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레벨이 갑이다
36화
“야, 가만히 안 있어?”
“웁웁, 우우웁.”
“이게 그래도!”
퍽퍽, 퍽퍽퍽.
“우우우웁!”
불쌍한 눈을 하고서 몸부림치고 있는 건 바로 뱀파이어 킹이었다.
살아 있는 건 인벤토리에 넣을 수가 없어 직접 끌고 가는 것이다.
최대한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기 위해 가죽으로 온몸을 칭칭 감았는데, 어디서 힘이 나오는 건지 자꾸만 꿈틀거렸다.
이서우는 혹시 원래의 힘을 회복할 것이 염려되어 지속적으로 생명력을 빼면서 데려왔다.
‘그래도 막판 필살기는 좀 셌어.’
처음 필살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게 막을 수 있었다.
이미 아는 공격이기도 했고, 생각보다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뱀파이어 킹의 생명력이 10퍼센트 미만일 때 사용한 최후의 필살기는 상당히 강했다.
오죽했으면 이서우도 절반의 생명력이 빠졌을까.
하지만 그 공격을 마지막으로 뱀파이어 킹은 이서우에게 붙잡혔다.
허접해 보이는 이서우를 잡아다가 노예로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도리어 질질 끌려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서우는 경비병의 도움을 받아 은밀히 남작 성으로 들어갔다.
루테인 남작이 미리 언질을 했는지 경비병들은 적극 협조했다.
마을에 들어오자마자 이서우는 마나 물약 제조를 걸어 두었다.
그가 성으로 들어가자 소식을 전해 들은 남작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아내의 병을 고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체면이고 뭐고 따지지 않았다.
“이, 이보게, 성공했나?”
“네.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고맙네. 정말 고마워!”
“아직 남작 부인께서 나으신 것도 아니니 그 말은 모든 일이 끝나고 듣겠습니다.”
“괜히 부담을 줬구먼. 이럴 게 아니라 얼른 가세.”
“네.”
그는 이미 이서우가 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남작의 거처 주변을 비웠다.
하인들이 알지 못하도록 철저히 조치를 취한 것이다.
지하로 내려간 이서우는 남작을 따라갔다.
주기적으로 자주 내려왔는지 남작은 거침없이 움직였다.
‘확실히 복잡하긴 복잡하네.’
길이 여기저기 나 있어, 지도를 암기하지 않았다면 누구나 길을 잃을 것 같았다.
이서우는 남작을 따라가면서도 지도의 내용을 떠올렸다.
기억은 하고 있지만 다시 한 번 상기시켜 머릿속에 각인했다.
한참을 내려가서야 목적지에 다다랐다.
“놀라지 말게.”
“네.”
남작은 미리 주의를 주고 복도 끝까지 차분히 걸었다.
그냥 평범한 벽으로 보였으나, 남작이 벽의 특정 부위를 누르자 문이 열렸다.
“피, 피를 주세요. 제발 피를…….”
“여보, 치료제를 찾았소. 그러니 조금만 기다리시오.”
“참을 수 없어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요!”
남작 부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얼굴은 창백해서 산송장 같았고, 머리도 산발이었다.
팔과 다리, 목까지 쇠사슬로 묶여 있었는데, 어디서 힘이 나는지 자꾸 몸부림을 쳤다.
“어서 해 주게.”
“알겠습니다.”
커다란 유리병 몇 개를 꺼낸 뒤 뱀파이어 킹의 동맥을 잘라 버렸다.
덩치가 커서인지 피가 10리터나 나왔다.
입을 틀어막아 둬서 뱀파이어 킹은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목숨을 잃고 말았다.
-뱀파이어 킹을 처치했습니다.
-24,500,000경험치를 획득하셨습니다.
-뱀파이어 킹의 반지를 획득하셨습니다.
-뱀파이어 킹의 목걸이를 획득하셨습니다.
