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레벨이 갑이다
99화
30킬로미터 지역까지는 역시 몬스터가 생각만큼 많지는 않았다.
카이젠 대륙이었다면 벌써 수천 마리 이상은 만났어야 한다.
전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힐러들이 심심해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개체 수가 적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결계와 멀어질수록 몬스터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50킬로미터쯤 왔을 때, 이서우가 말했다.
“휴우, 잠시 쉬었다 가죠.”
“……네.”
대답할 힘도 없는지 힐러들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잠시 휴식을 취하자 기력이 돌아오는지 이설아가 입을 열었다.
“여기 오크는 어째 저쪽 오우거보다 더 강하네요.”
“언니, 강한 것도 강한 거지만 수백 마리가 한꺼번에 덤벼서 혼났어요. 겨우 다 처리하면 또 덤비고, 또 덤비고……. 진짜 또 한 번 더 나왔으면 멘붕 올 뻔했어요.”
“아무래도 결계의 힘을 느끼고 약한 몬스터들은 다 멀리 벗어난 것 같아요. 하지만 곧 몬스터들이 늘어날 테니 다들 바짝 긴장하세요.”
개체 수는 적지만 몬스터가 워낙 강력해서 이서우는 주의를 주었다.
“쿨마다 스킬을 쓰니 마나가 쭉쭉 빠져서 사냥이 더 힘든 것 같아요.”
“사냥에만 들어가면 쉬지 않고 마나를 쓰니 그럴 수밖에.”
조현아의 말에 이설아도 염려가 되는지 걱정스러운 말투였다.
마나 물약에 대해 언급하자 이서우가 넌지시 말했다.
“깜빡하고 있었는데, 마나 물약 공급은 제가 할 수 있어요.”
“네? 서우 씨가요?”
“네. 사실 그거 다 제가 제조한 거예요.”
“…….”
힐러 셋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서우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머쓱해진 이서우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을 이었다.
“수수료 빼면 1골드 48실버 50브론즈인데, 개당 1골드 48실버에 제공할게요. 혹시라도 생각 있으면 말씀하세요.”
“우와, 정말이에요?”
정신을 차린 조현아가 얼른 되물었다.
혹시라도 이서우가 마음이 변해 더 비싸게 팔면 낭패였다.
“난 한번 내뱉은 말은 지킨다.”
“일단 지금 가격은 그렇게 해 주셨다가 가격 변동 추이에 따라 조정하시면 될 것 같아요. 손해 보고 파실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 조건이라면 전 무조건 살게요.”
“맞아요. 마나 물약 재료비가 꽤 비싸다고 하니 그게 당연한 것 같아요. 저도 언니와 같은 조건이라면 서우 님 물약 살게요.”
“오빠, 저도요!”
세 힐러가 동의를 하자 이서우는 미소를 지었다.
알아서 가격 변동 폭에 맞춰 값을 지불하겠다고 하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참, 한 가지 더 물어볼 게 있는데, 혹시 마나를 즉시 채워 주는 게 있다면 어떨까요?”
“네? 에이, 마나를 즉시 채워 준다고요? 물약 생산자 중에서 꽤 인지도가 있는 사람을 아는데, 그런 물약은 없을걸요.”
이설아의 말에 이서우가 파티원만 볼 수 있는 홀로그램을 실행했다.
“헛!”
“어머!”
“…….”
이서우는 최하급 마나 비약과 하급 마나 비약 모두를 보여 주었다.
다들 너무 놀라 말문이 막혀 한참이나 마나 비약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서우 씨, 전설의 물약 제조사라도 되세요?”
“네? 아뇨. 전 순수한 약초꾼입니다.”
“어머, 오빠, 약초꾼이었어요?”
“어.”
“무슨 약초꾼이 이런 물약을 만들어요? 와, 대단하시다.”
이서우는 이게 그렇게 호들갑을 떨 정도로 대단한 일인가 싶었다.
‘약초액 생산이나 연금술까지 한다고 하면 놀라 자빠지겠군.’
이서우는 물약 제조와 관련된 것 외에는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이건 최하급은 3골드 이상도 받을 수 있겠어요. 하급은 7골드나, 많게는 10골드까지도 받을 수 있을 것 같고요.”
