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스판타지로 떨어진 S급 헌터-147화 (147/150)

147화 사랑을 믿다 (3)

어둠 속에서 온갖 형태들이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아니, 그저 나부낀다고 하는 표현이 맞을지도. 그 와중, 마리나는 고고하게 여신을 마주 보고 있었다.

“지구에서 온 사람들은 대개 반골의 상들이구나. 내가 널 성녀로 만든 걸 모르는 모양이야. 그렇기 때문에 네가 대접받은 거지.”

여신은 마리나를 노려보았다. 마리나는 개의치 않은 듯 비웃고 말았다.

“너희가 뭘 생각하는지 몰라도 이 세계는 이미 망가졌는걸. 이렇게 된 이상 다시 씻어 내는 수밖에 없지. 이렇게 말이야.”

여신은 우리에게 하나의 장면을 보여 줬다. 사람들이 서로 죽고 죽이고, 서로 증오하고 원망하며 분노하는 장면들이었다. 이것들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상황들이었다.

그야말로 광기가 흐르는 곳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눈에는 광기로 보였지만 여신에게는 인간 본성으로 보일 것이다.

제국의 수도에 있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무장이 안 되어 있는 일반 시민들이었다. 내가 아는 전쟁법상 민간인들은 당연히 죽일 수 없었다. 그건 국제법상 걸리는 일이었으니까.

법이 아니더라도 도덕적인 이유에서 그런 점은 확실했다. 내가 아는 한 인류가 100년간 민간인을 죽인 사례는 없다. 물론 200년 전에는 있었다고 하지만. 그러나 지금을 보라.

“제국 안에 있는 사람들을 절멸해라! 저들에게는 죽음이 구원이다!”

내가 충격받은 건, 그것도 지구에서 비슷한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었다고 생각한 헌터들이 앞장서서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다니고 있었단 점이다.

신체에서 빠져나온 영혼들이 하나둘씩 내가 있는 검은 배경으로 떠오른다.

“너도 자신을 그만 속이고 본성을 끄집어내라. 인간들은 생명을 존중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자신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만 존중하지. 너 역시 그러니까 네 지인들을 다른 곳에다 가두고 민간인들을 죽인 것 아니냐? 네가 도외시한 다른 도시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지.”

“아니야.”

나는 부정했다. 난 마리나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여신이 날 알아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난 철이 들기 전부터 싸우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적들과 타협해 본 적도 없다. 여신은 내가 이해시킬 상대가 아니었다.

“자, 지금까지 잘해 줬어, 주환영 씨. 난 정말 깊은 고마움을 느끼고 있어. 난 이게 우연한 일이라는 걸 알아. 나, 아니 우리는 수많은 반복을 거쳐 왔고, 나는 그저 똑같은 상황을 쥐여 줄 뿐이었어. 네가 이 세계를 구하고자 마음먹은 건, 어쩌면 세속적인 영웅심의 발로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정말 훌륭한 위인의 마음가짐일 수도 있겠지. 무엇이 됐든, 난 당신에게 영광을 돌리고 싶어.”

마리나는 박수를 쳤다. 그녀의 박수는 내게 조그마한 위로가 되어 줬다. 난 그녀의 말대로 다시 이 상황이 됐을 때 똑같은 행동을 할 자신이 없었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같이 편안한 삶에 적당한 사치를 누리고 싶은 보통 사람이었으니까. 이렇게 날 이끈 건, 분명 아이리를 향한 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죽여라, 다들 죽여라!”

“싸워라, 싸워!”

난 수도 안에서 벌어지는 잔인한 상황들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여러 건물이 의미도 없이 불타고 있으며, 사람들의 피가 건물 벽에 덧칠된다.

사람들의 비명과 울음이 하늘에 닿는 듯하다. 그들은 왜 자신이 죽어야 되는지, 자신들이 왜 이렇게 광증에 시달리고 있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나마 그들의 전진이 더딘 건 내가 내려앉힌 어둠들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명백히 말하자면 그저 어둠이 아니었다. 작은 알갱이가 되어 빼곡하게 세상을 채운 영혼들이었다.

그것들이, 피 냄새를 맡고 점점 깨어나고 있었다. 영혼들이 주변에서 숨 쉬는 게 느껴진다.

영혼들이 하나둘씩 깨어나자 여신도 슬슬 내 공간에 대해서 눈치를 챈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굉장히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네가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그들은 과거 시대의 유물일 뿐이야. 세계를 얼마나 혼란스럽게 할 거야?”

“너도 과거 시대의 유물이잖아.”

내 입에서는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나왔다. 영혼들이 내 몸속으로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영혼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내게로 흡수되고 있었다. 막 죽은 영혼부터 여신과 같은 시기를 살았던 영웅들까지.

