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
레벨이 갑이다
141화
“적이다!”
이서우와 이설아는 잠깐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멀리서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오빠, 적이라는데?”
“적이라……. 이곳에서 적은 개척자 도시밖에 없는데.”
“그러게.”
“일단 한번 가 보자.”
“응.”
이서우는 소리가 들린 곳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적이라는 말에 무기까지 뽑아 들고 뛰쳐나가고 있었다.
이서우는 비교적 높은 건물이 있는 곳으로 갔다.
사람들끼리 뒤섞여 싸우는 모습이 보였다.
-오빠, 우리 편이 아닌 것 같은데?
-맞아. 조세프 백작의 병력은 절대 아냐.
-그럼 누굴까?
-아마 주변 종속자 중 하나가 병력을 보낸 거겠지. 이쪽은 종속자 셋이 사라졌으니 다른 종속자가 노릴 만도 하지.
-그러면 당분간 이놈들이 개척자 마을을 건드리지는 않겠네?
-욕심이 많은 놈들이니 어떻게 될지 모르지. 아, 설마……!
-오빠?
-아, 아까 들어갔던 마차, 그게 인근 종속자들을 견제하기 위한 건가 싶어서.
-우리가 아니라 종속자를?
-그럴 가능성도 있어. 아무래도 조금 더 살펴봐야겠어. 만약 종속자를 견제하거나 그들을 처리하기 위해서라면 오히려 우리에게 기회겠지.
-빈집 털이?
-그렇지! 싹 빠져나갔을 때 털어 버리면 아마 분해서 한동안 잠이 안 올걸?
이서우는 대규모 전투를 보면서 얻은 정보를 하나씩 짜 맞추었다.
어떻게 맞춰 봐도 자신들에게 유리했다.
“야, 너희들, 촐타카 무리들이 쳐들어왔는데 거기 숨어서 쥐새끼처럼 있을 거야?”
“이미 승자가 누군지 뻔히 보이는데 뭐 하러. 귀찮아.”
“주인님을 섬기는 자들이 아니구나. 너희 같은 놈들 때문에 이 도시가 점점 시끄러워지는 거야. 기회주의자 같으니.”
지붕에 올라가 있는 이서우와 이설아에게 독설을 날린 사내는 무기를 치켜든 채 전투가 벌어지는 곳을 달려갔다.
지금 현재의 전투 상황은 막상막하지만 계속해서 도시에서 무기를 들고 나가는 사람들이 있어 승패는 불 보듯 뻔했다.
그래서 이서우는 사내의 말에도 당황하지 않고 대꾸를 할 수 있었다.
“일단 오늘은 여기서 머무르자.”
“여기서?”
“언제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 모르니 여기 있는 게 나아. 그리고 새벽에 살짝 동향도 살피고.”
“근데, 쉴 곳이 있을까?”
“이것저것 다 있으니 잘 곳도 있겠지.”
이서우는 미리 방을 잡아두기 위해 주변을 살폈다.
아직도 싸움이 진행이 되고 있어 마을은 비교적 한산했다.
사람들이 없으니 건물의 모습이 더욱 눈에 잘 들어왔다.
“예쁘게 잘 지어는 놨네.”
“응. 중세시대로 온 것 같은 느낌이야.”
“이제 보니 지붕이 다 주황빛이네.”
“그러네. 마치 마을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체스키를 보는 것 같아.”
“아, 나도 본 적이 있어. 그러고 보니 진짜 그러네. 부수기에는 아까운데?”
“여기서는 이런 게 흔한 거니까 괜찮아.”
“하긴, 아마 한 달이면 이런 마을이 뚝딱 생겨날걸.”
“그러니까.”
건물들을 보며 대화를 나누는 사이 그들은 숙박 시설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의외로 여러 곳이 있었는데, 대부분 바와 함께 잠자리도 제공하고 있었다.
“하룻밤 머물고 싶소만.”