“언니, 그렇게나 비싸게 팔릴까요?”
“랭커도 보스 몬스터나 레이드 몬스터를 잡는 데 어려움이 많아. 마나 물약에 버퍼의 도움까지 받아도 마나가 늘 부족해. 그러니 딜러들은 마나가 없어서 뒤로 빠졌다가 평화 상태에서 다시 마나를 회복하고 딜을 들어가는 거고.”
“네,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3천 가지고 10골드를 쓰는 건 좀 무리 아닐까요?”
“극딜을 들어가면 딜러들이 더 많은 마나를 쓴다는 건 알지? 탱커도 극딜 들어갈 때 어글 잡으려고 미친 듯이 마나를 쓰잖아.”
“그렇죠.”
“랭커들은 몇백, 몇천 골드 쓰는 걸 그다지 아까워하지 않아. 오히려 편하게 사냥하는 걸 원하지.”
“그건 그렇지만…….”
조현아도 중산층에 속하지만 소모품에 드는 골드는 아끼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1분에 10골드씩 쓰는 건 그녀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반대로 이설아는 이미 게임 진행자로서는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
연간 수입이 100억이 넘는다는 소문이 있으니 보스를 잡는 동안 몇백 골드를 쓰는 것 정도는 그다지 무리라고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결정적으로 그 정도 값을 매긴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마나 비약을 쓰면 레이드 몬스터를 잡을 때 인원을 줄일 수 있다는 거야. 경쟁자가 줄어드는데 몇백, 아니, 천 골드라고 아까워하겠어?”
“아!”
조현아는 그제야 이설아의 말을 제대로 이해했다.
유일 등급의 아이템이 조금씩 나오고 있다.
그래 봐야 총개수가 20개 정도지만, 조금씩 양이 늘고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20명이 잡던 레이드 몬스터를 15명으로 잡을 수 있게 되면 어떨까.
아마 1~2천 골드가 아니라 5천 골드를 써야 한다고 해도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다.
강화도 안 된 유일 중급 장비가 10억을 넘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이건 꼭 경매장을 이용해서 파세요.”
“가격이 책정되지 않아서 일단은 그렇게 해야겠네요.”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많이 만드셔야겠네요.”
“그래야죠.”
“혹시 모르니 완성되면 저에게 개당 10골드씩 100개만 주세요. 위험할 때 쓰게요.”
“그렇지 않아도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몰라서 제안하려던 참이었습니다.”
힐러들이 생존해야 이서우도 위기의 순간에 힐을 받을 수 있어 100개 정도는 팔 수 있었다.
“설마, 완성된 물량이 있어요?”
“네. 하급으로 1천 개 정도 완성이 되어 있네요.”
“와!”
성능이 좋은 물약은 제조하는 데도 시간이 꽤 걸린다.
그런데 1천 개라니.
“서우 씨는 양파 같은 사람이네요.”
“네?”
“까도 까도 뭔가 새로운 게 계속 나오잖아요, 호호호.”
“호호호,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진짜 사냥도 엄청 잘하고, 아무도 못 만드는 물약까지 척척 만들어 내고. 또 뭐가 나올지 궁금하네요.”
세 힐러는 하급 마나 비약을 개당 10골드씩 100개를 구입했다.
워낙 가격이 비싸 자주 사용할 수는 없겠지만 비약을 써서 힐 한 번을 더 해 동료를 살릴 수 있다면 10골드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 그럼 휴식도 취했으니 야간 사냥을 시작해 볼까요?”
“네!”
이서우의 제안에 힐러들은 신이 났다.
이곳까지 오면서 이서우는 1레벨을 올렸고, 그들은 무려 2레벨을 올렸다.
경험치가 좋으니 주야간 할 것 없이 풀로 사냥해도 즐거웠다.
그렇게 48시간을 꼬박 사냥하고 이서우는 다시 2레벨을 올렸고, 그들은 4레벨을 올렸다.
그때였다.
-잠시만요!
이서우가 급히 일행을 막아섰다.
-엄청난 숫자의 몬스터가 느껴져요.