“네가 스킬을 제한시키고 사람들의 분노를 돌리기 위해 마물을 만들었던 것도 이해를 못 할 바는 아니다. 사람의 본능이란 폭력적인 걸 수도 있지. 진실보단 거짓말을 많이 말할 수도 있고. 하지만 그게 네 개인의 욕구를 취하기 위해서였다는 걸 우리는 몰랐을 뿐이야.”

누구의 영혼인지 모를 목소리가 여신을 지탄하고 나섰다. 아마도 이들은 꿈에서 나다니거나 마물이었거나 하던 사람들일 터다.

사실 나는 성대가 없어서 목소리라고 하기도 뭐했다. 그저 영혼의 울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를 통해서 무언가 말하고 싶은 사람들이 중구난방으로 여신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여신은 그들을 비웃었다.

“그래서? 결국 역사에 남은 건 나고, 내가 승리자야.”

나는 대신 고개를 저어 주었다. 이들이 전생에 무엇을 했는지는 나도 알 수밖에 없었다. 영혼이 들어왔으니까. 만약 내가 뇌가 있었다면 이들의 기억을 전부 담느라 터져 버렸을 거다.

난 인간을 포기하면서 인간 외의 그릇을 갖게 되었고, 하나의 우주를 품을 수 있게 되었다. 인간들의 기억이 아무리 쌓여도, 하나의 단칸방에 가둬 놓을 수 있었다.

확실히 이들은 여신의 말대로 떳떳하기만 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하나, 나는 이들이 필요했다.

나는 지금 사람과 사람의 영혼이 연결되는 매개체였다. 나는 그들의 전부를 이용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충분하니까. 신기하게도, 이렇게 수많은 영혼이 내 안에서 함께 숨 쉬어도 서로가 완벽히 일치하는 개체는 없었다.

어떤 이는 성인군자의 인격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이는 사이코패스였으며, 어떤 이는 보통 사람이었다.

나는 내 몸 안에 있는 수많은 영혼의 교집합을 볼 수 있었다. 그건 보석같이 여러 면을 지니고 있었으며, 빛이 나고 있었다. 그걸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는 알고 있니?”

“알고 있어.”

사실, 내가 여신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상상력이라고 한들 나는 여신처럼 저렇게 많은 사람을 조종할 수 없었다. 그건 상상력의 한계였다.

여신과 나에게는 천 년의 격차가 있었다. 그녀는 상상을 하는 데에 나보다 능숙했고, 사람에 대한 통찰력도 나보다 강했다. 많이 아는 사람일수록, 오래 산 사람일수록 상상력이 많기 마련이었다. 나는 그 부분에서 취약했다.

결국 내가 결론을 내린 건 수많은 사람들의 역사를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사람들과의 공유와 관계가 얼마나 큰 힘을 이뤄 내는지 아이리와의 밤에서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나는 여신을 압도할 수 있는 상상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는 한 편, 내가 지키기 바랐던 내 일말의 인간성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인간성이 사라지는 순간 뜻하지 않게 나는 우주의 비밀을 관통할 수 있게 되었고, 세상에 존재하는 수만가지 담론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제 주관적인 사고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난 객관적인 사고를 할 수 있었고, 객관적인 사고 그 자체였다.

이 세계뿐만도 아니었다. 내가 볼 수 있는 다른 세계들이 있었다. 어떤 곳은 증기기관과 톱니바퀴가 가득했으며, 어떤 곳은 하늘에 탑이 있었으며, 어떤 곳은 인간들이 동물에게 지배받고 있기도 했다. 이 외에도 정말 많은 세계가 있었다.

“또 하나의 존재가 떠올랐구나.”

“반가워라. 요즘에는 동지가 많이 없는데.”

이미 나와 같은 경지에 오른 존재들이 있었다. 그들은 내게 짤막한 인사를 건네주었다. 난 오히려 그들과 공감할 수 있었다. 그들은 나와 다른 수많은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물론 결론은 같았지만.

여신은 이 정도 경지에까지 못 이르렀다. 그녀가 말하는 ‘격’에서 나는 그걸 느낄 수 있었다.

여신 역시 나와의 격을 느꼈다. 그녀는 내가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는데도 불안해했다.

나는 일단 제논 왕국의 병사들 손에서 병장기들을 모두 회수했다. 여신은 내 거대한 사고 안에 가둬 놓았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두껍게 접혀 내 안에서 하나의 이론이 되었다.

어둠 속에서 모든 것은 하나의 선이 되었다. 제국이 역사로 이루어 낸 위대한 건축물들, 문화들이 접혔다.