-뱀파이어 킹의 심장을 획득하셨습니다.
-뱀파이어 킹의 피를 획득하셨습니다.
-1골드 75실버를 획득하셨습니다.
-뱀파이어와의 적대치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이서우는 아이템을 2개나 얻었지만 침착하게 정제 작업을 준비했다.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작 앞에서 도저히 좋은 티를 낼 수 없었다.
“다 된 건가?”
“아닙니다. 마지막 과정이 남아 있습니다. 시간이 조금 걸릴 겁니다.”
이서우는 제조 창을 열고는 재료를 지정했다.
-정제할 피의 양을 설정해 주십시오.
‘10리터 전부 다.’
-뱀파이어 킹의 혈액을 정제하시겠습니까?
‘그래.’
이서우는 망설이지 않고 수락했다.
양이 워낙 많아서인지 10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10분 정도만 있으면 될 것 같습니다.”
“휴우, 오래 걸린다고 해서 난 또, 오늘은 안 될 줄 알았네.”
“저도 처음이어서 정확한 시간을 가늠하지 못했습니다.”
“평소와 다르게 10분이 10시간 같구먼.”
남작은 불안한지 안절부절못하고 이서우와 아내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남작 부인은 여전히 간절한 목소리로 피를 달라고 호소하고 있었다.
-정제가 끝났습니다.
-뱀파이어 치료제 10개를 획득하셨습니다.
“드디어!”
“됐는가?”
“네, 남작님. 됐습니다!”
이서우도 기분이 좋아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남작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밝아졌다.
이서우는 미리 준비한 주사기에 치료제를 넣었다.
“주사를 놓아야 합니다. 몸부림치시면 어쩔 수 없이 잡고 있어야 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내가, 내가 하겠네.”
“……알겠습니다.”
막고 싶었지만 치료제도 넉넉하게 있으니 동의했다.
남작이 부인에게 다가가자 이서우는 그의 옆에 바짝 붙었다. 혹시라도 돌발 상황이 생기면 즉각적인 행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피! 피! 피!”
그러는 동안에도 그녀는 피를 달라는 말만 외치며 온몸을 흔들었다.
남작이 다가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빨리 해 주게.”
“네.”
이서우는 얼른 다가가 주사를 놓았다.
“아아아악!”
남작 부인이 비명을 질렀다.
자기에게 해라도 입히려는 줄 알고 발악하는 것이다.
하지만 잠시 후 그녀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어, 어떻게 된 건가?”
“아마 치료제와 바이러스가 서로 싸우는 것 같습니다.”
“그, 그런…….”
“잠시만 기다려 보십시오. 확실히 치료제가 맞으니 괜찮아지실 겁니다.”
“제, 제발…….”
남작은 입술이 바짝 타들어 가는지 혀를 내밀어 말라 버린 입술을 적셨다.
양손은 깍지를 꼈다, 비볐다가를 반복하며 불안한 눈빛으로, 기절한 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때, 남작 부인이 귀신이라도 본 듯 크게 놀라며 눈을 떴다.
“흐억!”
“여, 여보!”
“여보?”
“괘, 괜찮소?”
“제가, 제가 왜 여기에…… 아악!”
“자, 잠시만 기다리시오. 풀어 주겠소.”
남작 부인은 자신이 묶여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움직이려 하다가 통증이 밀려오자 비명을 질렀다.
남작은 얼른 열쇠를 꺼내서 그녀를 풀어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몸에 힘이 없어 버티지 못하고 남작의 품에 쓰러지고 말았다.
“괘, 괜찮소?”
“네, 전 괜찮아요. 한데, 제가 왜 이런 곳에 있는 건가요?”
“기억이 나지 않소?”
“네. 아무 기억이 안 나요. 참, 우리 제다의 생일은 어떻게 됐나요?”
“그게…….”
남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생일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은 그녀의 기억이 그 당시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서우도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지만, 그저 안타까운 시선으로 두 부부를 바라볼 뿐이었다.