힐러들은 아무리 둘러봐도 몬스터가 느껴지지 않아 이서우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천천히, 힘을 드러내지 말고 따라오세요.
-네.
숲속을 조심스럽게 지나갔다.
최대한 조심했지만 풀이 워낙 무성해 사라락 하는 소리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그렇게 거북이처럼 느리게 10분 정도를 갔을 때다.
-저, 저건…….
-어머, 어떻게 저런…….
-끄, 끔찍하네요.
세 힐러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축구장 100여 개를 합쳐 놓은 것보다 더 넓은 땅에서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일을 하는 것은 문제 될 것이 없지만 그들의 몰골이 너무나도 엉망이었다.
몬스터에게 채찍을 맞으며 노예처럼 거대한 돌들을 나르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 뭘 만들고 있는 걸까요?
-거대한 건축물 같은데요.
-피라미드 같은 걸까요?
-터를 닦고 이제 막 시작하는 것 같아 뭘 만드는지는 알 수가 없네요.
이서우도 궁금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수많은 인간들이 노예처럼 일을 하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어쩌죠?
-일단은 접속 제한에 곧 걸리니 내일 다시 만나도록 해요.
-아무래도 그게 낫겠네요.
-그럼 몇 시에 접속할까요?
-오전 9시가 괜찮겠네요. 혹시라도 그 시간에 접속을 안 하시면 참여 못 하는 것으로 알고 접속한 사람끼리 움직일 게요.
-네.
이서우의 말에 모두가 동의했다.
도움이 되지는 못할망정 자신들 때문에 다른 사람이 피해 받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였다.
조용한 곳으로 가서 접속을 종료한 이서우는 베드에서 나오며 기지개를 켰다.
“너무 몰입해서 시간이 이렇게나 지났는지도 몰랐네요.”
“그러게요. 진짜 오랜만에 즐겁게 게임한 것 같아요.”
“일단 나가죠.”
“네.”
접속 베드에서 나오니 시간이 밤 11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방송 때문에 당분간은 같이 못 하시겠네요?”
“아마 그럴 것 같아요.”
“여튼, 오늘 즐거웠어요.”
“네. 저야말로 정말 즐거웠어요.”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네, 서우 씨도요.”
이서우는 얼른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뭐, 내일 접속해 보면 알겠지. 당분간은 그 일 때문에 바쁠 것 같으니 가상공간에서 집을 알아보고 오전에 시간 내서 부모님 모시고 가 봐야겠네.’
집에 도착한 이서우는 가상공간에 접속해 ‘마당이 있는 집’이라고 검색했다.
수유동과 우이동 등 일대에는 10억 미만부터 20억까지의 집들이 보였다.
그러다가 평창동에 괜찮은 집이 보였다.
35억 정도였는데, 주차장부터 마당까지 이서우가 원하는 것이 다 있었다.
대지 183평에 건물 연면적이 62평으로, 두 분이 살기에는 다소 넓지만 편안한 노후를 보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다가 성북동에 이르렀을 때, 이서우의 눈을 확 사로잡는 집이 보였다.
‘헉, 기사에 가사 도우미까지 제공한다고? 2030년 디자인상 수상에, 최고급 친환경 재료들을 썼고, 호텔급 서비스에 보안까지 완벽하다니.’
이서우는 매매가가 얼마인지 살펴보았다.
‘역시 비싸긴 비싸네. 하지만 감당 못 할 수준은 아닌데, 아무래도 부모님이 거절하시겠지?’
160~200평형까지 있었는데, 180평대가 62억이었다.
다른 매물을 찾아보려 했지만 한번 좋은 것을 보고 나니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가 않았다.
이서우는 새벽 2시까지 검색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이서우는 오랜만에 부모님과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어머니, 아버지, 오늘부터는 집부터 보러 다니세요. 빨리 이사하려면 서둘러야죠.”
“그렇지 않아도 너희 어머니와 그 일로 이야기를 좀 했다.”
“네. 편하게 말씀하세요.”
“아무리 돈이 많이 생겨도 사람은 일을 해야 한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너에게도 해당된다.”
“네. 저도 놀고먹을 생각은 없어요.”
“그래서 차라리 집에 투자할 돈으로 접속 방을 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접속 방요?”
