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스판타지로 떨어진 S급 헌터-127화 (127/150)

127화 거울 (8)

커다란 붕괴였다. 아이리가 아무리 소드 스페셜리스트라고 해도 갑자기 땅바닥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하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아이리는 아래를 바라보았다. 밑도 끝도 없는 어둠이 보였다. 그녀를 공포스럽게 한 건, 이 어둠도 언젠가 바닥이 있을 거라는 것이었다. 당장 부딪혀서 몸이 부서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붕괴는 분명히, 무조건 에퍼리와 관련된 붕괴였다. 그라면 자신을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계속 떨어지는 벽에 칼을 박으려는 등의 저항을 했다. 그때 그녀의 눈에 은빛이 옅게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바로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감싸는 기운이 느껴졌다. 그 기운은 그녀의 몸을 살짝 위로 띄웠으며, 포근하게 감쌌다.

“…아가씨.”

아이리의 눈에 들어온 건 예프린이었다. 그러나 아이리는 이 예프린 속에 있는 사람이 에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그가 어떤 말을 해 줄지 굉장히 기대했지만, 에퍼리는 자신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소리를 했다.

“신성력 쓰면 떠오르실 수 있는데.”

“…아.”

물론 막 붕괴가 되던 시점에 신성력을 사용하지 못한 건 잘못이었지만, 경황이 없던 탓이기도 했다. 갑자기 일어난 붕괴와 제대로 사용해 보지도 못한 신성력.

그것보다 아이리는 지금 이런 상황에서 그딴 말을 하는 에퍼리를 쥐어박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모습은 자신이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예프린이었다.

아이리가 빤히 바라보자 에퍼리는 그제야 말실수를 했다는 걸 알아차린 듯 말을 바꿨다.

“그, 걱정돼서 그렇죠. 어쨌든 제가 구해 주기는 했겠지만.”

“늦었어.”

“…정말요?”

아이리의 칼같이 자르는 말에 에퍼리는 살짝 시무룩해 보였다. 심지어 예프린의 외형을 해서 자신보다 키도 작아 꽉 껴안고 싶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됐어. 나중에 얘기해.”

“아, 네.”

“지금은 해야 할 일을 해야지. 네가 말했잖아, 서로 각자의 할 일을 하자고.”

아이리의 말에 에퍼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에퍼리는 그 말에 잠깐 수정을 했다.

“지금은 서로 각자가 아니죠. 같이하는 거예요. 아가씨, 정말 잘해 주셨어요.”

그 말에 아이리는 살짝 멍해졌다. 이 남자는 자신이 예상할 수 없는 부분에서 강했다. 아까의 어리바리하던 에퍼리와는 달리 지금은 자신에게 믿음을 주는 강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자, 같이 움직이죠.”

에퍼리가 내민 손을 아이리는 조심스럽게 잡았다. 뭔가, 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불쾌하지 않았다.

* * *

참 이 아가씨는 대책이 없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나라면 그녀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난 언제나 정면 돌파를 지향했으니까. 근데 그건 내가 수습을 할 수 있으니까 그런 거다.

내가 감옥에서 수인들하고 실랑이를 하고 있을 때도 난 위의 저택에도 감각을 드리워 놓고 있었다. 그녀가 무슨 일을 할지는 대략 알고 있었지만 정확히 언제 할지는 몰랐기 때문이다.

사실 그녀가 있었던 방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척을 감추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그건 명백하게 아이리를 암살할 인력들이었다. 내가 그래서 땅 전체를 붕괴시킨 것이다.

심지어 그녀는 떨어지면서도 떨어지기 3초 전까지 자유낙하를 했다. 언젠가는 신성력을 쓰겠지 생각했지만, 결국 너무 걱정이 되어서 힘을 쓴 것이다.

어쨌든 이런 사소한 건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 난 계속 반신반의했다. 정말 아이리가 내 생각대로 움직여 줄까? 아니면 내가 아이리의 생각대로 움직일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불신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정말 내 의도대로 움직여 주었고, 난 그녀의 의도에 부응했다. 난 정말, 이것을 기적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뭐 이제 어떡해?”

