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거울 (5)
나는 붕 떠 있었다. 다리도 안개로 가려 놔서 아마 상반신만 떡하니 보일 터다. 좀 유치한 분장이기는 하지만 내 나름의 노하우였다. 이곳이 꿈인 걸 알아차리지 못하게.
“안녕, 아가씨.”
“오랜만이야, 스승님.”
“절 스승님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늘 그렇게 생각했는데.”
예프린은 웃었다. 뭔가, 그것만 보면 잘 지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건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예프린의 몸은 상처투성이였으니까.
“어때요? 잘 지내요?”
“X 같은데?”
서슴없이 욕을 뱉은 그녀는 바닥에 가래침까지 뱉었다. 아마 꽤 힘든 모양이었다. 이 귀족과 맞지 않는 걸걸한 말투는 오랜 야지 생활에서 배운 것 같았다.
“처음엔 좋았지. 난 꽤 촉망받는 용병 유망주였다? 어린 나이에 나처럼 검을 잘 쓰는 검사는 없다 그랬어. 당연하다면 당연하지. 난 최고급의 수업을 받았잖아.”
예프린은 한탄이라도 하듯 말을 이었다. 그녀의 용병 생활은 2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했다. 꽤 만족스러웠다고 한다. 자유롭기도 했고.
그러나 용병 생활에서도 그녀는 곧 지루함을 느꼈더랬다. 그녀는 더 자유롭고 싶었고, 그때부터는 용병 생활로 모은 돈으로 전 대륙을 돌아다녔다고 했다. 그러다가 이 녹색 모자의 무리에 잡혔다고 한다. 그다음에서 여기서 겪은 고초를 말해 줬는데, 차마 듣기가 힘들 정도였다.
성 고문은 안 당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런 경험의 여부도 이곳에서는 가치와 연결되기 때문이었다. 참, 역겨운 세상이었다.
“어쩌면 널 탓하는 것처럼도 들렸겠다. 근데 그건 아니야. 난 느꼈어, 자유가 제일 커다란 권리였다는 걸. 권리가 큰 만큼 이런 반대급부도 따라오는 거겠지.”
“그건 아니에요.”
난 그렇게 말해 줬다. 예프린이 잠깐 멈췄다. 조금 이상한 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원래 꿈이라면 자신의 의식과 반대되는 얘기를 하지는 않으니까.
“그냥 여기가 치안이 안 좋은 세계이고, 그런 사회일 뿐이에요. 한 사람이 어떻게 사회의 병폐를 의무처럼 질 수가 있겠어요.”
나는 그렇게만 말했다.
“그러니까 좀 주무세요. 쉬어야 할 필요도 있죠.”
예프린이 슥 쓰러졌다. 이제 세상 바깥으로 나갈 준비를 해야 했다.
* * *
똑. 똑.
누군가가 아이리의 방문을 두드렸다. 예의 있고 절도 있는 노크였다. 그녀는 옷차림을 한 번 매만진 다음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뜻밖의 사람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무뚝뚝한 인사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녹색 모자를 옆에서 아무 말 없이 보좌하던 사람이었다.
“어쩐 일로?”
“상단주님의 폴라를 좀 구경시켜 드리라는 명이 있으셨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면 제가 보좌해도 되겠습니까?”
이들이 올 줄 알았다면 솔직히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이들이 익숙하지 않았다. 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몰랐고, 어쩌면 영원히 이들을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녀는 지금 옆에 칸나도, 에퍼리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의 각오는 어떤 상황이 와도 의연하게 받아치는 것이었다.
“저야 사양할 일 없죠.”
“그렇습니까? 다행입니다.”
“이름이 뭔가요?”
아이리는 물었다. 귀족을 떠나서, 인간관계의 기본은 통성명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입을 오물거렸다. 뭔가 난처한 느낌이었다.
“전 이름이 딱히 없습니다.”
“그래요? 그럼 내가 뭐라고 불러야 되죠? 아니, 그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불러요?”
“보통 저기, 그쪽, 이런 식으로 많이들 부르시죠.”
“그게 편하시다면야.”
아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아이리는 이걸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들과 많이 엮이면 엮일수록 일단은 좋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 자신이 하는 일에 자신감은 들지 않지만.
“뭐, 어디 가고 싶은 데 있으십니까?”
“잠깐만요. 화장 좀 하고요.”
“아, 네.”
