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
레벨이 갑이다
74화
“무슨 일입니까?”
“당했습니다.”
“당했다니요?”
흔들리는 프랑드의 눈동자에는 절망이 담겨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얼굴이었다.
한데 하루아침에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프랑드는 힘없는 목소리로 이유를 말했다.
“마차를 강탈당했습니다.”
“네? 어찌 그런 일이…….”
이서우는 NPC에게 맡긴 물건이 어떻게 강탈당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NPC들에게 추궁해 본 결과 가족을 인질로 잡고 있었다는군요.”
“그게 가능한가요?”
“지금까지는 불가능했죠. 특히 이런 곳은 강제적으로 약탈을 할 수도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런데?”
“그자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더군요.”
“…….”
이곳은 유저들의 그 어떤 강제적 요구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곳이다.
협박도 인질도 통하지 않는다는 뜻.
노련한 그가 이곳에 물건을 맡겼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서우는 곧 그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특수한 기술을 가진 자가 나타났군요.”
“맞습니다. 저도 그쪽으로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뉴 월드는 예상치 못한 기술들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는 곳이다.
뱀파이어, 산적, 도적 등을 직업으로 할 수 있다는 것도 처음에는 몰랐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 물건은 꼭 찾아야 합니다.”
“시간이 꽤 지났을 텐데요?”
“아닙니다. NPC들도 꽤 버텼더군요. 사라진 지 5시간 정도 지났습니다.”
“5시간이라…….”
덤프트럭 크기의 대형 짐마차를 끌고 가려면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마차를 끄는 말들의 힘이 워낙 강하고 지구력도 좋아서 이동속도는 빠르겠지만, 5시간이라면 되찾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추적술에 능한 유저가 없다는 게 흠이지만 마차의 흔적을 쉽게 지우지는 못했을 겁니다.”
“아마 놈들은 이런 일에 익숙할 겁니다.”
“그 말씀은…….”
“네. 이미 흔적을 지웠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이서우의 말에 프랑드는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아무리 경험이 많아도 그렇게 큰 마차 20대의 흔적을 5시간 만에 어떻게 감쪽같이 없앨 수 있단 말인가.
“아직 판단하기엔 이른 것 같군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차돌풍이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자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쏠렸다.
희망을 가지라는 의미에서 한 말인데 갑자기 주목을 받게 되자 머쓱한지 차돌풍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더니 퉁명스럽게 한마디 던졌다.
“미안한 말이지만, 우리의 임무는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차를 보호하는 것으로 의뢰를 했습니다. 맞습니까?”
“그렇습니다만.”
“마차가 이미 사라졌는데, 당연한 일 아닐까요.”
“그런…….”
희망적인 말과는 달리 그의 음성은 냉정했다.
말 한마디엔 돈이 들지 않으니 그런 것이지만, 의뢰는 다른 문제였다.
물론 상식적으로 보면 차돌풍의 말이 맞다. 지킬 물건이 없으니 의뢰도 종료가 되는 것이다.
추적해서 물건을 다시 찾아오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보호와 마차를 되찾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우리는 계약을 했고, 그대로 이행할 뿐입니다.”
돌발 상황에 대한 조건을 추가하면 더 많은 돈이 들어 계약서에서 빼 버렸다.
현실처럼 변수가 생길 일이 거의 없고, 지금까지 수많은 상행을 다녔지만 이런 일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아서 발생한 실수였다.
그러니 차돌풍을 탓할 수는 없었다.
“좋습니다. 그러면 마차를 찾아 주신다면 보상으로 1인당 1천 골드를 드리겠습니다.”
“그런 조건이라면 의뢰를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백작의 영지까지 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프랑드는 이번 일에 전 재산을 걸었다.
이익은 최하로 잡아도 10만 골드 이상 얻지만, 3만 골드를 지출하고 시간까지 허비하면 남는 게 별로 없었다.
그러니 프랑드의 입장에서는 이번 제안이 파격적이라 할 수 있지만, 차돌풍은 만족하지 않았다.
