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화양연화 (완결)
아이리는 눈을 떴다. 무슨 방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은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얼마나 오래 누워 있었던 걸까. 몸이 삐걱거리는 게 느껴졌다.
먼저 아이리는 커튼을 걷었다. 방에 있을 때는 몰랐지만, 눈부실 정도로 밝은 햇빛이 방 안에 가득 들어왔다. 연노란색의 빛이 따뜻하게 끼얹어졌다.
누군가가 문을 열었다. 그는 희한하게도 가토스를 닮았지만, 조금 어려 보였다.
“일어났네?”
그는 깨어날 줄 알았다는 듯 그렇게 자연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아이리는 별로 시간이 흐르지 않은 줄 알았다. 자신의 머리 길이도 전과 비슷했고.
“…누구세요?”
“나? 가티스 트라프비체야.”
그 꼬맹이였던 가티스 3황자가 이렇게 컸다고? 아이리는 당황해하며 물었다.
“제가 얼마 동안 이러고 있었죠?”
“5년?”
그의 입에서는 경악할 말이 쏟아져 나왔다. 아이리는 놀라다가 허리가 삐고 말았다.
“악!”
“조심해. 몸을 5년 동안 안 움직였는데, 몸이 당연히 굳었지.”
가티스는 툴툴거리며 아이리를 부축해 주어 침대에 눕혔다. 아이리는 옴짝달싹 못 하게 됐다. 그렇게 자유롭게 움직였던 영혼이, 몸에 갇히자마자 한계를 느껴 버렸다. 그녀는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에퍼리를 데리고 왔는데 막상 만날 곳에서 이렇게 못 움직이게 되다니.
“전 지금 일어나야 되는데.”
“조용히 해.”
가티스는 시니컬한 말투로 아이리의 이불을 덮어 주었다. 말투는 가테스를 닮았지만, 행동은 가토스를 닮았다. 그녀는 묘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리얀… 황제 전하는 어디 계신가요?”
“뭐, 황제? 그런 구시대적인 표현이 있나. 그런 말 하면 제국주의자로 몰려. 조심해. 누나는 지금 시장이야.”
가티스는 아이리에게 누워 있으라고 말하고 나갔다. 5년 동안 잠자고 있다가 깨어났는데, 그다지 놀라지도 않은 느낌이다.
곧 복도에서부터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노크도 없이 방문이 벌컥 열렸다. 거기에는 이미 눈망울에 물을 한 바가지 담고 있는 리얀이 있었다. 그걸 보자 아이리는 어색하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돌아왔구나.”
리얀은 앉은 아이리를 거칠게 안았다. 아이리는 그 와중에 조금 나은 허리가 다시 삐고 말았다.
“악!”
“누나, 조심해. 지금 몸이 성치가 않아.”
“…그렇겠네. 미안.”
가티스는 핀잔을 줬다. 리얀이 미안하다고 해도 이미 삔 허리. 아이리는 허리를 짚고 일어나려 했지만 다시 침대 신세를 지게 됐다.
아이리는 결국 침대에 누운 채로 리얀과 대화해야 했다. 리얀은 밤새 의자에 앉아서 아이리와 대화했다. 그녀는 얘기할 게 참 많은 모양이었다. 하긴,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니까.
참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협력하고 서로 돕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다른 도시에서도 수도를 재건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건너왔고, 그 결과 수도는 5년 만에 다시 만들 수 있었다.
황제라는 위치는 사라졌다고 한다. 계급사회도. 결국 리얀은 민선 1기의 수도 시장이 되었다고 한다.
여러 가지 변화된 환경, 사회, 정치 구조, 정책 등을 리얀은 쭉 나열했다. 그것만 해도 밤이 꼬박 샐 정도였다.
“아, 아침 회의 가야겠다.”
“한 시간도 안 잤잖아요?”
“너랑 얘기하는 게 재밌어서. 그럼 이만!”
리얀은 바로 의자를 밀어 놓고 달려갔다. 아이리는 산책을 하고 싶었지만 역시 허리가 삐어서 움직이지도 못했다.
또한 그녀를 찾는 방문객 또한 많았다. 몸을 되찾은 칸나 역시 아이리를 찾아왔다. 그녀는 군부대의 부대장을 맡고 있다고 했다. 5년의 시간이 흘러서인지, 꽤 과묵했던 칸나의 성격도 많이 바뀌었다. 성격이 개방적으로 변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수다스럽게 자신을 얘기했다. 원래는 평범하게 살면서 자신의 사랑을 찾아보려 했으나, 자신의 모습을 오히려 완전히 드러내는 게 사랑을 찾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부대장을 맡았다고 했다. 물론, 아직 사랑은 못 찾았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피곤해했지만 전혀 슬퍼하지 않았다. 아이리는 칸나의 활짝 웃는 모습이 어색했지만, 보기 좋기도 했다. 어쩐지 그녀와 더 친해질 것 같고, 그녀의 바뀐 모습에도 금방 적응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면, 다음에 봐요.”
