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레벨이 갑이다
27화
“모험가님!”
이서우는 간절한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돌아보니 경비병 하나가 그를 애타게 부르는 게 아닌가.
그가 다가오자 이서우가 물었다.
“무슨 일이시죠?”
“모험가님, 접니다!”
“네?”
“제다 님과 함께 있던 호위.”
“아!”
이서우는 그제야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제 복장이 조금 많이 달라졌죠? 그때 제다 님을 잘 지켜 냈다고 남작님께서 오백부장에 임명하셨습니다.”
“그러셨구나. 잘됐네요.”
“아닙니다. 이게 다 모험가님 덕분입니다. 감사 인사를 꼭 하고 싶었는데, 남문을 통과했다는 소리를 듣고 한참을 찾았습니다.”
“지난번에 이미 충분히 하셨으니 괜찮습니다.”
“아닙니다. 그때는 남작님이 걱정하실까 봐 서둘렀지만, 자꾸 모험가님이 생각나더군요.”
“전 여자가 좋습니다.”
“네?”
“아, 아닙니다. 그나저나, 그것 때문에 절 찾으신 겁니까?”
남자가 우수에 찬 눈빛을 하고 자꾸 생각이 났다고 하니 오싹한 기분이 들어 반사적으로 한 말이었는데,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오백부장의 표정에 얼른 말을 돌렸다.
하지만 곧 오백부장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아, 모험가님이 나와 친해지기 위해 여자를 소개시켜 달라고 하신 것 같은데, 내가 둔해서 못 알아차렸구나. 그래, 남자는 누구나 다 여자에게 관심이 있는 것을. 아직 수련이 부족하구나. 지금이라도 소개시켜 드린다고 할까? 아니야, 괜히 뒷북치면 더 어색해질지 몰라. 다음부턴 조심해야지.’
이미 지나간 일이고, 은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것도 예의가 아니어서 오백부장은 아쉬워하며 대답했다.
“사실 염치가 없지만 모험가님에게 도움을 얻기 위해 찾아온 겁니다.”
“도움이라뇨?”
“다름이 아니라 우리 도련님이 트롤병에 걸리셨습니다. 방법을 찾던 중 모험가님이 다론 마을을 트롤들의 공격으로부터 구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다 같이 노력한 결과입니다.”
“아닙니다. 다론 마을과 우리가 그다지 교류는 없지만 소식은 간간이 듣습니다. 한데, 그쪽 경비대원들이 모험가님을 영웅으로 대접하고 있다더군요.”
“과한 대접이지요.”
“어쨌든 트롤들을 가볍게 물리치셨다는 소식을 듣고 혹시나 트롤병도 치료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러셨군요.”
이서우는 일부러 뜸을 들였다.
타르타의 심장으로 트롤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을 얻었지만 제다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가 없었다.
괜히 큰소리쳤다가 완치를 못 시키면 이서우는 남작에게 미운털이 박힐 수도 있었다.
“바쁘시더라도 제다 님의 상태를 좀 봐 주실 수는 없을까요?”
-루테인 마을 오백부장 주다뭉이 당신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고칠 수 있다는 확신은 못 드린다는 점 미리 말씀드립니다.”
“물론입니다!”
주다뭉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안내로 이서우는 남작 성으로 갔다.
가장 말단 귀족이지만 남작 성은 생각보다 컸다.
이서우는 그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저택으로 향했다.
주다뭉과 동행하니 모든 곳이 무사통과였다.
“남작님, 주다뭉입니다.”
“어서 오게. 옆에 있는 모험가가 자네가 말한 사람인가?”
“네, 남작님.”
“일단 들어오게.”
문을 두드리자 남작이 직접 나와서 문을 열어 주었다.
귀족이 직접 움직이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행동이었지만 그다지 어색하지 않았다.
“앉게.”
화려하게 꾸며진 의자가 조금은 부담스러웠지만 주인이 앉으라고 하니 거절하지 않았다.
“루테인 남작이네. 자네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
“이서우라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모험가입니다.”
이서우는 늘 그렇듯 겸손한 태도를 취했다.
특별히 상대가 귀족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론 마을을 구했다고 들었네.”
“아닙니다. 마을을 불철주야로 지키는 경비대원들과 합심해서 이루어 낸 성과입니다.”
