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분노 (5)
“저 귀해 보이는 사람이 죽였나?”
채린이는 눈짓만으로 사건의 인과를 파악했다. 그건 나도 바로 파악한 바였다. 리얀 앞에 떨어져 있는 칼과 엎어져 있는 시체의 상흔이 딱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뭔가 그… 아까 새, 아니 새님이랑 눈이 좀 닮았다, 저 사람.”
새님은 뭐야. 난 잠깐 생각한 후에 채린이가 가토스를 말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새가 됐는데도 핏줄이라는 걸 알아냈단 말인가. 대단한 눈썰미다.
“남매야.”
“응? 새랑 인간이랑?”
내가 사실을 말해 주자 채린이가 놀랍다는 듯 입을 가렸다. 아니, 지금 이런 데 시간을 쓸 때가 아니었다.
“리얀, 괜찮아요?”
나는 리얀을 불렀다. 리얀은 아이리의 품에서 진정을 되찾은 것 같았다. 가티스는 놀랍게도 그렇게 당황한 것 같지는 않았다.
“황자 전하, 괜찮아요?”
“에퍼리, 살아 있었네?”
“네. 뭐 어쩌다 보니.”
가티스는 꽤 평온해 보였다. 난 하나 그것이 더 불안정해 보였다. 사람은 흔들려야 정상이다. 하나 가티스는 흔들림이 없었다. 차가운 눈빛이었다.
“리얀,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
아이리는 여전히 충격에 빠진 리얀을 달래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서 말을 꺼낸 건 바로 가티스였다.
“누나 잘못이 아니야. 내가 죽였어.”
“아니, 아니야. 내가 죽였어.”
“왜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해?”
가티스는 심지어 앞에 엎은 칼을 들어 시체를 푹 찔렀다. 시체는 인형인 것처럼 칼에 찔려서 흔들렸다. 확실히, 가티스는 내가 알던 가티스가 아니었다.
가티스는 굳이 형제를 따지자면 가토스를 닮은 사람이었다. 천진난만하고, 밝고, 티가 없는 아이. 그러나 지금 가티스는 오히려 가테스를 닮은 것처럼 보인다. 저 싸늘한 무표정이란, 가슴을 철렁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가티스, 대체 왜 이래?”
“뭐가?”
리얀이 가티스의 칼을 뺏어서 던졌다. 가티스는 오히려 자신에게 왜 그러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일단 리얀과 가티스를 분리시켰다. 내가 볼 때는 지금 리얀보다 가티스가 더 심각해 보이기는 했다. 저런 모습이 굳어진다면 가티스는 영영 행복하게 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리랑 칸나가 가티스를 맡고, 난 일단 리얀을 불렀다.
“리얀,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은데…….”
“…그래. 알아.”
그녀는 자신이 겪은 정신이상부터 설명해 주었다. 그건 자연스럽게 드는 생각이라고 했다. 자연스러운 살의와 불안, 그녀는 가티스를 죽일 뻔했다고 고백했다. 그 와중 가티스는 죽음에 대해 무감각해 보였다고 말했고.
그때 갑자기 누군가 방을 박차고 들어와 자신들을 죽이려고 했고, 리얀이 칼을 뺏자 가티스가 그 칼로 그 사람을 죽였다는 것이다.
하나 가티스는 리얀을 방어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내가 걱정했던 것처럼 가테스처럼 사이코패스가 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가티스가 날 지켜 주려고 했을 때 난 엄청난 무력감에 빠졌어. 자괴감도 있었지. 날 지키려고 하는 사람, 그것도 내 동생을…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그건 리얀 잘못이 아니에요.”
그녀는 그런 생각을 거치며 곧 살의가 사그라드는 걸 느꼈다고 한다. 이 살의는 감정과 상관관계가 있는 것일까? 어떤 부분을 건드렸기에 그런 걸까? 확실히 여신도 만능은 아니다. 여신도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도시는 어떻게 이렇게 막은 거예요?”
“그건, 그, 노을이들이 알아서 한 거야. 그들은 무언가를 느꼈대, 이런 게 필요하다고.”
노을이라. 그러고 보니 노을이들은 여기서 대체 뭘 하고 있을까. 나만 그렇게 따르던 놈들인데.
아무튼 지금 이 비상시국에서는 노을이들이 거의 모든 일을 도맡아하고 있다고 한다. 난 그저 머릿수만 채워 넣으려고 한 건데, 그들이 하나의 역할을 맡았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내 감정에 대해서 모르겠어. 네가 내 사랑이 언젠가는 사라질 거라고 했잖아. 그런 생각이 어쩌면 맞는 것 같기도 해. 그렇다면 내가 사는 이유는 뭐야? 남들에게 다 좌지우지 될 정도면 내가 사는 이유는 뭐고, 이렇게 살아갈 이유는 또 뭐냐는 말이야.”
