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사랑을 믿다 (4)
인간을 육체적으로 보존해 주는 건 혈액의 순환이지만, 정신적으로 보존해 주는 건 감정의 순환이다. 언제나 하나의 감정으로 살고 있다면 그건 미쳤거나 백치기 때문이다.
분노 끝에 평안이 오며, 증오 끝에 용서가 오며, 후회의 끝에 열정이 생긴다. 하나 지금 내게는 감정의 진폭이 없었다. 그저 인간일 때의 남은 감정을 소모하는 것뿐이었다. 소모가 되면 그 감정은 그것으로 끝이었고 내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게 되겠다.
무감각한 건 물론이고 무감정하다. 모든 게 하찮게 느껴졌다. 하찮다는 게, 내가 무슨 위대한 존재라서 그런 게 아니었다. 사람의 시선에서 개미를 봤을 때 그들의 치열함을 피부로 느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는가. 그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위대함과 덜 위대함의 차이가 아니다. 그냥 존재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난 영혼을 하나씩 불러 일으켰다. 지구의 헌터들 먼저. 그들은 내게 본능적으로 먼저 두려움을 품었다. 나는 총 하나를 만들었다.
인간이 만들 수 없는, 기술의 극단에 다다른 총이었다. 영혼이 사라지게 만드는 총. 내가 영혼의 구성 요소, 육체와 정신의 상관관계, 뇌의 비밀에 대해서 통달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안 돼, 안 돼!”
지구의 사람들은 내가 총을 날리기 전에 외쳤다. 나는 아무 감정도 없이 그들을 일렬로 세워 놓고 총을 쐈다.
현재 이 세계는 여신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영혼이 과포화된 상황이었다. 사라질 영혼들이 사라지지 않고 마물이 되었으니 당연한 결과리라.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제발 살려 주세요!”
그들의 감정이 풍부하게 담긴 외침은 내게 닿지 않았다. 선 위에 일렬로 나열된 사람들은 움직이지도 못한 채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원망스럽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권력을 탐한 자들이었다. 지구에서와 같이.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들은 S급 헌터들이었고, 각자 나라에서 정치적 권력을 가지고 있던 자들이었다. 원래 가지고 있던 걸 탐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니까.
탕.
탕.
탕.
사람들의 구멍 난 곳에서 피 대신 무색의 영혼이 빠져나왔다. 어떤 이는 자신의 차례가 오기 전에 자신을 죽이려고도 했다. 하지만 이곳은 인간의 자율적인 결단이 통하지 않는 곳이었다. 그들은 이미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착각하고 있는 건, 그들 자신이 아직 인간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욕망 덩어리에 불과했고, 그들은 스스로 사고하지 못했다. 생각하는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다.
총알은 사라지지 않는다. 총도, 총알도 내 의념이었다. 내 의념은 고갈되지 않는 우물이며, 총알 따위야 광대한 바다에서 두 손으로 퍼낸 물 정도의 비율이었다.
영혼이 사라진 사람들은 선 바깥으로 떨어진다.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모두 죽었다. 선 마지막에 남아 있는 건 누구보다 벌벌 떨고 있는 여신이었다.
“이건, 인격적이지 않아.”
여신은 그래도 나름의 자아를 구축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사고를 말하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학살하는 게 네가 나 대신 할 행동이야? 난 적어도 이러지 않았어.”
“학살이 아니야. 세계의 정상화를 위해서 하는 일이지. 그러니까… 엔트로피를 조절해 주는 거라고 할까.”
“무슨 개소리야, 대체?”
“아마 넌 이해 못 할걸.”
내가 볼 때는 여신의 문제점은 이것이었다. 인격이 남아 있는 자가 신을 흉내 내려 했다는 것. 난 신도 아니고 그 무엇도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법칙이었다. 거스를 수 없는 법칙.
난 더 이상 대화가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 여신을 향해 난 총을 쐈다.
“아아아악!”
여신은 무슨 일인지 소리를 질렀다. 고통을 느끼는 듯했다. 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여신은 아직 자신의 사고가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영혼들과는 달랐다.
심지어 그녀는 한 방에 날아가지도 않았다. 내가 총을 쏘면 안에서 무언가가 또 나와서 여신의 형태를 갖추었다. 여신 안에도 수많은 인간이 있었다.