여전히 면사포로 얼굴을 가린 아이리는 잠깐 문을 닫았다. 그리고 면사포를 벗어 던지고 얼굴 가면을 벗는다. 오랜만에 아이리 라피테스로 돌아온 느낌이다.
“…어? 얼굴이…….”
“이게 제 본얼굴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웬만하면 당황할 것 같지 않던 그 철벽이 살짝 무너진 느낌이었다.
“왜요, 어색한가요?”
“아뇨, 너무 아름다우십니다.”
“그렇긴 해요.”
하나 머리는 완전히 산발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자랑인 폭포수 머리를 땋으려고 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혹시, 머리할 줄 알아요?”
“네.”
“폭포수 모양으로 땋아 줘요.”
“아, 네. 알겠습니다.”
가만히 의자에 앉아서 아이리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투박하지만 꽤 능숙한 움직임으로 아이리의 머리를 하나하나 땋았다.
“생각보다 잘하네요.”
“감사합니다.”
아이리는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 건물을 나섰다. 뭐, 그와 딱히 할 말은 없었다. 그도 딱히 아이리에게 궁금한 건 없어 보였다.
“어디로 먼저 가시겠습니까?”
“전 좀 재미있는 데를 가고 싶네요.”
“음, 여기는 관광지가 많죠. 옌시 건물이 가득 있는 타운도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옌시의 음식도 많이 먹어 볼 수 있죠.”
“그건 뭐, 굳이 땡기지 않네요.”
아이리는 단호하게 말했다. 어차피 옌시는 곧 갈 곳이었다.
“내가 갈 곳은 그때 그 시연장 출구예요. 아니, 거기가 입구겠죠?”
“별다른 이벤트가 없을 때는 그곳은 그냥 거렁뱅이들이 사는 아지트입니다. 굳이 그런 데가 궁금하십니까?”
“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보좌가 아니었다. 보좌라면 서로 생각의 교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사람은, 그냥 꼭두각시였다.
아이리는 곧 시연장의 입구이자 그들의 아지트로 갈 수 있었다. 당연히 그곳은 볼품없었다. 그곳에서 아름답고 귀티 나는 아이리의 존재는 당연히 이질적이었다.
감히 아는 척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떻게 불똥이라도 튈까 쉬쉬하는 사람들뿐. 마치 누구 하나 제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어쩌면 내보내 달라고 아우성치는 곳보다 이곳이 더 눅진한 지옥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에퍼리가 자신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그는 자신에게 이런 걸 보여 주기 싫었던 거다. 이해할 수 있다. 만약 에퍼리가 이런 걸 모르는 사람이었으면 자신이라도 에퍼리에게 이런 걸 보여 주지 않았으리라.
“괜찮네요.”
“어디가 말입니까?”
“저와 다른 사람을 본다는 거요.”
아이리가 말했다. 아마 그는 이해하지 못할 발언 같았다. 그녀는 옆의 이름 없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당신, 꽤 귀족들과 안면이 있죠?”
“네, 그렇습니다.”
“내가 누군지 아나요?”
“네. 아이리 라피테스 공녀님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는 역시 눈치가 빨랐다. 아이리는 흥 하고 웃었다.
“알고 있나요, 전 제국의 수배자라는 걸?”
“짐작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당신의 행동은?”
“전 상단주님께 보고할 뿐입니다.”
남자의 목소리는 무덤덤했다. 아이리는 그게 좀 답답했다.
“그래서 보고의 결과가 나오면 나를 잡을 수도 있겠군요?”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을 한 건 이름 없는 남자가 아니었다. 어디선가 온 녹색 모자였다. 그는 비열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사실 공녀라는 지위는 명예직이죠. 정식적인 작위라고 보기도 뭐합니다.”
“그렇군요. 그런 말씀을 저한테 하신 이유는 결단이 섰다는 뜻이겠네요.”
“맞습니다. 저희가 구금해 놓고 있겠습니다. 당신은 모르시겠지만, 당신에게 걸려 있는 보상금이 좀 많습니다. 해를 가하지는 않겠죠. 아무리 그래도 공녀님이니까.”
아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이곳 귀족들과도 연관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자신이 정체를 드러낸다면 쉽게 알아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를 가두겠다고요?”
“제국의 조사관이 올 때까지만 가둬 놓고 있는 거죠.”
“공작 작위에 있는 사람은 면책특권이 있다는 걸 아나요? 공작은 수배가 걸리지 않죠. 왜냐하면 스스로 변호할 권리를 지니기 때문이에요.”
