, 박 대표님이 우리가 잠시 쉴 호텔을 알아 두셨대.”
“그래?”
“응. 인테리어 마칠 동안 거기서 지내면 된대.”
“잘됐네. 이벤트 끝나고 가면 되겠네.”
“응. 나도 그게 좋을 것 같아.”
박 대표는 두 사람을 위해 골든 타워에서도 가장 좋은 방을 렌트해 뒀다.
게다가 접속 베드까지 완벽하게 준비를 해 놔서 두 사람이 지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200평이 넘으니 둘이서 지내기에도 좋고 말이다.
공사는 이주일이면 끝나기 때문에 그리 오래 비우지 않아도 된다.
아침 운동과 샤워를 끝내고 나오는데, 박 대표가 급히 들어왔다.
“서우 씨!”
“박 대표님?”
“서우 씨, 지금 어떤 분이 서우 씨를 뵙고 싶다고 왔어요..”
“네?”
이서우는 의아한 표정으로 박 대표를 바라보았다.
대체 누가 찾아왔단 말인가.
이서우를 찾아올 사람은 부모님과 친구들밖에 없다.
한데, 그가 아는 사람들이 찾아왔다면 박 대표가 그 소식을 전하러 이렇게 급히 올 필요가 없었다.
“혹시 정오균 회장님을 알고 있나요?”
“정오균 회장이라면 그 재계에서 두 번째로 잘나간다는…….”
“알고 있네요. 그분이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연락이 왔어요.”
“이곳으로요? 이상하네. 전 약속을 한 적이 없는데요.”
“약속을 한 적이 없다고요? 한데, 약속이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던데.”
“전 약속한 적 없습니다.”
“그래도 한번 만나 보세요. 그분은 쉽게 만나 뵐 수 있는 분이 아니니까.”
“볼일도 없는데, 만나서 무슨 대화를 하겠어요. 어색하기만 하지.”
“날 봐서라도 한 번 만나봐 주세요.”
“흠.”
박 대표의 부탁에 이서우는 잠시 고민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는 박대표의 말이어서 쉽게 거절하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박 대표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만나는 볼게요. 하지만 오랜 시간을 할애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고마워요.”
박 대표는 활짝 웃어 보였다.
그가 이토록 이서우에게 간절히 부탁하는 이유가 있었다.
박 대표는 정오균에게 전화가 왔을 때를 떠올렸다.
-박 대표, 날세, 정 회장.
“네? 정 회장님이 어떻게…….”
-요즘 잘나간다지?
“아닙니다. 저야 회장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런 말 말게. 중국과 인도 시장이 열리면서 탄탄대로라는 걸 다 알고 있네.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자네가 사람 보는 안목은 있었지. 다 자네 복 아니겠나.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박 대표는 갑자기 전화가 와서 칭찬을 하기에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의아했다.
그 이유는 곧 드러났다.
-참, 자네에게 이렇게 전화한 건 이서우라는 아이 때문이네.
“서우 씨요?”
박 대표는 이서우의 이름이 나오자 목소리가 절로 높아졌다.
정 회장이 이서우에게 왜 관심을 갖는단 말인가.
-그렇다네. 그 아이를 만나서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지금 그쪽으로 갈 테니 자네가 잘 좀 말해 주게.
“하지만…….”
-자네에게 뭔가 바라고 도와준 일은 아니지만 그 옛날의 일을 기억해 주게.
“그때의 일은 늘 가슴 속에 새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서우 씨는 제가 어찌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칫 그와의 사이가 나빠질 수도 있는 일이어서…….”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네. 그저 잠시 이야기만 하면 되니 말일세. 두 사람 사이에 작은 균열도 없도록 하겠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약속해주신다면 제가 잘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고맙네. 이 은혜는 잊지 않겠네.
“아닙니다. 저야말로 회장님이 아니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오를 수 없었을 겁니다.”
박 대표의 말은 진심이었다.