“기다리면 돼요.”

아이리의 말에 난 그렇게 대답해 주었다. 이제 여기부터는 아비규환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모든 감옥의 문을 부숴 놨기 때문이다. 내가 아이리의 손을 잡은 이유도 이것이었다.

대저택에서 떨어진 사람들과 감옥에서 탈출한 사람들이 어떻게 하냐에 따라서 나와 아이리의 움직임은 달라질 것이다. 그들에게 딱히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뭐야, 넌 누구야?”

“A동 사람인데?”

“들어가. 관리자다.”

주변에서는 실랑이가 벌어졌다. 감옥을 빠져나온 사람들, 감옥의 관리자들. 그들이 섞인 이곳은 혼란스러운 곳이었다.

“크아아악!”

누군가 둔기로 머리를 치는 소리가 났고, 어둠 속에서 피가 뿌려졌다. 아이리와 나는 조용히 기척을 감추고 누가 부딪힐세라 기민하게 움직였다.

아이리는 아마 못 봤을 테지만, 나는 다 보고 있었다.

난 이곳에 다프네 같은 사람들만 있을 거라고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다. 다프네의 행동에 대놓고 반기를 들지는 않았어도 기회만 된다면 빠져나오고 싶었을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건 너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 사람들로 추정되는 부류들은 무너진 건물에서 나온 철골들을 집었고, 다른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아이리가 내 귀를 간질이듯이 말했다. 애초에 그렇게 하라고는 했지만, 간지러웠다.

“글쎄요. 혁명 내지는 투쟁?”

“그래?”

우리는 조용히 그것들을 느꼈다. 이 어두운 곳에서는 정말 인간의 의지가 무엇보다 선명해 보였다. 사람들은 각자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편을 만들어 갔고, 감독관들은 다시 감옥에 들어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물론 그렇게 압박하는 과정에서 날붙이가 들어가는 건 당연했다.

여러 군데에서 피가 뿌려졌고, 편을 착각해 같은 편을 죽이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너무 편하게 살아왔나 봐.”

“아뇨. 그건 아니에요.”

지구에서도 이렇게 잔인한 장면은 보기 힘드니까. 그리고 편하게 사는 게 어디 있는가. 각자는 각자의 위치에서 힘들 뿐이다.

“아가씨, 난 아가씨가 고민하는 사람이라고 믿어요. 고민하는 사람은 늘 괴롭죠. 이런 잔인함과 멀리 떨어졌다는 건 자부심이 될 일이지, 죄책감이 될 일이 아니에요.”

“그래.”

아이리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조금 어렵게 말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이게 무슨 말이야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대신 난 한 가지 추측을 했다. 아마 그녀가 내 말을 완전히 이해했으면 내 행간을 완전히 읽었다는 거고, 그렇다면 꿈을 기억하고 있다는 의미라고. 그녀가 나한테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다고. 아니면 그냥 넘어간 거거나.

난 그걸 물어보고 싶었지만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만약 꿈을 기억하고 있다고 해도, 그녀와 한 약속이 있고 그녀는 그걸 기다리고 있을 뿐일 테니까.

그때 이 어둠을 완전히 밝히는 빛이 동시에 켜졌다. 마력으로 빛을 밝히는 구체가 여러 군데 있었다. 비상용 전등 같은 것이었다.

주변은 완전히 아수라장이었다. 이 잠깐의 어둠에서 수많은 살육이 벌어졌으니까. 사람들의 시체, 내장, 피들이 바닥을 완전히 칠하고 있었다.

아이리는 그것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비현실적인 광경일 게 분명했다. 하나 그녀는 잠깐 충격을 받았어도 쓰러지지는 않았다. 그저 내 손을 조금 더 꽉 쥐었다.

“잠깐 소란이 있었다. 자, 다들 돌아가라.”

저 위에서 나긋한 소리가 울렸다. 위를 바라보니 녹색 모자와 귀족처럼 보이는 남자가 있었다.

감독관들을 죽인 사람들은 녹색 모자를 보자 술렁였다. 뼛속까지 박힌 두려움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다프네를 비롯한 사람들은 이미 감독관한테 몸을 맡겨 서로의 허리를 잡고 있었다. 달아나지 말라는 그들의 명령인 모양이었다.

