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거울 (4)
아이리는 이렇게 예프린을 다시 보게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운명을 믿었다. 예프린을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예프린은 아이리의 마음에 어릴 적 날려 보낸 새와 같았다. 그녀가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단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서 사랑을 하고, 친구를 찾고, 자기만의 생을 살고 있으리라 믿었다.
“좀 더 움직이라고!”
“상품에 흠집이 나는 건 아니겠지?”
하나 지금 이 상황은 어떤가. 저 황도에서는 기도 못 펴는 귀족들이 왕 행세를 하면서 자신의 동생을 모욕하고 있지 않는가.
사실 아이리는 제국에 불법적으로 암약하는 노예 상인이 많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물론 황도에까지 그런 더러운 사람들이 침입하지는 않지만, 그런 사람들이 있는 걸 알기만 했다.
하나 아는 것과 직접 보는 건 다르다. 그리고 그에 관련된 사람이 자신의 동생이라는 건 또 다르다.
“…으.”
아이리는 침음성을 냈다. 도대체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자기가 공녀라는 걸 드러내고 이 판을 엎을 수도, 예프린을 살릴 수도 있었지만, 그러면 에퍼리와 칸나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아가씨, 아가씨는 아가씨 일을 하고 나는 나의 일을 할게요. 할 수 있죠?”
“뭐?”
에퍼리가 뒤에서 그런 말을 한 건 부지불식간이었다. 그녀가 뒤를 돌아봤을 때, 어느새인가 에퍼리는 사라져 있었다.
* * *
왜 예프린이 여기에 있는지는 나는 잘 모른다. 나도 언젠가 그녀를 보기를 바랐다. 당연한 말이지만, 물론 이런 형태로는 아니었다.
만약 내가 이 기억을 가지고 과거로 돌아간다면 예프린을 그렇게 보내 주지는 않았으리라. 막말로 난 예프린이 가출 청소년이 되도록 도운 것이니까. 다만 그때는 이 세계에 도사리는 악의에 둔감했었다.
“…아가씨, 나 믿어요?”
“으…….”
아이리는 완전히 정신이 나가 버린 상태였다. 그저 입 바깥으로 소리만 간헐적으로 내고 있었다.
여기서 예프린이 죽지 않을 건 자명했다. 왜냐하면 이 녹색 모자한테도 예프린은 귀한 상품일 테니까.
“어떻습니까? 몸놀림도 날렵하죠?”
그러나 계속 이렇게 동물처럼 취급되는 예프린을 아이리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냐는 말이다.
“아가씨, 아가씨는 아가씨 일을 하고 나는 나의 일을 할게요. 할 수 있죠?”
“…뭐?”
아이리는 내 말에 간신히 대답했다. 하나 녹색 모자는 자신에게 대답한 줄 알고 고개를 돌렸다.
물론 그 눈빛을 다 받아 줄 겨를은 없었다. 난 바로 예프린의 케이지로 들어갔다. 뭐,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예프린은 지금 반쯤 정신이 나가 있는 상태였다.
공포, 두려움 이런 감정들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눈빛에서는 어떠한 감정이나 정서도 보이지 않았다. 오랜 감금 생활로 인한 영향인 것 같았다. 그녀의 몸은 옅은 안개로 가려져 있었다. 난 그걸 알고 있었다. 난 그렇게, 그녀의 몸으로 들어갔다.
* * *
여기서 아이리와 녹색 모자가 있는 위쪽이 보이지 않게 설계되어 있었다. 케이지로 막상 떨어지니 참,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 대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년은 얼마야?”
“여기 술 좀 더 갖다줘!”
“빨리빨리 움직여! 보는 재미가 없잖아!”
내 앞의 괴물이 참으로 압도적으로 보인다. 괴물은 관객들의 성화에 조금 더 빨리 움직였다. 지능이 있거나 녹색 모자가 조종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 건 나한테 중요하지 않다.
난 일단 오랜만에 스킬 창을 열기로 했다.
【스킬: 중급 검술 Lv. 3】
【스킬: 정신 집중 Lv. 3】
【스킬: 기사도 Lv. 7】
.
.
.
한 10개 정도 스킬이 있었지만 막상 쓸 만한 건 이 세 가지뿐이다. 이 정도만 발휘해도 저 앞의 괴수를 잡을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이 가녀린 손에 들린 나뭇조각으로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 내가 아니고 예프린이어도 충분히 가능하다. 예프린은 포기한 것이다.
난 계속 날렵하게 피하기만 했다. 괴수는 느리고 무거웠다.
“크어어어어!”
잡힐 듯 안 잡힐 듯. 답답한지 괴수가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의 아우성은 더욱 커졌다.