과거 힘들 때 우연히 정 회장을 만나 조언을 몇 마디 들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의 그 충고 덕분에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런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돕지 않을 수 있을까.
게다가 정 회장이 직접 자신의 입으로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했다.
이런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 그렇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로 이서우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뜻이다.
물론 이서우에게 해가 되는 일이라면 박 대표도 거절했을 것이다.
‘그나저나 대체 무슨 일일까?’
조금 전 일을 떠올리던 박 대표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이서우가 허락을 해서 다행이기는 한데, 왜 정 회장 같은 사람이 그를 보려는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제가 회장님을 모시고 올 테니 서우 씨는 옷 챙겨 입고 휴게실에 있으세요.”
“네.”
아무리 약속이 안 되어 있어도 트레이닝 복을 입고 만나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렇다고 격식을 대단히 차린 것은 아니었다. 청바지에 티 차림이었으니 말이다.
이서우와 이설아가 휴게실에서 가볍게 차를 한 잔 마시고 있으니 곧 손님이 왔다.
“인사하게. 정 회장님이시네.”
“반갑습니다. 이서우입니다.”
“반가워요. 이설아라고 해요.”
“반갑네. 정오균이네. 다들 앉지.”
이서우와 이설아가 나란히 앉고, 정오균과 박 대표가 나란히 앉았다.
“사실 내 아들내미는 이 자리에 오는 걸 바라지 않았네. 그래서 소심하게 같이 와 놓고도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지. 불쑥 찾아와서 의아했을 텐데 응해 줘서 고맙네.”
“별말씀을요. 한데, 절 보자고 한 이유가 뭔가요?”
“둘은 연인 사이라고 했으니 편하게 말하겠네. 하지만 이곳에서 나온 말은 웬만하면 밖으로 유출하지는 말아 주게.”
“밖으로 유출하지는 않겠지만 어떤 이야기냐에 따라 절 도와주는 누님 한 분께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솔직한 성격이군.”
“거짓이 섞이는 순간 전 그 관계는 필요 없다고 보는 주의라서요.”
“자기 의지도 뚜렷하고.”
“칭찬 감사합니다.”
이서우는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 모습에 정오균은 흡족한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도 바쁠 테니 그럼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지. 내가 자네를 찾아온 건 내 손자 때문이네.”
“손자 때문이라고요?”
“그렇다네. 자네처럼 어나더 월드를 하다가 식물인간이 된 아이지. 정민후라고 한다네.”
“아!”
이서우는 그제야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떠올렸다.
‘이런 24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걸 잊고 있다니.’
김소연에게 식물인간이 된 사람에 대해 들었다.
하지만 부자 집안은 굳이 걱정할 필요가 없어 저소득층 가정만 집중하다 보니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이설아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쓸데없는 걱정이 재벌과 연예인 걱정이라는 걸 알기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렸던 것이다.
요즘 들어 생각할 것도 워낙 많고, 할 일은 더 많아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에 신경 쓰고 싶지는 않았다.
“혹시 알고 있나?”
“네. 저처럼 식물인간이 된 사람들이 더 있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습니다.”
“맞네. 자네나 민후 말고도 셋이 더 있다네.”
“셋이나요?”
“내가 알고 있는 것만 그렇다네. 안 대표도 중간에 글로벌사를 맡은 거라 정확히는 모른다더군.”
“대표가 모를 수도 있나요?”
“사건이 터지고 힘이 있는 자들의 가족은 글로벌사를 믿을 수 없다고 데려갔지. 모든 자료를 넘기라는 압박 때문에 사고를 당한 사람이 몇 명인지도 모른다네.”
“그렇군요. 생각보다 식물인간이 된 인원이 더 많을 수도 있다는 거네요.”
이서우는 자신과 동일한 사고를 겪고, 고통 속에서 잠들어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그들의 고통은 자네가 가장 잘 알고 있겠지.”
“…….”