여신은 어쩌면 나와 같은 하나의 법칙이 될 수도 있었다. 하나, 여신은 욕망 때문에 자신이 하나의 법칙이 되길 거부했던 모양이다.
탕.
“아아악!”
나는 계속 총을 쐈다. 총소리가 들리면 그녀의 안에서 또 다른 여신이 나왔고, 그것은 가죽을 한 겹씩 얇게 포를 뜨는 작업을 연상케 했다.
그녀는 너무 많은 욕심을 가졌다. 영생, 포식, 색욕… 그것들은 오히려 그녀가 고통을 느끼게 하는 원인이었다. 그것들은 너무 오랫동안 눌어붙어 한 방에 사라지지 않으니.
나에겐 시간이 많았다. 아니, 시간에 구애되지 않았다. 시간은 인간에게 허용되는 법칙 같은 것이었으니까. 난 그저 방아쇠를 당기는 행위를 할 뿐이다.
아마 내가 알레프에 의해 시공을 떠돌아다녔을 때는 3년이 걸렸지만 육체를 만들 때는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던 것도 이런 연유에서 기인했을 터다. 3년의 시간이 걸렸을 때는 어디선가 도망치고 싶었고, 1분의 시간이 걸렸을 때는 빨리 매듭짓고 싶어 했다. 모든 건 의식의 문제였다.
나는 그녀에게 고통을 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녀가 특별히 대단한 짓을 한 건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욕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욕구를 발산하지 못하는 사회적 위치에 있거나 법과 윤리적인 제약에 묶일 뿐.
하나 그녀는 그런 게 없었고, 그래서 욕구를 발산한 것뿐이다. 난 그녀를 동정하지도 않았지만 원망하지도 않았다.
그저 비명 소리만 길게도 울려 퍼졌다. 그녀에겐 영겁 같은 시간일 수도 있었다. 그녀의 상상력은 내 법칙 안에서 평범한 수준으로 격하되었으니까.
“제발, 제발 빨리 죽여!”
여신은 이제 그렇게 외쳤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죽이라고!”
그녀는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그렇게 많은 욕심을 지녔던 그녀도, 영혼이 깎여 나가는 고통에 모든 걸 내려놓고 싶을 정도로 포기 상태에 이른 것이다.
“네가 조금의 인정이라도 있다면 빨리…….”
그녀의 울부짖음에도 총소리는 규칙적으로 울렸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너한테는 미안하게 됐어.”
여신의 영혼은 무거워서 잘 떠나지도 않았다. 그녀의 잔해가 어떻게 보면 잔인하게도 퍼져 있었다. 마리나가 그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린 것으로 난 추측할 뿐이다. 난 아무런 감정도 없었으니까.
“뭐가?”
“이런 경험을 하게 한 것.”
“음.”
난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옆에는 또 다른 망령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가테스의 영혼이었다.
“네 목표를 찾았구나. 꽤 힘든 일이었을 텐데.”
“…알고 있었어?”
“지금 내가 모르는 건 없어.”
마리나 역시 지금 내 상태에 대해서는 예측을 못 한 것으로 보인다. 경험을 얘기하는 것도 그렇고, 나에게 무언가를 감추려고 하는 것도 그렇고.
“그런데, 이미 죽은 영혼은 사라져야 해. 영혼은 가면 갈수록 무거워지거든. 여신의 사례를 봤을 때. 한 사람이 2인분을 먹는 정도의 불공평함이라고 해야 하나.”
난 최대한 그녀가 이해하게끔 말해 주었다. 난 모르는 게 없다. 그녀의 마지막 목표가 우리 모두의 행복이 아닌 자신의 행복이라는 것도 난 알고 있다.
마리나는 가테스를 사랑했고, 가테스와 같이 있고 싶어 했다. 하나 가테스는 선천적으로 사랑이 결핍된 사람이었다. 그녀는 가테스를 개과천선시키려고 했고, 그것은 다시 태어나게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걸림돌이 된 건 바로 여신이었다. 여신은 죽은 영혼을 마물로 다시 만들고 있었으니까. 마리나 역시 여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거다. 영혼을 순환시키려는 생각. 하나, 그건 법칙에 어긋난다. 영혼은 순환할수록 무거워지기 마련이니까.
