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
레벨이 갑이다
75화
“이제 거의 다 온 것 같습니다.”
“제 눈에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데, 정말 놈들이 이 근처에 있다고 확신하십니까?”
“그건 아마 곧 알게 될 겁니다.”
이서우는 자신감 있게 말한 반면, 용병대장들은 불신의 빛이 역력했다.
이서우가 차분히 이동하자 10분쯤 뒤 거대한 마을이 보였다.
“저건…….”
“쉿, 여기서부터는 목소리를 낮추셔야 합니다.”
“아, 네. 죄송합니다.”
차돌풍은 설마 했는데 정말로 이서우가 도적들을 찾아내자 크게 놀랐다.
어찌나 놀랐는지 적들을 코앞에 두고 하마터면 큰 실수를 할 뻔했다.
그는 얼른 목소리에 힘을 빼며 대답했고, 자세마저 낮추었다.
“일단 이곳은 몸을 숨기기에는 좋으니 잠시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네.”
이서우의 말에 아무도 토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3시간 만에 이곳을 찾았다.
용병대장들은 곧 150레벨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벤트 이후 150 이상의 유저가 많아졌다지만, 두 용병대장의 실력도 상당했다.
의뢰를 받아야 레벨도 올리고 골드도 벌어들이니 NPC들부터 유저들까지 많이 만나고 다녔다.
하지만 이서우처럼 추적술에 능한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두 용병대장은 이서우의 등을 보며 똑같은 생각을 했다.
‘영주가 극찬을 해서 뛰어난 전투 계열의 유저인 줄 알았는데, 추적에 능한 사람이었을 줄이야. 이 정도면 어디를 가나 엄청난 대접을 받겠어.’
아마 단순히 2차 전직을 한 추적자였다면 이번 일을 실패했을 것이다.
그들이 봐도 너무 깔끔하게 흔적을 지웠으니까.
한데, 마치 모든 것을 안다는 듯 달려와 적들을 찾아냈다.
‘관찰력에 잠재력까지 더해지니 애써 찾으려 하지 않아도 보이네. 덕분에 2천 골드 이득 봤네.’
적들의 본거지를 찾아내자 이서우의 머릿속에 메시지가 울렸다.
-프랑드로부터 2,000골드를 받으셨습니다.
유저들 간에도 에스크로와 같은 시스템이 적용이 되기에 안전하게 골드를 받을 수 있었다.
백작의 영지까지 가면 또다시 2천 골드를 받는다.
어차피 가야 할 곳을 가는 것뿐인데 큰 이득을 취할 수 있으니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네? 하지만…….”
“적들의 규모를 알아야 짐을 무사히 찾을 확률이 더 높아집니다.”
“그래도…….”
“추적에 능하다는 건 몸을 숨기는 데도 능하다는 겁니다.”
“그건 그렇지만…….”
누구도 이서우의 말을 반박할 수 없었다.
괜히 그들이 따라갔다가 적들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간다.
“당신의 의도는 알겠어요. 하지만 당신이 들켜도 문제잖아요.”
“들킬 일은 절대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건 제가 스스로 몸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유세나는 이서우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듣기에는 상당히 오만한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뭐라 반박할 수 없었다.
“정찰이 끝나면 돌아오겠지만, 만약 제가 모습을 드러내면 공격할 타이밍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 늦지 마시길.”
“그러죠. 하지만 일의 실패에 따른 모든 책임은 당신께 있습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일방적인 몰아세우기는 기분 나쁘군요. 만약 결과가 좋으면 어쩌려고 그러시는지.”
말에는 책임이 따른다.
실패하면 당연히 이서우가 책임을 지겠지만,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부정적인 말을 듣는 것이 기분 좋을 리는 없었다.
“당신이 이번 일을 성공한다면 제가 얻게 될 보수는 당신께 다 드리죠.”
“후회하실 겁니다.”
“후회하고 싶군요.”
유세나는 돈 따위에는 관심 없다는 듯,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식이었다.
이서우는 그녀의 배포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흔쾌히 이번 내기를 받아들였다.
서로 동의를 하면서 단순한 내기에서 강제성을 띤 계약이 되었다.
이서우는 조용히 통나무 뒤를 벗어나 적진으로 접근했다.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그러나 치타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아무도 이서우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했다.
소식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이서우가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 너무 궁금했다.
유세나는 동료들에게 소식을 전하기 위해 살짝 뒤로 빠졌다.
함께 있던 조현아도 그녀를 따라갔다.
“언니, 괜찮겠어?”
“뭐가?”
“이번 의뢰비가 얼만지 몰라서 그래?”
“나한테 떨어지는 건 한 5천 골드쯤 되나?”
용병들은 1천 골드지만, 용병대장은 2천 골드가 주어진다.
도둑을 맞는 바람에 호위가 두 번으로 계산되니 4천 골드에, 이곳에 오는 조건으로 1천 골드를 받게 되니 정확히 5천 골드가 맞다.
한데, 그런 엄청난 돈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서우 씨만 신났네.”
“언제부터 서우 씨였냐?”
“그렇다고 동행하는 사이에 이 사람, 저 사람 할 수 없잖아.”