“다들 싸우러 갔는데, 자네는 반대로 휴식을 취하려는구먼.”
“승패가 정해진 싸움만큼 싱거운 건 없지.”
“뭐, 그것도 그렇지. 촐타카의 무리들이 아무리 설쳐 봤자 제스터 님이 계신 곳은 끄떡없지, 암.”
“힘의 차이가 뻔한 데도 촐타카의 무리들이 멍청하게 쳐들어왔다는 거군.”
“간을 보는 거겠지.”
“고작 간이나 보기 위해 그렇게 희생한다고?”
“저건 희생도 아니지. 혹시 어디 산골에서 왔나?”
“그건 왜 묻지?”
주인장으로 보이는 중년 사내의 말에 이서우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다들 말이 거칠고 존대 같은 건 없기에 이서우도 거리낌 없이 대화를 이어 갔다.
주인장도 오히려 그게 당연하다는 반응이어서 이서우는 더욱 당당히 행동했고, 개인적인 질문을 하기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주인장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헛기침을 하며 얼른 이서우를 진정시키려 했다.
“험, 험. 당연한 걸 물어서 그런 거라네.”
“수련 성과를 보고 싶어서 묻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
“아, 아닐세. 그나저나 어떤 방에 머물 텐가.”
“최고로 좋은 방으로.”
“30골드라네.”
이서우는 골드를 툭 던졌다.
그러자 주인이 받아 들고는 방을 안내해 주었다.
주인이 나가고 나자 이설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와, 오빠 박력 있다. 난 싸움 나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니까.”
“여긴 아무래도 힘의 논리가 적용되는 곳 같아서 세게 나간 거지.”
“다행히 효과가 제대로네.”
“종속자들 자체가 이미 힘으로 그 자리에 오른 거니 효과가 있을 수밖에.”
힘의 논리가 적용되는 곳이면 이서우만큼 적응하기 편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오빠.”
“왜?”
“근데, 침대가 하난데?”
“그, 그러네.”
이설아의 말처럼 가운데 킹사이즈 침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지금도 같이 누워 있어 특별할 건 없지만 장소가 장소니 만큼 신경이 쓰였다.
이설아는 얼굴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모습이었다.
“어차피 새벽에 주변을 살피려면 제대로 자지도 못해. 그리고 뉴 월드는…….”
“아, 그렇지. 그럼 그냥 지금처럼 같이 누워서 쉬면 되겠네.”
이설아는 이서우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얼른 끼어들었다.
뉴 월드에서는 잠자리가 불가능하다.
키스를 하고, 포옹을 하는 것은 마음대로 되지만 성관계는 금지하고 있었다.
그걸 알고 있기에 이서우는 어차피 관계가 안 되니 그냥 누워서 쉬면 된다는 말을 하려 한 것이다.
이설아는 이서우가 그 말을 할까 봐 부끄러워서 얼른 선수를 친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것이 있었다.
아, 아, 조금만 더, 아!
편하게 쉬고 있는데 갑자기 옆방에서 여성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
“…….”
두 사람은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굳어지고 말았다.
그렇다. 유저들끼리는 관계가 되지 않지만 NPC들은 예외였다.
물론 유저와 NPC들도 관계를 할 수 없다. 하지만 이곳을 살아가는 NPC들은 현실에서처럼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이쪽은 죄다 스위트 룸인가 보네. 방을 잘못 골랐나.’
NPC도 연인끼리는 좋은 방을 원할 거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게임에서는 관계가 되지 않으니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인데, 주변에 자신들 말고는 전부 NPC라는 것을 잊고 말았다.
“오, 오빠. 나 좀 씻고 올게.”
“어? 어, 그래.”
이설아는 얼른 샤워실로 들어갔다.
유저는 화장실을 갈 필요도 없고, 씻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씻는 게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놈, 그거 정력도 좋네. 빨리 좀 끝내지 뻘쭘하게.”
이설아는 목욕을 하는지 1시간 동안 나오지 않았고, 신음소리는 갈수록 커지기만 하지 줄어들지는 않았다.
