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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판타지로 떨어진 S급 헌터-134화 (134/150)

134화 다른 사람 (4)

갑작스러운 신성파 사람들의 변화에 다른 사람들 역시 적응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스프리는 그들과 내가 연이 있다는 걸 눈치채고 반신성파 사람들을 해산시켰다.

“대체 왜 너희가 여기 있는 거야?”

“뭐긴 뭐야. 리바이어던한테 먹힌 거지.”

그나저나 내가 왜 이들한테 보이는 건지 모르겠다. 크리스털 목걸이가 무슨 작용을 한 것 같은데, 정확한 건 모른다. 그걸 알려 준 건 스프리였다.

“자연의 힘이 에퍼리 님과 함께하는군요.”

“자연의 힘?”

내가 되묻자 스프리는 마치 입에 올리기도 송구하다는 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여신이 나오기 전 원래 이 세상을 지배하셨던 존재들이죠. 그분들이 영혼의 모습을 비춰 주고 있는 겁니다.”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크리스털 안에 있는 게 자연의 힘이었고 그게 내 영혼을 실체화해 주는 힘이라는 건 알았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닌 것 같은데.”

채린이가 스프리를 노려보았다. 어쨌든 사상적으로 반목하는 그들이다. 나 때문에 잠깐 봉합되었다고 한들 일시적인 것뿐이었다.

“그래. 근데 너 왜 이렇게 컸냐?”

“여기 온 지 3년은 됐지.”

“아.”

그러고 보니 내가 여기 온 지 한 4년은 됐지. 몇 년이 지난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지만, 어쩌면 이들을 이렇게 만나기 위해서 3년이나 지난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하여튼, 사건을 몰고 다니네. 설마 그 반신이라는 게 아저씨인 줄은 몰랐다. 우리는 제국 측 사정을 모르니까.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그걸 나도 묻고 싶었는데.”

아무튼 서로 길게도 엇갈렸다. 적어도 다행인 건 그들이 날 적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거였다. 난 그들이 반가웠지만, 이 상황이 아주 고까운 한 사람이 있었다.

“잠깐, 좀 떨어져서 얘기하면 안 돼?”

아이리가 채린이와 나를 완전히 갈라놓고 중간에 섰다. 채린이는 억지로 내게서 떼어 내졌다. 나와 어깨동무를 하던 다른 남자 헌터들도 아이리의 살기를 보고 슬며시 내게서 떨어졌다.

“아저씨, 얜 뭐야?”

“뭐? 얘?”

“아가씨, 채린아, 그만. 이럴 때 아니잖아.”

채린이는 피식 웃었다.

“어우, 아가씨래. 호칭 소름 돋네. 아주 현지인 다 됐네.”

하긴 지구에 살면 아가씨라는 소리를 들을 일이 없지. 어디 사극에서나 들을 단어인데. 채린이가 한껏 비웃었고, 아이리는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채린이나 아이리나 성격이 상극이라는 건 알았다. 채린이는 어릴 적부터 S급 헌터가 된 애라 너무 자유분방했고, 아이리는 뼛속까지 귀족인 사람이다.

“이 사람은 뭔데? 친구야?”

채린이가 물었다. 그때 아이리가 날 바라보았다. 난 즉각 대답했다.

“소중한 사람.”

뇌를 거치지 않고 나온 대답이었다. 그냥, 마음 깊이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근데 뭔가 많은 설명이 생략됐다는 걸 알아차린 건 다른 사람들의 표정 때문이었다.

다른 헌터들과 채린이는 묘한 표정이 되었고, 아이리는 얼굴이 붉어졌다. 채린이가 나와 아이리를 빠르게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채린이뿐만 아니라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리가 민망했는지 주제를 돌렸다.

“일단, 얘기할 거나 빨리해.”

“아. 일단, 이 사람부터 풀어 줘야겠네.”

채린이는 청소기의 몸통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칸나의 영혼이 다시 빠져나왔다. 사람의 영혼이 저렇게 쉽게 빨려 가고 빠져나올 수 있다는 것에서 난 놀랐다. 칸나는 멍하니 빠져나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느낌이었다.

“정말 막장이구나, 여기는.”

“이 세계가 원래 그래. 과학이 발전했잖아.”

난 뭔가 그 영혼을 빨아들인다는 힘이 거북했다. 그건 내가 볼 때는 한참 선을 넘은 힘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 너도 느끼고 있구나.

그건 말이라고 하기엔 뭐했다. 어디에 적힌 의념을 내가 보는 기분이었다. 그 글자들은 내 뇌리에 박혔다.