아이리가 말했다. 녹색 모자는 살짝 갸웃했다.
“그런가요. 근데 공녀님은 공작이 아니지 않습니까?”
“공작이에요.”
아이리는 단호하게 말했다.
“황도에서 오는 소식이 느리군요. 전 지금 제국의 공작, 아이리 라피테스 공작입니다.”
그녀는 녹색 모자를 노려보았다.
“자. 이제 당신의 선택입니다, 나를 구금할 건지 아니면 하지 않을 건지.”
* * *
똑. 똑.
어딘가 물방울이 떨어지는 느낌이 났다. 눈을 뜨니 두 팔목에는 쇠사슬이 채워져 있었고, 발목에도 무거운 쇠공이 달려 있었다.
“어, 깼네?”
남자들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야말로 순수한 웃음이었다. 내가 뭐라 묻기도 전에 가죽 채찍이 내 몸을 쳤다. 바로 옷이 찢어지고 피부가 붉게 부어올랐다.
“어쩌자고 반항했어, 그래. 네가 사연 있는 년인 건 알어. 얼마나 굴욕적이겠어. 근데 말이야. 다른 사람들도 다 합의 보고 사는 거야. 자기 운명하고 말이야.”
“왜 남의 운명을 네가 정하냐?”
“내가 정하는 게 아니야. 이건 다 여신님의 뜻인 거지. 난 그저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고, 돈을 받기 위해서 이런 일을 하는 거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침묵하자 그걸 반항의 신호로 받아들였는지 다시 가죽 채찍이 날아온다. 찬물도 서슴없이 끼얹었다. 예프린의 정신을 잠재워 두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언제나 이런 고통을 받아 왔겠지만, 하루 정도는 쉴 수 있으니까. 내게 이런 고통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냥,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고 상상하면 그만이었다.
“근데 너희가 반대로 묶여 있으면 운명을 부정하지 않을까? 분명 항상 원망하고 증오가 쌓일걸. 네가 말하는 운명이란 그냥 네 편의에 맞춘 것에 불과하지. 그걸로 네 죄책감이 덜어진다고 생각해?”
“웬일로 오늘 말을 많이 한다?”
그와 나의 대화는 채찍만 아니었다면 정상적인 대화였다. 난 이곳의 사상에 진절머리가 난 지 오래다. 사람이 사람을 적으로 생각하고, 누군가가 누군가를 죽이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풍토.
“정확히 말하면 너희의 잘못은 아니지. 원래 잘사는 사람들은 그 세계에 녹아드는 사람들이거든.”
“계속 개소리를 하는구나.”
그가 채찍을 휘두르든 물을 붓든 배를 때리든 난 아무 관심도 없었다. 내겐 감각이 없었으니까. 난 그저 입을 기계적으로 놀리고 있을 뿐이다.
“근데, 세계가 엎어질 때 제일 먼저 죽어 나가는 사람들은 너 같은 놈들이야. 오히려 난 그걸 운명이라고 말하련다.”
난 바로 발을 차서 쇠공을 그의 얼굴로 날려 버렸다. 묶인 쇠공이 내 발에서 벗어나 그의 얼굴에 직격한다.
“아아악!”
쇠공이 쿵 하고 떨어지고, 그는 얼굴을 부여잡고 털썩 엎어졌다. 난 잠깐 기절한 그의 옷을 벗겼다. 채찍을 너무 맞아 예프린의 옷이 넝마가 되어 속살이 비치기 때문이었다. 난 그의 옷을 걸친 다음 뒷머리를 밟아서 머리를 터뜨렸다.
나는 그의 시체를 깔끔하게 정리했다. 이제 그가 이 대륙에서 살았다는 증거 자체가 사라졌다.
난 손으로 철창을 굽히고 몸을 구부려 나갔다. 감옥들 틈 사이로 나를 보는 눈빛들이 쏠린다.
뭐, 스킬을 쓰기는 싫지만 이곳에서는 빨리 써야겠지. 상상한다. 나는 이 사람들을 구하러 온 기사며 이들을 모두 책임질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스킬: 기사도 Lv. MAX 업그레이드】
【스킬: 카리스마 Lv. MAX 업그레이드】
적어도 예프린의 삶이니까. 그녀의 스킬을 쓰는 게 그녀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라며, 나는 감옥들을 둘러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