“그래.”
그 이후로 많은 이가 찾아왔다. 옛날에 안면이 있었던 귀족들도 그녀의 쾌차를 축하하려고 다들 찾아왔다.
그중 가장 뜻밖의 손님은 가토스였다. 가토스는 웬일인지 자신의 몸을 되찾은 채였다.
“잘 지냈나?”
“아, 네. 돌아오셨네요.”
“음, 그렇지. 깨어나니까 어느새 새가 아니고 사람이 되었더군. 참 신기한 일이야.”
아마, 에퍼리가 한 일일 것이다. 모든 영혼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일 텐데.
그녀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에퍼리를 언급하지 않는 것이다. 아이리는 물었다.
“에퍼리는 어디 갔나요?”
“…누구 말인가?”
가토스는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는 에퍼리라는 존재에 대해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아이리는 가토스 옆에 딱 붙어 있는 여자를 보았다. 그녀 역시 낯이 익은 사람이었다. 아마, 채린이라고 했지. 에퍼리와 같은 곳에서 넘어온 사람. 그라면 에퍼리를 모를 리가 없다.
“에퍼리 모르나요?”
“모르겠는데요.”
정채린이라는 사람 역시 에퍼리를 모른다는 듯이 굴었다.
“장난하는 거 아니죠?”
“그럼요?”
“당신의 이름은 뭐죠?”
“정채린인데요.”
분명 이 세계와 다른 이름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자신이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 이름은 어디서 온 거죠? 우리 세계의 이름이 아니잖아요.”
“그다지 특이한 이름은 아닌데. 리얀 시장 보좌관 강태성 모르세요?”
“그래. 뭐, 이름의 형식이 다르기는 하지만 세계까지야…….”
가토스도 정채린의 말을 거들었다. 아이리는 혼란스러웠다. 말이 안 통했다. 자신이 누워 있는 동안 무엇이 바뀐 걸까. 에퍼리가 사라지면서 모든 사람이 잊어버린 걸까?
그나저나, 가토스와 정채린은 팔짱을 끼고 있었다. 아이리는 다른 주제로 돌렸다.
“둘이 사귀어요?”
“네. 왜요?”
“아… 그렇구나.”
“제가 먼저 대시했어요.”
정채린은 당당하게 말했다. 오히려 가토스가 부끄러운 듯 볼을 붉혔다. 꽤나 신기한 광경이었다.
그렇게 가토스와 정채린을 보내고, 아이리는 역시 수많은 사람을 맞이했다. 맞이하는 사람마다에게 에퍼리를 물었지만, 헛수고였다.
직접 자신이 발로 뛰고 싶었지만, 허리를 삔 상태여서 움직일 수도 없었다. 허리를 삔 걸 떠나서도, 5년이나 굳어 있던 몸은 재활이 필요했다.
사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리는 허리가 낫고 가티스의 팔목을 잡으며 걷는 연습을 했지만, 아직 나가서 걷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듯했다.
괜스레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자신은 그렇게 온 세계를 돌아다녀서 에퍼리를 찾았는데, 에퍼리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아이리는 결국 재활하는 데 온 신경을 쏟아야 했다. 그리고 가티스가 와서 틈틈이 바뀐 사회에 대한 교육을 해 줬다. 아이리는 바뀐 세상이 마음에 들었고, 금방 적응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들었다.
아이리는 가티스와 함께 공부를 하다가 궁금한 게 있으면 바로바로 물어보았다.
“그나저나, 가티스.”
“왜?”
황자 전하의 명칭을 뗀 지도 좀 오래되었다. 가티스 역시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아이리는 자신이 궁금해한 걸 물었다.
“내가 5년 동안이나 자고 일어났는데 왜 안 놀랐어? 별로 관심이 없었나?”
“그런 건 아닌데.”
가티스는 아이리의 농담에 머리를 긁었다. 가티스는 잠깐 생각하다가, 머리가 아픈 듯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기억이 날 것 같은데. 모르겠다. 아무튼, 너는 뭔가 의지로 가득 차 있는 인물이었어. 무엇에 대한 의지였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가티스는 그렇게 간단하게 대답하고 다시 교육을 시작했다. 아이리는 봄에 깨어나 여름, 가을, 겨울을 그렇게 보냈다.
그리고 다시 봄.
시간은 참 빨리도 흘렀다. 여전히 에퍼리는 소식이 없었다.
“어디 있는 거야, 이 새끼는.”
점점 아이리는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건 자신의 믿음이었으니까. 창문을 바라보며 에퍼리를 기다리는 것도 지겨워졌다. 이제 나갈 힘이 생겼어도, 어디에서 찾아야 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수도에서 벗어나면 엇갈릴 것 같기도 했다.