“워낙 외딴 지역이라 내가 너무 소홀했는데, 좋은 인재들이 있어 안심이 되는군.”
남작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다지 밝은 얼굴은 아니었다.
‘상태가 꽤 심각한가 보네.’
이서우는 살짝 긴장했다.
트롤병을 본 적이 없으니 어떤 상태인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남작을 만나니 결코 쉽게 해결할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차, 바쁠 텐데 내가 너무 붙잡고 있었군. 자네가 트롤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 하던데, 괜찮다면 아들을 좀 봐 줬으면 하네.”
“네. 그러기 위해 온 거니까요.”
“그럼 자리를 옮기지.”
남작이 직접 이서우를 안내했다.
방 2개를 지나치자 제다의 방이 나왔다.
집도 크고 방도 워낙 커서, 몇 발짝 가는 게 아니라 몇십 미터를 이동해야 했다.
“들어가지.”
주다뭉이 문을 열었고, 남작이 앞장섰다.
보통 귀족들은 누군가를 등 뒤에 두지 않지만 그는 그런 격식이나 절차 같은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꽤 괜찮은 귀족이네.’
특별히 이서우에게 대우를 잘해 준 것은 아니지만 호감이 가는 유형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제다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저건…….’
제다를 본 이서우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치료사는 트롤병이 저 정도로 심각하게 진행된 경우는 본 적이 없다고 하더군. 수도로 가서 최고의 치료사를 데려오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고 하니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네.”
“그랬군요.”
제다의 얼굴은 마치 트롤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피부색이 변해 있었다.
유저들이 본다면 색깔만으로도 오크나 트롤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타인인 그도 이런데 남작의 마음은 오죽할까.
남작은 제다의 병이 심각해질수록 심하게 스스로를 책망하고 있었다.
홀로 남겨진 제다를 위해 그가 하고 싶다고 하는 것은 모두 들어주면서 문제가 생겼다.
위험한 곳이니 어떻게 해서라도 나가지 못하게 했어야 하는데 말리지 못한 것을 자책하는 것이다.
“의식은 있나요?”
“어제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오늘 새벽부터 갑자기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네.”
“흠.”
이서우는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어렵겠나?”
“일단 제가 가진 약을 써 보겠습니다. 당장 낫는다는 확신은 없지만 약간의 호전은 있을 겁니다.”
“그런가? 정말 고맙네. 아들놈만 고쳐 준다면 남작 성을 달라고 해도 주겠네.”
“아닙니다. 이곳은 남작님이 다스리셔야지요.”
제다의 병을 고쳐라
루테인 남작의 아들 제다가 트롤병에 걸렸다.
트롤병은 대부분 쉽게 극복하지만 선천적으로 약한 사람이 걸리게 되면 아주 심각한 상태까지 진행이 된다. 치료하지 않고 방치한다면 이지를 상실하고 트롤이 되어 버릴 수도 있다.
치료사에게 이 사실을 전해 들은 남작은 백방으로 수소문하다가 다론의 영웅에 대해 들었다.
루테인 남작은 다론의 영웅에게 희망을 걸었고, 아들만 고칠 수 있다면 무엇이든 내놓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이 자리를 마련했다.
난이도 : C+
완료 조건 : 제다의 완치.
성공 시 보장 : 3레벨 경험치, 100골드, 남작과의 친밀도 상승.
실패 시 : 5레벨 다운, 루테인 마을 접근 불가.
레벨이 올랐지만 난이도가 높아서인지 보상이 상당히 좋았다.
하지만 실패 시의 페널티도 만만치 않았다.
‘루테인 마을을 이용하지 못하면 사냥은 이 지역에서 하고 정비는 다론 마을에서 해야 하나? 가는 데만 몇 시간인데.’
퀘스트를 받지 않을 수는 없으니 절대로 고쳐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정말 고맙네.”
“아닙니다. 그 말은 제다 님을 고치고 나서 듣겠습니다.”
이서우는 제다 곁으로 가서 그를 이리저리 살폈다.
얼굴을 비롯해 몸 곳곳을 만져 보기도 하고, 눌러 보기도 했다.
“죄송한데, 자리를 좀 비켜 주시면 좋겠습니다.”