“너한테 조금의 시간을 줄 수 있어.”
“…동정이야? 아니면 우정?”
둘 다 아니었다. 그냥 시간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난 그들을 위한 하나의 시간선을 생성할 수 있었고, 그뿐이었다.
마리나는 똑똑했다. 내가 범접할 수 없고 타협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알았다.
“괜찮아. 나에게 필요한 건 아주 짧은 순간이니까.”
마리나는 생각보다 빨리 수긍했다. 난 가테스와 마리나를 위한 시간을 주고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내 존재의 본질은 고독이었다. 유일한 존재가 되는 순간 날 이해해 줄 수 있는 건 아무도 없었다.
날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인간이라는 동물에서 관계라는 의미를 뺀 존재였다. 식물과의 관계, 동물과의 관계, 다른 사람과의 관계. 나와 가장 가까운 감정의 형태를 고르자면 광기일 것이다.
따로 안배한 시간에서 거친 폭풍과 폭발이 일어났다. 가테스와 마리나는 서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나누고 있었다.
나는 이제 내 존재를 지우려고 했다. 내 사고 또한 서서히 멈춰 간다. 쉴 새 없이 돌아갔던 생각들이 건물 옥상에서 뿌리는 종잇조각처럼 어두운 곳,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난 원한다면 말할 수 있고, 원한다면 느낄 수도 있고, 원한다면 먹을 수도 있으나, 그 무엇도 원하지 않았다. 모든 욕구를 제거한 다음에는 사고의 제거가 이루어졌다.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제논 왕국의 병사들은 어떻게 된 거야?”
“건물들이 무너지고 있어!”
내가 사고를 거둬들일수록 어둠은 옅어져 갔고, 선은 점점 입체성을 띠어 하나의 공간이 되어 갔다. 제국의 수도가 정상화되는 과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부작용도 있었다. 사람의 상상력으로 지은 건물들이 모두 잔해가 되어 버린 것이다. 건물들뿐이 아니다. 사람들의 옷 또한 모두 사라져 버렸으며, 그들은 모두 나체로 평원 위에 서 있었다.
“좀 가려!”
“굳이 안 가려도 될 것 같은데.”
“…그런가? 모두 벗고 있으니 별로 상관없을 것 같기도.”
사람들은 자신이 나체임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
“스킬도 사라졌어!”
“그러네.”
몇몇은 습관처럼 호들갑을 떨었지만 대다수의 사람은 무심하게 받아들였다. 그들은 여러 가지 감정이 절제되어 있는 것으로 보였다. 부끄러움을 비롯한 호기심 등. 하나의 선에서 막 뛰쳐나온 영혼들의 부작용이었다.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인간은 항상심의 동물이고, 언젠가 답을 찾을 거니까.
물론 지금까지의 문명을 다시 이룩하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난 이제 시간에서 벗어난 존재라서 크게 의미가 없었다.
이제, 정말 잠겨 간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 어둠은 점점 걷히고 있었다. 이 어둠이 사라지면 나도 사라지겠지.
딱히 아무런 생각은 없었다. 나는 내 몸을 고개를 숙여 바라보았다. 점점 흩어지고 있었다. 사라지는 게 아니라 전 세계에 뿌려지는 것이었다. 인간의 육체는 거대해진 의식을 담기에는 연약한 그릇이었으니까.
어둠을 모두 걷으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내가 사라지기 직전, 저 멀리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은 내게 한참을 달려왔다. 그리고 내게 충돌하듯 안겨 왔다. 그건, 바로 아이리 라피테스였다.
“…대체 어디로 가는 거야?”
그녀의 질문에 난 대답할 수 없었다. 목적지가 없었으니까. 그녀는 날 붙잡고 흔들려고 했지만, 난 붙잡힐 수 없는 존재였다.
아이리의 허망한 눈빛, 원망스러운 눈빛이 나를 관통했다.
그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가 느껴졌다. 나는 그 무언가를 아이리에게 얘기해 주고 싶었지만, 이미 사라지기 시작한 내 몸은 걷잡을 수 없었다. 그녀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그녀의 눈으로는, 내가 사라진 것으로 보일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