“슬슬, 그만해야겠네.”

난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하면서 감독관을 죽인 사람들 앞으로 나갔다. 녹색 모자는 나를 유심하게 바라보았다.

“넌 누구냐?”

“네 노예지, 누구야?”

난 그렇게 대답했지만 녹색 모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아는 사람과 다른 사람이다. 그건 확신할 수 있다. 사람은 쉽게 바뀌는 존재가 아니거든. 너는 악마거나 그녀의 몸을 강탈한 다른 존재일 것이다.”

난 살짝 놀랐다. 애초에 몸을 뺏는다는 것 자체가 검은 무리, 망령에 대한 정보가 없으면 내기 불가능한 생각에 가까웠다. 근데 이자는 완전히 단언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녹색 모자에게서 눈을 거뒀다. 난 다프네를 한 번 일별하고, 감독관에게 몸이 사로잡힌 사람들을 보았다. 내게 중요한 건 그들이었다.

“계속 그렇게 쓰레기처럼 살고 싶으면 난 말리지 않아. 근데, 너희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 마지막 기회야. 너희가 인간처럼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

그들은 나를 바라보았다. 감옥 안에 있는 그들은 흉흉했지만, 감옥 밖에서는 그저 겁에 질려 있는 아기 새와도 같았다.

“너희 중 지금이라도 바깥에 나가서 살고 싶은 자가 있다면 말해라.”

내 말에 사람들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에는 물론 미더워 보이지 않겠지. 당장 몇 년 동안 갇혀 있었고, 예프린의 몸은 근육 하나 없이 연약해 빠졌으니까. 또한 추레하기도 했다.

“야, 저년이 뭔 말을 한다고 믿어? 믿지 마, 그냥 여기 있는 게 속 편한 거야.”

그 말을 한 사람은 다프네였다. 음. 난 다프네가 저렇게 해 주길 바랐다. 그래도 살겠다면 구해 주기는 했겠지만, 예프린을 망친 사람을 살려 주는 건 그렇게 유쾌한 일은 아니라서.

“뭐, 뭐 어떻게 구해 주겠다는 건데?”

그들 중 한 명이 용기 내어 소리쳤다. 당연히 감독관과 녹색 모자는 그를 아니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녹색 모자는 그에게 빠른 속도로 단검을 날렸다. 난 바로 달려가 그 단검을 쳐 내어 떨어뜨리고 그의 뒷덜미를 잡아 아이리 옆으로 옮겨 놓았다.

“이렇게.”

내가 너무 빨리 움직였던 탓인지 사람들은 뭐가 뭔지도 몰랐다.

대충 솎아 낸 걸까. 내가 저들에게 무력시위를 해서 구해 준다면 그들은 또 다른 곳에서 비슷한 악질 짓을 하겠지. 그건 의미가 없었다.

난 아이리에게 조용히 말했다.

“아가씨, 이들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세요.”

“…나가는 길을 모르는데?”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긴, 애초에 어두운 곳이고 건물은 무너지기까지 했다. 그녀가 보기에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바깥에서의 지원군도 있었다.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아이리 옆에 붙은 건 칸나였다. 그녀는 갑자기 나타나서 아이리를 살짝 놀라게 했다. 난 칸나의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들은 나갈 일만 남은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든 살겠지.

아이리는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내 손을 잡았다.

“조심해.”

“네.”

그들이 떠나려고 할 때 녹색 모자와 감독관들은 우리를 막으려고 했지만, 막을 수 없었다. 내가 기세를 풍겼기 때문이다. 그들의 발 앞쪽이 부들거렸지만, 걸음을 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난 그렇게 그들을 잡아 두고 아이리와 칸나, 다른 사람들을 보냈다.

난 그들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한 다음에 이곳을 처리할 청소부 하나를 부르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라도 있는가?”

난 그들에게 물었다. 녹색 모자는 어느새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재앙이군.”

그 말과 함께 어디선가 커다란 다리가 우리 사이를 가로막았다. 이곳의 괴물, 아파치치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