“…글쎄요.”
나는 아쉽지만 그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해 줄 수 없었다.
“난 이제 나를 믿지 못하겠어. 내가 사는 주체가 내가 아니라고 한다면 살 이유조차 없어. 누군가가 내 마음을 조종하고 있어. 난 너를 사랑한다는 마음조차 뺏겨 버렸단 말이야. 이제 너를 봐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아. 근데, 뺏긴 감정의 공간은 남아 있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울었다. 그녀는 모든 걸 빼앗긴 셈이었다. 감정의 주체, 행동의 주체, 그녀는 모든 걸 뺏기고 말았다. 그녀가 잘못된 건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뭇 사람들처럼 느끼는 감정에 따라 행동했다. 다만 그것이, 자신의 감정이 자의가 아닐 뿐이었다.
그게 그녀의 불행한 점이었다. 첫 단추부터, 순리에서 어긋나 버렸다. 그녀는 원래 여자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태어났고, 그 본성은 원래라면 지속되어야 했을 터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 의하여 바뀌었고, 그것이 결국 그녀의 정체성을 잃게 했다.
나는 다시금 이 세계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내가 느끼는 감정에 난 솔직하려고 노력했어. 근데 그 느끼는 감정이 거짓이라면 어떻게 해야 될까? 몸에 화상의 흔적이 없는데 내가 타오르고 있다고 말하면 누가 알아줄까?”
그녀의 계속된 질문에도 난 답할 수 없었다. 아마 대답할 수 없는 문제겠지, 인간의 결함에 대한 문제니까. 여신은 대체 어디까지 인간을 망가뜨리려 하는 것일까? 난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리얀은 지금 분노를 하고 있었다. 주체를 뺏긴 사람의 분노. 그녀는 지금 말 그대로 타오르고 있었다. 커다란 분노 앞에, 난 손을 대지도 않았는데 불이 붙은 느낌이었다.
* * *
“오셨습니까.”
“어… 잘 있었어?”
노을이들과의 만남은 뭔가 좀 이상했다. 그들이 나보다 훨씬 잘 차려 입고 있었고, 완전한 인간 같았으니까. 인간 사회에 편입된 지는 3년이 채 됐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인간 같을까.
마치 오래된 제자들이 나보다 훨씬 성공한 다음에 그들을 다시 보는 느낌이랄까. 뿌듯하기도 하고, 좀 웃기기도 하고, 그립다는 느낌도 들었다.
“당신의 뜻대로 리얀을 보필했습니다.”
“응, 잘했어.”
“현재 인간 사회에서 큰 병이 일고 있습니다. 알고 계시겠지만요. 그걸 수습하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그들은 상관에게 보고를 하는 듯 말했다. 원래는 슈퍼 노을이 한 명만 말했었는데, 모두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나에 대한 존경심도 똑같았다.
“그렇구나. 뭐, 너희한테는 딱히 영향이 없나 보네.”
“인간들에게만 해당되는 병이니까요. 하지만 저는 당신께서는 현혹되지 않으리라 믿었습니다. 보통 강한 사람들이 현혹되지 않더군요. 저희는 현혹되지 않은 사람들을 분리하고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뭔 훈련?”
“군사훈련입니다. 위쪽의 제논 왕국에서 쳐들어올 거라는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노을이는 말했다. 갑자기, 천장에서 거미줄이 축 늘어지면서 그가 보고하고 있는 화이트보드 앞에 거미 한 마리가 내려왔다.
“현재 제논 왕국 측은 이 질병이 발발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 중입니다. 사람들은 평온하며, 전쟁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국재(國災)인 지진과 화산의 별고도 없습니다.”
“…얜 뭐야?”
엄청나게 어려운 언어를 구사하는 거미가 내 눈앞에 떨어졌다. 거미는 굽은 다리를 자신의 머리에 대었다.
“충성! 에퍼리 군단장님께 인사 올립니다. 황국 정보부 소속 화이트 록 대령입니다.”
“아. 군인이야? 응. 반갑다.”
경례를 대충 받아 줬다. 좀 멋쩍은 느낌이 난다. 근데 얘 말은 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저희는 현재 신성력에 대해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신성력과 생물이 감응하면 생물의 지능이 높아지더군요. 저희는 그것에 착안하여 다른 생물들을 훈련하고 있습니다.”