“그래. 네가 뉴 월드를 통해 그런 수익을 올렸다고 해서 우리도 알아봤는데 전망이 밝더구나.”
“그렇긴 하죠.”
보통 괜찮다고 하는 일은 이미 포화 상태여서 뒤늦게 뛰어들면 망하기 일쑤다.
하지만 접속 방은 그렇지 않았다.
짧은 시간 국내에 1만 개가 넘어서고 있는데도 북적북적했다.
접속 방이 미어터지는데도 사람들이 쉽게 창업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용자들이 갈수록 고급스러운 곳을 찾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상당수의 이용자들이 고급형 접속 베드를 갖춘 곳을 찾다 보니 인테리어를 비롯해 초기 비용이 20억 원 정도는 필요했다.
그것도 50대 기준이어서, 100대 이상을 놓으려면 30억은 들여야 쓸 만한 곳을 구할 수 있었다.
대당 1천만 원이 넘는 고급형 베드에 10~15대 정도는 최고급형까지 설치해야 차별화가 되어 비용이 고공 행진을 하는 것이다.
“네게 괜히 부담을 지우는 게 아닌가 걱정이지만 이왕 할 거라면 미래까지 생각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
“당연한 말씀이세요. 오히려 제가 그 점을 놓치고 있었네요. 그럼 저도 상가 건물을 알아볼게요.”
“상가 건물을 통째로 살 필요는 없다.”
“아니에요. 임대료 오르는 거 걱정하면서 가게 하시는 건 전 반대예요. 어차피 첫 월급은 부모님께 드리는 거라잖아요. 그리고 아버지 말씀처럼 이왕 할 거라면 확실한 곳을 선택하는 게 낫죠. 추가로 돈이 또 꽤 들어올 계획이니 편하게 알아보세요.”
“알았다. 그러마.”
이서우는 부모님께 제대로 된 접속 방을 만들어 드리고 싶었다.
지금부터 공사를 해서는 답이 없고, 최근 지어진 곳을 구입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지하는 주차장으로 쓰고 3층 건물 정도면 꽤 괜찮은 지역이라도 100억 선에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다.
‘그래, 이왕 해 드리는 거 제대로 해 드리자. 어차피 목걸이도 곧 팔릴 테니 돈은 모자라지 않아. 오늘 밤에는 상가 건물을 열심히 알아봐야 되나?’
이서우는 새벽까지 상가 건물을 알아볼 생각에 기분이 좋은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식사가 끝나고 8시를 조금 넘긴 시간, 예상치 못한 인물에게 전화가 왔다.
‘설아 씨가 웬일이지?’
이서우는 아침부터 의외의 인물에게 연락이 와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설아 씨.”
-서우 씨, 좋은 아침이에요.
“아, 네. 좋은 아침이에요. 한데, 무슨 일로 전화 주셨어요?”
-다름이 아니라, 저 오늘도 접속하려고요.
“네?”
-왜요? 제가 접속하는 게 싫으세요?
“그게 아니라, 방송은 어쩌시고요?”
-이벤트도 끝났고, 서우 씨가 목걸이까지 올려 버려서 이제 더 이상 대단한 아이템이 없어 생방송은 필요 없을 것 같아서 새벽까지 녹화해 뒀어요.
“대단하시네요.”
-전장의 지배자와 함께 게임하려면 이 정도 수고는 해야죠.
“못 당하겠네요. 그럼 어제 그곳에서 뵐까요?”
-오늘은 다른 곳으로 가요. 제가 봐 둔 곳이 있는데, 서우 씨 집에서 20분 정도 거리예요.
“네. 그럼 주소 보내 주세요. 8시 50분까지 나갈게요.”
-네, 그럼 그때 봬요.
이서우는 통화를 끊고 피식 웃었다.
“목소리가 여자던데, 여자 친구냐?”
“네? 아니에요. 그냥 아는 사람이에요.”
“이제는 연애도 좀 하고 그래라. 네 나이가 곧 스물여덟이다. 지금 연애를 해야 서른 살 전에 결혼을 하지.”
“엄마도 참. 여튼, 전 나가 봐야 해서 씻을게요.”
이서우는 피하듯 욕실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