“보면 안 되는 건가?”
“네. 아무래도 집중력이 흐트러질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치료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집중력이 흐트러지고 말고 할 일도 아니다. 단지 그들이 보고 있는 게 신경 쓰일 뿐이다.
“알았네. 치료에 방해가 된다면 비켜 줘야지.”
아들을 홀로 두는 것이 마음 쓰였지만, 이서우는 이미 한번 제다를 구해 줬다.
힘들게 구하고 다시 칼을 꽂을 사람은 없을 테니 남작은 흔쾌히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두 사람이 나가고 나자 이서우는 인벤토리에서 약을 꺼냈다.
“나아야 할 텐데.”
약병 마개를 뜯어 제다의 입으로 가져갔다.
의식이 없는 상태이기에 입술을 살짝 적시는 정도로 수차례 나눠서 복용시켰다.
작은 약병이 다 빌 때쯤 제다에게서 반응이 왔다.
“으흠…….”
“제다 님, 정신이 드십니까? 제다 님!”
“당신은…….”
“네, 접니다. 기억이 나십니까?”
“무, 물론입니다. 제가 어찌 모험가님을 잊겠습니까.”
거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지만, 제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정신을 기억이 돌아왔다는 건 희망적이야. 하지만…….’
뇌에 영향을 미치면 완치가 쉽지 않기 때문에 이서우는 그의 기억부터 살폈다.
다행히 기억이 또렷한 것에 안도했다.
문제는 겉으로 드러난 증상이었다.
초록색으로 변하고 있는 얼굴과 몸은 그대로였다.
“제가 나은 겁니까?”
“죄송합니다. 아직 완전히 나은 것은 아닙니다. 그저 의식만 차리게 했을 뿐입니다.”
“그래도 진전은 있는 거네요.”
낫지 않았다는 말에 실망했을 텐데도, 제다는 억지로나마 미소를 지었다.
“너무 염려 마십시오. 방법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가요? 역시 모험가님이시네요.”
대답은 긍정적으로 했지만 제다는 이서우가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그러는 것이라 여겼다.
제다는 치료사의 표정이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불가능하다 여기는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어찌 잊을까.
“남작님께서 걱정하시니 잠시 만나 뵙고 푹 쉬세요. 체력이 좋아야 병도 금방 낫는 법입니다.”
“네. 그렇지 않아도 많이 피곤하네요.”
이서우는 얼른 남작을 불렀다.
아들이 깬 것을 본 남작은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쉬어야 한다는 이서우의 말에 남작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리고 제다가 잠든 것을 확인한 후 다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고맙네.”
“아직 다 나은 게 아닙니다.”
“알고 있네. 하지만 아들이 깨어났다는 게 나에게는 무척이나 중요하네.”
기절한 이후 치료사를 찾았지만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의식을 차렸으니 남작에게는 새로운 희망이 생겨났다.
남작의 표정으로 그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알게 된 이서우는 살짝 부담이 되었다.
하지만 완치시킬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기에 자신감을 가졌다.
노련한 남작이 그런 이서우의 변화를 감지 못 했을 리 없다.
“역시 그럴 줄 알았네. 방법이 있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나?”
“생각해 둔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방법이 있다는 게 중요하지. 내 모든 걸 지원해 줄 테니 필요한 게 있으면 말만 하게.”
“그 말을 들으니 더 든든합니다.”
“아닐세. 오히려 내가 든든해.”
이서우는 몇 가지 준비를 해야 한다며 남작과 헤어졌다.
밖으로 나온 이서우는 남문으로 향했다.
이서우는 경비병들에게 극도의 예우를 받으며 남문을 벗어났다.
그가 향한 곳은 바로 다론 마을이었다.
이곳에서 제다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은 란셀밖에 없었다.
수도까지 가는 데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
간다고 해도 황궁으로 갈 수도 없었고, 가서도 최고의 치료사를 만날 수는 없다.
남작의 치료사는 왕의 주치의인 치료사가 최고라고 여겼지만 이서우는 아니었다.
란셀이야말로 대륙의 최고 치료사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실력은 좋은데 성격이 문제였다.
“생각보다 재회의 시간이 빨라졌네. 가면 또 그것도 못 고쳤냐면서 구박 안 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