- 난 저들이 자연이라 부르는 힘이지. 굳이 나한테 뭘 꾸미지 않으려고 해도 된다. 난 그저 흘러가는 자이니.

- 그래요? 당신은 지금 뭐 하는 건데요?

- 그냥, 뭘 한다기보다는 안 하고 있어. 그냥 흘러가는 거야.

뭔 소리야. 선문답 같은 느낌이다. 나는 지금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사람이 아닌 것과 대화 중이다. 검은 나무도 결국엔 사람으로 밝혀졌으니까. 확실히 뭔가 말이 안 통하는 건 감수해야 했다.

- 나한테 바라는 게 뭡니까?

- 음, 난 사람한테 굳이 바라는 게 없는데.

- 그럼 나한테 왜 말을 건 거예요?

- 그러게. 내가 너한테 바라는 게 뭐였더라. 바라는 게 있었던 것 같은데.

자연은 약간 치매기가 있는 것 같다. 말이 오락가락하고,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대다수가 웅얼거리는 말이라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일어나서 채린이한테 다가갔다. 아이리가 이해할 수 없는 눈으로 바라봤지만, 지금은 뭐 어쩔 수 없었다.

“이거 청소기 어떻게 쓰는 거냐?”

“뭐, 지금은 유령도 없는데. 사람한테는 안 먹혀.”

“그나저나 이런 건 어떻게 만든 거야? 어떻게 하면 사람의 혼을 끌어당기는 과학이 존재할 수가 있냐?”

“원래 사람의 상상력은 무궁무진하잖아.”

채린이는 웃었다. 난 유령이고, 그들을 본 자로서 그들 역시 인격체를 갖춘 ‘사람’과 다를 게 없었다. 유령을 빨아들이는 건 내게는 살인처럼 느껴졌지만, 채린이는 그렇게 느끼지도 않는 모양이다. 하긴, 그녀에게는 보이지도 않는 존재니까.

당장 내가 목걸이에서 힘을 받지 않고 계속 그녀에게 투명한 상태로 있었으면 날 빨아들였을 거다.

“자, 이렇게 하는 거야. 그래도 나름 안전장치도 있어.”

그게 중요한 게 아닌데. 어쨌든 청소기를 가동하니까 자연의 의념이 다시 내 안에 들어왔다.

- 생각났어. 저런 불쾌한 힘 좀 쓰지 말라고 해, 소름 돋으니까.

그걸 눈앞에서 틀어 줘야 아나. 내 손으로 크리스털의 힘이 새어 나왔다. 확실히 지금 자연을 몸 안에 담고 있어서 느끼는 건데, 채린이가 말하는 과학은 자연과 상극이다.

힘이 청소기로 들어가 내부에서 소용돌이쳤다. 청소기 안에서 폭죽 터지는 소리가 푹푹 나더니 기계 틈에서 회색 연기가 삐져나왔다.

“뭐야, 갑자기?”

“야, 정채린! 뭐 해? 그게 얼마짜린데!”

“내가 안 했어! 아저씨가 만졌어!”

미안, 내가 한 거 맞아. 하나 난 모른 체했다. 다른 사람들이 성을 내자 난 슬그머니 돌아가 아이리 옆에 앉았다. 신성파 사람들은 기계를 열어 보고 고치려는 등 별 쇼를 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직감했다, 절대 못 고칠 거라고.

“너, 뭐 했지?”

“네.”

아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리는 채린이를 보고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만족했으면 됐다.

- 저 힘이 마음에 안 드시는 모양이군요.

- 응. 별로 마음에 안 들어.

나는 그 힘이 내 안의 어떤 작용과 비슷하다는 걸 느꼈다. 자연이 내 몸 안에서 움직였으니 나도 이제 그걸 건드릴 수 있었다. 그건 영혼의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자연은 내가 건드려도 거부하지 않았다.

마치 떨어지는 물에 손을 대듯 부드러운 기분이었다. 내 힘을 거부하지는 않지만, 그건 계속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다. 이 힘은, 정확히 말해서 내가 가지고 있던 원죄와 그 맥이 같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난 엘파힘의 심안을 켰다. 다른 사람은 봐도 아이리는 볼 수 없었다. 그녀가 날 얼마나 사랑하고, 누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고, 키워드가 무엇인지는 내가 알아 가야 하는 것이었으니까.

- 편안한 힘이구나. 나한테는 말이야.

난 지금에 와서야 이 원죄라는 것이 사람에게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스킬이라는 걸 깨달았다. 사랑은 사람의 마음이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건 자연과는 정반대였다.