“아, 그래……? 근데 신성력을 너희가 사용할 수 있어?”
신성력은 인간의 상상력이 만든 힘이었다. 그걸 노을이들이 자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가.
“신성력이라는 건 별게 아닙니다. 신성력이란 곧 상상력의 문제이기 때문에 누구나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저희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걸 어떻게 또 알았네.”
노을이들이 굉장히 똑똑한 모양이다. 어떻게 보면 인간보다 낫다고 해야 하나. 내가 그렇게 많은 경험으로 미루어 도출해 낸 결과를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 그들에게는 어떤 불문율이나 이런 게 없었으니 그럴 수도 있지만.
“현재 저희는 여신이 인간이거나 인간이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꽤 논리적인 추리력으로 정답에 근접해 있었다. 그들의 사고력이란 굉장했다. 뒤에 말하기로는, 노을이들끼리의 사고는 연결되어 있어서 하나의 집단 지성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덕에 하나의 인간보다는 훨씬 월등한 상상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대단하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노을이는 겸양의 제스처를 취했지만 내게는 무엇보다 뛰어나 보였다. 역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더니 다 거짓말이다. 이렇게 인간의 추악한 면까지 다 보고 있으니까 내겐 그것이 더욱 실감나게 다가왔다.
나는 다리를 꼰 다음 여러 생각에 빠졌다. 지금까지 내가 겪었던 경험들, 상상력, 감정… 나는 결론에 다다랐다.
* * *
에퍼리는 무언가를 하려는 모양인지 이리저리 움직이느라 바빴다. 아이리도 나름 바쁘기는 했다. 가티스와 리얀 곁에서 그들을 보호해 주고 있었으니까.
퍽 섭섭하기는 했다. 그래도 사랑 고백까지 해 놓고 막상 황도에 돌아와서는 복도에서 잠깐 눈만 마주치고 인사하는 정도였으니까. 물론 지금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해할 수 있었지만, 마음 깊이 우러나오는 서운함은 어쩔 수 없었다.
한 사람에게서 가장 개인적인 것을 꼽자면 시간일 것이다. 아이리는 에퍼리의 시간을 독점하고 싶었고, 그의 전체에 자신이 스며들기를 원했다.
“아이리는 에퍼리랑 사귀는 거야?”
그때 뜬금없이 가티스가 물었다. 가티스는 아이리가 알던 것과는 다르게 도통 말이 없어졌는데, 쭉 말이 없다가 처음 꺼낸 말이 그것이었다. 아이리는 당연히 놀랐고, 리얀도 덩달아 놀랐다.
“음… 네.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서로 보는 눈빛이 다정해서.”
가티스는 툭 내뱉었다. 어떤 눈빛이 이 아이에게 보였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사랑이란 뭐야?”
가티스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아이리는 머리를 꼬았다. 꽤 어려운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글쎄요. 서로 좋아한다는 감정을 느끼는 것?”
“그럼 나랑 누나는 사랑하는 거야?”
“그렇죠?”
“아니야, 너희는 뭔가 좀 달라.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건 다른 거야. 사랑은 뭔가 구별될 필요가 있어. 난 그걸 알고 싶은 거야.”
가티스는 퍽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 그러게. 사랑이란 뭘까. 어려운 말이었다. 표현하기에는 이만한 입체적인 감정도 없었다.
지금 에퍼리가 눈앞에 있으면 더 좋은 대답을 할 수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에퍼리는 오지 않겠지, 일이 바쁜 모양이니까. 에퍼리의 말로는 제논 왕국이 습격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때 누군가 노크를 하고 바로 문을 벌컥 열었다. 뜻밖에도 에퍼리였다. 그는 웬일로 좋은 옷을 차려입고 꽤 멋지게 꾸민 상태였다. 귀찮다고 대충 편한 옷만 입더니.
“웬일이야?”
“나올래?”
에퍼리는 아이리에게 말했다. 그 말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따뜻함, 안도감, 의지 등. 그녀는 곧바로 그걸 느꼈다.
“데려가도 돼요?”
에퍼리는 리얀과 가티스에게 물었다. 리얀이 고개를 끄덕이기 전에 가티스가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 못하면 알 수도 없겠네. 저렇게 복잡한 감정이라니. 데리고 가.”
가티스는 제 나름의 결론을 내린 듯했다. 아이리는 뭔가 더 얘기를 해 주고 싶었지만, 에퍼리는 아이리의 손을 채서 일으켰다. 그답지 않은 거친 손놀림이었다. 아이리는 당황해하면서 에퍼리에게 끌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