이 시연회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아마 이 공간에서는 녹색 모자와 나밖에 모를 것이다. 그들에게 예프린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냥 괴롭히기 좋은, 장난으로 곤충의 날개나 다리를 뜯듯 해칠 수 있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이건 투기장도 아니고 뭣도 아니다. 그냥 사람의 악의가 만들어 낸 자극적이고 무의미한 유흥이었다.
삐익.
그때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와 함께 케이지 안의 공기가 바뀌었다. 주변 관객들의 환호성이 들렸고, 마수의 근육이 이상하게 바뀌었다. 근육 안쪽에서 거품이 터지는 것처럼 부풀고, 눈이 돌아가 하얀색으로 바뀌었다.
“크르르르.”
마수의 입에서 침이 흐르기 시작한다. 마수의 기도가 바뀌었다. 마수가 땅을 박차고 내게 달려왔다.
피할 수 있다. 예프린도 스킬을 가지고 있지만 그건 예프린의 스킬일 뿐이었다.
마수의 주먹이 내 얼굴 가까이 다가온다. 아까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빠른 속도다. 나는 최대한 그걸 지켜보았다. 이 순간에 아이리가 용기가 있기를 난 진심으로 기도했다.
삐익!
예프린의 머리만 한 마수의 주먹이 얼굴 앞에서 멈춘다. 예프린의 긴 은빛 머리가 풍압으로 뒤로 제쳐졌다.
“뭐야?”
“뭐 하는 거야, 이 새끼들. 바쁜 사람들 모아 놓고 장난하나?”
내가 예상한 대로 관객석에서 분통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곳의 니즈는 확실했다. 내가, 이 예프린의 몸이 벌레처럼 구르고 추잡스럽게 삶을 갈구하는 걸 보면서 일종의 희열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희열을 멈추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이런 반응이 나오기 마련이다. 녹색 모자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예프린이 죽으면 신경도 쓰지 않을 관객들과 달리 녹색 모자에게 예프린은 팔아야 할 상품이었으니까.
“오늘은 친구가 많이 지친 것 같군요. 여러분, 다른 친구를 선보이겠습니다.”
녹색 모자의 수습과 함께 마물이 무너졌다. 주변은 당연히 더 어수선해졌고, 그 틈을 타 케이지 안에서 사람들이 나와 예프린의 몸을 강제로 잡아 안쪽으로 끌고 갔다.
예프린의 겨드랑이 밑으로 넣은 우악스러운 손, 복도에서 풍기는 불결한 냄새. 여러 부분에서 내 오감을 자극했다.
저 뒤로 들리는 아우성과 함께 나는 암흑으로 끌려갔다. 이들이 나, 예프린을 보는 눈이 심상치 않았다.
“안타까운 짓을 했구나. 2년 동안 학습이 덜 됐어. 네가 누구보다 잘 알아야 될 텐데. 여기서 결정권은 너한테 없단다.”
“곧 그분이 오실 거다. 기다리고 있어라.”
어떤 사람이 내 등을 발로 차서 방에 넣었다. 곧 방 바깥에서 문이 잠겼다. 그래, 나는 지금 이렇게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했다. 예프린과 대화할 시간이.
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감고 예프린을 불렀다. 그리고 슬며시 눈을 떴다. 예프린의 몸에서 옅은 안개가 다시 떠오른다.
* * *
아이리는 냉정을 되찾으려고 했다. 어려운 일이었다.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케이지 안의 예프린의 잔상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지워야 했다.
“어떻습니까? 뭐, 작은 사고가 있었지만요.”
“좋네요.”
아이리는 최대한 의연하게 말했다.
“저 친구는 얼마죠?”
“첫 번째 나온 애 말인가요?”
“네.”
“음, 좀 비싸죠. 백금화 2개 정도는 됩니다.”
사람 한 명이 백금화 2개라. 비싸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단지 가치를 매긴다는 점에서 역겹다고 생각이 들었다.
“물론 비싸다고 느끼실 수 있겠죠. 하지만 저 미색과 기품은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추측하건대 몰락 귀족의 여식으로 보입니다.”
“뭐, 경매장 같은 것도 있겠죠?”
“네. 다음 주에 있죠.”
“그럼 그때 뵈어야겠네요.”
아이리는 최대한 이 공간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천장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깊이 들어왔는지 밖으로 나가는 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계단을 올라가는 건 아니었다. 녹색 모자는 광부들이 타고 다니는 카트 같은 것으로 아이리를 안내했다. 그 기나긴 터널을 지나 나가니 폴라성 외곽 쪽에 있는 폐가로 나올 수 있었다.