자연은 흘러가지만 사람의 마음은 꺾인다. 사람의 마음은 한 번 손을 대면 절대로 전과 똑같이 돌아갈 수 없다. 내가 그녀가 원하는 걸 비겁한 수로 먼저 알아차렸다고 한들 그건 내 사랑에 절대 도움이 안 될 터였다.

사랑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나를 위해도 필요한 것이니까. 내가 만약 엘파힘의 심안을 지독하게 쓰고 다녔으면 다른 이들의 마음을 쉽게 얻을 수는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렇다면 오히려 내게 남은 건 없었으리라.

오히려 내가 모태 솔로고 연애에 미숙했기에 진정한 사랑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 이건 당신의 힘이지요?

- 맞아. 뭐, 별로 중요하지는 않아. 난 사람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으니까. 애초에 감정이라는 게 난 뭔지 몰라. 그저 단어의 정의로 알고 있는 거지.

- 제가 이 힘을 가지고 있는 게 옳은가요?

- 옳지 않아.

자연은 생각보다 간단하게 답해 주었다.

- 이유는요?

- 뭐든지 온전한 모습일 때 아름다운 법이니까. 동물은 팔과 다리가 달려야 아름답고, 꽃은 팔과 다리가 달리면 흉하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난 자연의 생각을 어느 정도 알 것만 같았다.

- 네가 원한다면 그 힘을 회수할 수 있다. 그렇게 할까?

자연은 물었다. 나는 한 치도 망설이지 않았다.

- 그러세요.

- 그래.

난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 내가 가져가지 말라면 안 가져갈 심산이었습니까?

- 응.

- 왜요? 당신의 힘이라면서요.

- 상관없는데.

하긴, 여신한테 실권을 다 뺏겼는데도 이렇게 무심하니. 어쩌면 이상적인 신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신이 인격을 가지면 어떻게 되는지 우리는 지금 보고 있으니까.

- 그럼 거둔다.

- 아, 잠깐만요.

마지막으로 할 일이 생각났다. 어쩌면 난 이 원죄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올바르게 쓰고자 하는 것일 터다. 자연은 당연히 기다려 주었다. 자연은 거부하는 법이 없었으니까.

나는 자연과의 이야기를 마치고 아이리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왜?”

“손거울 있으면 좀 주실래요?”

그녀는 눈을 깜빡거렸다. 내 저의를 어떻게든 탐색하려고 하는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하나 그녀가 내 진의를 알 리가 없다.

“…뭐, 그래.”

역시 귀족. 손거울, 수건은 그녀에게는 기본 아이템이다. 나는 손거울을 바라보고 엘파힘의 심안을 썼다. 나에게는 당연히 처음 쓰는 것이었다.

난 사실 내 마음을 아는 것이 두려웠다. 사랑에 대해 정확히 알지도 못한 채 사랑하는 사람을 아는 것만큼 이상한 문제도 없었다.

제일 무서운 건 내게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떡하지 하는 문제였다. 내 엘파힘의 심안 창에,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공백으로 되어 있다는 걸 상상하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마치 마음의 가장 어두운 면을 보는 느낌이겠지.

많은 고민을 했던 게 사실이다. 사랑에 대한 깊은 고민도 이와 같이했다. 내가 느낀 건, 각자 생각하는 사랑은 다르겠지만 분명히 그 사람을 닮았으리라는 거다. 사랑은 사람에게 한계치의 용기를 요구하고 한계치의 인내를 요구하니까.

나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엘파힘의 심안 창을 켰다.

「이름: 주환영

나이: 28

호감도: 23

가장 사랑하는 사람: 아이리 라피테스

키워드: 연애」

음, 확실하다. 다른 건 관심 없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느끼고 있는 사람과 같으니 됐다. 그래, 내 마음은 틀리지 않았던 거다.

- 이제 가져가세요.

- 그래.

난 엘파힘의 심안을 자연에게 돌려줌과 동시에 아이리에게 손거울을 돌려줬다. 덜컹거리는 열차 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어둡기만 하다. 앞은 기계의 고장으로 시끄럽다.

“웃는 걸 보니까 얼굴이 생각보다 잘생겼나 보네?”

아이리는 내게 시답잖은 농담을 던졌다. 난 내가 웃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떤 웃음일까. 지금 이 어지러운 상황에서도 웃음이 날 정도면 난 잠깐 동안 행복을 느낀 모양이다.

그리고 그건, 아이리가 내 옆에 있었기 때문이 분명하다. 난 그녀에게 감사함을 표해야 했다.

“아가씨.”

“응?”

“사랑해요.”

열차가 덜컹거렸다. 우리의 어깨도 들썩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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