그것들은 하나의 흰 줄이 되었는데, 나는 그걸 줄타기하듯이 걸었다. 난 이 존재가 되면서 궁금한 점이 사라졌다. 모두 미약한 존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인간과 나의 차이는 어느 순간 사이에 몇 개의 은하를 둬도 메워지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다.

내가 이렇게 행동하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나는 선 위에서 주머니에 손을 꽂고 있었다. 지금 나는 갈색 코트를 입고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왜 이런 모양이 됐는지는 모른다. 그냥 내가 이러고 싶었나 보다.

허리를 숙여 선 안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낸다. 그 무언가는 하나의 형체가 되어 내게 끌어 올려졌다. 그건 내 옛 친구, 구공환 아저씨였다.

“뭐, 뭐야?”

처음에 그는 내가 누군지도 몰라봤다. 자신이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도 몰랐다. 확실히, 주변을 둘러보면 이 세상이 아닌 면모가 많았다.

“…당신은 누구요?”

“날 모릅니까?”

“어떻게 압니까, 그런 모습으로 있는데. 그냥 옷만 걸쳐 입은 슬라임 같이 보입니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난 순간 내 얼굴과 모습이 어땠는지 기억해 낼 수 없었다. 왜냐하면, 너무 사소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방대해진 내 의식에서 그것을 끄집어내기까지는 퍽 오랜 시간이 걸렸다.

“환영이구나.”

“네, 안녕하세요.”

“어쩐지 네 앞에서는 거짓말을 못 하겠네. 아니,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고 해야 하나. 이미 알고 있단 게 너한테서 느껴져. 신기한 기분이야.”

구공환 아저씨는 허허 웃었다. 난 그 이유를 알고 있다. 난 그와 좀 더 내밀한 대화를 하고 싶어서 그의 욕망을 벗겨 낸 채 불완전한 영혼 상태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뭔가, 초월한 느낌인걸.”

“그럴 거예요.”

“네가 무슨 짓을 했구나.”

“맞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구공환 아저씨는 어디서 꺼냈는지는 몰라도, 주머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어 물었다. 어둠 속에서 연기가 우리 사이를 맴돌았다.

그는 담백하게 말했다.

“내가 널 배신했어. 네 심리를 흔들려고 했지. 별다른 이유는 없어. 그냥, 내가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 다른 나라 헌터들과 같이 있었고, 그들과 섞이고 내가 한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그것밖에 선택지가 없었어.”

나는 이런 대화를 원했다. 그에게서 다른 욕망을 제거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시답잖은 변명은 듣고 싶지 않았다. 그냥, 사실 그 자체만 듣고 싶었다.

“그렇군요. 근데, 아저씨는 꽤 저랑 친하다고 생각했어요.”

“친하지. 음, 지금 내 안에서 무언가 없어진 기분이 드는데, 난 지금에서 너를 더 친근하게 느끼고 있어. 아마 내 안에 있던 것들이 너를 시기, 질투하고 있었거나 내 성공이 더 마려웠거나, 둘 중 하나지 뭐.”

“시원하시네요.”

“음, 그러게? 난 네 앞에 서면 쪽팔려서 말도 안 나올 줄 알았는데.”

그건 그가 없어졌다고 느낀 욕망들을 제거해서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나는 구공환 아저씨에게 이런 평안을 주고 싶지 않았다. 개인적인 감정이 섞였다기보다는, 그게 순리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잘 들었어요. 아저씨, 난 당신을 탓할 생각은 없어요. 이미 알고 있기도 했고. 그냥, 마지막 인사 같은 거였어요.”

“무섭게 말하는구나. 난 지금의 감정이라면 너한테 사과를 하고 싶은데… 네가 사과를 받아 줬으면 하고. 물론 뻔뻔한 짓인 걸 알지만.”

“그건 안 돼요. 전 지금 감정이 없거든요. 사과를 받을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그냥, 그런 게 무의미해졌어요.”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아마 이해를 못 하겠지. 그는 욕망이 사라져 있다고 해도 인간적인 감정으로 날 대하고 있었다. 언뜻 들으면 이기적인 말도 그의 순수한 감정일 것이다.

“아저씨는 지구에서 제 깊은 친구였어요. 고마웠어요.”

“너, 너 지금 뭘 하려는 거냐?”

나는 그를 다시 눌렀다, 선 안으로. 그는 본능적으로 소리를 외쳤다. 존재가 사라진다는 공포감에 시달린 것 같았다. 그는 마지막까지 내게 미안하다고 소리쳤지만, 난 받아 줄 수 없었다. 그의 마지막에서도 외칠 정도면 어지간히 진심이겠지만.

이미 나는 강을 건넜다. 돌이킬 수 없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