폐가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 부랑자로 보이는 사람들. 방금 전에 식당에서 강매를 했던 꽃팔이, 파인애플 장수들도 여기에 있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녹색 모자는 그렇게 아이리를 배웅했다. 아이리는 재빨리 그곳에서 빠져나갔다. 조금 지나니 대로변이 나왔고 밝은 거리가 나왔다. 아직 해가 떨어지지는 않았다. 이렇게 일상과 밀접한 곳에 이런 더러운 곳이 있다니, 아까의 그 충격적인 경험이 꿈처럼 느껴졌다.
“조금 전 걔, 내 동생이야.”
“네?”
“내 동생. 예프린 라피테스.”
칸나는 그제야 방금 싸했던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에퍼리가 급하게 움직인 이유도. 칸나는 예프린의 얼굴을 몰랐다.
“몰랐네요.”
“다행이네. 내가 그만큼 잘 버텼다는 거니까.”
아이리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골목에 사람이 있으면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지형을 돌고 돌다가, 결국 아무도 없는 골목을 발견한 아이리는 구석에서 쭈그려 앉았다.
“…윽.”
아이리의 입에서 무언가 걸리는 소리가 나더니 몸이 벌벌 떨렸다. 칸나는 그렇게 우는 귀족을 처음 봤다. 원래 눈물을 흘리는 것 역시 귀족에게는 지양되는 행동이었다.
늘 남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는 사람이니까. 자신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되었다. 아이리는 그런 쪽에서는 오히려 투철했다. 근데 그런 그녀가 펑펑 울고 있었다. 칸나는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었다.
안아도 감각을 느낄 수도 없고, 감각을 느끼게 해 줄 수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무력함을 느꼈다. 그리고 이 잔혹한 세계의 뒷면에도 이가 갈렸다.
서로 가만히. 그렇게 오래라면 오랜 시간이 흘렀다. 골목이 돌고 도는 것처럼 아무도 안 올 것만 같던 이 골목에도 누군가 들어왔다.
그때 아이리가 벌떡 몸을 돌렸다. 칸나가 보니 아이리의 눈물은 어느새 지워져 있었다. 물론 얼굴이 발갛고 눈이 부어 있는 게, 운 흔적은 보였지만 그래도 멀리서 보면 잘 모를 정도였다.
“공녀님, 괜찮습니까?”
“응.”
아이리의 목소리는 깔끔했다. 마치 방금까지 펑펑 울었던 게 거짓말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이제 내 할 일을 해야지. 너무 놀았다.”
아이리는 배시시 웃고는 칸나에게 묘한 말을 늘어놓았다.
“칸나, 넌 자신의 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네?”
“에퍼리가 예프린 몸으로 들어간 거 알아?”
“…모르죠.”
아이리는 웃었다. 사실 이건 그녀에게도 추정에 가까웠다. 하지만 예프린이 마지막에 보여 준 행동은 예프린보다 에퍼리에 가까웠다. 아이리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예프린은 에퍼리가 지켜 줄 거다.
“그런 게 가능한 걸까? 다른 사람의 몸으로 들어간다는 게.”
“…그것도 모르겠습니다.”
“할 수 있겠지. 에퍼리와 너와 다른 게 뭔데?”
아이리가 말했다. 계속 묘한 말을 늘어놓았다. 아이리는 칸나를 바라보았다.
“칸나 카라모프, 공녀의 지위로 명령할게. 넌 지금부터 황도로 가서, 내가 시키는 일을 해.”
“…지금요?”
“넌 할 수 있어.”
아이리는 칸나의 가능성을 믿었다. 그녀는 칸나의 어깨를 잡았다. 다행히 골목에 들어온 사람이 낮술에 취한 사람이라 아이리를 눈여겨보지는 않았다.
“눈을 감았다 떠 봐. 너의 등에 누구보다 빨리 날 수 있는 날개가 있다고 생각해 봐.”
“그렇게 말씀하셔도…….”
칸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이리의 말을 따랐다. 아이리의 눈이 진지했기 때문이다. 칸나는 눈을 감고 떴지만, 역시 등에서 날개 같은 건 돋아나지 않았다. 당연하다. 사람의 등에서 무슨 날개란 말인가. 사람이 요정도 아니고.
“할 수 있어.”
하지만 아이리는 계속 칸나의 어깨를 잡고 바라보았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이미 황도에서 해야 할 일은 칸나에게 전부 전달했다. 1시간이 지나서일까. 칸나의 등에 날개가 돋았다.
“어, 어떻게……?”
칸나 본인도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아이리는 믿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의 가능성을 믿고 있었다.
“그럼, 부탁해.”
여전히 당황스러워하는 칸나의 등을 아이리는 살짝 밀어 주었다.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칸나를 아이리는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맑은 하늘에 그때 꿨던 생생한 꿈이 다시 펼쳐지고 있다. 잊겠다고 거짓말을 한, 잊을 수도 없는 그 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