4월쯤이었다. 아이리는 가티스의 교육을 빠르게 흡수했고, 온갖 책들을 보면서 지식을 쌓았다. 그녀는 단기간 내에 사회문제에 대해 토론할 수 있게 되었고, 어떤 정책을 제시할 수도 있었다.
리얀은 그걸 반갑게 여겨 시의 복지 정책 담당관을 맡겼다. 그녀는 공직에 들면서 경호병이 생기게 되었다.
수도의 경호대장 말로는, 아이리의 경호를 바로 지원한 자가 있다고 했다. 아이리는 수도에서 인기 있는 인사였다. 지식도 많고 아름다웠으니까. 5년 동안 자다 깬 것이 언론의 화젯거리가 되기도 했다.
경호대장은 아이리의 경호원을 자처한 사람을 데리고 왔다. 경호원은 얼굴의 반을 가리는 투구를 쓰고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경호대장이 나가고, 그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너무 오래 걸렸네요.”
그 목소리에, 아이리는 번개를 맞은 것처럼 몸이 짜릿해졌다. 그는 투구를 천천히 벗었다.
그는, 자신이 기다리고 기다렸던 그 사람이었다.
아이리는 그가 투구를 벗자마자 명치를 내질러 버렸다.
“으억!”
에퍼리는 아마도 자신이 가진 강력한 힘들을 모두 잃어버린 것 같았다. 진심으로 아파하는 게 느껴졌다. 아이리는 주저앉은 에퍼리를 껴안았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사정이 있어서.”
그는 미안하다는 듯 주절주절했다. 아이리는 더 맞기 싫어서 그런가 싶었다. 일단 그의 말을 듣기로 했다.
에퍼리는 구구절절했다. 자기는 헌터-무슨 단어인지는 감은 잘 안 잡히지만-의 힘을 잃어 평범한 사람이 되어 버렸고, 자신을 만나려 했지만 그녀는 이미 절벽의 꽃이 되어 있었다는 얘기이다.
하긴, 아이리는 수도에서 그야말로 리얀의 품 안에서 자랐다. 일반인들이 그를 면회하기는 쉽지 않았다. 애초에 존재 자체도 잘 몰랐고.
일반인들이 아이리를 만나자고 해 봤자, 당연히 묵살되기 마련이었다.
“네가 네 존재를 지워서 그렇잖아.”
“그렇긴 하네요.”
에퍼리는 그렇게 말하면서 변명을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근데, 나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남아 있으면 사람들에게 의문의 대상이 되거나 신화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봤어. 난 그게 옳지 않다고 생각했어. 풀이 땅 위에 있을 때 제일 아름답듯이, 사람은 사람일 때 제일 아름답다고 생각했어.”
“헛소리하지 마.”
아이리는 다시 명치를 쳤다. 에퍼리의 궤변에는 진저리가 났다. 에퍼리 역시 자신의 잘못한 점을 알고는 있는지 맞아 줬다. 아이리와 에퍼리는 울거나 웃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원래 곁에 있는 게 자연스러운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래서 처음엔 시골의 부랑자로 다시 돌아왔는데, 내가 기술이 있어야지. 난 너를 만나기 위해 정말 인생을 바쳤어. 무과 시험이 어렵더라고. 그… 작년에 한 번 떨어졌어.”
그래서 1년이 지났구나. 아이리는 자신이 그를 찾은 만큼 그도 자신을 찾았다는 생각에 쉽게 마음이 풀어졌다.
“밖에 나갈까요?”
“아니, 아직 나 몸이 좀 힘들어.”
아이리는 지식의 단련에 힘을 쓰느라 몸이 아직 삐걱거렸다. 그도 그렇지만 리얀이 말릴 게 뻔했고. 에퍼리의 존재가 잊힌 이상 다른 이들에게 에퍼리를 설득하기에도 뭐했다.
아이리는 침대에 누웠다. 투구를 벗은 에퍼리는 그녀의 하얀 종아리를 주물러 주었다.
“그래서, 언제쯤 움직일 수 있을까?”
“도시 밖으로 움직이기는 쉽지 않지. 가끔 그, 시청 안으로 산책은 나가는데.”
“많이 바뀌었더라고. 그, 나가면 재밌을 거야.”
“그래.”
에퍼리는 아이리의 종아리를 주물거리면서 계속 말했다. 아이리는 죄책감을 가진 듯 열심히도 주무르는 에퍼리를 귀엽게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옛날 체력이 아니라 그런 것일까,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녀는 장난 삼아 그걸 혀로 핥았다. 에퍼리는 당연히 소름이 돋는 다는 듯 몸을 뒤로 쭉 뺐다.
“뭐 하는 거야?”
“뭐긴 뭐야.”
아이리는 가만히 누웠다. 창문 바깥으로 달이 샌다. 달에서 달빛이 흘러나온다. 다리에 힘이 점점 돌아온다. 새로운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게 될까. 안의 물건을 알 수 없는 상자 앞에 우리 둘은 서 있다.
이 순간보다, 행복한 순간은 없으리라.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