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시간아, 천천히 (7)
노을이들뿐만 아니라 바퀴벌레들이나 온갖 징그럽게 생긴 벌레들이 꽤나 많이 나왔다. 아이리는 벌레를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바퀴벌레들은 날개들이 꽤 확대되어 있었다. 날개 달린 바퀴벌레가 그녀에게는 더 혐오스러웠던 모양이다. 이곳은 아이리가 가진 무의식의 세계다. 아이리가 보는 날개 달린 바퀴벌레는 저렇겠지. 엄청 혐오스럽게도 보인다.
뭔가 그녀의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니 좀 웃겼다. 아이리에게는 노을이가 이렇게 보였구나. 내겐 좀 둥글둥글하다는 이미지였는데.
노을이들이 내게 칼날을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여기가 꿈속이라는 것이 더 확실해진다. 노을이들은 나를 공격하지 않을 테니까.
상상해 보자, 어떻게 하면 더 노을이들을 쉽게 제압할 수 있는지. 그냥 여기 있는 벌레들의 심장이 멈춘다면 어떨까. 하지만 바로 노을이들의 팔이 날아왔다. 그런 어중간한 상상은 안 된다고 그들이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거야?”
“돌아가면 돼.”
내 혼잣말에 대답해 준 건 어떤 중후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곳을 바라보니 라피테스 공작이 있었다. 아, 아이리와 라피테스 공작은 사이가 나빴던 것 같은데. 물론 그 내면의 사정은 모른다. 공작이란 걸 강요했다고 했나.
“공작, 어쩌자고 여기 계실까?”
“이곳을 넘어가면 아이리가 인식할 거야. 여기서 돌아가라.”
이미 난 다른 상상력을 발휘했다. 내 기파를 거미줄처럼 퍼뜨려 모든 벌레와 라피테스를 묶어서 터뜨린 것이다. 하나 라피테스 공작은 묶이지 않았다. 더 큰 트라우마라 그런가.
라피테스 공작 뒤로 폭죽놀이를 하듯 벌레들의 사체가 빙글거리며 날아간다. 라피테스 공작은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나는 가만히 그를 보았다. 과연 이 사람은 아이리에게 어떤 상처를 줬을까.
“아, 이건 물어봐야겠군. 자네는 누구인가?”
“날 몰라?”
“대충만 알아. 아이리의 꿈에 자주 나왔던 인물이거든. 근데 실물이 더 별로인 걸 보니까 아이리에게 꽤 호감을 사는 모양이군?”
무슨 말인가. 모르겠다. 하긴, 여기 있는 라피테스 공작은 진짜 라피테스 공작이 아닐 터다. 아이리의 생각 속 라피테스 공작일 테니까.
“미안하지만 자네가 상상하는 건 내가 대충 알 수 있어. 이 세계에선 내가 선배라네. 자네의 생각을 알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 난 아이리의 허구가 아니네. 난 예라우프 라피테스 그 자체라네.”
그의 말에 난 놀랐다. 난 그를 유심히 보았다. 저 라피테스 공작은 분명히 내가 아는 그 라피테스 공작과는 조금 달랐다. 내가 아는 그는 이득만을 따지는 장사치 같았지만 이 사람은 조금 진지하다고 해야 하나.
“자네의 힘 정도라면 이 정도는 따라 할 수 있을 걸세.”
난 그의 말을 따라 라피테스 공작의 생각을 들여다보려고 했다. 칸나와의 연결도 가능했으니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닐 테다. 남의 생각을 보고 싶다. 그건 엘파힘의 심안의 발동과 유사한 과정을 지니고 있을 테니까.
곧 난 라피테스 공작의 생각을 알게 됐다. 그는 진짜 예라우프 라피테스였고, 그의 생각들이 전부 읽혔다. 그리고 과거의 단면까지. 물론 아이리의 트라우마를 읽어 내지는 못했다. 내가 읽은 건, 그가 가진 생전의 기억, 마지막 장면이었다. 동그랗게 매듭지은 밧줄에 들어가는 하얀 목, 떨어지는 팔과 다리… 나는 이것을 어디까지 의심해야 하는가?
- 의도치 않게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게 됐군. 나는 이 대화법을 좋아해. 이 방법을 사용하면 생각을 바로 읽을 수 있으니 서로 거짓말을 할 수 없거든.
- 그래요? 하, 씨발. 이 새끼 대체 어디까지 믿어야 돼. 아.
아, 이 대화법에 익숙하지 않아 실수를 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예라우프 라피테스는 개의치 않았다.