“일단, 방으로 가서 옷부터 갈아입읍시다.”
“네? 어머, 제 몰골이…….”
“일단 나갑시다.”
“네. 그런데…….”
남작이 부축을 해서 몇 발짝 떼려는데, 갑자기 남작 부인이 의식을 잃어버렸다.
“여, 여보!”
이서우가 급히 다가가 남작 부인을 살폈다.
“남작님, 괜찮습니다. 그동안 몸을 지탱하던 뱀파이어의 능력이 사라지면서 몸이 갑자기 약해져서 기절을 한 것 같습니다.”
“이런. 어서 나가세.”
“네.”
이서우도 한쪽 팔을 붙잡고 남작 부인을 부축했다.
워낙 미로가 꼬여 있어 나가는 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그들은 은밀히 남작의 방으로 들어갔다.
남작 부인을 눕히고 활력차를 먹였다.
“기력이 조금 빨리 돌아올 겁니다.”
“고맙네! 정말 고마워!”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닐세. 내 이 은혜는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네.”
-퀘스트 ‘남작 부인을 치료하라’를 완료하셨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300골드를 획득하셨습니다.
-중급 강화석 10개를 획득하셨습니다.
-남작과의 친밀도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제가 필요한 일이라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내 그 말 꼭 기억하겠네.”
“물론입니다.”
오히려 이서우가 남작에게 잘 보여야 하는데, 아들에 부인까지 구해 줘서 반대의 입장이 되어 버렸다.
갈수록 레벨 업이 힘들어지는 상황이기에 이서우로서는 환영이었다.
“참, 제다의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네. 이젠 혼자서 식사를 할 수 있을 정도야. 몸이 계속 좋아지니 자네를 자꾸 찾는구먼. 여긴 내가 보고 있을 테니, 제다를 한번 만나 주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다 낫거든 제다와 함께 꼭 그곳에 가 주게.”
“하지만…….”
“무슨 마음인지 아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내에게 보여 줄 수가 없네. 완전히 낫고, 자초지종을 설명해 줘야 할 것 같네. 그때까지는 제다를 기쁘게 만들어 주고 싶네.”
“네.”
이서우는 남작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바로 제다를 본다면 남작 부인이 큰 정신적 충격을 받을지도 몰랐다.
이서우는 남작과 인사를 하고 제다의 방으로 갔다.
입구를 지키는 경비병이 있었지만, 이서우를 알아보고 문을 열어 주었다.
들어가자 제다가 반가운 얼굴을 하고는 상체를 들었다.
“모험가님!”
“불편할 텐데 편하게 계세요.”
“아니에요. 움직여 줘야 빨리 낫죠.”
“너무 무리하면 오히려 더 오래 누워 있어야 할지 몰라요.”
“아, 알겠어요. 누워 있을게요.”
제다는 순한 양이 되어 침대에 누웠다.
의외로 고집이 강한 성격인데, 이서우의 말에는 얌전히 따랐다.
남작이 봤다면 신기해할 장면이었다.
“이걸 하루에 한 병씩 드세요.”
“이건 뭔가요?”
“활력차라고, 기운을 북돋워 주는 거예요.”
“아, 그럼 귀한 거네요?”
“그렇게 귀한 건 아니니 부담 없이 마셔요.”
“네! 열심히 마시고 빨리 나아서 같이 지하 던전으로 가요!”
이서우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하에 가 봤지만 별게 없는 곳인데, 제다에게는 그곳이 던전으로 여겨지는 것 같았다.
하긴, 실전 경험이 그다지 없을 테니 환상을 가지는 것도 당연했다.
“그럼 몸조리하세요. 전 이만 가 봐야겠어요.”
“벌써 가시게요?”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일어나야 해요. 제다 님 몸이 빨리 나아야 지하 던전에 가죠.”
“네!”