“이미 호위 계약은 끝났습니다. 그러니 물건을 찾더라도 따로 계약을 하셔야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 그건…….”
프랑드는 난처했다.
다시 계약을 맺으면 그는 결국 이익 한 푼 없이 이번 일을 해야 한다.
퀘스트 보상이 있지만 그건 그저 마차를 빌리는 데 필요한 돈을 갈음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사람 중심으로 일을 했다면 아마도 몇 명쯤은 그를 도우려 했겠지.’
이서우는 돌아가는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시간은 점점 흐르는데 서로의 이익을 위해 머리만 굴리고 있는 것을 보니 답답했다.
물론 이서우도 일면식이 없는 프랑드를 위해 공짜로 일을 해 줄 생각은 없었다.
“좋습니다. 기존과 동일한 조건으로 호위를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이번 조건은 어떤 일이 발생해도 물건을 무조건 목적지까지 가져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좋습니다. 그런 조건이라면 마다할 이유는 없죠.”
“그리고 혹시 추적술을 조금이라도 알고 계신 분이 있다면 제가 2천 골드를 더 얹어 준다고 말해 주십시오.”
“미안합니다. 우리는 그런 비싼 인력을 데리고 다닐 정도는 아닙니다.”
차돌풍의 말은 반만 진실이었다.
아무리 소규모여도 정찰 인력은 있다. 단지, 그들의 몸값이 워낙 비싸서 이런 중소 규모 임무에 투입되지 않을 뿐이다.
숫자는 적고 그들을 필요로 하는 고레벨 유저들은 많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제가 추적술을 알고 있으니 그 의뢰는 제가 맡겠습니다.”
“저, 정말이십니까?”
“네. 일단 서두르죠. 시간이 흐를수록 찾을 수 있는 확률은 줄어드니까요.”
“가, 감사합니다.”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신다니 저도 마다할 이유는 없지요.”
“……네.”
프랑드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대답했다.
퀘스트 실패로 페널티까지 받으면 그는 그야말로 파산이다.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퀘스트라도 완료해야 재기라도 할 수 있었다.
이서우는 프랑드의 안내를 받아 마차가 사라진 곳으로 갔다.
마을 입구까지는 흔적이 또렷해서 찾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대충 50명 정도가 움직였네요.”
“허! 혹시 전문 추적자이십니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입구에는 흔적이 있지만 저 앞쪽부터는 흔적이 많이 약해져 있습니다. 더 늦으면 놓칩니다.”
“네? 제, 제발 찾아 주십시오!”
프랑드가 간절한 눈빛으로 호소했다.
이번 일을 망치면 다시 일어서는 데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소모된다.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신뢰.
대상인을 넘어 궁극의 상인으로 가는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신뢰가 기본 바탕이 되어야 했다.
만약 이대로 실패한다면 그의 3차 전직은 한참이나 늦어질 것이다.
힘겹게 남들보다 앞서가게 됐는데, 그 모든 것을 잃을 수는 없었다.
“이쪽입니다!”
이서우는 방향을 잡았다.
2명의 용병대장은 이서우가 무엇을 보고 방향을 잡았는지 알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왜 그쪽으로 가는지 이유라도 물어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만큼 한가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서우가 무슨 짓을 하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마차를 찾아도, 찾지 않아도 이득이기 때문이다.
상인들도 그렇지만 용병 집단도 이익에 의해 움직이기에 그들에게 가장 우선순위는 돈이었다.
그래서일까.
용병들의 움직임은 한결 가벼웠다.
하지만 프랑드는 죽을 맛이었다.
그나마 레벨이 있으니 추적에 방해는 되지 않았지만 마차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 때문에 2배로 힘이 들었다.
프랑드는 누구도 믿지 않고 오직 자신만 믿었는데, 지금은 속으로 온갖 신을 찾으며 기도하고 있었다.
* * *
“흔적은 말끔히 지웠겠지?”
“네, 형님. 아무리 뛰어난 추적자가 와도 찾지 못할 겁니다.”