한데, 더 뻘쭘한 상황이 벌어졌다.
지금쯤이면 끝났겠지 싶어 젖은 머리로 나온 이설아를 보니 그렇게 섹시할 수가 없었다.
‘헉. 이건 고문이야!’
언제 여자 친구가 가장 섹시하게 보이냐고 남자에게 묻는 다면 십 중에 팔이나 구는 막 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서우도 마찬가지였다.
촉촉하게 젖은 머리에 뽀얀 얼굴을 보고 있으니 강한 성적 욕망이 일어났다.
20대 중후반의 혈기 왕성한 청년이니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게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게다가 남도 아니고 여자 친구여서 더 그럴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서우는 이성으로 그것을 억눌렀다.
‘휴우, 현실에서 지금과 같은 상황이었으면 위험할 뻔했어.’
이서우는 충동적으로 이설아과 관계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서로 원할 때, 좋은 분위기에서 첫 관계를 하고 싶었다.
이서우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이설아도 설마 아직까지 관계가 끝나지 않았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해 당황했다.
그러고도 20분이나 더 신음 소리가 이어졌고, 여자는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지 괴성을 질렀다.
모든 상황이 종료되자 이서우가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목마른데, 맥주나 한 잔 할까?”
“응? 응. 그러자.”
두 사람은 바로 내려가 시원한 맥주를 마셨다.
그때였다.
“우리 자기 오늘 싸운다고 힘을 너무 많이 뺐나 봐. 너무 빨리 끝나서 아쉬웠어. 끝까지 싸우고 왔으면 어쩔 뻔했어.”
“백 놈 정도 처리한다고 많이 빼기는 했지. 그래도 우리 이쁜이 생각에 중간에 끊고 오느라 얼마나 인내심을 발휘했는데. 이따 새벽에 아주 뻑 가게 해 줄 테니 기대해.”
“호호호, 벌써부터 기대가 되네. 그럼 술은 한 잔만 하기!”
“난 술을 마셔야 더 오래 가.”
“그럼 마음껏 마셔!”
노출이 심한 의상을 입은 여자가 남자에게 착 달라붙어 이서우와 이설아의 옆 테이블에 앉았다.
이서우와 이설아는 더 듣고 있기가 힘든지 맥주를 원샷으로 털어 넣고는 다시 방으로 올라갔다.
“설아야, 정찰이나 좀 하고 올게.”
“새벽에 가려던 거 아니었어?”
“어? 아냐. 지금 가도 괜찮을 것 같아.”
“응. 조심해서 다녀 와.”
“금방 올 테니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연락해.”
“응.”
계속 같이 있으면 음란한 생각만 날 것 같아서 차라리 정찰을 하기로 했다.
파티 채팅이 되기 때문에 이서우는 안심하고 밖으로 나갔다.
마나를 이용하자 그의 발소리는 자취를 감추었다.
지붕과 지붕을 넘어 거대한 성으로 갔다.
‘제스터라는 종속자가 이곳을 삼켰다고 했지? 그놈도 과시욕이 강한가 보네.’
성은 생각보다 컸다. 낮에는 성에 접근할 수 없어 멀리서만 봤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규모가 엄청났다.
감시자들의 눈을 피해 깊숙이 파고들었다.
‘저건 낮에 봤던 마찬데. 왜 감시가 별로 없지? 설마…….’
이서우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최대한 조심을 하면서도 속도를 높여 마차로 접근했다.
‘역시! 설마 당장 전쟁을 하겠다는 건가?’
마차를 모두 살폈지만 무기가 하나도 없었다.
이서우는 경계가 심한 곳을 찾았다. 경계가 심하다는 건 그만큼 중요한 장소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저기군.’
횃불이 곳곳에 켜져 있었고, 경계 인력이 많은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니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흐흐흐, 드디어 절망의 벽을 넘은 놈들을 싹 정리할 수 있겠구나.”