“뭐, 어쨌든 넌 저 사람이 성공할 거라 생각해?”
“어, 난 성공할 거라고 생각해. 언니는 아니겠지만.”
“추적술과 전투 능력은 별개야. 착용하고 있는 장비만 보면 우리보다 레벨이 최소 10레벨 이상 낮아. 그런 자가 어떻게 저런 곳에서 살아남겠어.”
만약 내기 조건이 단순히 정보를 얻기 위해 돌아다니는 것이었다면 유세나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서우는 분명히 말했다.
스스로를 드러낸다고, 그때가 바로 공격할 타이밍이라고.
그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적의 공격이 집중될 것이다.
유세나는 이서우가 그들의 공격을 버텨 낼 만큼의 강자는 아니라고 확신했다.
“설마 언니는 서우 씨가 죽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당연하지. 이번 일의 배후는 적어도 150레벨의 유저야. 그러니 저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끝장인 거지.”
“그럼 우리도 큰일 난 거 아냐?”
“그렇진 않지. 하는 데까지 해 보다가 안 되면 후퇴하면 되니까.”
“하지만 프랑드 씨가 이의를 제기할 텐데?”
“이의 제기도 적정 수준이 있는 거야. 우리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이면 괜찮아.”
조현아는 나무 뒤에 숨어서 상황을 지켜보는 프랑드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 * *
홀로 적진으로 간 이서우는 경계를 유유히 뚫고는 안쪽으로 침투했다.
레벨에서도 차이가 크지만 능력치 자체가 비교가 되지 않아 누구도 이서우를 발견할 수 없었다.
‘100명 이상 모여 있는 것 같네. 이곳이 본거지는 아닌 것 같은데…….’
이런 외진 곳에 건물을 지을 사람은 없으니 급조된 곳일 확률이 높았다.
‘어디 보자.’
이서우는 주변을 면밀히 살피며 마차가 어디에 있을지 판단했다.
‘저곳이겠군.’
마을 중앙 쪽에 커다란 건물이 보였다.
딱 봐도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 창고 건물이었다.
‘저 창고를 다 채우기 위해 이번 일을 벌인 건가?’
이서우는 수천 평이나 되는 창고 10개를 설마 다 채웠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한데, 저걸 다 채워서 어디에 쓰려는 거지? 도시라도 털 생각인가. 응? 저놈은…….’
이서우는 창고 근처로 가서 상황을 주시했다.
한데,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그때 그 힐러랑 같이 덤비던 녀석이네. 설마 저놈이 이번 일의 배후였나?’
이서우는 의외의 인물을 마주하게 되자 살짝 당황했지만, 상대가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안도했다.
‘힐러가 없네? 있어도 상관은 없지만 없으니 금세 해결되겠네.’
이서우는 대검을 조심스럽게 뽑아 들었다.
굳이 기습을 할 필요는 없었지만 깔끔한 일 처리를 위해 조용히 다가가 신속히 처리할 생각이었다.
두 다리에 마나를 집중해서 소리는 전혀 나지 않았는데, 속도는 가히 화살처럼 빨랐다.
“헉! 네, 네놈이 어떻게…….”
창고에서 정리를 마치고 돌아가던 최진수는 갑자기 느껴지는 기운에 무기를 뽑아 들었다.
한데,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상대가 그토록 그가 복수하고 싶어 하던 바로 ‘그놈’이었다.
깡!
다급히 검은 뽑았지만 워낙 빠른 속도로 달려와서 미처 대응하지 못했다.
이서우는 당연히 공격이 성공할 거라 여기고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갑자기 반투명 막이 생기더니 최진수의 몸을 보호하는 게 아닌가.
“네놈 때문에 절대 방어가 있는 아이템을 구입한다고 얼마나 많은 돈을 지불했는지 몰라. 이날을 기다렸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변에서 수많은 도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따로 설정한 대화 채널을 통해 적이 나타났다고 전달한 것이다.
100여 명의 도적들이 일제히 이서우에게 덤벼들었다.
약탈을 위해 200명이 빠져나가서 숫자는 적었지만, 모두가 140레벨을 넘긴 유저와 NPC였다.
최진수도 160을 찍어 온몸을 유일 장비로 도배했다.
무기는 초월로 20강화까지 찍었고, 공격력이 붙은 반지와 목걸이도 초월 강화를 끝까지 올렸다.
방어구도 초월은 했지만 18강과 19강에 머무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능력치는 이미 200레벨을 넘어서고 있었다.
최진수는 자신만만했다.
그가 가진 모든 돈을 쏟아부어 복수를 준비했으니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강했다.
이서우가 이벤트 보상으로 받은 아이템을 강화했을 거라는 예상은 했다. 하지만 초월 강화까지 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만큼 자원이 빵빵했다면 이벤트 때 허접한 아이템을 착용하지 않았을 테니까.
한데, 대검을 보니 유일 최상급 옵션이 아니라 이벤트 때 사용하던 그 아이템이었다.
볼품이 없어서 다들 한 소리 했었는데, 그 아이템을 그대로 사용하다니.