“멍청한 놈. 너도 저 마차의 주인처럼 되고 싶은 것이냐!”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놈도 설마 이런 식으로 도둑을 맞을 거라 생각을 했겠느냐.”
“하지만 그건 형님이 워낙 뛰어나셔서…….”
“덩치만 미련한 게 아니라 생긴 것도 미련한 놈. 앞으로 일을 추진할 때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느냐?”
“그야, 상식을 벗어날 정도로 더 빡빡하게 하라고…….”
덩치가 산만 한 사내는 쩔쩔매며 대답했지만 자신이 없는 목소리였다.
그만큼 그의 앞에 있는 사내가 두려운 것이다.
“그 개자식에게 당한 걸 생각해라. 멍청해 보이고 쪼렙처럼 보였지만, 결과는 어땠느냐?”
“그, 그건…….”
“네놈은 그날 그놈이 무서워서 형제들이 다 당할 때 혼자 달랑 종료해 놓고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느냐!”
“아, 아닙니다, 형님. 제가 어찌 그날의 치욕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날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납니다. 복수를 하고자 이렇게 밤낮 없이 형님이 시키신 일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는 말이다. 이왕이면 철저하게 하라는 뜻이다. 알겠느냐!”
“네, 형님! 명심하겠습니다!”
덩치 큰 사내에게 호통을 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최진수였다.
그는 오직 복수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으고 있었다.
많은 인원을 모아 전방위적으로 원수를 압박하기 위해서였다.
마침 이벤트 때 피나는 노력으로 귀한 스킬을 얻었다.
NPC를 홀리는 기술이었는데, 그 후 소규모 마을을 대상으로 약탈을 일삼았다.
쉬웠다. NPC를 겁박해 맡겨 둔 물건을 찾으면 그만이었다.
원래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가 익힌 특수한 기술 때문에 가능해졌다.
소문도 나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가족들을 노예로 팔아 버리겠다고 협박을 해서 그에게 당한 NPC들은 입을 꾹 닫았다.
멍청하게 당한 유저들도 소문을 내지 않았다.
혹시 다른 사람이 당하면 그들이 말해 주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방관했다.
게다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일이어서 말을 한다고 믿어 줄 사람도 없었다.
그 결과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혹시라도 대형 길드에 속한 놈들이 물건을 맡길 수도 있으니 잘 살피고.”
“염려 마십시오. 주로 상인들이나 소규모 파티들이 맡겨 둔 짐들을 털고 있습니다. 그리고 안전을 위해 몬스터에게서 약탈하는 비율을 더 높이고 있습니다.”
“그래, 그런 식으로 진행해. 이제 곧 마지막 창고도 찰 테니 서둘러.”
“네, 형님.”
“그럼 가 봐.”
“설마, 저걸 혼자 다 정리하시려고요?”
“괜찮으니 넌 가서 열심히 물건이나 가져와.”
“네, 형님. 참, 형님, 근데 형수님은…….”
“그년 얘기는 앞으로 두 번 다시 하지 마라. 알겠어?”
“네? 네, 형님.”
최진수는 이민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불같이 화를 냈다.
‘미친년, 감히 날 떠나? 놈에 대한 복수만 하면 다음은 네년이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을 한 최진수는 시선을 돌려 거대한 마차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눈빛이 다시 누그러졌다.
“이제 몇 번이면 마지막 창고도 금세 차겠군. 이것만 채우면 네놈의 신상을 탈탈 털어서 현실에서도, 뉴 월드에서도 아예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해 주마.”
최진수는 복수의 칼을 갈며 대형 창고 10개를 제작했고, 거기에 훔친 물건들을 차곡차곡 쌓았다.
빼앗은 물건을 바로 풀면 의심을 살 수 있어 창고에 모아 둔 뒤 여러 마을에서 조금씩 동시에 팔아 골드를 마련할 생각이었다.
그 골드로 정보를 사들이고, 유능한 추적자들을 사서 원수의 뒤를 쫓을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를 찾은 뒤 궁지로 몰아넣어 처참하게 죽이고, 현실에서는 아예 뉴 월드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마차를 정리하는 최진수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