“그렇게 좋아만 할 일이 아냐. 은밀히 움직여야 하는데, 괜히 발각되면 우리가 더 큰 낭패를 볼지도 몰라.”
“병신 같은 놈들이어서 우리가 움직이는 것도 모를걸?”
“뭐,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완전히 안심하기에는 일러.”
“걱정도 팔자다. 우리 주인님이 얼마나 정교한 분이신지 모르고 하는 소리냐?”
“알지. 그래도 매사에 조심해야 하는 법이야.”
“우리 정도 되는 규모의 병력이 몇 군데나 되는데 무슨 걱정이라고.”
이서우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한창 갑옷을 챙겨 입고 무기를 점검하는 사내들이었는데, 한 사내는 얼굴에 자신감이 가득한 반면 다른 사내는 자신감과 함께 약간의 걱정의 빛도 보였다.
‘어둠을 틈타 공격하려 했구나. 당장 공격할 것 같으니 이젠 사이먼 자작에게 알려야 해.’
이서우는 조금 더 상황을 살피고는 이설아에게로 돌아갔다.
“설아야, 서둘러 돌아가야겠다.”
“설마…….”
“맞아. 놈들이 공격 준비를 하고 있더라. 당장이라도 공격할 것 같으니 알려야 해.”
“오빠,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빠른데 괜찮을까?”
“여기만 전쟁 준비 중이라면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지만 상황을 보니 여기 말고도 더 있는 것 같아.”
“이런 곳이 또 있다고?”
“그래. 그것도 한두 군데가 아닌 것 같다는 게 내 느낌이야.”
“그럼 정말 큰일인 거네.”
“그렇지. 일단 나가자. 나가서 넌 사이먼 자작에게 이 사실을 알려. 난 놈들을 뒤쫓을 테니.”
“응.”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그곳을 빠져나갔고, 이서우는 이설아가 개척자 도시로 가는 것을 확인하고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이럴 때 자작의 신뢰를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귓말로 빠르게 전달할 수 있겠지만, 이서우와 이설아 외에는 병력을 움직일 정도로 신뢰를 받는 유저는 없었다.
그 때문에 그녀가 직접 움직이는 것이다.
이서우는 전쟁 준비로 한창인 성을 다시 찾았다.
‘뭐가 이리 빨라?’
10분도 채 안 되는 사이 벌써 준비가 끝났는지 오와 열을 맞춰 넓은 연병장에 모여 있었다.
그리고 대장으로 보이는 사내의 인솔 하에 은밀히 성을 빠져나갔다.
마을 입구가 아니라 그들이 따로 이용하는 입구여서 누구도 그들이 나가는 것을 알지 못했다.
‘마을로 들어와 보길 잘했네. 밖에서 지켜보고 있었으면 아마 놓쳤을 거야.’
이서우는 최대한 은밀히 그들을 뒤쫓았다.
* * *
“주인님, 드디어 놈이 덫에 걸려들었습니다.”
“이 모든 게 그놈 하나를 잡기 위해 짠 계획이라는 걸 놈은 절대로 모르겠지.”
“물론입니다.”
“슬라임액이 놈의 몸에는 여전히 남아 있겠지?”
“네. 놈의 위치는 확실히 파악하고 있습니다. 한데, 그놈과 같이 다니는 년이 멀어진 것을 보아 절망의 벽을 건너온 놈들에게 알리려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요?”
“어차피 목적은 그놈이다. 그놈만 처치하면 다른 놈들은 언제든 쓸어 버릴 수 있다.”
“네, 주인님.”
제스터의 확신에 찬 음성에 전투 노예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놈은 병력이 합류 지점으로 가는 줄 알 테니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뒤를 쫓아라.”
“네, 주인님!”
“흐흐흐, 덫에 걸린 녀석의 표정이 궁금하군.”
제스터는 전투 노예의 보고에 만족해하며 천천히 화려한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전투 노예의 안내에 따라 거침없이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