- 뭐, 욕한다고 해도 별로 상관은 없네. 나야 죽은 지 오래된 사람이고, 인간의 예의라는 건 나에게는 이제 무색하니까.
- 그래? 하, 야부리는 개 잘 터네. 아, 이건 아니야.
- 그냥 인정해. 인정하면 욕도 줄어드네. 지금 이 순간이 당황스러우니까 그렇지.
뭔가 당황스럽다. 사실 사람들은 모두 어느 정도 필터링을 거쳐서 말하지 않는가. 이 대화법은 정말 필터링이 전혀 없었다. 생각과 생각 사이의 행간, 잡설도 모두 노골적으로 전달된다.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두 개의 뇌가 링크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 후, 그래. 진정해야지. 넌 진짜 아이리의 친아버지, 예라우프 라피테스야?
- 그래.
어떻게 생각이 저렇게 단호하고 짧을 수가 있을까. 난 빨리 생각을 넘기기로 했다. 어차피 이런 것도 다 그에게 어렴풋하게 들릴 터였다. 진정하고 난 내 머리를 정리했다.
- 그렇다면 당신이 죽은 거라고? 내가 알고 있는 라피테스 공작은 누구지?
- 검은 무리의 일원이야. 그건 나도 이 꿈에서 망령들한테 들어서 알았다네. 내 몸이 그렇게 이용되고 있을 줄이야. 그런데 다행이야. 아이리와 예프린은 모르니까 말이야. 내가 죽은 건 라임 집사밖에 모른다네.
그 집사가 알고 있었단 말이야? 이건 좀 소름인데. 그걸 알고도 그렇게 연기를 했단 말인가. 정말 일류 집사가 따로 없다.
- 그럼 그자가 내게 거짓말을 한 게 되네?
- 뭐, 검은 무리는 여신에게 안 들키기 위해 거짓말을 일상생활처럼 하니까.
- 그럼 진짜 라피테스 공작은 죽어서 여기서 망령으로 아이리의 꿈을 지키고 있고, 가짜 라피테스 공작이 밖에 나와 있다는 의미네?
- 정확하다. 이제 내 질문에 대답할 차례가 된 것 같군.
어느 정도 머리가 정리되자 그가 바로 눈치챘다. 그는 내가 생각할 시간도 안 주고 바로 질문했다.
- 자네는 누구인가?
- 주환영, 아니 에퍼리 션.
- 이방인이군. 굳이 속이지 않아도 되네.
- 그건 또 어떻게 아셨대.
- 망령 중에는 오래 된 자가 많으니까. 병문졸속 미도교지구야(兵聞拙速 未睹巧之久也). 이 말을 한 카멜 장군도 난 만나 봤네. 생각보다 볼품없는 늙은이였지.
예라우프 라피테스 공작은 생각을 계속 이었다.
- 뭐, 잡설이 있었지만 난 아이리의 꿈을 지켜 주고자 하네. 난 자식을 놓고 간 못난 아비니까.
- 내가 들어가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 보통 망령이 많이 꼬이면 악몽이 되는 경우가 많거든. 난 이런 몸이 되고 나서야 인간이 남을 놀리는 걸 좋아하는 성질이 있다는 걸 알았네.
- 그렇게 유치한 짓 하러 가는 거 아닌데.
- 그럼 뭔가? 아니, 자네와 아이리의 관계는 뭐지?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들이쳤다. 그녀와 나는 무슨 관계일까. 애초에 그녀는 나를 왜 도와주는 것일까. 사실 그녀가 날 좋아하는 건 아닐까? 아니, 그런 미녀가 날 왜 좋아한대… 같은 별의별 생각들.
- …할 말이 별로 없군.
당연하게도, 이런 생각들은 모두 예라우프 라피테스에게 들어갔다. 뭔가 흑심이 있는 건 맞는데, 그것도 어설프긴 하다. 난 아이리를 정말로 좋아하기는 하는 걸까?
- 그냥 동경이라고 하지, 그런 건.
- 그, 그런가요?
뭔가 내게 약한 부분이 나오니까 자연스럽게 존댓말이 된다.
- 사랑이라는 건 어려운 감정이지. 동경도 어쩌면 사랑의 한 형태일 수도 있어. 뭐 그건 내가 참견할 바가 아니지만, 어쨌든 자네는 못 들어간다네.
- 내가 볼일이 있다고 해도?
- 이봐, 자네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는 몰라도, 여기 선배는 나라고 했네.
그때, 내 심장을 조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누가 심장을 손아귀에 두고 쥐는 느낌. 꽉 짜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S급 헌터로 단련된 내 반사 신경은 상상력에도 적용이 가능했다.