이곳에서 열여섯 살은 전투에 참여할 수 있는 나이지만, 이서우에게는 아직 어린아이로 보였다.
이서우는 남작을 만나 활력차를 몇 병 건네고는 남작 성을 나왔다.
나오자마자 이서우는 우편함부터 열었다.
“역시!”
이번에도 4골드에 모두 팔려 있는 것을 보고는 정오의 태양처럼 밝은 미소를 지었다.
영웅 무기를 산다고 비었던 인벤토리가 다시 꽉 찬 기분이었다.
효자 노릇을 하는 마나 물약이 다시 완성되었다.
이서우는 완성된 마나를 얼른 거래 중개소에 올리려다 말고 친구 목록을 열었다.
-민수야, 바쁘냐?
-아니, 마침 휴식 시간이다. 왜?
-너 마나 물약 필요해?
-마나 물약? 그 비싼 걸 샀어?
-사긴 왜 사. 만들었지.
-헉. 설마 그거 니가 만든 거였어?
-어.
박민수는 화들짝 놀랐다.
최근 들어 마나 물약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뜨겁다. 한데, 그걸 가장 친한 친구 중 1명이 만들었다니.
-진짜야? 지금까지 아무도 만든 사람이 없는데?
-어쩌다가 그렇게 됐어.
-헐. 야, 너 생산 계열로 가려고 그러는 건 아니지?
-내가 미쳤냐? 난 사냥이 좋다.
-근데 어떻게 그걸 만들어?
-좀 특수한 직업이거든.
-그래? 사냥도 하고 물약도 만들면 좋긴 하지. 하지만 물약 쪽으로 너무 치우치지 마. 그러다가 둘 다 말아먹는 수가 있어. 그리고 우린 파티로 주로 사냥해서 물약 쓸 일이 없는데, 넌 솔로라서 많이 드나 보다?
-사냥 들어가면 쿨마다 쓰지.
-역시 파티 사냥이 좋다니까.
이서우는 급할 때 쓰라고 마나 물약을 줄까 싶어 귓말을 보낸 건데 쓸 일이 없다니, 그냥 레벨 업이나 열심히 하라는 말로 마무리하려 했다.
-참, 서우야, 너 그거 알아?
-뭐?
-지금 마나 물약 때문에 길드마다 난리 난 거.
-난리? 무슨 난리?
-당연히 만든 사람을 찾는다고 난리지. 하급만 해도 버프와 같이 사용하면 엄청 유용해. 중급을 쓴다고 생각해 봐. 효율이 엄청 올라갈걸.
-그러니까 제작자를 찾아서 부려 먹겠다는 거네?
-대우를 해 준다는 거지.
-그게 그거지.
이서우는 박민수가 뭘 지적하는지 금방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는 길드에 속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같이 파티하는 유저 중 1명이 자기 길드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해서 생산 기술 레벨 올리고 있다더라. 다른 길드도 1명 정도는 키운다고 하더라고. 그러니 가격 떨어지기 전에, 쟁여 둔 거 있으면 얼른 팔아 치워.
-그렇지 않아도 그때그때 팔고 있다.
-그래, 그게 나아. 근데, 네가 선택한 직업은 좀 특별한가 보다?
-왜?
-여기 유저 말 들어 보니까 중급 10레벨인데도 안 뜬다고 하던데.
-좀 특화되긴 했지.
-운이 좋네. 여튼 벌 수 있을 때 바짝 벌고 빠져.
-그래, 고맙다.
-열렙해라.
-너도.
이서우는 박민수와 귓말을 끝내고 서둘러 거래 중개소로 갔다.
정말로 그 말이 맞는다면 가격이 떨어지는 것 따위를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그래, 일리는 있어. 아예 없었다면 모르지만 누군가가 독점을 해서 시장이 파괴된다면 뉴 월드 측에서도 가만히 있지는 않겠지.’
이서우는 재료를 왕창 구입하기 위해 속도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