이서우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그의 표정이 말하고 있었다, 식물인간으로 지냈을 때의 그 아픔을.
단지 의식을 차리지 못할 뿐,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게임 속에 갇혀서 희망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죽기보다 더 끔찍한 일이었다.
“그들이 깨어나려면 자네의 도움이 꼭 필요하네.”
“회장님의 손자가 아니라 그들인 겁니까?”
“솔직히 내 손자가 나에게는 가장 소중하네. 하지만 그들도 누군가의 자식이 아니겠나.”
누군가의 자식이라는 말에 이서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고생했을 부모님이 떠오른 것이다.
그는 운이 좋아서 깨어날 수 있었지만 게임에 갇혀 희망 없이 살아가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그들의 부모님이 떠올랐다.
“제가 정확히 뭘 해 주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몇 가지 테스트가 필요하네.”
“저보고 실험용 쥐가 되라는 건 아니시겠죠?”
“당연히 아니네! 모든 과정을 오픈하겠네. 자네가 원하는 사람들이 볼 수 있고, 영상 기록도 남길 수 있네.”
“흠.”
“거친 실험이 아니네. 병원에 가면 하는 그런 간단한 것들이라네. 채혈을 하고, 뇌파를 검사하고, 심전도를 보는 거지. 3D 신체 스캔은 자네도 알다시피 그리 위험한 게 아니지 않나.”
“어나더 월드 베타 시절 뇌 관련 테스트를 할 때도 담당자가 그런 말을 했죠.”
“이건 그때처럼 폐쇄적이지 않네. 자네 연인도, 그 누나라는 사람도, 그리고 박 대표도 언제든지 볼 수 있다네. 자네가 허락한 사람들이라면 어떤 곳도 갈 수 있고, 어떤 자료도 요청할 수가 있네. 원한다면 이곳에 테스트 룸을 꾸미겠네. 어떤가?”
정오균이 저자세로 나오자 이서우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서우가 침묵하니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긴장한 모습이었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이서우가 입을 열었다.
“설마 박 대표님 주머니를 털지는 않겠죠?”
“허허허, 이를 말인가. 모든 것은 내 주머니에서 나갈 것이네.”
“단 모든 스케줄은 저에게 맞추셔야 합니다.”
“알겠네. 자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겠네. 고맙네, 정말 고마워.”
정오균이 이서우의 손을 덥석 잡더니 눈물을 흘렸다.
지켜보던 박 대표가 놀란 눈으로 정오균 회장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냉정하던 분도 손자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니. 십대 재벌 총수들이 이 장면을 봤다면 눈을 비비며 놀라워했을 거야.’
같은 상황에서도 이서우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당신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게 아닙니다. 당신의 이용해 힘없는 사람들이 깨어날 수 있기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겁니다.’
이서우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정오균 회장이 아니라 힘없고 연약한 일반인들 때문이었다.
그들을 돕기 위해서는 뛰어난 과학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돈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정오균이라면 분명 특출난 인재들을 영입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서우가 이번 일을 받아들인 이유였다.
“그럼 언제부터 시작하면 되겠나?”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죠. 장비를 들여오면 상황보고 시간을 맞춰 보도록 하죠.”
“알았네. 박 대표 당분간 좀 도와주게. 이곳은 자네가 없으면 들어오기 힘들 것 같으니 말일세.”
“네, 회장님, 제가 당분간 모시겠습니다.”
“고맙네.”
그렇게 시한폭탄과 같은 상황이 마무리되자 금세 분위기가 훈훈해졌다.
아마 정준우가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봤다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니냐며 눈을 열심히 비볐을 것이다.
아니면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볼을 꼬집었거나.
더 심한 경우에는 비록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겠지만 속으로는 드디어 아버지가 노망이 났구나 하는 생각까지 했을지도 몰랐다.
“누가 내 욕을 하나.”
차 안에서 기다리던 정준우는 애꿎은 귀를 열심히 파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