난 합리적인 상상을 했다. 난 인간이 아니니까 심장이 없다는 상상. 내장도 없다. 뭐, 이래도 상관없다. 바로 내 심장을 조여 오는 느낌이 풀렸다.
“오호.”
라피테스 공작이 감탄사를 날렸다. 바로 하늘에서 커다란 칼이 비처럼 쏟아진다. 나는 땅과 하늘이 뒤집어지는 상상을 했다. 언젠가 땅에서 하늘로 번개가 치는 걸 봤는데, 그때를 상상하니 쉽게 되었다. 바로 공간이 뒤바뀌고 칼날이 거꾸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바로 나는 내 칼을 생성해 잡는다. 그립감은 내가 10년 동안 썼던 헌터의 그 칼과 동일하다. 어디가 닳았는지, 어디가 날카로운지도 똑같다. 완전한 투영이었다. 난 바로 그에게 달려들어 가 베었다.
그의 앞에 투명한 막이 생겼다. 난 직감했다. 아마, 이건 절대 못 뚫을 벽이라고. 그의 벽에서 그가 가진 상상력의 의지가 풀풀 풍기고 있었다.
안 된다. 그렇다면 모두 벨 수 있는 검을 만들어야 했다. 상상해 보자. 이 칼날이 무한대로, 얕게 진동하면 어떨까. 그렇게 생각하니 벽에 흠집이 났다.
그렇다면 이 검을 중심으로 이렇게 진동하는 입자가 뿌려지면.
슥, 하는 소리가 나고 그의 몸통이 갈리며 분해가 됐다. 내장이 분출하고 피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난 그것이 끝이 아님을 알았다. 땅에 뒹굴고 있는 라피테스 공작의 눈이 날 또렷하게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건 경험으로 받치고 상상으로 꺼낸 검격이군. 자네가 강한 사람이라는 건 알았어. 사실 나도 아이리의 꿈을 훔쳐보면서 자네가 강한 존재인 건 알 수 있었다네. 자네는 한 번도 진 적이 없었지.”
그의 입이 계속 움직였다. 그는 상상하고 있었다. 자신이 반으로 갈라져도 살아나는 동물이라는 상상을. 난 그제야 그와의 생각이 계속 동화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내가 반사적으로 상상했던 것도 그의 상상력에 동화되고 있었다는 거다.
사실, 이런 상상법도 지금 내가 예라우프 라피테스와 연결되어 있으니 하는 것이었다. 난 그에게서 상상력을 사용하는 법을 실시간으로 배우고 있는 것이다.
“눈치채는 것도 빠르군.”
“날 가르친 건가요?”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는 대충 알고 있으니까. 자네가 무슨 일을 하는 건지도 알고. 검은 무리와 친구 사이인 망령이 몇 있다네. 많은 건 아니지만.”
예라우프 라피테스 공작의 몸이 다시 온전한 모양을 갖춰 간다. 난 살짝 얼떨떨했다. 바로 그는 나와 생각을 강제로 연결했다. 난 그의 말이 곧 사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이리를 잘 부탁하네. 자네를 막상 보니 걱정은 된다만, 자신을 믿으면 된다네.”
“뭐가 걱정이 돼요?”
“잔걱정이 많지 않은가. 쓸모없는 죄책감도 가지고 있고.”
그는 어느새 내 생각의 이면까지 전부 읽어 버린 건가. 내가 불평을 토하기도 전에 갑자기 내 앞에 일자로 된 길이 나타났다.
“아이리가 있는 곳으로 방향을 터 줬네. 혹여 날 만났다고 얘기하거나 그런 눈치 없는 행동은 안 할 거라고 믿네.”
일단 내게 주어진 시간은 별로 없었다. 여기는 아이리의 꿈속이었고, 꿈은 또 언제 깰지 모르는 일이니까. 이렇게 깬다면 칸나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그러니 이자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아도 당장은 참아야 했다. 아이리가 오늘만 꿈을 꾸는 것도 아니니까.
“잘 가게.”
뒤돌아서 예라우프 라피테스를 마지막으로 보았다. 그는 날 향해 손을 흔들었다. 뭔가, 뭔가 말해 주고 싶었지만 말할 수 없었다. 저 꿈속에 있는 아이리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나는 어쩌다가 예라우프 라피테스 공작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 버렸고, 또 내가 아이리의 트라우마도 전부 봤기 때문이다. 기억이 연동된 탓이었을까. 괜한 걸 봤다는 느낌이 든다.
내 어깨가 더더욱 무거워졌다.