‘이번에는 무조건 이긴다.’
대검을 본 최진수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이서우가 착용한 아이템이야말로 전설급 그 이상의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슈슈슈슈슈슈슛!
챙챙챙챙챙챙챙!
자신감이 듬뿍 담긴 최진수의 검이 빠른 속도로 움직였고, 이서우의 대검이 그의 공격을 가볍게 막아 냈다.
너무 쉽게 공격이 막혔지만 최진수는 미소를 지었다.
다음 순간, 그의 검에 푸르른 빛이 맺혔다.
“죽어라!”
그가 이날을 위해 심혈을 기울여 단련한 스킬이 그의 검을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과거 산적 왕이 남겼다는 비기 중의 비기, 일격필살 무적검법.
비록 숙련도가 많이 낮지만 확실히 산적 왕의 검법이 맞았다.
푸른빛을 머금은 무적검법이 이서우의 심장을 향해 날아갔다.
“큭! 이, 이럴 수가…….”
최진수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분명히 심장을 뚫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단지 허상에 불과했다.
진짜 이서우의 모습은 그의 시야에는 없었다.
분명 공격이 성공할 거라 확신했는데, 오히려 가슴이 화끈거리는 게 아닌가.
등에서부터 가슴을 뚫고 나온 긴 대검.
최진수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바로 붉게 물든 서슬 퍼런 대검이었다.
털썩.
-산적 왕의 후예 최진수를 처치하셨습니다.
-163,200,000경험치를 획득하셨습니다.
-7골드 70실버를 획득하셨습니다.
-창고 열쇠를 획득하셨습니다.
-현상금 2,000골드를 획득하셨습니다.
-명성이 1,000 상승합니다.
“두, 두목님!”
바닥에 쓰러진 최진수를 보며 산적들은 당장이라도 이서우를 죽일 것처럼 무서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 강렬한 눈빛은 곧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최진수는 최근 산적 왕의 흔적을 찾아 그의 후예로 전직을 하면서 더 강해졌다.
2차 전직에서 얻은 모든 것들을 다 지워 버려야 했지만, 그는 특수 퀘스트를 통해 산적 왕의 후예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더 강해질 자신이 있었기에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놀랍게도 며칠 만에 이전의 능력을 회복한 것뿐만 아니라 더 강해질 수 있었다.
이제 산적 왕이 남긴 물건들만 찾으면 누구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자신감까지 생겼다.
그리고 수많은 산적들이 따르면서 그 자신감이 최고조에 달했다.
한데, 그런 절대적인 두목이 순식간에 죽어 버렸다.
NPC들도 유저들도,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뒷걸음질 쳤다.
이서우는 그들을 당장이라도 쓸어버리려 했지만, 바로 그때 용병들이 등장했다.
놀란 산적들은 혼비백산해 뿔뿔이 흩어졌다.
모든 정리가 끝나는 데 채 10분이 걸리지 않았다.
“설마, 처음부터 이곳의 우두머리를 칠 생각이셨나요?”
“그게 편하잖아요. 마침 무방비 상태여서 더 편했습니다.”
“그래도…….”
아무리 무방비 상태였다고 해도 이렇게 짧은 순간에 우두머리를 죽일 수 있을까.
유세나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쉽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상대방이 그렇다는데 더 이상 따질 수도 없었다.
“일단 잃어버린 물건부터 확인해 보죠.”
두 사람의 대화에 프랑드가 끼어들었다. 지금 그에게는 마차가 가장 중요했다.
이서우는 창고를 하나씩 열었다.
“헉!”
첫 번째 창고를 열자마자 수많은 잡동사니들이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일반, 고급 장비 등이 있었는데 물량이 상당히 많아 꽤 돈이 될 것 같았다.
“이것만 팔아도 평생은 먹고살 수 있겠네요.”
“일단 다른 곳도 살펴보죠.”
창고 안에는 마차가 없어 두 번째 창고로 향했다.
그곳도 첫 번째 창고와 마찬가지였다.
결국 마지막 창고에서 마차를 찾을 수 있었다.
“찾았습니다!”
프랑드가 얼른 뛰어가 마차를 확인했다.
말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지만 내용물은 그대로였다.
기쁨도 잠시.
프랑드는 이서우에게 다가와 현실적인 문제를 꺼내 놓았다.
“한데, 창고에 있는 물건들은 어떡하죠?”
“약탈당한 거니 영주님께 신고를 해야겠지요.”
“그게 당연한 절차이긴 한데…….”
이서우는 정당하게 얻지 않은 물건에 욕심을 낼 생각은 전혀 없었다.
게다가 뉴 월드를 계속해야 하는데, 작은(?) 이익 때문에 대귀족과 사이가 나빠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한번 신뢰를 잃으면 회복할 수 없다.
이서우의 경우는 퀘스트로 초고속 레벨 업 중이어서 더욱 조심해야 했다.
뉴 월드만 계속해도 돈은 얼마든지 벌 수 있는데 황금을 더 얻겠다고 황금 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프랑드도 아쉬워했지만 이서우의 의견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꺄아아악!”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렸다.
이서우와 프랑드는 급히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